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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SF 어둠을 먹다

2008.02.10 06:15

과자 조회 수:571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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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획도시 염하의 KEFO 사무실 내부. 27층과 28층의 사이에 해당하는 공간에 숨겨진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간부급 에스퍼 요원들이 활동하는 일명 수호(修好)국 이었다. 그 곳은 크게 간부들의 전용실과 기타 잡무를 처리하는 개방된 사무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용실은 스태프(staff)이상의 에스퍼에게 주어지는 방이었고 사무실은 염하의 esp관련 사건들과 연습생 관련 문제들을 처리하는 곳이었다.


 “….”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국장이 나간 지 30분이 지났다. 태하는 예의 그 자리에 앉아 다시 국장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엔틱 느낌이 짙게 나는 중후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국장실은 간부급 에스퍼들이 모여 회의를 갖는 곳으로서 그 역할에 맞게 크기도 상당했다. 그 곳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태하는 완벽하게 그려진 수채화에 찍혀진 검은색 오점 같았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따라 오게나.”


 지문 인식 자동문을 열고 국장이 들어왔다. 어두웠던 국장실 안으로 복도에서 비춰오는 한 줄기 불빛이 새어 들었다. 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국장의 뒤를 따랐다. 


 국장이 태하를 데리고 간 곳은 한 간부급 에스퍼의 전용실이었다. 전용실의 도어 앞에는 검은색 글씨로 ‘Commander 주리아’라고 쓰여 있었다.


 “리아, 나다.”


 국장의 말과 동시에 도어가 열렸다. 도어 안 쪽의 방은 깔끔했다. 국장실의 무거운 분위기와는 다른, 누구나 동화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우측으로는 검은색 소파가, 좌측으로는 커다란 벽걸이형 TV가 걸려있었고 그 옆에는 브라운 계통의 색을 가진 책장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 정면에는 한 여자가 책상 위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있었다.


 “….”


 여자는 상당한 미녀였다. 상하의 모두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옷을 입고 있어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머리카락은 마치 피와 같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오염된 바다 위에 한줄기의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과는 상반되게 얼굴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매우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여자는 그 표정 그대로 국장과 태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아이일세.”


 국장이 말했다. 태하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도어의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방 안은 말 그대로 어색했다. 노인이 청년을 옆에 두고 서 있었고 그 앞에서는 한 미녀가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언가 반대로 된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가?”


 어색함을 견디지 못했는지 국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도 여자는 시선을 치우지 않았다. 그 상태로 5분 동안 그들을 쳐다보던 여자는 이젠 지쳤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귀찮다구요. 윗대가리들이 싫어서 밑으로 내려왔더니, 이젠 애보기를 시킵니까?”


 여자는 깍지를 끼고 팔을 위로 뻗으며 중얼거렸다. 귀찮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짜증난 목소리였다.


 “애보기가 아니라네. 연습생의 훈련이지. 간부급 에스퍼인 자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네. 주리아.”


주리아라 불린 여자는 태하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태하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과 눈 사이의 거리는 20cm도 채 안되었다. 리아는 태하의 눈에서 뭐라도 읽어내려는 것처럼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 그리고 붉은 입술. 누구라도 계속 응시하면 빠져버릴 듯한 매혹감. 얼굴 위의 모든 것이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름이 뭐냐?”


 “김태하입니다.”


 “나는 주리아. 염하의 지휘관으로 일하고 있다.”


 “그렇습니까?”


 짧디 짧은 통성명. 이것을 끝으로 둘 사이의 대화는 끝났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국장인 현중은 연신 헛기침을 해댔고 리아는 언제 짜증이 난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부르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태하는 그 사이에서 뭘 해야 하는지 조차도 모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참다 참다 못 견디겠던지 태하가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겁니까?”


 순간 국장의 표정이 놀람으로 변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표정이었다. 곧 이어 리아의 발걸음과 휘파람이 뚝 그쳤다. 그리고 돌아 선 리아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여기저기 주름이 잡혀있어 알 수 없는 미묘함이 가득했다.


 “방금 뭐라고 했냐?”


 리아가 말했다. 예의 목소리와는 달리 이 사이로 간신히 새어나오는 듯한, 무언가를 참으려는 목소리였다.


 “지금 뭐하는 거냐구요.”


태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평소와 같은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네놈이 미쳤구나?”


 리아가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태하의 몸이 뒤로 밀려나 도어에 부딪혔다. 태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숨을 못 쉬고 있었다. 손으로 목 주변을 더듬더니 이내 컥컥거리기 시작했다. 리아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딴판이었다. 눈을 치켜뜨고 태하를 노려보는 눈빛은 가히 ‘붉은 여왕’이라 불릴 만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상대방을 제압하는 눈빛이었다.


 “그만하게.”


 현중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리아를 제지했다. 리아는 국장의 말을 무시하고 태하를 계속 압박하다가 이내 지겨워졌는지 손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태하의 목을 짓누르던 염력도 사라졌다. 태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었다. 매우 거친 숨소리였다. 그런 태하를 리아는 눈을 내리깔고 쳐다보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싸가지 없는 거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나랑 여기서 생활하기 꽤나 힘들 거다.”


 태하의 숨소리는 많이 좋아졌지만 제대로 숨을 쉬기에는 부족했다. 태하는 고개를 들어 리아를 쳐다보았다.


 “똑똑히 알아들어. 나는 앞으로 네놈을 담당 할 에스퍼 주리아다. 알았냐?”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던 태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의 괴로워하던 표정은 어디 갔는지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국장은 다시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대로 리아에게 달려들면 제지하려고 했는데 예상외로 태하가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태하의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태하의 성격대로라면 이대로 리아에게 달려들어 대판 싸움이 났어야 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방 안은 조용했다.


 “…사과하는 거 하난 맘에 드는군. 따라와라.”


 리아는 태하의 사과를 바로 받아들이고 도어를 열어 방을 빠져나왔다. 도어가 닫히자 방 안에는 태하와 국장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상당히 화끈하시군요.”


 태하가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원래 저런다네. 이해하게나.”


 국장이 다시 도어를 열었다. 태하는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국장과 함께 방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