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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팬픽 라데카

2005.06.25 01:53

핏빛노을. 조회 수:37

extra_vars1 마비노기 팬픽 
extra_vars2 下 
extra_vars3 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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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말에서 내렸다. 하지만, 하루종일 말 위에 앉아있어서인지 순간 휘청하고 말았
다. 이런, 안 그래도 힘들 셀레인 앞에서 나까지 이러면 안 되는데……. 난 곧 균형을
되찾고는 셀레인 쪽으로 걸어갔다. 말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줄곧 괜찮
은 척 하던 셀레인은 땅을 딛자 곧 근처에 있던 돌무더기에 기대앉았다.
 난 대충 주위를 둘러보았다. 풀 한 포기 안 나는 황량한 붉은 벌판이었지만, 돌무더
기와 버려진 수레, 구덩이들 때문에 시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도적 코볼트에게 습
격이라도 받으면 큰일인데…….
 에라, 모르겠다. 자기 품에서 자란 고아들인데, 라이미라크께서 가호하시겠지. 이
멘 마하 대성당은 라이미라크 교단의 총본산이다.
 안 그래도 목이 깔깔했는데, 메마른 평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 목이 타는 느낌이
었다. 난 안장에 걸어둔 물을 꺼내 마시고는 셀레인 옆에 앉았다. 셀레인은 내가 물을
건네자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난 셀레인이 돌려준 물을 다시 안장에 걸고는 돌무더기에 기대앉아 숨을 고르는 그
를 바라보았다. 아까(라지만 벌써 세시간 전이다), 가이레흐 언덕에 막 들어서서 잠
깐 쉬었을 때엔 뭐가 묻을까봐 제대로 앉지도 못하더니, 지금은 흙이 묻든 말든 상관
없이 편하게 기대앉는 걸 보면 확실히 힘들긴 힘든 모양이었다.
 대성당에서 내준 갑옷이 흰 색 계통이라, 뭐라도 묻으면 보기 좋을 리가 없다. 물론
여행 다니면서 그런 걸 신경 쓰는 건 무리고, 바람직한 일도 절대 아니지만, 얼마나 힘
들면 저렇게 기댈까 싶어 측은한 마음이 앞섰다.
 조금만 더 가면 반호르였다. 하지만 셀레인이 많이 지친 탓에 쉴 수밖에 없었다. 사
실 셀레인은 처음치곤 정말 잘 달렸지만, 길이 너무 멀고 힘든 탓이었다. 옛 전투의 상
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무너진 건물과 거대한 크레이터, 그리고 곰들뿐인 센 마이 평
원을 지날 땐 안전을 위해 계속 달려야 했고, 가이레흐 언덕과 석상 발굴지를 지날 땐
쉴 만한 곳이 없어서 계속 달려야 했으니까.
 출발한 게 아침 7시였는데, 지금이 오후 2시쯤 되었을까? 7시간을 내리 달렸으면
서, 쉰 시간은 가이레흐 언덕 입구에서 10몇분 쉰 게 전부다. 난 분명히 셀레인에게
이 길은 어렵다고 충분히 말했고, 가이레흐 언덕 입구에서 잠깐 쉴 때도 차라리 던바
튼으로 가서 하루 쉬어갈 걸 권했다. 그 곳을 넘어가면 던바튼으로 향하기 어렵기 때
문이다.
 하지만, 셀레인은 오늘 안에 반호르에 들어가기를 고집했다. 맡긴 편지가 그다지 중
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기한을 어기면 자기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고……. 자기
힘든 거 보고 내가 마음 아파할 줄은 모르고.
 후우, 모르겠다. 어쨌든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왔고, 곧 반호르에 들어갈테지. 별 문
제 없을거다.
 난 돌무더기에 기대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밝고 선명한 푸른빛 하늘에 새하얀 구
름이 흘러갔다. 바람이라도 좀 불면 좋을텐데. 아냐, 그럼 흙먼지가 날리겠군. 그냥 하
늘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벅거리는 발소리를 듣기 전까진.
 난 반사적으로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가볍고 작은 소리긴 하지만, 거리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건 아니다. 체구가 작고 가볍다는, 최소한 인간 여행자는 아니라는 뜻
이다. 거기에, 한두 명 발소리도 아니었다. 긴장한 목에서 조그맣게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제기랄. 셀레인, 준비해."

 셀레인은 놀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칼을 뽑는 내 오른손을 바라보고는 고개
를 끄덕였다. 난 칼을 뽑아들고 돌무더기 뒤편을 살폈다.
 이런 제길, 라이미라크여! 코볼트 다섯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뒤쪽은 돌무더기로 막혀있어 안전하다는 것 정도일까. 그거
외에는, 정말, 없었다.
 녀석들은 각자 가진 무기로 우리를 겨눈 채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코볼트, 인간 싫
다.' 우리도 너네 싫어. 난 녀석들의 무기를 살폈다. 단검 셋, 곡괭이 하나, 대장장이
망치 하나. 코볼트는 인간보다 체구가 작으니 단검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하
는, 원래 우리 땅이었다.' 아, 그래? 관심 없는데. 위험한 건 망치, 곡괭이…곡괭이가
제일 큰 문제군.
 난 별다른 기대 없이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우리는 너네 땅이나 금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코볼트, 인간 못 믿는다!"
 "인간, 코볼트 뒷통수 친다."

 녀석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난 셀레인을 흘깃 쳐다보았다. 싸울 수 있을
까? 힘들어 보이는데.

 "보면 알겠지만, 어차피 싸울 수 있는 상태도 아냐. 원하는 게 뭐지?"
 "용기 없는 자식, 덤벼라!"

 망치를 쥔 녀석이 제일 크게 소리쳤다. 좋아, 너부터. 난 바스타드 소드를 쥔 오른손
에 힘을 줬다.

 "헛소리 하지 마. 네가 말하고 싶어하는 건 용기가 아니라…"

 이미 협상은 결렬됐다. 전투를 시작하기에 가장 알맞은 때는, 적이 눈치채지 못한
순간.

 "만용이겠지!"

 외침과 함께 앞으로 튀어나간다. 녀석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가슴 높이로
들고있던 망치를 어깨 너머로 들어올리려 하는데, 너무 늦어. 그대로 바스타드를 왼
쪽 가슴에 꽂아 넣고, 녀석이 무너지기 전에 뽑아낸다. 가슴에서 흩뿌려진 피가 갑옷
에 묻었다. 그대로 녀석을 차서 날려버렸다.
 난 그대로 크게 한 발자국 딛어 뒤로 돌았다. 뒤가 노출되면 그대로 죽는다. 이런 싸
움에선 속도가 최우선이다. 협격을 당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매 순
간 날 노리는 상대가 최대 두 명을 넘지 않도록 유지하는 데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다른 코볼트들은 그저 자기들 무기를 겨누고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짜증날 정도로 멍청한 말만 내뱉으면서.

 "이잇, 비…비겁하다!"
 "그런 건, 이긴 다음에, 찾아, 멍청아."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전투의 흥분 때문에 숨이 차서 말을 길게 할 수가 없었
다. 난 셀레인을 바라보았다. 남은 코볼트 넷이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어서, 셀레인이
뒤에서 친다면 한둘은 어렵잖게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난 셀레인에게 눈짓을 보
냈다. 하지만 셀레인은 충격 받은 듯 한 표정으로…충격?
 그래, 2년 동안 검술 수업을 받았다는 게 곧 2년 동안 죽기 싫으면 죽여야 하는 상황
을 겪었다는 뜻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건 무리겠군.
 죽어보자. 2년 동안 이런 일 겪은 게 한두 번인가.

 "어설픈 용기에, 되지도 않는 용감 같은 거, 따지지 말고, 죽기 싫으면 덤벼!"

 내 말에 곡괭이가 기합을 내지르며 덤벼들었다. 만만한 무기는 아니다. 맞기만 하
면 풀 플레이트 아머라도 버텨내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너무 느리다. 옆으로 휘두르
는 순간 살짝 피하고, 관성을 이기지 못해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녀석의 머리통을 바스
타드로 날려버렸다.
 눈앞에서 둔기에 맞은 듯 한 소리를 내며 피와 뇌수가 뒤섞여 터지는 머리통을 보면
서도, 고개를 돌릴 수는 없다. 서둘러 녀석 너머 뒤편을 살피던 나는 소름끼치는 느낌
을 받았다. 나머지 셋이 보이지 않아! 뒤에 있다는 뜻인가? 급하게 오른쪽으로 몸을 굴
리자마자 내가 있던 곳에서 단검이 섬뜩한 빛을 뿌린다. 난 그대로 왼팔의 카이트 실
드로 그 코볼트의 다리를 가격했다. 휘청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일어나 녀석의 배에
바스타드를 꽂아넣는다. 칼자국을 따라 벌어진 배에서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숨이 벅차다. 심장 고동소리가 요란하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낼 틈도 없이 낮게
베어들어오는 단검을 피해야 한다. 제기랄, 느리고 무겁기만 한 곡괭이보다는 오히려
빠르고 가벼운 단검이 더 위협적이군. 단검을 피하며 왼손으로 바스타드의 칼몸을
잡는다. 짧은 무기로 파고드는 상대에겐 차라리 이렇게 단창처럼 다루는 게 낫다. 녀
석의 단검을 피해 바스타드를 꽂아넣는 순간, 등 뒤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 제길!
안 보이더라니! 문자 그대로 허리가 부서지는 느낌을 받으며 급하게 뒤로 돌았다.
 하지만, 내 등을 노리던 코볼트는, 이미 오른팔이 잘려나가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
할 틈 없이 바로 녀석의 가슴에 바스타드를 꽂아넣고서야, 코볼트 뒤편에 피로 물든
롱소드를 들고 서있는 셀레인을 볼 수 있었다.

 "허억, 허억…고, 고마워."

 난 거친 숨을 들이쉬며 주위를 살폈다. 라인알트의 적토가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주
위는 코볼트 시체로 가득했다. 머리가 터지고, 배가 갈라져 창자가 흘러나온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셀레인, 후우, 이만 떠나자. 셀레인?"

 난 셀레인의 얼굴을 살폈다. 셀레인은 피가 흐르는 자기 칼을 슬픔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충격이 큰 모양이다. 자
칫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난 셀레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피에 물든 갑옷을 내려
다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어떡해야 하지?
 셀레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이넨, 맞지……?"

 내게 닿은 눈빛에 피곤한 기색이 스쳤다고 느낀 순간, 셀레인은 무너져 내렸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에요. 최선을 다 했지만, 어떻게 될지는 신께서만 알
 고 계시겠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셀레인을 보고 있자니, 반호르 사제의
말이 떠올랐다. 컴건이라고 했던가? 성당도 없는 조그만 광산마을에 홀로 부임한 사
제치고는, 아니 일단 사제라기엔 너무 어렸지만, 그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이 없
었다.
 아까 오후에, 셀레인을 앞에 태우고 반호르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제일 먼저 맞은
것은 컴건이었다. 내게서 이야기를 들은 그는 우리를 서둘러 마을에 하나뿐인 술집
겸 여관으로 안내했다.
 내가 보기에 셀레인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었다. 첫 날부터 일곱 시간을 달린 건 정
말 무리였으니까. 컴건도 거기엔 동의했지만, 그가 보기엔 정신적 피로도 만만찮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나간 사이 여자인 주인 제니퍼씨가 셀레인을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침대에 눕혔고, 컴건이 기도를 시작했다. 별다른 기도문 없이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할 뿐이었지만, 단지 그 모습만으로도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가 느껴질 정도
였다.
 긴 기도가 끝났을 때,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하던 셀레인의 표정은 많이 부드러워
졌지만, 정작 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랑의 신 라이미라크의 권능으로 많이 감화
된 건 사실이지만, 받은 피로와 충격이 워낙 크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머뭇대며 만약 그 충격이 전투의 기억 때문이라면 그 기억을 지울 수는 없냐
고 물었다.

 '기억을 지우다니요? 그런 게 가능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요. 가능하더라도
 우리 교단에서는 할 수 없을 거에요.'
 '아니, 그럴리가요. 티르 코네일 사제님께 부탁해서 내 기억을…아니, 아닙니다.'

 컴건은 잠깐 묻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볼 뿐,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다
행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대답할 말도 없었으니까. 난 만약 기억이 지워졌다면 어
느 기억이 지워졌을까 생각해봤다. 답은 뻔했다. 교육원을 떠날 즈음의 기억, 특히 셀
레인과 관련된 것들.
 의자에서 일어나 셀레인에게 다가갔다. 곤히 자는 듯 편한 표정이었다. 난 가슴까
지 내려온 홑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난 그대로 서서 셀레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침대를 따라 흐르는 다갈색
머리카락에 시선이 닿자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난 지금까지 셀레인을 그저 동생으로
생각해왔다고 믿었다. 틀린 생각은 아닌 거 같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서로 같은
고아라는 것 때문에 자연스레 어울렸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까지
믿고 하게 되었으니까. 마치 가족처럼…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가까이.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4년 전, 셀레인이 날 대하는 태도가 평소답지 않다고
느꼈던 때였다…그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셀레인이 머뭇대며 할 말이
있다고, 해가 진 다음 교정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이기에 그러는지 궁금해
할 뿐,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은, 오늘처럼 라데카가 만월인 날이었
다.
 사흘 전, 식당에서 떠올랐던 그 장면이었다. 거기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더라? 그
기억을 덮고 있는 벽은 너무도 얇았지만, 그 벽을 깨는 건 너무도 어려웠다. 아직도 깨
면 안 된다는 경고가 마음속에서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심코 셀레인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이 떨린다. 내 손길 때문인지 셀레인의 눈꺼풀
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셀레인의 얼굴에서 손을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셀레인이 눈
을 떴다. 셀레인은 잠시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날 알아보고는 입을 열
었다.

 "아, 오빠…편지는?"

 다행스럽게, 그 목소리에서 두려움이나 혼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난 반가운 목소
리로 대답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순 없었다.

 "전했어, 바보야. 왜 이렇게 걱정하게 만들어?"

 셀레인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내가 말렸다. 하지만 계속 몸을 일으키려 하던 셀레
인은 결국 포기하고는 날 바라보며 눈 밑을 닦는 시늉을 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셀레
인의 몸짓을 따라하자 손에 물기가 묻었다. 난 황급히 눈을 문질렀다. 셀레인은 그런
날 보며 미소지었다.

 "미안해, 오빠. 괜히 고집부려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렵네……."
 "그런 당연한 말을…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셀레인은 내 말에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하고 같이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었어. 오히려 더 힘들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셀레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셀레인의 목소리가 점점 젖어들었다.

 "이런 기분, 알아? 4년 동안 미칠 듯 보고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그 사람은
 내가 그렇게 바랬던 사람이 아닌 거 같은 느낌……."
 "…무슨 뜻이야?"

 내 얼굴을 바라보는 셀레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셀레인이 입을 열자, 기어코 한
줄기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4년 전 그 일, 용서한 게 아니라 기억 못하는 거지?"

 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대답이었다. 셀레인
은 말을 이었다.

 "오빠가 떠나고 나서, 한동안 힘들어하다가 결국 결심했어. 오빠가 어디 있든지,
 날 어떻게 생각하든지, 찾아가서 사과하겠다고…어쨌든 오빠가 교육원을 떠난 건
 내 책임이니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교육원을 떠난 건 너 때문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입
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 그저 안타까운 눈빛으로 셀레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실 다시 오빠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못했는데……. 그래
 서, 사흘 전에 광장에서 오빠를 처음 봤을 때는, 기뻐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
 결국 오빠가 날 용서한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저
 께 식당에서 만났을 때 확신 가까운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도 믿기 싫었는데……."

 어느새 셀레인이 흐느끼는 소리가 커졌다. 아무 말 없이 난 무릎을 굽혀 얼굴에 흐
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셀레인은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차라리, 오빠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을텐데, 이렇
 게 눈앞에 있으면서도……."

 셀레인은 끝내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물이 그 얼굴을 타고 흘러 베갯잇을 적셨다.
 


 셀레인은 그렇게 한동안 울다가 잠들었다. 난 한동안 셀레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닦아주고는 일어섰다. 해줄 수 있는 일이 고작 눈물을 닦아주는 것 뿐이라는
게 슬펐다.
 문득 푸른 라데카에 물든 셀레인 라데카가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동생이 아니라 여
자로서. 그 모습을 잠깐동안 내려보다가,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밖은 바로 노천 주점이었다. 깊은 밤이라 주위는 투명하고 짙푸른 색으로 가득했
다. 이미 주점 주인 제니퍼나 점원이자 그의 동생인 리카드도 다 들어가서, 주위는 적
막으로 가득했다. 공기는 춥다기보다는 쌀쌀했다. 난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늘에는 둥근 이웨카와 라데카가 떠있었다. 라데카는 엘프의 달이라는 이웨카에
대비되어 인간의 달이라고 불린다. 이웨카는 붉고 라데카는 푸르지만 땅은 라데카의
빛만 받는 듯 짙푸른 것은, 이웨카의 빛은 땅에 닿으면 마나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라데카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움직인다고 한다. 난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계단에 걸터앉았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셀레인이 저렇게 아파할 필요는 없다. 내
가 교육원을 떠난 건 셀레인 탓이 아니었기에. 기억은 없었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했
다. 하지만 아파하는 셀레인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 따위, 내겐 없었다. 기억이 없기 때
문에.
 난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내 기억이기 때문에, 셀레인이 기억하는 나
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나마 정말 중요한 기억은 교육원을 떠나기 전 라데카가 보
름이었던 날 교정에서의 기억이 아니라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
미 미약해질대로 미약해진 거부감을 걷어내자 의외로 쉽게 기억난 교정에서의 일과
는 달리, 그 기억은 정말 떠오르지 않았다. 도저히, 가닥조차 잡히지 않았다.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푸르게 빛나는 라데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날 교정에서 셀레인이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내 머리카락이 라데카빛 같다고 했
던가. 너무 과분한 찬사에 피식 웃고 싶었지만, 마음을 온통 짓누르는 절망감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내가 교육원을 떠날 때의 기억이 정말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그
기억은 정말 절대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난 원망하는 눈빛으로 라데카를 쏘아보았
다. 인간의 마음을 읽고 움직일 수 있다면서, 내가 이렇게 절망하는 게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지? 가닥조차 떠올려주지 않다니…….
 정말 라데카가 내 외침을 들었을 리는 없지만, 문득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
만 내가 바라는 기억은 아니었다. 난 어금니를 깨물고 기억이 자리를 잡는 것을 지켜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잡은 기억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기억
보다 6개월 정도 뒤의 기억이었다. 그러니까, 막 티르 코네일에 도착했을 때였다.
 난 내가 티르 코네일에 도착했을 때 건강한 상태였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
억에선, 솔직히 말해 살아있다고 말하려면 짧은 고민이 필요한 상태였다. 기억은 그다
지 자세하지 않았다. 저 멀리 건물이 보이는 곳에서 쓰러진 다음, 침대에 누운 내 곁으
로 여러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엔델리온 사제가 내 손을 잡고 걱정스
러운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을 지운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에요. 힘든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갑자기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미 내가 한 대답을 바꿀 수
는 없었다.

 '충분히 생각했어요. 이 기억을 갖고 살수는 없습니다.'

 엔델리온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옆에 서있던 마을 마법선생님 라사가 입술을 깨물
며 내 머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난 터져나오는 비명을 애써 삼켰다. 나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셀레인이 기억하는
나는 그 곳에서 반신불수가 된 거나 마찬가지다. 인격이라는 것은 결국 기억의 총체이
므로. 기억이 없이도 내가 셀레인에게 아이넨일 수 있을까? 내가 셀레인이 사랑하는
그 사람일까? 미칠 것 같이 안타까웠지만, 고개를 끄덕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참으려 했지만 끅끅대는 소리까지 지울 순 없었다. 턱을 따라 흐른 눈물이
계단에 떨어졌다. 투명한 눈물에 푸른 라데카가 어렸다.
 


 어느 새 아침이었다. 난 여관 방문을 열었다. 셀레인이 문 여는 소리에 깼는지 눈을
비볐다. 난 셀레인에게 말했다.

 "미안, 잠깐 나갔다 왔어."
 "하긴, 4년에 비하면 하룻밤은 잠깐이지."

 셀레인은 상체를 일으키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난 난처한 웃음으로 대답했
다. 곧 셀레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어제 내 옷 누가 갈아입혔어?"
 "응? 아, 내가."
 "…오빠!"
 "자, 장난이야. 제니퍼씨가 갈아입혔어.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오빠 못 믿어?"
 "오빠 남자잖아."

 나도 모르게 '내가 너한테 어떻게 너한테 남자야?'라는 말이 튀어나갈 뻔 했다. 아
마 이멘 마하를 떠나기 전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걸 깨달은 나는 딱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었고,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
다.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에이, 이런 분위기에서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난 양손
을 맞잡았다가, 머리를 긁었다가, 턱을 감싸쥔 후, 손을 내려놓고 운을 떼었다.

 "미안해. 내가 교육원을 떠난 이유…결국 기억해내지 못했어. 아니, 그래도 셀레인
 네 탓이 아닌 건 확실해."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기억조차 못 하는 내 위로가―위로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확
신이 들긴 했지만―, 셀레인에게 먹힐 리가 없다. 게다가 셀레인이 슬퍼하는 이유는 따
로 있는데.
 셀레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흘 전 광장에서 만났을 때
와는 달리, 그 표정 뒤에 숨은 슬픔과 쓸쓸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제기랄, 지금 눈물나
면 안 되는데……. 난 눈에 먼지가 들어간 척 하며 눈을 비볐다. 진짜 할 말이 남아있
었다.

 "하지만, 그래도 떠나기 전, 보름날 밤에 교정에서 했던 대화는 기억났어."

 난 살짝 웃었다. 갑자기 셀레인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으면서,
아니,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기억날 듯 말 듯 날 괴롭혔던 그 날의 일. 나는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셀레인을 바라보았다. 문득, 정말 예
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 그 날 까지만 해도, 난 셀레인을 편한 동생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
만 셀레인은 다르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16살…이제 막 성에 눈뜰 나이. 당시
18살이었던 난 특이하게 사귀는 여자가 없었지만, 그래도 동생을 여자로 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셀레인과 서먹서먹해질 생각도, 내게 그 말을 한 용기를 우습게 여
길 생각도 없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그 날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뒤, 얼마 지나
지 않아 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대답도 못한 채 교육원을 떠났고, 그
후 4년 동안 그 말은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다시 만난 셀레인을 사랑하는 데엔
고작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건, 혹시 라데카의 장난일까.

 "혹시 그 날 내게 했던 말, 아직까지 유효하다면…아냐."

 난 문득 그 때 했던 말이 아직까지 유효하건 아니건 그건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셀레인이 사랑했던 아이넨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엔, 셀레인 라데카를
사랑하는 아이넨 제피렌더가 있었고, 그거면 충분했다. 난 그냥 팔을 뻗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셀레인 라데카, 당신과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하하, 하하…장난이 심하잖아, 오빠."
 "장난 아냐."

 발갛게 상기된 채 애써 웃는 셀레인의 볼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셀레인은 떨리
는, 하지만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락할게요…아이넨 제피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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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의사 전달의 도구입니다.
독자 없이 쓰는 것 만큼 비참한 것도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