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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팬픽 라데카

2005.06.22 11:51

핏빛노을. 조회 수:70

extra_vars1 마비노기 팬픽 
extra_vars2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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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은 마비노기의 세계 에린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마비노기와 직
 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는 설정
 을 삽입하기도 했으며, 게임에 등장하는 설정을 탈락시키기도 했습니다.
 마비노기 팬픽보다는 일반 판타지라는 개념으로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히야! 에라, 하!"

 말발굽이 세차게 땅을 디뎠다. 어쨌든 여기는 숲 속이니 높은 속도를 내는 것은 위험
한 일이겠지만, 내 말은 자기가 발 딛는 곳이 숲 사이에 난 오솔길이든 황야든 상관없
다는 듯이 달리고 있었다. 물론, 이 정도 속도는 괜찮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달
리게 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저 조바심이 나서 그러는 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그렇게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띄는 나무의 수가 점점 줄더
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그리고 도시와 호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급하
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크게 울며 멈춰 섰다.
 격한 질주의 흥분이 남아있었는지 말이 푸르릉거렸다. 난 말에서 내려 갈기를 쓰다
듬으며 달랬다. 갑자기 멈춰 서게 한 게 미안하긴 하지만, 사실 늦기 전에 저 광경을 보
려고 달린 거니 어쩔 수 없었다.
 저 앞에는 거대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태어나서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
람에게라도 대충이나마 바다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 정도의 호수였다. 때마
침 저녁이라 팔라라가 낮게 떠 있었기 때문에 호수는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호수도 충분히 환상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내 관심은 그보다는 호수 옆에 자리잡
은, 호수에 비하면 규모에서도, 역사에서도 비교가 안 될-하지만 사람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거대한 도시에 쏠려 있었다.
 제일 먼저 호수 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언뜻 보면 섬처럼 보일 듯 한 조그만 곶 위에
서 노을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듯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며 서 있는 대성당이 눈에 띄었
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길은 자연스럽게 호숫가에 발달한 큰 도시로 옮겨갔
다. 저런 거대한 호수의 옆에 서 있으면 왠지 조그맣게 보일 것 같지만 오히려 도시는
호수를 자신의 배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풍경을 갖고 있으
면서 그 풍경 못지않게 밝게 번성하는 도시. 이 땅 에린을 통틀어 보아도 이런 도시는
얼마 없다.
 이멘 마하. 오랜만이다.
 


 호수를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이멘 마하 시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호수에 비치
는 노을과 한산하지만 아름다운 거리가 시간감각을 뺏어간 모양이다. 내가 느끼기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 않은데, 벌써 팔라라는 수평선 아래로 반이나 잠겨
있었다.
 그나저나, 저 호수는 내 눈길을 놓아주지 않을 모양이군. 어느덧 노을은 하늘까지 불
사르고 있었다. 하지만, 짙어지는 노을을 보며 마음이 조급해 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은 늦게 데워지고 늦게 식으며, 양이 많을수록 그렇다. 그래서 바로 옆에 거대한
호수를 둔 이멘 마하의 밤은 그다지 추운 편은 아니다. 하지만 호수 때문에 바람이 세
차다. 계절이 봄인지라 그렇게 거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 좋은 바람인 건 아니
다. 밤이 되면 바람이 더 거세질테니 어서 여관에 들어가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지나가
는 사람에게 여관이 어딨는지 물어보았다.

 "저기, 여관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마구간이 있어야 되는데……."
 "아, 저, 마구간 있는 여관이면, 엣취. 저기 대성당 보여요? 그 근처에 공연장이, 엣
 취! 있거든요. 그 근처에 보면, 여관이 많아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공연장이라……. 익숙한 이름이다. 난 빙긋 웃었다.
 내가 여관이 있는 거리에 도착했을 땐 이미 팔라라가 수면 아래로 내려간 다음이라
주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대충 살펴보고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테
지만 지금은 간판도 제대로 읽기 힘들었다. 그래서 마구간이 있는지만 살펴보고는 말
을 맡겼다.
 삐이걱. 여관 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여관 홀
은 밝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도 활기찼
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종업원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멘 마하에서 좋은 추억이……."

 갑자기 종업원의 당황한 듯 말을 멈췄다. 탁자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이 쪽을 흘깃거
렸다. 대놓고 신기하다는 듯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뭐지, 이거? 내가 뭘 잘못했나?
 그 때, 종업원이 내게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어, 성에서, 나오셨습니까?"

 이건 또 뭐, 아. 그건가. 쳇.
 하긴 내 차림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만 하다. 물론 기사라면 이런 가죽갑옷을 입진
않겠지만, 어쨌든 이멘 마하는 안전한 도시라서 갑옷 비슷한 거라도 입는 사람은 기사
뿐이니까.
 종업원은 긴장한 얼굴로 나만 보고 있었다. 이 도시 영주나 기사들의 평이 나쁜 건
아니지만, 기사가 시시한 일로 여관에 들르진 않을 거 아닌가. 하지만 다른 손님들은
은근히 재밌어 하는 분위기였다. 어쨌든 자기들이 관련된 일일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난 기사가 아닌데.
 우습지는 않았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내가 기사가 아니란 걸 쉽게 알 수 있을 거
다. 기사가 이렇게 머리를 기를 리도. 여행가방을 메고 다닐 리도 없잖은가. 갑옷에만
정신이 팔려서 정작 나 자신에게는 그런 기본적인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게 기분
나빴다.
 후우. 별로 웃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히 화내서
분위기 망치고 오해만 깊게 만드는 보단 낫겠지.

 "아뇨, 여행자입니다. 방 있어요?"
 "아, 여행자…예! 방 있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을 억지로 억눌렀다. 이 여관엔 여행자나 마족 사냥꾼
들이 묵지 않은 지 오래된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여행자라는 말에 저렇게 당황하는 거
겠지. 사실 요즘엔 여행자와 마족 사냥꾼이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니까. 그리고 마족 사냥꾼은 거칠게 마련이고.
하지만 난 그렇게 거친 사람 아니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열쇠를 받아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래도 옷 갈아입기 전에
는 내려오지도 못할 것 같다.
 


 받은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일단 배낭을 방 한 구석에 던져놓고 바스타드
소드를 띠에서 풀어 건틀렛과 함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카이트 실드도 팔에
서 풀어 탁자에 기대놓고, 부츠를 벗어 침대 옆에 놓은 다음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직 갑옷을 입은 채인데도 너무 부드럽게 느껴졌다. 어느새 침대보다 땅바닥이 익
숙해졌단 말이지. 나는 피식 웃었다.
 문득 그 종업원의 말이 생각났다. 사실 내 옷차림이 그다지 가벼운 차림이 아니라는
건 인정하지만, 요즘같이 동물도 사나워지고 마족들도 심심찮게 나타나는 상황에서 여
행 다니고 싶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다지 무서운 차림은 아닌데…….
 그래, 여기는 이멘 마하니까. 아직도 평화가 일상인 얼마 안 되는 도시.
 아직 하룻밤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러는 건 너무 성급한 감이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는 고향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그저 지난 2년 동안 지나쳤던 수많은 마을
들과 같은 느낌이 들뿐이다. 차라리 여기보다는 티르 코네일이 더 고향 같을 것 같다.
이멘 마하를 떠난 뒤 1년 반 동안 머물렀던 마을이니까. 그저 조그마한 산골 마을이라
더 포근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지만.
 난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둥글고 붉은 이웨카와 아직 보름이 안 된 푸른 라
데카가 보였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그렇겠지만 특히 여행자에겐 라데카가 더 반가운
달이다. 이웨카는 언제나 둥글어서 시간을 아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니까.
 5일쯤 있으면 라데카도 보름이 될 거 같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여관 식당에서 가볍게 식사하는 중이다. 이렇게 편하게 식사할 수 있
는 건 가방 안에 있던 평상복 몇 벌 덕분일 거다. 어제 같은 차림이었으면 꽤 거북했겠
지.
 걱정되는 게 있다면 누가 날 알아보고 놀라지나 않을까 하는 정도다. 다행히 식사하
는 도중에는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여관이라고는 해도 요즘같이 여행 다니기 힘든 상황에
선 여행자보다는 마족 사냥꾼들이 찾게 마련인데, 마족 사냥꾼들은 평화롭고 넓은 이
멘 마하는 별로 찾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여기 여관들은 이 도시 사람들이 모이는 곳
이 되었을 거다. 그러던 와중에 갑옷 입고 칼 찬 여행자가 들어왔다. 중요한 건 그 여행
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 여행자가 걸친 무장이었을 테고, 그게 일상을 깨트렸다는
것일 테지. 그러니까 갑옷을 벗었다는 것만으로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거다.
 탓할 생각은 없다.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난 식사를 끝마치고 홀에 들어섰다. 혹시 말상대를 찾거나 그간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까 해서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난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여관에 놀러오
는 사람은 많았지만 묵는 사람은 얼마 없었기 때문에 홀은 거의 비어있었다. 어쨌든 지
금은 놀러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니까. 이래선 차라리 광장에 나가는 게 낫겠는데.
 내가 여관 문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였다. 한 탁자에 앉아있던 여자가 날 보더니 갑
자기 손을 들었다.

 "이봐요! 어제 그 여행자 맞아요?"

 어, 알아보네? 당황한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같은 탁자에 앉은 남자가 먼저 말
했다.

 "뭐? 말도 안 돼. 저 사람이?"
 "아냐, 확실해. 저 머리 보라고. 맞죠?"

 아, 머리카락. 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는 약간 푸른 빛 도는 은발이다. 게다가 그걸 묶고 있지. 그다지 여성적으로
묶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여자로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이유
는 별 거 없다. 여행 다니다 보면 머리 손질할 시간이 없게 마련이라 자르는 것보단 편
하겠지 싶어서 묶기 시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풀면 허리까지는 갈 법한 머리 손질하는
건 장난이 아니다.
 난 자연스럽게 그 쪽에 가서 앉았고, 그러자 그 남자가 내게 정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알려줘도 모를 정도라고……. 기분 나쁜데.

 "어, 저기, 티어렌이라고 부르시면 되는데, 정말 어제 그 사람 맞아요?"
 "제피렌더라고 불러요. 어제 얼굴은 안 가리고 있었습니다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피렌더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다. 그것도 난 고아니까 다른 사
람이 지어준 성일 뿐이다. 내가 누군지는 관심 갖지도 않는 사람에게 아이넨이라는 이
름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 물론 그랬지만 그 상황에서 얼굴이 보일 리가…"
 "너 도대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냐?"

 음, 이 여자 화끈하고 좋은데. 내가 할 말 대신 해 주다니.

 "레나 너 같은 애 아니면 그런 데 신경 안 써. 그런데 난 적어도 30살은 됐을 줄 알았
 는데…몇 살이에요?"
 "스물 둘이요."

 내가 말해 놓고도 목소리가 너무 차가워서 놀랄 뻔했다.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그
런 데 신경 안 쓰는 게 당연하다니, 너무하잖아. 어쨌든 남자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고,
대신 레나라는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면 우리랑 동갑이네요? 이거 의왼데. 여행 많이 다니시나봐요?"
 "뭐, 많이 다녔다면 많이 다녔죠. 2년 동안 떠돌아 다녔으니까."

 말을 조심할 걸 그랬다. 저 눈빛은 분명히 존경하는 눈빛이다. 난 그 남녀가 부담스
러운 질문을 하는 것을 막으려고 먼저 말했다.

 "그런데, 여행자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일찍부터 여관에 있어요?"
 "티어렌이 할 말이 있다고……."

 갑자기 티어렌이 헛기침을 했다. 우리는 잠자코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고, 티
어렌은 약간 시간이 지난 다음 머뭇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아니, 별 건 아니고, 시간 있으면 어디 같이 놀러갈까 해서…"
 "응? 아, 미안한데 내일 모레까진 시간 없어. 교육원 졸업식 돕기로 했거든."
 "그래?"

 티어렌은 레나의 대답을 듣고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난 내가 그다지 눈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니, 적어도 저렇게 실
망한 표정을 짓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난 그냥 궁금한 걸 묻기로 했다.

 "교육원이요? 대성당 교육원 말하는 겁니까?"
 "어, 알고 계세요? 외지인은 잘 모르는 건데."
 "아, 그거야…"

 '내가 그 교육원에 있었거든요.' 난 그렇게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말을 맺지 못했
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가슴 한 구석
이 서늘해지는 기분 때문이었다.

 "예?"
 "아, 아녜요. 언젠가 들었던 것 같아서요. 이멘 마하엔 대성당에서 운영하는 기숙학
 교가 있다고……."

 음. 어색하다. 정말로.

 "맞아요.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고아들 데려다가 무료로 가르치기도 한다고 하더라
 구요."

 사실이다. 아마 여기가 이멘 마하가 아닌 다른 도시였다면, 아니면 이멘 마하에 대성
당 교육원이 없었다면 난 어릴 때부터 도둑질이나 소매치기 같은 거나 해먹고 살았겠
지. 갈 곳 없는 고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얼마 없다.

 "그런데, 졸업식이 큰 행사인가요?"
 "네. 가족같이 지내다가 사회로 나가는 거잖아요. 그리고 졸업생 가족들이나 친구들
 도 많이 보러 오거든요."

 그 말을 흥미 있게 듣는 척 하면서, 난 사실 내 감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교육원에 대
해 말하고 듣고 기억할수록 뭐라고 꼭 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긴장되고 약간 불편하다고 할까.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재밌겠네요. 언제 하는데요?"
 "3일 남았어요. 보러 가시게요?"
 "아니…생각 좀 해 보고요."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이상한 기분 때문에 더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티
어렌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난 대충 인사하고 여관을 나갔다.
 물론, 여관을 나선다고 딱히 갈 곳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난 그냥 걷기로 했다. 어차
피 고향인데 길 잃을 걱정은 없다.
 걷다 보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난 신경질적으로 그 생각들을 머리에서 쫓
아내려고 했다. 거의 다 교육원에 관련된 생각들이었고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불쾌했기 때문에…
 …그 기억이 불쾌하다고?
 나는 놀라서 길 중간에 멈춰 섰다. 그 기억이 불쾌할 이유가 없다. 고아인 내게 교육
원은 거의 가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교육원의 기억들은 이멘 마하에서 살았던
18년 기억의 전부나 마찬가지인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 아침 여관에서 졸업식에 관련된 일을 듣기 전까
진 교육원이라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잊어버렸다기 보다는 떠올리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병사가 고향에 돌
아와서는 자기 가족에 대한 일을 까맣게 잊었다면 모를까.
 이상한 일이다.
 


 그 후 이틀 동안, 난 이멘 마하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주로 내가 교육원 시절 자
주 들렸던 곳, 그러니까 내 기억이 서려 있을 만 한 곳들이었다.
 도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 말을 하기 위해 굳이 도시 옆에 자리 잡은 호수를 볼
필요는 없다. 도시는 아름다운 건물들로 가득했고 큰길들과 광장은 언제나 밝고 활기
차게 북적였다. 방학 때 몇 번 가곤 했던 공연장은 여전히 전문 공연이 없을 땐 견습 악
사나 떠돌이 음유시인의 연습장으로 사랑 받고 있었고, 선선한 호수바람도 낯이 익었
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고향이라는 느낌보다는 그저 익숙한 도시 같은 느낌이랄까.

 "후우."

 난 한숨을 내뱉고는 광장 계단에 걸터앉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난 아직 교육원
에 가지 않았으니까. 찾아가서 사제님들께 인사드리기는커녕 그 건물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틀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도 사실은 교육원 졸업식을 보러갈지 말지를
고민했던 거고.
 골치 아픈 일이었다. 가고 싶지 않다면 안 가면 될 테지만,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예
정도 계획도 없는데 10여년을 가르쳐주신 사제님들을 찾아뵙지도 않는 건 문제가 있
는 것 같다. 나 스스로 아쉬운 면도 없잖아 있고.
 그런데 정말 골치 아픈 건, 도대체 뭐 때문에 교육원에 가기 싫은 지도 모른다는 거
다. 그 이유라도 안다면 이렇게 머리 아프지는 않을 텐데. 최소한 가야 할지, 말아야 할
지 정도는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가지 않기에는 이유가 너무 비합리
적이었고, 그렇다고 가자니 그러고 싶지 않다. 왜 그런지는 모를지언정 감정 그 자체만
큼은 뚜렷하니까. 지난 이틀 동안 그 감정들은 꾸준히 커져갔다. 불안, 긴장, 심지어는
공포에 혐오까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려다 말았다. 어차피 묶은 머리라 긁기도 어렵고 흐
트러지면 다시 손질하기도 귀찮다. 대신 나는 대성당 건물을 노려보았다. 대성당은 광
장 정남쪽에 있는 데다 워낙 크기 때문에 앉아서도 무리 없이 보였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맥이 풀리고 말았다. 대성당 건물이 아닌 대성당 교육원 건
물이었다면 이렇게 노려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난 착잡한 기분으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고 말았다. 저녁이라고 말하
긴 이르지만 그래도 늦은 오후인데, 광장은 아직도 분주한 사람들 때문에 북적대는 중
이었다. 이런 광장에 앉아서 혼자 착 가라앉아 있단 말이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내일이 졸업식이니 교육원에 가 보기는 해야겠다. 그리
고 혹시 내가 잊어버린 뭔가가 있는지도 알아보고.
 그렇게 막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내가 아는 누군가를 봤다는 느낌이 들었
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광장에서? 난 광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느낌이 맞다
는 걸 확인했다. 내가 이멘 마하를 떠났을 때 16살이었으니 지금은 20살일 거다. 변해
도 한참 변했을 테고, 아니, 실제로 많이 변했다. 하지만 내려 묶은 갈색 머리 하나만으
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셀레인이다.
 교육원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여자애였다. 같은 고아라는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잘 통해서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당시 소극적이었던 나에 비해 활발하고 적극
적인 모습이 보기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보다 두 살 어린데도 서로 말도 잘 통했고.
 반가워서 셀레인을 부르려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갑자기 거부감이 들어
서였다. 이유는, 이번에도 없었다. 미칠 것 같은 노릇이었다. 부르기 싫다면 부르지 않
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4년 만에 만났는데 이렇
게 헤어질 수는 없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셀레인은 점점 멀어졌다. 곧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안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는 내 자신이 싫었고, 한심했다.

 "세, 셀레인……?"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광
장에서 제대로 들릴 리가 없다. 난 크게 다시 말해야 할까 하고 생각했다.
 셀레인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리고 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푸른 눈이 크게 떠지는 게 보였다. 작고 가느다란, 떨리는 목소리가 너무 또렷하게
들렸다.

 "…아이넨 오빠?"

 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갑자기 밀려온 온갖 감정들이 너무 심하게
뒤엉켜 있었으니까. 셀레인이 내 이름을 불러준 게 고마웠다. 하지만 셀레인이 날 보
는 게 두려웠다.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싶기도 했다.
 셀레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표정일 뿐이었지만 난 거기
서 혼란스러운 기쁨을 읽어낼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셀레인이 날 보고 기뻐한다
는 걸.
 물어볼 말도, 하고싶은 말도 많은 모양이다. 몇 번인가 입을 열려고 하던 셀레인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셀레인은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한 두 발자국 떼
었다.
 난 거의 뒤로 물러설 뻔했다. 발을 떼기 직전에야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딱히 물
러서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냥 물러서면 안될 것 같았다.
 내 혼란을 눈치챈 모양이다. 셀레인은 놀란, 어딘지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멈춰
섰다. 그 표정을 보자, 갑자기 숨이 막힐 것 같은 슬픔과 후회가 스며들었다. 나만 슬펐
을 리가, 나만 아팠을 리가 없는데…셀레인의 마음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나는…….
 내가 갑자기 밀려든 감정에 숨막혀 할 때였다. 서서히, 그러나 충분히 빠르게, 셀레
인의 얼굴에서 슬픈 기색이 사라졌다. 그저 담담한 듯,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표
정이 떠오를 뿐이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셀레인은, 기쁘
면 웃고 슬프면 울 줄 아는 아이였다. 이렇게 자기 감정을 감추는 데에 능숙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만큼 슬픔에 익숙해졌다는 뜻일까.
 하지만, 셀레인도 슬픔이 가려진 자리에 남은 쓸쓸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셀레인
이 한숨쉬듯 입을 열었을 때 흘러나온 목소리에선 분명 슬픔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
건 슬픔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이야?"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슬픔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지만, 난 그 말에 대답할 수 없
었다.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니까. 하지만, 뭐가 아직인지는 모르지만, 아니라고,
더 아파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건 마음뿐이었다. 기억도 못 하는
일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셀레인이 저렇게 아파하는 것을 그저 지켜
만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팔을 벌렸다. 셀레인이, 만약, 아직도 원한다면, 내게 안길 수 있도록.
 셀레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셀레인이 내게 뛰어와 안겼을 때, 어쩌면 내 눈
에도 같은 눈물이 고였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이멘 마하의 호수 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

핏빛노을입니다.

이전 창도에 올렸던 글인데, 다시 올리는 이유는…백업이랄까요.
할거면 이전에 리뉴얼 되자마자 하던지 할 거를 왜 지금 하는 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_-;;

재밌게 읽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덧. 커플제국의 공격에 쉽게 상처받는 분이시라면 중편까지만 읽으시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