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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SF 르 리에의 집

2006.12.15 06:56

misfect 조회 수:455 추천:4

extra_vars1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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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조금 무덥게 느껴진다 싶더니, 희뿌연 하늘이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비를 쏟았다. 기후개선시스템은 비록 달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인간이 주로 활동하는 수백 개의 '위성 돔' 내에서는 지구에서와 똑같은 기상 현상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이 기후개선시스템이 기상현상 자체뿐만 아니라 예측하기 어렵다는 지구 기상현상의 특징까지도 완벽히 재현해낸 탓에, 시스템을 관리하는 기상청마저도 30분 후의 국지적인 소나기를 예견할 수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작스런 비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군중 가운데, 레인코트를 입은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쏟아지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이제껏 걸어왔던 것과 똑같이 빠른 걸음으로 인파 속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단지 딱 한번, 앞서 가던 남자가 한 손으로 빗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거칠게 한 마디를 내 뱉은 것이 소나기에 대한 그들의 반응 전부였다.


 


"젠장, 더럽게 끈적거리네."


 


남자의 말에도, 뒤따라오던 또 한 사람인 여성은 아무 반응이 없이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옅은 파랑색으로 물들인 단발머리가 빗물에 달라붙는데도,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애초부터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두 사람이 향하는 선상에, 약간 특이해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월면의 도시에 세워진 건물들 모두가 제각기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걸음이 닿을 건물 역시 꽤나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물의 전체적인 모양은 반구 형태였는데,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선 건물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펼쳐진 네 단 정도의 계단을 오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 계단 사이사이로 건물 앞 넓은 공터를 향해 서너 갈래의 구불구불한 발을 내뻗고 있었다. 그랬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발이라고밖엔 볼 수 없는 구조물이었다. 이 특이한 구조물 탓에, 건물의 전체적인 인상은 마치 심해 밑바닥에 자신의 여덟 발을 밀착시키고 잠에 빠져든 한 마리의 문어같았다.
이 문어의 '발'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던 두 사람은, 입구에서 잠시 멈춰섰다. 특이할 것이 없는 평범한 문 앞에서, 남자는 곧바로 문을 열지 않고 고개를 들어 문 위쪽을 바라보았다. 꽤 호사스럽게도, 달에서 보기 힘든 진짜 목재로 짠 간판을 쓰고 있었다. 간판에는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 cafe 르 리에


남자는 흥, 하고 콧바람을 불고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 역시 아무런 말 없이 남자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들어선 가게 내부엔 제대로 된 조명이 없었다. 벽돌과 목재 대들보(이것을 본 남자는, 앞서 가게 간판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콘크리트 벽이 잘 융합된 가게 내부에, 수십 자루의 촛대만이 사람들의 얼굴을 음산하게 비출 뿐이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대개 타오르는 촛대를, 혹은 촛대 너머의 연인을 황홀하게 쳐다보거나, 혹은 우주 공간으로 난 창문을 바라보며 감상에 잠겨 있었다. 최근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는, 이 고풍스럽고 사치스러운 가게 안까지는 와 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꿈 속과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볼일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바텐더가 술잔을 닦고 있는 바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여기는 베르사유 궁전같은데. 미천한 것들이 문을 잘못 찾았으려나."


 


자리에 앉은 남자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건네자, 다소 마른 편이지만 인상좋게 생긴 바텐더는 환한 얼굴로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뭘로 드릴까요."
"주머니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알아서 적당한 걸로. 화를 내지 않는군, 주인장은."
"손님같은 분들에겐, 이미 익숙합니다. 숙녀분은?"


 


역시 웃는 얼굴로 남자의 씁쓸한 표정을 상대한 바텐더가 남자 곁에 앉은 여자를 향해 물었다. 여자는 물 한컵만을 시키고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여자에게 잔을 내민 후, 바텐더는 남자에게 줄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로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를 보던 남자는, 문득 바텐더 뒤의 선반 위에서 책 한 권을 발견하고는 책 위의 글씨를 따라 읽었다.


 


"러....브 크래..프트? 이봐, 저건 뭐지?"
"저 책 말씀이십니까? 러브크래프트란 소설가가 쓴 책입니다. 제겐 몇 안돼는 지구의 유산이죠."
"소설가인가...어떤 내용이지? 아니, 그보다도 장르가 뭐지?"


 


남자의 질문에, 바텐더는 미소를 지으며 막 만든 칵테일을 잔에 따라 내밀었다. 그러고는 다시 유리잔을 닦으며 남자의 질문에 답했다.


 


"설명해도 감이 잘 오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도 굳이 설명을 하자면 꽤 길어지겠죠. 괜찮습니까? 아, 그럼 다행입니다."


 


주인은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개역 사 14:12)' 해석하는 사람 나름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계명성'이란 존재에 대해,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에 대한 인간의 공포심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죠. 지금은 상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만."
"그것과 이 러브 뭔가 하는 작가가 관계가 있나?"


 


남자가 지루해하는 표정을 짓자, 바텐더는 쓴웃음을 잠시 지었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습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바로 '우주 공간에 대한 인간의 공포'에 어느 정도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외계에서 온 존재들, 흔히 신이라고 알려진 사악하고, 인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위대한 것들(Great one)을 소재로, 그는 장황한 설명과 묘사, 특유의 어휘 구사, 그를 통해 조성된 기괴한 분위기를 충분히 이용해 매력적인 작품군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이유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은 '코스믹 호러'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코스믹 호러, 라고. 결국 지구 밖으로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한 정신병자의 헛소리일 뿐이지."


 


남자의 말에 바텐더의 얼굴은 잠시나마 얼어붙었다. 하지만 바텐더는 금새 얼굴을 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이야기했다.


 


"'두려움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한 종류는 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이다.' 20C의 한 인간에게 있어 우주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었던 겁니다. 특별히 정신이 이상했던 것은 아닙니다."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말이죠."


 


갑자기 여자가 입을 열자, 두 사람의 눈길이 한꺼번에 여자에게로 쏠렸다.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말했다.


 


"'인간의 감정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한 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한 종류는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이다.'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말을 인용했다는 얘기였지, 별 다른 소리는 아니었어요."
"잘 아시는군요. 그는 아마 '발을 디딜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해 인간이 얼마나 큰 근원적 공포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선 우주에 대한 호기심만큼이나, 발을 디딜 곳이 없는 우주공간에 대한 공포도 컸죠."
"발을 디딜 곳이 없다, 라는 건, 꽤나 현실에 와 닿는 얘기군."


 


두 사람을 못마땅한 얼굴로 보던 남자가 꺼낸 말에, 바텐더는 웃으며 글쎄요, 하고 중얼거렸다. 여전히 여유있는 바텐더의 얼굴을 바라보며, 남자는 지나가는 투로 한 마디 말을 던졌다.


 


"저기, 그럼 쿠트르프 프타군이란 말을 아나?"


 


그의 한 마디에, 바텐더의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풀어질 줄 모르는 굳은 얼굴로, 바텐더는 남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 말, 어디서 보았습니까?"
"어느 사건 현장에서지. 왜, 알고 있나?"


 


바텐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흐응, 반응이 어째 좀 시원찮군. 그럼 좋아. 사건에 대한 이야기, 듣고 싶겠지? 얼마든 들려 주지. 희원 양."


 


남자에게 불리운 여자는 금세 반응을 보여 남자 쪽을 바라보며 등을 펴고 앉았다. 그런 희원에게 남자가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부족한 점이나 빠트린 점이 있으면 곁에서 보충설명하도록."
"호스피서 1036 윤희원. 시동자 명령 접수합니다."


 


그제야 바텐더 및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인간과 꼭 닮은, 그래서 사람을 대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휴머노이드 가운데서도 2등급에 속하는 특수치안업무 담당기기. 임무 특성상 호스피서라고 불리는 이 인간형 로봇이 관여하는 사건은 살인, 테러 따위의 중범죄다.
희원이란 여자와 아마도 형사일 남자가 본격적으로 심문에 들어가려 하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하나 둘 가게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안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빈 가게 안을 둘러보며, 주인이 침착하게 두 사람에게 말했다.


 


"괜찮습니까, 다들 나가버리는데 막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가 원하는 건 당신 하나니까."


 


이 말에 바텐더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남자는 씨익 웃고는, 비에 반쯤 젖어 읽기도 쉽지 않게 되어 버린 수첩 하나를 품안에서 꺼내 힘겹게 한 장 한 장을 넘겨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9:43분, 경찰관사 8층에서 생활하던 전중현 전직 형사가 추락사했다. 옥상에 발자국이나 지문은 피해자 한 사람 것 뿐이었고, 사건 직후 피해자 이외의 사람을 본 목격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건은 단순 자살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이게 뭐야?"


빗물에 젖은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 것에 형사는 짜증을 부렸다. 그런 형사 대신에, 곁에 있던 호스피서 희원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 씌어진 의문의 문장이 주목을 받으면서 사건은 본격적인 수사선상에 올랐다. 이 문장은 바로 '쿠트르프 프타군."
"잠깐, 잠깐. 그 다음은 다시 내가 하지. 에, 그래서 JAPAN구역 내 희망 자유특별시 경찰청 소속인 나와 이 친구가 사건을 맡게 되었지. 사실 말야, 러브, 뭔지 하는 이야기는 요새 몇 번인가 들어서 대략 알고는 있었어. 하긴 당신처럼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준 사람은 없었지만. 그도 그렇지. 수 백년이나 이전에 싸구려 잡지에 올린 통속소설을 그토록 세세하게 내용까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


 


형사의 발언에, 바텐더는 조금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형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 그래. 마니아 놈들은 성질 좀 죽이고 조용히 있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 암튼, 그런 싸구려 길거리 소설이라도 데이터베이스에는 저장되어 있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호스피서는 언제든지 자신이 본 내용을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할 수 있고. 그랬더니 이런 문장이 나왔어. 음, 이거 어떻게 읽나?"
"흔구르이 무굴우나프 크투르프 르 리에 우가 나굴 프타군.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크투르프가 부르는 소리'에서 나오는 문장입니다. 뜻은..."
"그래, 러브크래프트란 이야기는 그렇게 들었지. 다행이도 이 소설가 씨는 자기 글에 이 문장의 뜻도 남겨 두었더군. 희원 양?"
"죽음을 당한 크투르프가 르 리에의 집에서 꿈을 꾸면서 기다리고 있다."


 


호스피서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듣고서, 이제는 형사가 여유로운 미소를 띄웠다. 순식간에 바텐더의 얼굴 표정은 창백함에서 침통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짜맞추기를 해 보지. 물론 근거는 없어. 단지, 이 가게 이름이 '르 리에'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그럴듯해 보이도록 조각맞추기를 해보려는 것 뿐이지. 내가 나름대로 조사한 것과, 당신이 말한 것을 조합해 볼때 '크투르프'란 것은 위대한 것(The Great One.)들 가운데 하나며, 동시에 기괴하며, 잔인하고, 인간애라는 것이 전혀 없지. '죽음을 당한'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어떤 상처를 입었다는 이야기 아닐까? 당신의 이력과 취미 등을 비추어 보면, 그것이 아마도 저 저주스런 퍼런 행성과 관련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거칠게 말을 내뱉으면서, 형사는 한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마침 지평선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지구의 모습이 우주 공간으로 펼쳐진 창문 안에서도 분명하게 보였다. 가게에서 손님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비참함이 감도는 가운데 단 세 사람의 눈 앞에서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게 주인이기도 한 바텐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르 리에의 집'은 방금 풀었듯 이 가게, '꿈을 꾸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이번 사건의 암시, 혹은 새로운 사건의 암시를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 책에도 있다면서, 언젠가는 이 위대한 자들이 깨어나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언이. 그러니까 '기다린다'의 의미는 비교적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지."
"나, 난 모르는 일입니다. 대체, 그런 문장. 누가 그렇게 써 놓았는지도 모르고...."


 


바텐더는 손을 저으며 부인했지만, 형사는 여전히 여유롭게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당신 전중현 형사와 아는 사이였다면서? 경찰청사를 그렇게나 자주 왕복했으니, 우리들까지야 알 수 없어도, 순경들은 다 알지. 전 형사의 가족들은 전부 흩어졌고, 수중에 돈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 지구에서 탈출한 후로 계속 경찰청사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방문객은 전부 체크되지."
"하. 하지만 어떻게 그 장소에 없던 제가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호스피서를 데리고 온 거야. 호스피서의 역할은 알고 있겠지? 그래, 죽은 형사에게서 A.F. 양성 반응이 나왔지....희원 양?"


형사의 말에, 희원은 뚫어져라 바텐더를 보고는, 곧 확신에 찬 어조로 형사에게 말했다.


"등 뒤에 반투명한 '업힌 아이' 발견. A.F. TYPE : REMOTE EFFECT : MENTAL 확인했습니다."
"좋아."


 


좋아, 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형사의 손에는, 품 속에서 나온 권총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권총의 총구는 바텐더를 향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형사는 정해진 절차를 밟았다.


 


"호스피서의 A.F.식별. 결과 양성. 자유특별시 안전보장법 16조 8항에 의거, A.F.의 소거와 숙주의 안식을 집행한다."
"집어치워!!"


 


형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텐더는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손을 움직여 유리잔을 형사에게 던졌다. 호스피서가 재빠르게 형사를 끌어당기자, 유리잔은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 부딪치며 산산조각났다. 겨우 유리잔을 피한 형사가 가게 구석으로 움직이는 바텐더를 향해 총을 쏘았다.


 


"움직이지 마! 희원 양, 처리를!'
"시행합니다."


 


형사의 뒤에 서 있던 희원이 말을 마치자, 곧 희원의 몸 여기저기에서 은빛 광택의 액체가 뿜어져나왔다. 액체는 땅바닥에 쏟아질 새도 없이 희원이 앞으로 뻗은 손 안으로 들어와 모여들면서 서서히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바텐더는 총알을 피해 벽면으로 훌쩍 뛰었다.


 


"뭐, 뭐야 이건!!"


 


벽면에 수직으로 선 채 목을 등 뒤쪽을 향해  90도로 들어 가게 안을 둘러보는 바텐더를 보며, 형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A.F.를 상대하는 업무가 거의 대부분 비상식적이긴 했지만,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형사로서도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형사를 보면서, 바텐더는 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어이, 그걸로 날 쏠 생각인가? 숙주를 죽이고,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저 아가씨로 나 역시 죽일 생각이지?"
"시끄러워! 어서 거기서 내려와!"


 


형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바텐더는 내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괴상한 모습으로 변했다. 바로, 똑바로 세워진 고개를 오른쪽으로 서서히 180도까지 돌려 비튼 것이다. 이제 바텐더의 뒤통수가 배를 향해 있었고, 얼굴은 여전히 정면을 향했다. 그 상태에서, 바텐더는 조롱하듯이 이야기했다.


 


"이봐, 사실 나도 그리 나쁜 건 아니야. 너희가 지구에 살던 것처럼, 나도 여기 살던 것 뿐이라고. 너희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무슨 사람을 병들게 하고, 미치게 하고, 사건을 일으키는 건 아니란 거지."
"닥쳐. 260개 뼛조각조각까지 똑바로 해 놓고 근육, 장기, 혈관도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채집하자마자 연구소로 보낼 것 없이 즉석에서 해부시켜주마."
"어차피 죽은 남자 뭐하러? 어차피 병든 남자 어째서."


 


바텐더는 잠시 숨을 고르듯 사이를 띄었다가, 일순간 화난 표정을 지으며 형사에게 말했다.


 


"네 녀석들이 뭐가 잘났어! 그렇게 잘나서 자기 행성에 자리도 못 잡고 여기로, 저기로 도망치기에 바뻤나! 우리가 나쁜 거라고? 천만에. 인간이여. 무엇 때문에 저 푸른 낙원에서 떠나 이 월면의 잿빛 대지를 밟았는가. 너희는 스스로 별을 움직이고,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실상은 어떠했는가. 너희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해서, 너희를 성난 짐승처럼 자연에 달라들게 만든 그 '무엇'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이 바텐더의 등 뒤? 아니면 너희의 그 뱃속에?"
"웃기지마!!"


 


노성과 함께, 형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바텐더는 총알을 피하며, 일부는 맞아가며 벽을 따라 구석에서 다른 구석으로 이동해 갔다. 형사의 총이 탄환 소모로 멎자, 바텐더는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팔다리를 양쪽 벽에 짚어 섰다. 사지를 쫙 벌리고 거미처럼 선 바텐더의 머리는 이제, 등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낄낄거리며, 바텐더는 형사를 향해 말했다.


 


"과연, 인간들은 누구나 인정할 줄을 모르는군. 솔직하게 인정할 건 인정해. 구시대에 지구를 이끌었던 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라고. 욕심이 과다해지니까, 버티지 못한 지구가 폭동을 일으켰다고. 지구에서 쫓겨났다고 말야."
"집어치워."


 


형사는 으르렁거렸지만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비밀 하나 가르쳐 줄까? 실은 말야, 우린 그저 기생충에 불과해. 미치게 한다고? 탐욕? 그건 사실 다 허구야. 무언가에 미친다는 것,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거의 순전하게 지구산이지. 러브크래프트 이야기를 했나? 너희가 말하는 공포라는 건, 너희가 원한다는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내세우는 명분일 뿐이야. 관심없는 것에 공포를 가지지는 않겠지. 호기심이란 건 실은, 광기와 파괴성에 적절히 씌우는 가면일 뿐이고. 우린 촉매야. 명분을 깨고, 가면을 벗기지. 너희가 통제하지 못한, 하지만 실질적으로 별을 운영해온 욕망을 만천하에 드러내 놓지. 그게 나쁜가?"
"준비 완료했습니다."


 


순간, 형사의 등 뒤에서 호스피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사는 눈을 질끈 감으며, 호스피서에게 말했다.


 


"처리해."


 


명령과 동시에, 호스피서는 손에 들고 있는 물체를 상대에게 겨누었다. 손에 들린 거대한 샷건 모양의 총은, 호스피서의 온몸에서 나왔던 은빛의 액체와 같은 색을 하고 있었다. 무기를 작동시키는 순간, 빛이 일대를 휩쓸듯이 퍼져나가며 반경에 들어오는 모든 A.F.들을 고체화시키게 된다. 피할 수는 없다. 사방이 막힌 건물에서, 빛의 폭풍을 뚫고 문 밖으로 도망칠 수 있는 운 좋은 경우는 흔치 않다. 인간을 숙주로 삼아 그 정신을 지배하고 공격적으로 만드는 A.F.를 제거하면, 숙주가 되었던 인간 역시 금새 죽어버리고 만다. 지배에서 풀린 채 죽는 인간의 얼굴은 고요하고 평안해 보인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인간다운 죽음을 선사하는 호스피스를 보는 것 같다고 해서 이 경찰 특수치안업무용 휴머노이드에게 호스피서란 이름을 붙였다. 바텐더 역시, 잠깐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에 빛의 폭풍에 휘말려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처리가 끝난 뒤, 르 리에를 떠나는 두 사람의 뒤를 이어 순경 여럿이 가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자질구레한 증거와 딱딱하게 굳은 반투명한 기생 외계인, 그리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죽은 한 바텐더의 시신을 채집해 분석하고, 그 중 기생 외계인, A.F.의 사체는 특수연구소로 옮겨 정밀조사를 거칠 것이다.
문득 자리를 뜨던 형사가 몸을 돌려 르 리에를 다시 바라보았다. 문어 형상의 건물이 새삼스럽게도 유난히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 건물을 바라보며, 형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르 리에의 집...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눈에 드러나는 은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
"..."
"에잇, 신경 끄자. 휴가 때는 잠이라도 실컷 자볼까. 이번이 세번째니까, 휴가 쓸 수 있는 거겠지?"
"규정에 따르면 분명, 특수업무를 세 번 수행하게 되면 반드시 하루의 휴가를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호스피서의 말을 듣고, 형사는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을 옮기며, 형사는 호스피서에게 물었다.


 


"희원 양은 어째서 인간을 편드는 거지? 어쩌면 그 녀석 말대로일지 모르잖아."
"로봇에겐 선택권따윈 없습니다."


 


대답을 들은 형사는 조금 낙심한 표정이었다.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기에.
그 때, 호스피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설령 선택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었겠죠. 제게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인간에겐 '만회'라던가 '반성'이라는 것들이 주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든 될 거다'라고 이야기하던가요?"


 


형사는 어딘가 떫은 듯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로봇도 이젠 낙관적으로 설계하나보다, 그 순간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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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없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 자신은 아직 살아있는 모양입니다(뭔소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