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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SF 어둠을 먹다

2008.02.10 06:19

과자 조회 수:689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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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DO 건물의 상부에 위치한 연구부.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분주히 타자를 치고 있었다. 이곳은 esp와 관련된 일반 및 특수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하며 에스퍼들의 esp 능력을 측정하여 그들의 데이터를 관리하는 곳이었다. 이 모든 작업은 염하가 자랑하는 슈퍼컴퓨터인 MORT를 거친다. MORT는 초당 4600조(兆) 번의 계산을 할 수 있는 최초의 AI-PC로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최첨단 과학의 산물이었다. 그 위상만큼 MORT에 대한 보안은 철저했다. MORT가 위치한 중앙 컴퓨터실은 다른 연구실과는 분리되어 있었고 MORT 자체의 보안 프로그램에 의해 외부로부터의 모든 접근은 일절 차단되었다. MORT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은 정부로부터 승인 받은 소수의 간부급 인사들 뿐이었다.


 “어이, esp측정 준비해.”


 연구부의 정문 도어를 열고 리아가 들어왔다. 그 뒤에는 주변의 시설을 신기한 듯이 둘러보는 태하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번화가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태하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연습생, 빨리 안 와?”


 주변의 시설에 정신이 팔려있던 태하는 리아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리고 달려왔다. 단 몇 분만에 완전히 길들여진 모습이었다.


 “리아님, 측정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측정실로 가시죠.”


 새하얀 가운을 걸친 연구원이 리아에게 말했다. 긴장한 낯빛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그만큼 리아는 적에게나 동료에게나 두려운 존재였다.


 “따라와라.”


 태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잠자코 리아의 뒤를 따랐다. 연구부 내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어두운 색상이 주를 이루는 연구부의 배경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 같았다. 많은 연구실을 거치고 중앙 컴퓨터실을 지나자 ‘esp 측정실’이라는 팻말이 달린 방이 나왔다. 리아를 안내하던 연구원이 도어를 열자 의자 하나만 달랑 놓여있는 썰렁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의자 위로는 케이블 같은 선들이 아래로 늘어져있었고 방 한 쪽으로는 수많은 계기판들로 가득 차 있는 제어실이 있었다. 


 “저기 있는 의자에 앉으세요.”


 태하는 리아의 옆을 지나 새까만 의자에 앉았다. 편안했다.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자신의 몸에 꼭 들어맞는 의자였다. 태하가 의자에 앉는 사이 리아는 제어실 안으로 들어갔고 연구원은 의자 위에 달려 있던 케이블을 태하의 몸 여기저기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케이블 연결을 마친 연구원은 리아를 따라 제어실로 들어갔다.


 “지금부터 연습생 김태하에 대한 esp측정에 들어갑니다. 태하군, 눈을 감고 머릿속을 비우세요. 태하군이 사는 집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태하는 눈을 감았다. 집에 있다고 생각해라. 집에 있다. 집이다. 나는 지금 집에 있다. 어두운 하늘, 더러운 거리, 무너져 가는 집들. 여긴 게토(Gehtto). 내가 자란 곳. 내가 살아온 곳. 내가 가장…좋아했던 곳.


 측정기에 작동하기 시작했다. 태하의 몸에 연결된 케이블이 반짝거리고 조용했던 방 안은 낮고 작은 소음으로 채워졌다. 제어실 안의 리아는 계기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면이 숫자들로 채워지고 각종 수치가 그래프화 되어갔다. 연구원은 자리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며 무언가 작성하기에 분주했다.


 그러기를 수 분, 측정기의 작동이 멈췄다. 연구원도 측정 보고서의 작성을 마치고 제어실을 빠져나왔다. 태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측정이 끝난 지도 모른 채 편안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연구원은 슬며시 태하에게 다가가 연결된 케이블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태하는 행복한 감상에서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그리고는 아직 정신을 덜 차렸는지 멍한 표정으로 연구원을 쳐다보았다.


 “측정이 끝났습니다.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태하는 아 라고 낮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에서 방금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슬며시 제어실 쪽을 돌아보니 연구원과 리아가 측정 결과를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리아는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계기판들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연구원은 손짓을 해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만 이야기 하네….”


 태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도어를 빠져나왔다. 흰색 가운을 걸친 한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얼굴은 익숙해져 버린 듯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 곳 KEDO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신경질 난 것처럼 인상을 쓰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뿐이었다. 다만 주리아만은 예외였다. 마치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사는 것처럼 그녀만은 항상 유유자적했다. 가끔 그 성격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측정실 밖으로 나온 태하는 복도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가만히 앉아 주변을 둘러보던 태하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두 손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 상처가 나있고 더러워져 있는 손. 그동안의 고생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자신은 다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새하얀 옷을 입은 그들, 거무튀튀한 옷을 입은 자신. 번화가의 사람인 그들, 게토의 사람인 자신. 외톨이구나, 외톨이야.


 “다 됐다. 따라와라.”


 측정실에서 리아가 나왔다. 연구원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리아는 태하의 앞을 지나쳐 연구부의 입구로 걸어갔다. 태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리아를 따라갔다. 태하의 시선에 리아의 등이 들어왔다. 보통 여자보다는 건장하지만 남자들에 비하면 턱없이 왜소한 등이었다. 리아는 누구라도 처음 보는 순간 반해버릴 만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가죽옷은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그대로 보여주었고 불꽃 문양이 새겨진 유광의 가죽옷 위로는 새빨간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다. 강렬한 핏빛의 머리카락. 지나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이 사람은 강하다. 가짜가 아닌 진짜다. 이런 생각이 태하의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태하는 다시 리아의 전용실로 돌아왔다. 리아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늘어놓고 처음 봤을 때처럼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태하를 쳐다보았다. 태하는 아무 말 없이 책상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네 esp를 측정했다. 국장이 탐낼 만 하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국장이 말했을 텐데? 네놈의 esp는 크기만 보면 여느 간부들 못지않아. 하지만 클 뿐이지. 사용할 수는 없어. 네 것이 아니라는 거지.”


 국장이 했던 말과 같았다. 크기만 클 뿐 쓸모가 없다. 쓸데없이 크기만 하다.


 “esp에도 한계는 있어. 멋모르고 사용하다가는 결국엔 죽어. 그리고 너는 esp가 큰 만큼 죽을 확률도 높지. 쉽게 말해서 네가 esp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 esp가 너를 지배한다는 거다.”


 “…”


 “esp를 과도하게 사용한 사람의 죽음은 끔찍하다. 체내의 모든 혈관과 장기들이 역 압력을 받아 찌그러들어. 혈관 압착, 장기 파열, 혈액 비순환 그리고 심장의 정지. 몸에 뚫린 구멍으로 피가 쏟아져 나와. 개죽음이지.”


 리아의 표정을 싸늘했다. 이 말과 함께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오싹함을 느낄 정도였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새빨간 입술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치 죽음의 여신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esp를 축복이라고 생각하더군. 윗대가리들도 esp만이 우리의 미래라고 난리들이던데, 다 개소리야. 너도 그렇게 생각 하냐?”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esp는 축복이 아니야, 저주지.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주변의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저 사람은 특별하다.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다. 저 사람이 우리의 미래다. 다 미친 소리야. 미래의 선점이라는 망령에 홀려 낭떠러지로 떠미는 거지.”


 리아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고 비웃는 듯한 웃음. 입 꼬리는 올라가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esp가 축복이든 저주든 상관 안합니다. 주변의 시선 따위 무시해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킥킥, 마음에 드는군.”


 “저는 앞으로 뭘 하면 됩니까?”


 태하의 눈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말했잖아? 넌 스스로 esp를 지배할 수 있어야 해. 가장 먼저 컨트롤 훈련을 하게 될 거다.”


 “전 기초 이론도 모릅니다만….”


 “내가 이론 수업 같은 시시한 걸 할 것 같냐?”


 말을 마침과 동시에 리아는 책상 위로 한 권의책을 던졌다. 꽤나 오래된 듯 모서리가 변색된 책이었다. 표지에는 검은색 글씨로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esp 기본’


 교과서였다.


 “이거 가져가라. 2일 안에 통째로 외워와. 시험 볼 거니까.”


 책을 던진 리아는 의자를 돌려 태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뒤통수에 손을 얹은 채 여유롭게 휘파람을 부르기 시작했다. 태하는 어안이 벙벙했다.


 “고등학교 교과서를 외워 오라구요?”


 “왜, 불만이냐? 거기 나와 있는 내용만 알면 이론은 필요 없어 …라고 아는 사람이 그러더군.”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잘 안 들리는데요.”


 “못 들어도 상관없어. 아, 밖에 사무실 있지? 거기 인사부로 가서 이름대면 앞으로 지낼 숙소를 알려줄 거다.”


 리아는 여전히 창문 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리아를 쳐다보았다.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태하가 시선을 줘도 리아의 휘파람은 멈추지 않았다.


 “2일 뒤에 오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리아는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지만 태하는 깊히 허리를 숙여 리아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도어 쪽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나랑 잘 지내고 싶으면 그 말투 고쳐라.”


 방을 나가려던 태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네?”


 “난 딱딱한 거 싫다. 부드러운 게 좋아.”


 “부드러운 거…?”


 “그 있잖냐, 누나 이런 거.”


 리아는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하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저리도 쉽게 하는지.


 “누나…로는 안 보입니다.”


 “뭐?”


 태하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리아가 고개를 돌려 태하를 노려보았다. 미간에 주름이 지고 눈 꼬리가 치켜져 올라간 것이 영락없는 악마였다. 태하는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목숨이 위험하다. 거짓말이 필요하다. 선의의 거짓말은 나쁘지 않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생각 해보겠습니, 아니 생각해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태하는 황급히 인사를 마치고 도어를 빠져나갔다. 문이 닫힌 방 안에는 리아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몇 초 동안 도어를 쳐다보던 리아는 이내 시선을 돌려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