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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전쟁 무한궤도(제1막)-(3)

2006.02.24 08:49

새벽을기다리는자 조회 수:195 추천:2

extra_vars1 폭풍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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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왼쪽 가슴의 포켓 속에서 담배를 꺼내고는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바지 주머니 속에 라이터가 있을 것이다. 손을 집어넣었는데……. 없다.
온 몸을 다 뒤적거려도 라이터가 없다. 망할 놈의 지프가 얼마나 요동 쳤는지 라이터가 오다가 흐른 모양이다.
“저기요. 하사님! 불 좀 빌려 주시겠습니까?”

가벼운 손짓으로 패트릭 하사를 불렀다. 그는 지프에서 내려 서른 걸음 정도 떨어진 보급소를 향해 유유히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주머니 속을 뒤지던 중이라 하사관이 지프에서 내린 것을 몰랐는데, 나는 하사관을(나보다 계급이 몇 개는 높은......) 불러들인 꼴이었다.

“으? 으응?”

하사관이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실수다……. 라고 생각한 순간에 하사관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여기 있네, 빨리 태우고 들어가지.”

상관이 나를 향해 다가와 담뱃불을 주었다. 깐깐한 패트릭하사관님이 확실하게 우리 둘을 특별대우 하고 있다. 특별대우가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곧 죽을 사람을 배웅 하는 듯하다.
모건은 지프에서 내려 어깨에 M1게런드를 매고 철모를 썼다. 멈칫 하더니 헛구역질을 해댄다. 운전수의 솜씨가 여간 예사롭지 않다. 확실히 예술이었다.
내가 M1게런드를 들고 허겁지겁 달려가자 그 뒤를 천천히 걸어왔다. 패트릭 하사관이 앞서 걸어갔다.

보급소는 큰 저택의 일부 벽면을 뜯어내고 저택 전체에 물품을 채워 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전형적 스위스풍의 주변 경관과 잘 어울렸다. 파란색과 하얀색, 목재가 발산하는 갈색의 적절한 조화가 절대왕정시기의 귀족별장을 연상케 했는데, 저택 마당과 담은 전부 헐어서 차량 통행에 원활하도록 해 놓았다. 이런 저택에는 고급 포도주 저장 따위를 해 놓았을 법 했다.

보급소 근처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수십 명의 사병들 중 우리와 눈이 맞은 일부는 경례를 했고, 일일이 그에 응해 답했다. 저택 현관에 도착하자 일병 둘에 상병한명. 입구를 지키던 세 명의 보초병들이
“충 성!”

하고는 문을 열었다.

하사관은 우리 둘을 저택 지하층으로 끌고 갔다.
지하실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공기가 쾌쾌하긴 했지만 습하지는 않았다. 낮은 조도의 전구 몇 개를 설치해 둔 지라 아래 층계도 잘 보였다. 어두운 편이긴 했으나 보일 것은 다 보였다. 삐걱 거리는 약간의 소음을 동반하고 지하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길고 천장까지 높은 수 개의 선반에 각종 무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와우, 대단 하군요. 마음대로 골라 가라 이겁니까?”

난 놀라 외쳤다. 아군의 무기도 있었지만, 연합군의 무기는 물론이고 추축군의 무기도 전부 진열되어 있었다. 물론 탄창도 한 두 박스분량이 함께 있었다.

“제법 정교한 사격을 요하는 임무 인 것 같군요.”
모건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하사관을 보며 말했다. 그는 뜻밖에 영국제 스텐마크 자동소총 쪽으로 가서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게 스텐마크란 겁니까? 소문으로는 들었는데 모양이 기이하군요.”

“기이한 만큼 잔고장이 잦아 영국 측에서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네.”
패트릭 하사관은 그 총은 제발 내려 놔라는 듯 받아 쳤다.
모건은 하사관의 말에 재빨리 소총을 내려놓았다. 옆에서 풋 하고 웃었다.

스나이퍼 스코프가 장착된 M1게런드 쪽으로 갔다. 정교한 사격을 요구 한다니, 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집어 들었다. 탄창은 지프에 벗어 놓고 온 탄띠에 가득했으니까 따로 탄약을 들고 갈 필요는 없었다.

“마틴 그레이. 그리고 이안 모건. 두 병장의 사격솜씨가 연대 전체 중 최고라 하더군.”
하사관이 우리가 작전에 징집된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밝혔다.
어느 놈이 그런 망측한 소문을 퍼트린 게야!

모건은 독일제 MP40 자동소총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리 둘은 훈련소 때 빼곤 단 한 번도 자동소총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정교한 사격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무기들에 나와 모건이 눈독 들이고 있었다. 정교한 사격. 깨끗한 살상을 위한 무기. 그러니까 위에서는 우리더러 ‘작전개시 후에는 엄청 바쁘고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니, 한 발에 한 놈씩 빨리 빨리 죽여 버려.’ 라는 뜻으로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이다. 너희 입에 맞는 저격 총과 스코프를 가지고 가라는 것 같은데, 반대로 자동소총에 눈독 들이고 있는 것이다.

“자동소총도 하나씩 집어 들게. 지프에서 꽤 오래 작전이 진행 될 거야. 필요 할 걸세. 난 기관총과 자동소총을 들고 함께 작전을 하게 될 것 같네. 밖에 있는 운전수도 함께 작전을 하게 될 테니 그 놈 무기도 몇 정 들고 가도록 하고…….”    
설마 했다. 우리 둘만 작전을 수행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 그럼? 하사관님과 밖에 저 제리 마샬인가 하는 운전수도 작전에 참여한다고요?”
모건이 노발대발 했다.
하사관은 예상했지만 운전수는 의외였다. 긴장한 나머지 그렇게 난폭하게 운전한 것인가?
같이 죽으러 갈 대원이 둘이나 늘어 든든하다.

“저걸 타고 하자고요? 말도 안 됩니다. 저런 차안에서 어떻게 저격 총을 사용하라고요?”
‘저런’ 이란 말에 다시 한 번 풋 하고 웃었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모건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프를 탄 채로 적진을 뚫는다. 적진에 설치되어 있는 타워의 보초들은 스나이퍼 라이플로 전부 제거 하면 된다. 차량 내에서 쫒아오는 적들을 섬멸하고, 참모실로 가서 모조리 쓸어버리고 폭탄 몇 개를 던지고 돌아오면 되는 거다.”

말로 만 듣자면 꽤 간단한 작전이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자. 겨우 4명으로 후방 작전 사령부를 교란시켜라 는 것인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겁 같은 것은 나지 않지만 지나치게 무모하다. 초호화 엘리트 부르주아 지도부에서 뭔가 생각이 있기에 보내는 거려니 생각 했다. 만약 죽는다고 하면 그저 죄 값을 치르고 가는 셈이고, 미치지 않기 위해 살인을 합리화 한지 오래 되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면 죽은 여인이 내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더 오래 볼 수 있어 좋아 하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해가 저물었다.

보급소 3층. 전투복 창고로 쓰이는 다락에서 작전에 참가할 우리 넷 중 나는 가장 먼저 잠이 들었다. 언제부터 잠이 든 지도 모르겠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잠에 들었을 것이다.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나 물어 봤더니 다들 잠을 설쳤다고 한다. 젊은 날의 무거운 죄책감이 이렇게 무뎌졌는지, 아예 내게서 공포가 사라진 것 같은 몹쓸 느낌을 받았다. 하사관에게서도 은근히 느껴졌던 두려움. 나는 그 두려움에 반도 느끼지 못했다. 두려움 보다는 시험치기전의, 100M 달리기 저의 약간의 긴장감이랄까? 그 정도만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작전. 헛되이 아까운 목숨 넷만 버릴 것 같은 작전의 전날 밤.
잠을 청하기 어려울 폭풍전야에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남자 하나만 깊은 안락의 잠에 빠져 들었고, 공포에 휩싸인 세 명의 장정은 서로 위로의 말들을 주고받으며, 무사 귀환 할 것을 장담하며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다. 잠깐 눈을 붙인 것에 불과했다. 서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다음날 작전에 아무 탈 없이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랬다. 한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