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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팬픽 라데카

2005.06.23 02:04

핏빛노을. 조회 수:61

extra_vars1 마비노기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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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저녁이었다. 대충 지금정도면 되겠지. 난 식당 문을 열었다.
 내가 이 식당을 찾은 이유는 셀레인 때문이다. 어제는 졸업식 전날이었고 셀레인
은 졸업생이었다. 아쉬웠지만 오래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셀레인
이 내게 그만 가봐야겠다고, 내일 졸업식 끝나고 근처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난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다가오자 문제가 생겼다. 셀레인이 말한 '졸업식 끝나고'가 언
제인지가 불확실한 것이다. '졸업식 끝나고'면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몰라
서 하는 소리다. 졸업식은 굉장히 긴 데다가 언제 끝나는지도 애매하다. 성인식을 겸
하느라 행사 자체도 상당히 길지만, 10여년을 같이 지내다가 사회로 흩어지는 거다
보니 뒷풀이가 길고 거창한 게 전통이고, 사실 이제는 거의 정식 행사의 일부처럼 굳
어져버렸다.
 만약 셀레인이 그 말을 '공식 행사가 끝나고'라는 뜻으로 했다면 오후 두세시를 말
하는 거겠지만, 셀레인 성격에 친구들에게 욕먹을 각오하면서까지 그렇게 일찍 나오
기를 바라는 건 무리다. 그렇다고 뒷풀이가 다 끝난 다음을 말한 것일 리도 없다. 밤
열시 넘어서…아니,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한 걸리는 없잖은가.
 뭐, 어차피 졸업식에 갈 예정이니, 거기서 셀레인을 만나 시간을 확인할 생각이었
다. 물론 이전의 경험들에 비춰 볼 때, 교육원에 간다는 게 쉬운 일일 리는 없었지만.
 결국 내가 불안감과 거부감에 맞서며 가까스로 교육원 건물 앞에 섰을 때, 난 졸업
식 준비로 분주하고 들뜬 분위기 가운데에서도 견디기 힘든 소외감과 무력감이 엄습
하는 걸 느꼈다. 이 많은 사람들 중 나와 같이 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그것을 아무
힘없이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이건 분명 과거에 겪었던 일의 파편이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알아보기 위해 온 것이긴 했지만, 그걸 기억해낸다는 게 두려웠던 거다. 결국, 난
그곳을 피했다.
 뭐…결국 약속시간이 언제인가는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뭐, 장소를 굳이 카
페나 공원이 아닌 식당으로 정했다는 건 뭐라도 먹으면서 말하겠다는 뜻일 테고, 그
렇다면 애매한 시간보다는 식사 때를 마음에 둔 것일텐데, 점심은 졸업식 중에 먹으
니 남은 건 저녁밖에 없지 않냐는 간단한 논리 때문에 지금쯤 아닐까 생각하긴 하지
만, 솔직히 확신은 없다. 맞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기다리지 뭐.
 하지만 난 셀레인이 먼저 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빠, 여기야!"

 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셀레인이 날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난 당황한
얼굴로 그 쪽에 가서 앉고는 물었다.

 "어, 많이 기다렸어?"
 "아냐, 별로. 걱정하지 마."

 셀레인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낯설었다. 내가 기억하는 셀레인이라면 왜 이렇
게 늦었냐고 투덜대거나 기다리다 지루해 죽을 뻔했다고 하지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텐데.

 "이렇게 일찍 나오면 친구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

 내 말에 셀레인의 미소 뒤편으로 쓸쓸한 빛이 스쳤다.

 "오빠보다…중요하지는 않아."

 뜻밖의 대답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날 이후,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지만 정말 듣고 싶었던…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그 날이 언제인
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난 두근대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물을 들이켰다. 난 셀레인의 표정을 살폈지만,
내 동요를 눈치챘는지 어떤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난 잔을 내려놓고 짐짓 쾌활하게
물었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응. 아직 주문 안 했어."

 우린 곧 다가온 종업원에게 각자 식사를 주문했다. 난 음식이 나오는 동안 식당 내
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실내는 넓은 편이었고,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투박하지도 소
박하지도 않은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괜히 지나치게 화려해서, 또는 로흐 리오스
처럼 너무 고급이어서 오히려 음식이 얹힐 것 같은 식당들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분위기는 조용하고 차분했고,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소리가 정겨웠다. 벽에 걸린, 탁자에 놓인 촛불이 던지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이 실내를 밝게 메웠다. 꽤나 마음에 드는 식당이었다. 갑자기 주머니가 걱정되는
걸.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난 종업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는 셀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셀레인이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치, 오랜만에 만났는데 식당에만 정신팔려도 되는 거야?"
 "어, 응? 아…아. 미안."

 너무 오래 식당에만 정신팔린 모양이다. 분명 셀레인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이상하게 아프게 꽂혔다. 마치 내가 셀레인을 외면하려고 식당에 관심을 쏟기라도
한 것처럼. 그럴 리도, 그럴 수도 없는 일인데…….
 셀레인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태
도는 바뀌지 않았지만 왠지 신뢰를 잃은 것 같달까. 난 서둘러 화제를 꺼내려 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우리가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들은 거의 다 너무 오래된, 빛 바
랜 기억들이었으니까. 결국 화제랍시고 꺼낸 이야기가 겨우 이거였다.

 "졸업식은 어땠어?"

 말을 꺼내자마자 입에 주먹을 밀어넣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필 꺼낸 말이 이거
라니!  하지만 셀레인은 내 마음을 모르는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았어. 오빠 생각나더라. 졸업식도 못 했잖아."

 마지막 말을 하면서 셀레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엔 약간 시
간이 걸렸다. 그래…난 졸업식을 치르기 2년 전에 졸업식을 나갔지. 그런데 왜 셀레
인이 미안해하는 거지?

 "괜찮아. 그래도 성인식은 받았으니까."
 "그래? 무슨 성 받았어?"

 부모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이상, 고아에게 성이 있기를 바라는 건 무리다. 그
래서 보통 고아들은 성인식 때 보호자로부터 성을 받는다. 내 경우엔 성년이 되었을
때 티르 코네일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곳 사제님이 지어주신 성을 받았다. 이
멘 마하를 떠난 직후부터 2년간 머물렀던 티르 코네일을 막 떠나려던 때였다.

 "제피렌더. 아이넨 제피렌더. 너는?"
 "어, 응…라데카."

 셀레인은 그 말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라데카…셀레인 라데카? 멋진 이름인데. 그
런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지?

 "머, 멋진 이름이네. 셀레인 라데카…하, 하하."

 난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잠깐동안 웃고 난 후, 난 사과하려고 셀레인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셀레인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웃을 수 있어, 오빠?"

 난 못 웃을 게 뭐냐고 말하려 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라데
카가 빛나는 밤, 교육원 교정. 그리고 셀레인과 내가…….
 갑자기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지? 언제 있었던 일이더라? 더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그 곳이 교육원 교정이었고 보름인 라데카가 빛나는 밤이었으
며 셀레인과 함께 있었다는 것 이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난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들어 입에 대면서 셀레인의 표정을 살폈다. 놀란 표정으
로 말을 걸려 하던 셀레인은 곧 아무 말 없이 생각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탁자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제외하면,
오로지 칼이 접시에 닿는 소리만이 적막을 깨트렸다. 도저히 음식이 넘어갈 기분도
분위기도 아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셀레인이 지나가는 듯 말하는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 졸업식 끝나고 여행 떠날 생각이었는데……."

 셀레인은 말을 계속하려 했지만 내가 말허리를 잘랐다.

 "여행을? 힘들고 위험할텐데.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줄 알아야 해."
 "걱정 마. 칼 정도는 다룰 줄 알아. 지난 2년 동안 열심히 배웠어."
 "교육원 검술 수업? 2년이면, 설마 끝까지 통과한거야?"
 "응."

 …세상에. 교육원 검술 수업은 성에서 파견나온 기사들이 진행한다. 끝까지 통과했
다면 거의 기사급인데.

 "하지만 칼 다루는 거하고 여행하는 건 다른 문제인데……. 뭐, 어디 마음에 두고
 있는 행선지라도 있어?"
 "응. 대성당에서 여행장비 지원해주는 대신 반호르에 있는 교단 사제한테 문서 전
 해주기로 했어. 그러니까…라데카가 보름이 되기 전에."
 "잠깐, 반호르? 보름까지?"

 내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셀레인은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긴, 그런 사람들이긴 했지만…거절해."
 "왜?"
 "이멘 마하에서 반호르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위험한 지 알잖아. 여행장비 대준다
 고 생색내고 일 떠맡기려는 속셈인가 본데, 너무 위험해."

 내 목소리엔 혐오와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내겐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사제님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셀레인은 내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떠맡긴 게 아니고 내가 자청한 거야. 아직 오빠가 대성당 사제님들을 싫어한다
 고…아니 증오한다고 해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벌써 4년 전 일
 이잖아. 용서해 줄 수 없어?"
 "용서…하라고? 후우. 모르겠어."

 내가 한 대답이라기보다는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반응이었다. 하지만 잘못된 대답
인 것 같진 않았다. 용서하라는 말은 무슨 문제가 있었다는 말일텐데…그래, 있었던
것 같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려 했지만 난 일단 그것들을 한 구석에 미뤄버렸다. 기억
해 내기가 두려웠으니까. 대신 난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래, 뭐…굳이 반호르에 가야겠다면, 내가 같이 가줄게. 별다른 계획 없으면 동
 료 구할 때까지라도."
 "아냐, 오빠한테 폐 끼치기 싫어. 그냥…"
 "아냐, 괜찮아. 어차피 특별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셀레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쉬려고 돌아온 거 아니었어?"

 난 그 말에 아직 정착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냐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문득 더 떠
돌아다닐 이유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난 그냥 하려고 했던 말을 했다.

 "발 닿는 대로 다니다 보니 오게 된 거지, 별다른 의미는 없어. 그리고, 아직은 정착
 하고 머물 때가 아니잖아?"

 셀레인은 내 말에 약간 놀란 빛을 띄더니 곧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런데 약간 이상했다. 그저 내 말에 알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질문의 답을 얻은 듯 보
였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자세한 계획(어차피 반호르
에 시간 안에 도착하는 것 외엔 목표도 없었지만)은 내일 다시 만나서 짜기로 했기 때
문에 별다른 중요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곧 화제는 보다 가벼운 쪽으로 흘러갔
다. 별 생각 없이 공감하고 같이 웃을 수 있는 이야기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식사
를 끝낸 우리는 웃음 띤 얼굴로 식당을 나섰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공기는 쌀쌀하다기보다는 시원한 느낌이었다. 나
는 팔을 쓰다듬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라데카가 눈에 들어왔다. 모레쯤 보
름이 될 것 같다.
 잠깐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셀레인이 내게 물었다.

 "뭐 할 거야, 오빠?"
 "응? 글쎄. 들어가야지. 데려다 줄까?"
 "아냐, 됐어. 나 혼자 들어갈 수 있어. 그런데…"

 난 말을 끊은 셀레인에게 고개를 돌렸고, 셀레인은 잠깐 시간이 지난 다음 말을 이
었다.

 "아직 교육원 사제님들한테는 오빠가 돌아왔다는 얘기 안 했어. 오빠가 직접 말해
 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사제님들한테는 말 안 하고 떠날 생각이야?"

 어느새 우리는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셀레인은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푸르
고 깊은 눈동자가 아름다웠지만,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 투명한 눈길 때문에
대답하기가 거북했다. 게다가 난 사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도 모르지 않는가.

 "글쎄 그건…조금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난 어색한 감정을 느끼면서 대답했고, 셀레인은 내 대답을 듣고서도 계속 그 눈빛
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결국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셀레인은 그러고서도 약
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내게서 눈길을 가져갔다.

 "알았어. 잘 가 오빠. 내일 다시 보자."

 셀레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교육원 방향으로 걸어갔다. 난 셀레인을 잡을까 했지
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그냥 여관 방향으로 향했다.
 문득 올려본 하늘엔 아직 보름이 안 된 라데카가 빛나고 있었다.


 
 난 호수 안에 떠있는 섬 위에 서있었다. 이멘 마하 시가 자리잡은 곳과 반대쪽의 땅
을 잇는, 호수를 가로지르는 석조 다리 가운데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섬이다. 호수의
아침답게 공기는 맑고 싱그러웠다. 바람이 세찬 느낌도 없잖아 있었지만, 아침이라
그런지 그렇게까지 거세진 않았다. 아침과 저녁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때니까.
 셀레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저께 식당에 갔을 때 셀레인이 먼저 나와있었던
걸 생각하고 일찍 나왔는데, 너무 일찍 나온 게 아닌가 싶다. 하긴, 지금은 아침이라
기보다는 새벽에 더 가까운 시간이니까. 하지만 난 셀레인이 많이 늦지는 않을 거라
고 확신했고, 별로 조급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다. 난 잠깐 시간을 때우기 위해 졸업
식 다음날, 그러니까 어제 셀레인과 만나서 여행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
을 떠올렸다.
 원래 계획은 오스나 사일을 거쳐 던바튼 시에 도착해서 하루 묵은 뒤 가이레흐 언
덕을 지나 반호르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제 기준으로 라데카가 보름이 되려면 하
루 남았고, 라데카가 보름이 되기 전까지라고 했으니 다음날(그러니까 오늘이다) 라
데카가 뜨기 전에 반호르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 때 당장 출발해서 던바튼에
서 하룻밤 묵은 다음 반호르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셀
레인이 갑자기 생긴 일 때문에 오늘에야 떠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루만에 가기는 어려운데. 어차피 중요한 편지도 아닐 테고, 좀 늦어도 되지 않
 아?'
 '그래도 믿고 맡긴 약속이잖아.'

 후우. 그 사람들의 신뢰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다른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일찍 출발해서 센 마이 평원과 가이레흐 언덕을 지나
라데카가 뜨기 전 반호르에 들어가는 것으로. 다행스럽게도 대성당에서 지원해준다
는 여행장비에 말과 승마장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울 수 있는 계획이었다.
 빠르긴 했지만 힘들고 위험한 계획이었다. 일단 첫 번째 계획에서 이틀동안 갈 거
리를 하루만에 가야 하는 데다, 센 마이 평원은 마족과 인간이 큰 전투를 벌인 끝에
결국 인간이 대패했던 지역이다. 아직까지도 안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셀
레인은 여행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이멘 마하 시 쪽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가장 먼저 눈
에 들어온 건 대성당 건물이었다. 사실 대성당은 이 섬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
에, 도시에 들어오면서 볼 때보다는 상당히 커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 보는 방향
은 도시에 들어오면서 봤던 방향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하긴, 그때는 호수가 아닌 반
대편 숲 쪽에서 왔다.
 난 시선을 내려 이멘 마하 시로 이어지는 다리를 바라보았다. 또각 또각 또각, 느리
지만 또렷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셀레인이 말을 끌고 오
고 있었다.

 "셀레인!"
 "아, 오빠."

 셀레인은 곧 종종걸음으로 내게 달려왔다.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대성당에
서 지원해 준 것이지 싶었다. 그럴 듯 한 롱소드에 검사 장갑, 가죽 부츠. 입고 있는
옷은 가죽갑옷이랍시고 마련해 준 것 같았는데, 색도 밝고 하의가 치마인 게 아무래
도 의장용이지 싶었다. 하, 참. 도대체 어떻게 치마를 갑옷이라고 줄 수가 있지? 뭐,
성당이니만큼 의장용 갑옷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다 싶긴 하지만.

 "이야, 오빠. 멋지네?"
 "응? 아, 고마워."

 난 새삼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5일 전 여관에서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냈던
그 복장이었다. 바스타드 소드와 카이트 실드, 그리고 아래팔을 가려주는 철 보호대
가 붙은 건틀렛과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그리브 부츠. 갑옷 허리부분엔 허리띠 세 개
가 교차되어 있었는데, 어차피 실용성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난 셀레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셀레인은 이멘 마하 반대편 육지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 눈엔 설렘과 동경, 흥분과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문득 내가 셀레인과 같이 여
행한다는 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셀레인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첫 여행이
다 보니 서투르고 미숙한 부분은 내가 도와줘야 하겠지. 짐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오
히려 기쁘고 설레었다.

 "어때, 준비됐어?"
 "응,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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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네요. 조회수 10을 넘기는 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