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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SF 어둠을 먹다

2008.02.13 17:58

과자 조회 수:687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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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으로 난 창문에서 햇빛이 들어온다. 어느 새 아침이 됐는지 창밖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분주히 걸어가고 있었다. 도로에서는 자동차들이 원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석유가 고갈된 이후 자동차의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석유의 공급이 중단된 이후로 석유 가격이 엄청나게 오른 탓이었다. 현재 석유는 일반 정유 회사에서는 공급되지 않고 암시장에서나 겨우 구할 수 있는 희귀물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가동되는 자동차의 원동력은 태양력이었다. 계속되는 기술 개발로 비용이 절감되자 석유의 자리를 태양력이 대신하였다. 지구 온난화의 심화로 겨울은 줄어들고 여름이 늘어났기 때문에 기후 상으로도 유리했을 뿐더러, 최대 약점으로 꼽혔던 강우시의 대비도 태양전지의 용량이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해결되었다.


 “…벌써 아침인가.”


 태하는 눈이 부신 듯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어젯밤 침대 위에서 잠들었던 태하가 일어난 위치는 바닥이었다. 어제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게토의 생활이 익숙해져버린 태하에게는 침대가 체질 상 맞지 않는 듯했다. 태하의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어제 하루 종일 집에서 나가지 않고 책상에 앉아 교과서만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만에 질려버린 탓이었다. 실눈을 뜨고 발 언저리를 쳐다보니 지긋지긋한 교과서가 발밑에 깔려있었다. 태하는 발로 책을 밀어 저 멀리 창가 쪽으로 보내버렸다. 어제 하루의 스트레스를 교과서에 푸는 것 같았다.


 꼬르륵-


 태하의 뱃속에서 소리가 났다. 어제는 한 끼도 먹지 못했다. KEDO 본부 앞에서 경비병들에게 문전박대 당한 경험 때문에 혼자서 밖에 나가는 것을 망설인 것이다. 덕분에 뱃속은 텅텅 비어 밥을 달라고 울고 있었다. 게토에서의 생활로 밥 짓는 일은 자신 있었지만 냉장고 안도 자신의 배처럼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요리를 할 수도 없었다. 배고픔을 억지로 억누른 태하는 이불 속에서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가관이었다. 더러운 옷에 더러운 얼굴, 머리는 까치집이었다. 자기가 보기에도 자신의 모습이 웃겼는지 피식 웃음을 보인 태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었다. 게토에서는 특별한 날에만 잠깐 할 수 있는 샤워를 이렇게 맘껏 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샤워를 마친 태하는 속옷만 걸친 채로 방에 들어섰다. 한쪽 손에는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때가 찌든 옷이 들려 있었다. 깨끗하게 씻은 몸에 더러운 옷을 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안을 둘러보며 난감해하던 태하는 뭔가 깨달은 것처럼 옷장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원목으로 된 옷장의 문을 열었다. 문은 아무 소음도 없이 조용히 열렸다. 옷장 안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청바지와 티셔츠 한 장이 걸려있었다. 태하는 허탈했다. 어제 하루 동안 걸레 같은 옷을 입고 지낸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마 그 상태 그대로 KEDO로 갔다면 분명히 놀림 받았을 것이다. 그 악마한테.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태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매우 어색했다. 깨끗한 옷에 깨끗한 얼굴, 정돈된 머리. 웃음이 나왔다. 본격적인 번화가 생활이 시작됐다. 태하는 웃음을 멈추고 다시 굳은 얼굴로 현관을 향했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자 아침 햇살이 가득히 들어왔다. 햇빛은 미래의 희망을 비추듯 태하의 전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KEDO본부 건물 앞.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하다. 웃는 얼굴, 찌푸린 얼굴,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 나름의 표정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 사이에서 태하가 걸어 나왔다. 모든 것이 번화가의 배경에 동화되어 보였지만 자신은 아직도 어색한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태하는 대리석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며 KEDO의 본부로 향했다. 본부 입구에는 이틀 전의 경비원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태하를 보지 못한 듯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태하는 그들을 보고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가 굳은 표정으로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계속 이야기를 나누던 경비원들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어제 정문에서 소동을 일으켰던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경비원들은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경비원들이 태하를 향해 경례를 했다. 긴장된 표정이었다. 태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경비원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정문을 지나쳐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원들은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느 새 태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사령부를 향해 올라갔다. 어느새 ESP산업은 인간 생활에 마음껏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사령부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전에 보았던 더러운 벽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라면 사용하지 않는 층에 잘못내린 것으로 착각할 만한 완벽한 눈속임이었다. 국장이 알려줬던 입구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아무 반응도 없다가 누가 깨끗하게 닦기라도 한 것처럼 문 크기의 하얀 벽이 나타났다. 구석에 나있는 자그마한 유리에 엄지손가락을 대자 부드럽게 도어가 열렸다. 밖의 풍경과는 대조되는 깨끗한 곳. 사령부.


 태하는 종합 사무실을 지나 복도를 걸어 리아의 전용실 앞에서 멈춰 섰다. 긴장된 표정이었다. 입구를 지나칠 때만 해도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이곳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긴장한 것이 역력했다. 태하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에 도어를 두드렸다.


 “태, 태하입니다.”


 말을 더듬었다. 당황했다.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대답을 기다렸다.


 “들어와.”


 몇 초 지나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에 들었던 날카로운 목소리. 리아의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약간의 소리와 함께 도어의 문이 열렸다. 리아는 이틀 전과는 달리 제대로 앉아 공무를 보고 있었다.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고 옆으로 넘기고. 똑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태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서 있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있은 후에 리아가 기지개를 켰다.


 “후아, 재미도 없는 게 많기는 더럽게 많네.”


 리아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젠장, 이걸 왜 내가 해야 되는 거지. 괜히 내려온 건가. 야,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


 “예?


 “이 내가 이딴 서류처리를 해야겠냐고.”


 태하는 상상했다. 여기서 ‘해야죠.’ 라고 대답했을 때의 상황을. 갑자기 태하의 머릿속에 2일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안 돼지 안돼.


 “아니요.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을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태하는 뻣뻣한 자세로 대답했다. 어딘가 굳어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나는 이런 쪼잔한 일을 할 그릇은 아니지? 이런 일을 할 녀석은 분명히 그릇이 소주잔 크기일거야. 에이 젠장.”


 리아의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궁시렁 거렸다. 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직설적으로 불만을 내뱉는 성격이었다. 그 성격이 가끔은, 아니 자주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건 그렇고, 외워오라는 건 다 외워왔냐?”


 “…대충은요.”


 “대충이 뭐냐 대충이.”


 리아는 교과서를 받아 책상 위에 펼쳤다. 리아가 교과서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사이 태하는 앞의 의자에 앉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리아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자, 시험보자. ESP에는 뭐가 있지?”


 “ESP는 Extra Sensory Perception의 약자로 초감각적 지각으로 해석된다. ESP는 ‘염력’을 기본으로 하여 ‘사고해석’, ‘천리안’, ‘대청각’, ‘투시’, ‘환상’를 특화시킬 수 있다. 즉 에스퍼라면 누구나 ‘염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ESP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다다르면 각자의 특성에 맞게 5가지 ESP중 하나로 특화된다. 그 시기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며 인위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태하는 엄청난 길이의 문장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말했다. 말을 끝낸 뒤 심호흡을 하고 리아를 쳐다보자 리아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과서와 태하의 얼굴을 계속 번갈가가며 쳐다보았다. 몇 번을 반복하던 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교과서를 뒤적거렸다.


 “…과도한 염력을 사용할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상황은?”


 “염력 과도사용의 부작용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머리에서 다리 방향으로 시전된 염력의 세기가 과도하게 크면 블랙아웃을 경험하게 되고 반대 방향으로 시전된 염력의 세기가 과도하게 크면 레드아웃을 경험하게 된다. 블랙아웃은 의식, 기억을 포함한 일시적인 시각 상실을 뜻하며 레드아웃은 머리에 피가 몰려 두통과 함께 시야가 흐려지는 현상을 뜻한다. 후자의 경우가 뇌의 손상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전과 마찬가지로 한 번의 실수 없이 깔끔하게 장문의 문장을 읊었다. 다만 다른 점은 전보다 문장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것이었다. 태하는 다시 숨을 몰아쉬고 리아를 쳐다보았다. 완벽하게 외웠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너 설마, 교과서를 그대로 다 외운 거냐?”


 어이없다는 리아의 표정.


 “통째로 외우시라고 하셨잖아요.”


 당연하다는 듯한 태하의 표정.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걸 그대로 외워.”


 리아는 황당했다. 요점만 뽑아 외우면 될 것을 곧이곧대로 외우다니. 그것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말이다. 이런 바보는 처음 본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리아는 태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교과서를 뒤적거렸다.


 “크흠, 잘 외워온 것 같군. 시험은 통과다.”


 리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 통과라뇨? 더 물어보셔야죠.”


 “두 번 물어본 걸로 충분해. 잘했다 짜식. 내 제자답구나.”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웃는 표정으로 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반대로 태하의 얼굴은 흙색으로 변해갔다.


 “아니, 잠깐만요. 더 물어 보시라구요. 2분짜리 시험이 어디 있어요?”


 “괜찮아, 괜찮아. 넌 천재다. 암, 내 제잔데 이 정도는 돼야지.”


 리아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즐겁다는 건가.


 “자 따라와라. 다음 훈련을 시작한다. 기합 넣고 따라와!”


 리아는 태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뒤 황급히 도어를 빠져나갔다. 리아의 전용실에는 태하만 남았다. 태하는 도어 쪽에 시선을 두고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속은 건가.”


 태하는 비틀비틀 의자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