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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SF 어둠을 먹다.

2008.02.11 18:15

과자 조회 수:721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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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새 저녁이 되었다. 연구원이 안내해준 곳은 4층짜리 원룸형 아파트의 3층 맨 끝 방이었다.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입구 옆의 경비실에서는 꽤 나이들어 보이는 노인 한 명이 졸며 앉아 있었고 정문을 열 때는 기름칠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파트 중앙에는 엘리베이터로 보이는 문이 있었지만 ‘고장’이라고 비뚤게 쓰여진 종이가 한 장 붙여져 있었다. 태하는 할 수 없이 옆에 있던 중앙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원래는 새하얀 색이었어야 할 벽은 염하의 역사를 보여주듯이 누렇게 때가 끼어 있었고 여기저기 아이들의 장난으로 보이는 낙서가 쓰여 있었다. 옆에 있던 녹슨 철제 난간을 잡자 제대로 고정이 되지 않았는지 좌우로 삐걱거렸다. 에스퍼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는 너무나 평범한 아파트였다.


 “게토에 비하면 천국이군.”


 태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3층에 도착해 복도 끝에서 끝까지 자리 잡고 있는 집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310호면…, 왼쪽인가?”


 방들은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301호부터 배열되어 있었다. 똑같은 크기의 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친숙했다.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페인트칠, 잘못 뜯겨진 스티커 자국, 유치한 낙서. 약간은 지저분해 보이는 이 곳은 게토와 비슷한 친숙함을 가지고 있었다.


 태하는 몸을 돌려 왼쪽의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306호, 307호, 308호, 그리고 309호를 지나 310호에 다다랐다. 태하의 오른쪽 손에는 연구원이 건네준 열쇠와 지저분한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왼손으로 교과서를 옮겨 든 태하는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왼쪽으로 돌렸다. 이윽고 덜컥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태하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동안 열쇠를 들고 있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는 느낌이 신기한 듯했다.


 문 안쪽으로 들어온 태하는 시선을 좌우로 돌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신발장을 지나 화장실을 지나자 커다란 거실 형태의 방이 보였다. 특별한 것 없었다. 한 쪽 벽면에는 주방기구들이, 창가 쪽으로는 침대와 책상이 자리 잡고 있었고 침대 옆에는 원목으로 보이는 커다란 옷장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리고 침대의 반대편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검은색 TV하나가 장식장 위에 얹혀져 있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TV인가?”


 태하는 벽면을 쓰다듬고, 옷장을 만져보다가 옆에 있던 침대에 털썩 앉았다. 푹신푹신한 느낌으로 몸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아래에는 리모컨이 깔려 있었다. 리모컨을 한참 들여다보던 태하는 TV를 향해 리모컨을 들고 ‘전원’이라고 써진 버튼을 눌렀다. 칙-하는 전자파 소리와 함께 액정화면에는 여러 가지 색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TV속의 사람들은 서로를 토닥거리며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몇 분 동안 채널을 돌려보던 태하는 이내 질렸는지 전원을 끈 다음 침대 한 쪽으로 리모컨을 밀어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가만히 쳐다보던 태하는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스프링이 끼익거리며 몸을 흔들었다. 몸이 푹 들어가는 것이 마치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태하의 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 있었다. ‘고등학교 ESP의 기본’ 리아가 전해준 교과서였다. 꽤나 오래 썼는지 여기저기 손때가 묻어 있는 책이었다. 누운 채로 표지를 열자 쪽 수와 함께 단원이 쓰여진 차례가 보였다.


 ‘ESP란?’


 ‘ESP의 구성요소’


 ‘ESP의 사용’


 단원의 제목만으로도 무슨 내용일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대학의 교수들이 만든 책인 만큼 상당히 신경을 쓴 듯했다.


 태하는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상당히 피곤했다. 아침부터 누군지도 모르는 에스퍼한테 얻어맞고 주리아한테 목이 졸렸으니 피곤할 만한 하루였다. 태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교과서를 바닥에 놓고 눈을 감았다. 게토에서 도망쳐 나온 하루하루들. 쓰레기통을 뒤져서 끼니를 해결하고 길바닥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이 곳 염하를 향해 매일 걸었다. 발이 부르트고 배가 고파고 걷고 또 걸었다. 그 목적은…


 “쓸데없는 생각이야.”


 무언가 떨쳐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세차게 흔든 태하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살며시 눈을 떴다.


 “ESP는…축복인가, 저주인가.” 


 방 안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옷장도, TV의 액정도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하나의 생명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화장실에서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창 밖에서는 저녁의 풀벌레들이 울어댔다. 시계는 째깍거리며 시침과 분침을 천천히 옮겼다. 어울리지 않는 고요함. 있어서는 안 될 한가함. 어떻게 지나간 지도 모를 정도로 바빴던 하루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헉, 헉…”


 두 사내가 골목길을 뛰어가고 있었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뒤를 힐끔힐끔 보며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었고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져 갔다. 길은 복잡했다. 바닥 여기저기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고 벽에는 수 십 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변색된 나이트클럽 광고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매우 지저분한 거리.


 “젠장, 재수에 옴 붙었군. 하필이면 저 년이….”


 한 사내가 숨을 헉헉거리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얼굴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쉽게 찾을 수 없을 미로 같은 길을 두 사내는 익숙한 듯이 빠져나갔다. 그들 중 한 명은 여성용으로 보이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지 가슴에 꽉 움켜쥐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나한테 한 말이냐?”


 하이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욕설을 내뱉었던 남자의 몸이 고꾸라졌다. 마치 땅 속에 자석이 묻혀있어 사내를 끌어당기는 듯했다. 땅바닥에 엎어진 사내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무거운 물체가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가방을 들고 있던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멈추기는커녕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공포가 더해갔다.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는 다리를 저절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인간의 생존 본능.


 “싸가지 없는 놈들.”


 목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적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바닥에 엎드려 저항하고 있는 사내의 옷자락을 움켜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순간 가방을 들고 도망가던 사내도 움직임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예의 사내와 마찬가지로 무언가가 머리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사내를 놓고 일어서서 손을 털었다. 그 표정은 싸늘했다. 마치 더러운 벌레를 쳐다보는 것 같은 눈빛. 새빨간 입술은 미묘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리아 님.”


 군복을 차려 입은 여러 사람들이 무리지어 달려왔다. 번화가를 지키는 수비대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모두 여자에게 잡힌 사내들처럼 땀범벅이 된 채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리아를 치켜세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쳐. 수비대라는 놈들이 이딴 놈들 하나 못 잡다니. 이 내가 이깟 쓰레기들 때문에 여기까지 원정을 와야 되나?”


 리아가 군인들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군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씨발. 오랜만에 나온 작업에 이 년을 만나다니.”


 리아의 발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사내가 이내 포기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사내의 고개가 세차게 젖혀졌다. 검은색 구두를 신은 리아의 발이 사내의 머리를 걷어찬 것이다. 리아는 다리를 들어 사내의 머리 위에 발을 얹었다.


 “다시 한 번 그 더러운 주둥아리로 지껄여봐라. 대가리가 날아갈 거다.”


 리아는 웃고 있었다. 기뻐서 웃는 웃음이 아닌, 화가 나있음을 알 수 있는 웃음이었다. 예쁘장한 외모와는 모순 되게 그 웃음이 미묘하게 어울렸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사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침을 삼켰다.


 “연행해라.”


 리아의 말을 들은 군인들이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군인의 손에 끌려갔다. 리아는 그 모습을 뒤에 서서 바라보았다.


 “이 따위 수비대로 용병들은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건지. 역시 윗대가리들은 맘에 안 들어.”


 리아는 혼잣말을 내뱉은 후 군인들을 지나쳐 밝은 빛이 비춰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으로 한 줄기의 빛이 내려오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조금의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꽃과 같은 붉은 색이 점점 빛 속으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