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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연애 영원으로의 회귀

2006.01.24 08:05

아바오아쿠 조회 수:86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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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의 압박이 있습니다... 단편을 그냥 다 올립니다. 양해를...




그가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들에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아닌―그러나 비슷

한―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에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그 자신이 무신경했다는 건지,

아니면 ‘그 것’이 때 맞춰 나타난 것인지, 전자라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뭔가 아주 희

한한 타이밍이라고 그는 생각하곤 했다.

‘그것’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는 별로 기분나쁘진 않았으나 귀찮아했다. 유희라는 이름이있었지만 그가

그 이름을 그 시절에 제대로 불러준 적은 거의 없었다. 뭐랄까, 자신도 ‘유신’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오빠’라

고 불리는 데 대한 일종의 앙갚음이랄까.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의 동생―그는 동생이라고 느껴본 적은 없지만―이 귀엽다고들 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단지 살결이 희고, 머리카락이 길고 윤기났었다는 것이 어째서 귀엽다

는 거지, 라고 자문하곤 했다. 아니, 어쩌면 애써 귀엽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큰 눈―


유일하게 무언가를 느꼈던 부분, 그걸 볼때마다 더욱 강해졌다.


아줌마들은 시원스럽고 예쁜 눈이라고 했다. 물론 그도, 큰 눈이라고는 생각했다. 바라보고 있으면―실제

그가 제대로 바라본 적도 없었지만―보고 있던 자신이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은 구멍. 아니, 차라리 귀신

의 눈, 이라고 느꼈다. 가끔씩, 이 쪽을 보는 그 ‘큰 눈’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그는 일종의 위압감 비슷한 것

을 느꼈다.


―날 잡아먹을지도 몰라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하곤 했던 그는, 절대 동생이랑 단 둘이 있지 않았다.





친구들이 생기고, 밖에서 나가 노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 무렵, ‘큰 눈’과의 대화는 더욱더 줄어들었다. 딱

히 할 얘기도 없었고, ‘큰 눈’ 쪽에서 말은 건 적도 없었던 데다가, 항상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

이다. 뭘 하는가,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호기심에 기웃거려 보면, 그 때마다 창문을 열어놓고―겨울

이라도― 창틀에 앉아 책을 보거나 이상야릇한 그림을 그리거나, 멍하니 창 밖의 풍경을 보고 있을 뿐이었

다. 어머니는 그런 모양을 보고 ‘영감쟁이 같다’고 했다. 그래서 영감쟁이는 저렇게 방에 혼자 박혀, 이상한

짓을 하는가, 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새로운 별명(?)을 찾아낸 그는 기뻐서, 어느날 책을 읽고 있던 ‘큰 눈’

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감쟁이―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 책을 읽던 ‘큰 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가…?


―엄마가.(물론 ‘큰 눈’ 이 물은 것은 ‘누가 영감이라는 거야?’ 정도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겠지만, 그는 축약

형 문장이 지닌 다의적인 의미를 이해하긴 힘들었다.)


‘큰 눈’은 잠시 그를, 아니 그의 눈을 쳐다보더니 곧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영감쟁이’는 기분나쁜 말이 아닌가?


그는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갑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혼란스러워졌다. 대가가 없는 행동. 머쓱해졌다.

난 뭘 기대하면서 이런 말을 한 거지? 그는 곧 그 방의 문을 닫고 나와버렸고, 다시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쳐다보던 그 눈동자.


조금 나이를 먹어서, 그 ‘큰 눈’ 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란 황당한 상상은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눈빛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어려워하는 것은 ‘큰 눈’ 주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와는 다른 사항으로 어려워 하는 것이었지

만. ‘큰 눈’이 원체 말이 없는 데다가, 밖에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들 중 한 명이 퍽이나 큰 눈을 못마땅해 하였다. 바로 옆집에 사는 아이였는데, 그 아이의 집

도 그만큼이나 잘 살았고 얼굴도 예쁘장했지만, 콧대가 높고 건방지다 할 만큼 기가 세었다. 물론 여론(이

래봐야 친구들 몇이지만)은 은둔자보다 공주님 편이었지만, 묘영이―그것이 그 아이의 이름이었다―는 뭐

가 아쉬운지 여전히 ‘큰 눈’을 별렀다.


그 아이도 그를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녔다. 그는 같은 ‘오빠’ 지만, ‘큰 눈’ 보다 묘영이에게서 듣는 편

이 더 좋았다. 서로 ‘큰 눈’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졌기 때문일까.


―오빠, 있잖아.


―응?


학교를 마치고 같이 갈 때, 그 아이가 불쑥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큰 눈’ 과 같이-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하

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하교했지만, ‘큰 눈’이 청소당번인 날이었다.


―우리 엄마가 딴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랬지만, 응, 오빠한테 말해줄게.


―뭔데.


약간의 설레임과 기쁨, 그도 그럴 듯이, 그 자신도 묘영이에게 약간 마음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큰 눈’에 대

한 감정보다는.


―오빠네 동생 있지. 업둥이래, 업둥이.


―업둥이? 그게 뭔데?


―엄마도 더 이상은 안 가르쳐 줬어. 오빠, 비밀 지켜.


―알았어.


업둥이라.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눈’에게 안 좋은 말이니까 어른들이 말하지 말라고 한 거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자, 무언가 큰 비밀을 혼자만 안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 날 저녁, 방문을 열고 나오는 ‘큰 눈’을 본 그는 대뜸 소리쳤다.


―야, 업둥아.


―…?


‘큰 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효과가 없자, 그도 역시 실망하여 자신

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빠, 업둥이가 뭐에요?


저녁을 먹을 때, ‘큰 눈’은 불쑥 그렇게 말했다. 마구 밥을 먹던 그도 마침 궁금했던 터라 귀를 기울였다.


―…!


한동안 아버지, 어머니의 말이 없었다. 끊임없이 달가닥거리던 수저와 식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멈추자,

돌연한 침묵에 그의 목이 막혀왔다.


―누가 그러니?


―오빠가요.


그는 뭔가 엄청난 잘못을 한 것 같아 얼굴이 홧홧해졌다. 고개를 들면 아버지의 무서운 얼굴이 보일까봐 숙

이고, 숟가락만 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건 아주 나쁜 말이에요. 유신아, 어디 가서 함부로 동생한테 그런 말 쓰면 안된다. 알았지? 한번만 더 하

면 혼을 내 줄테다. 유희도 신경쓰지 마.


아버지는 ‘아주’에 강조를 두고 말했다. 그는 맞지 않았다는 안도감에-그의 아버지는 퍽이나 점잖은 사람이

었고, 교양도 있는 사람이었으나 아들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 말이 주먹보다 속도가 느린 적이 없었다.-.

얼결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날 밤, 자다가 목이 타서 깨어난 그는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가던 중, ‘큰 눈’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빼꼼이 열려 있는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줄기. 여름이라 문이 열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

나, 불이 켜져 있는 것이 궁금하여(아니, 수상하여)살짝 엿보았다.


‘큰 눈’은 책을 읽을 때처럼, 창가에 기대어 있었다. 머리를 창문으로 향하고―창문은 열지 않은 채였다-앉

아 있었는데, 그 무릎위에는 제법 두툼한, 사전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 어깨가 주기적으로 가늘게 상하

로 움직였다. 무신경한 그도, 창 유리에 희미하게 비치는 붉게 부은 큰 눈의 언저리를 보았다면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 터이나 불행히도 그는 어렸다. 다만 밤 늦게까지 어려운 책을 읽는 독한 애라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을 뿐이었다.





키가 자라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온 몸을 훑는 나이가 되었다. 그는 명문 중학교를 거

쳐,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머리가 좋았고, 잘 생겼으며 체격이 좋아 교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이제 확실히 이성을 구별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에티켓도 아는 나이라, 그는 이제 ‘큰 눈’의 방을 기웃거린

다든지 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어릴 때와는 달리, 말도 몇 마디, 제법 나누고-물론 그래봐야, 아주 일상

적인 대화, 예를 들자면, 밥은 먹었냐, 오늘 어머니 어디 가셨냐, 친구 전화 왔다 정도였고, 대부분 그녀를

부르는 말이 생략된 문장을 썼다.- 지냈다. 그리고 그는  ‘큰 눈’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만두고 ‘유희’라고 부

르고 있었다.  오빠라는 사회적 역할의 감상에 젖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가끔씩 그의 집에 찾아오는 그의

친구들이 유희를 보고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기에 가르쳐 주느라고, 자연히 입에 붙어버렸던 것이다.

칠칠치 못하게 ‘큰 눈’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으니까.


친구들은 전부 유희가 귀엽다고 했다. 예쁘다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섬뜩하다거나 기분나쁘다고 말하

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눈이 꼭 귀신같지 않냐?


―뭐라고? 저런 귀신 있으면 잡혀가고 싶겠다. 임마.


―그럼, 꼭 사차원으로 빠지는 이공간의 틈 같지 않냐?(사차원이 뭔지 알 리가 없지만.)


―저런 틈이 있다면 몇백번이라도 빠져주지.


이런 식으로 물으면 친구들 열에 열은 면박을 주었다.


―너희는 참 축복받았다. 남매 둘이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좋으니.


사실이었다. 유희 역시 공부를 잘 했다.(인물이 좋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재고해 볼 일이었으나)교내 어

디에서는 남매 둘을 나란히 킹카로 찍어 소위 대면식이라는 행사때마다 체크 대상이 되곤 했다. 얼굴은 몰

라도, 책을 그렇게 지독히도 봤으니 공부를 잘 할 수 밖에. 라고 그는 생각했다. 안경을 안 낀 것이 신기할

정도다. 라고.


그는 이 시기에 또 한 명의 동생이었던 그 옆집 아이 묘영이를 소위 말하는 ‘여자친구’로 삼았다. 제일 예쁘

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그에게. 유희보다도 더 예쁘냐고 물었다. 그는 서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한 번은 친구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네 동생이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예쁘다더니, 실망했다. 야.


묘영이를 먼저 보내고 난 후 친구들끼리만 있을 때 그 중 한 명이 하는 말에 그는 어리둥절 했다. 녀석이

잘못 보았나 싶어 다른 친구에게도 감상(?)을 말하게 했으나 결국 처음 녀석과 같은 의견뿐이었다.


녀석들은 묘영이가 예쁘긴 해도 어딘가 경박해 보인다고 했다. 경박해? 그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자

신은 걔와 어릴때부터 지내왔으며,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안다고 하면서.


―첫 인상이 그렇다는 거지. 예를 들어, 네 동생은 첫 인상부터가 아주 좋았다고.


어딜 봐서 그런 느낌이 든다는 거지.


―눈이랄까.


이번에도 눈인가. 크기만 하면, 아니 귀신같으면, 아니 이공간의 틈새같은 공허한 눈을 하면 전부 좋은 인

상을 받는가 보지?


―너는 동생을 되게 싫어하는구나. 콤플렉스라도 있냐?


당치도 않다. 싫다는 느낌은 가진 적이 없다. 관심이 없을 뿐이지.


―그렇게 예쁜 동생에게, 왜 관심이 없지?


아니, 그건…


―아니, 예쁘건 예쁘지 않건 간에 어째서 가족 중 한 사람, 그것도 가장 가까운 동생에게 관심이 없을 수가

있냐?


그것은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평소의 무신경한 그답지 않게 무려 1시간 동안이


나, 그에게 있어서 1시간동안 생각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 일을 곱씹었다.


난해한 사고의 끝에, 그는 동생에 대한 무관심한 감정이 ‘남녀 칠세 부동석의 원리’에 입각한 대화의 기회


단절로 인한 이해 부족이라 억지로 결론지었다.




그 무관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가끔씩 그는 유희를 데리고 외출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단 둘이서만

이 아니고, 묘영이도 함께였지만. 묘영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서 그런지, 대 놓고 유희를 따돌리

지는 않았으나 유희에게 타박을 많이 주었다. 그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유희가

한심해 보였을 뿐 가엾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무덤덤

함,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일 뿐이었다.


언젠가 셋이 나갔을 때, 그는 잠깐 아이스크림을 사러 둘을 벤치에 앉혀놓고 나간 적이 있었다.


―너, 앞으로 나오지마. 어째 그리 눈치가 없니?! 너도 어차피 재미없잖아? 나랑 오빠 방해하지 마라구.


―…응.


아이스크림을 들고 벤치의 뒤로 하여 다가오던 그는 무감각하게 대답하는 유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그리고 그 뒤부터 유희를 동행시키는 일은 없었다. 물론 그 쪽에서도 권하지 않았다. 모처럼 생각해서

데려와줬지만, 본인이 전혀 고마워하는 기색도 없는 데 대한 앙갚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오지 마

란 말에 한 마디 대거리도 없이 ‘응’이라고 대답했으니.


하지만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을 영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단어를 찾아낸 것은 그가 한참 바쁠때인 고교생활의 마지막 해의 초여름이었다. 그의 학교에서

문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내준 수행평가, 그는 그것을 하느라 책상에 앉아 있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맞춤법 문제를 묻는 거냐… 별 의도도 없는 없는 말을 뇌까리며, 그는 답을 써

나갔다. 강낭콩, 남비… 이건 틀렸군. 귀염동이…? 뭐야, 귀염둥이 아닌가? 다음… 업둥이?


답을 써내려가던 그의 볼펜이 멈추었다. 그는 잠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업둥이, 업둥이, 업둥이…


기억이 날 듯 하면서도, 그 꼬리를 잡으려 하면 저만치 사라져 버린다.

업둥이… 업둥이…


그는 어느덧 중얼거리고 있었다.


업둥이… 큰 눈… 유… 유희…


그래, 어릴 적… 아버지가 ‘나쁜 말’이라고 하셔서 그날 잊어버렸던…


이제 이만큼 머리도 크고 했으니, 무슨 뜻인지 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책꽂이에서 국어사전을 찾

았으나 외국어사전만 그득할 뿐, 없었다. 자신의 애국지수에 회의를 품으며, 혀를 차던 그는 문득 동생을

떠올렸다.


―유희라면…


원체 외출을 안하는 애니까, 방에 있을테지. 사실 그는 가족에게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니었기에―그래서

모두들 그를 무신경하다고 하지만―유희의 존재에 대해서도 늘상 잊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 터였다.


유희 방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던 그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거둬들였다.


내가 이 방에 언제부터 노크를 했던가?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들어간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다. 다만, 가끔씩이라도 들어갔던 시절에는 항상 문이 빼꼼이 열려 있었다.


어쨌든 남의 방에 들어갈 때는 노크를 하는 거야.


그는 기본 에티켓임을 상기하며, 다시 주먹을 쥐어 가볍게 두드렸다. 곧이어, 착착착, 하는 맨발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그는 키가 컸다. 내려다보는 눈과, 올려다보는 큰 눈. 그는 눈이 마주치자 마자 시선을 돌렸으나, 순간 ‘핫’

하는 희미한 신음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갑자기 그는 말문이 막혔다. ‘국어사전을 찾으러 왔다’고 말하면 될 것이었으나, 왠지 초면의 사람에게 말

을 붙이는 기분이 되어, 말이 헛나왔다.


―그…


더듬을 필요가 없는데.


―…들어와.


유희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처음으로 유희에게 감사하며(적어도 그 순간만은)방 안으로 들어갔다.


향기…?


다시 문을 닫았을 때, 그의 코를 부드럽게 자극하는 향기가 있었다. 그도 무신경한 것은 정신상태였지, 육

체적 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홀로 낯선 곳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처럼,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책

상, 책꽂이, 서가…(그는 서가에 가득 꽂혀있는 책들을 보고 지독하군, 이라고 생각했다),침대, 스탠드.


그리고 옛날과 똑같이 변한 게 없는, 창문. 그 옆에는 조그만 의자.


―공부하고 있었냐?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던 그는, 책상을 보며 말했다.


―…응.


―…앉아.


유희가 자신의 의자를 내주었다. 그는 얼결에 앉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자각하고 일어났다.


―너, 국어사전 가지고 있지. 좀 줘.


유희는 일어서서 서가로 가더니 조금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유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 작다고 느

꼈다. 어깨는 좁고, 허리는 모래시계 가운데 부분같다.


서가를 더듬던 손이 멈추고, 우희는 두툼한 책을 꺼내 왔다.


어디서 본 디자인인데.


그는 순간 생각했지만, 아무려면 어떠냐 싶어 곧 잊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후루룩 넘기며 그 단어를 찾기

시작했다. 유희는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ㅇ…업…


없다? 그는 페이지 수를 확인해 보고는, 고개를 들어 유희를 보았다. 유희가 움찔 하며 뒤로 물러섰다.


―찢겨 있는데.


―…그…래?


그것도 ‘업동이’가 있어야 할 부분만 없다는 건. 유희가…? 그렇다고 본인한테, 아주 모욕적일지도 모를 그

런 말을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어렸을 적 일이니까, 기억을 못 할수도… 그렇지만… 그는 사

전을 들고 망설였다.


―…됐어.


그는 어른스러운 행동이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일어섰다. 나가면서 다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어쨌든 그

에게 있어서 몇 년만의 방문이었으니) 방안의 향기가 좋다고 다시금 느꼈다.


―이 방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데… 향수냐?


그는 ‘향기’라고 말하려다 어쩐지 쑥스러워 ‘냄새’로 고쳤다. 대뜸 묻는 그를, 큰 눈이 더욱 커져서 본다.


―그런 거, 없어.


―…? 그러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갔다. 유희는 새신랑을 전송하는 새댁같이, 그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업둥이가, 뭡니까?

다음 날, 그는 자신의 담임이자 언어학 박사인 선생에게 물었다. 노트북으로 통신바둑을 두고 있던 그는

이상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냐? 뭔진 모르겠지만.

―알고 싶어서요.

―‘업’과 함께 들어온 아기를 말하지.

―좀 더 현실적인 감각의 언어로 부탁합니다.

―남의 집 대문앞에 버려둔 아기를 말하는 거야. 뚱딴지 같이 갑자기 뭘 묻는가 했…

그는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놀라거나 황당한 감정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무엇인가

가 일순 해봉되는 듯한 기분,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유희에 대한 모든 행동을 정당할 수 있다는.

그래, 나와 닮은 것이 하나도 없던 그 눈! 어릴 때부터 나는 직감적으로 유희가 가족이 아니란 걸 느꼈던

거야. 그래서 일종의 위화감을 가지고 대했던 거지.

유희가 정말 업둥이인지, 그것의 진위는 부모님께 여쭤야 할 것이었으나 그는 그 때의 모든 기억을 동원하

여 그것이 사실이라 믿으려 애썼다. 모처럼 얻은 이 해방감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유희

에게 오빠로서 잘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업둥이로서 들어온 유희에 대한 예의일테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족’ 보다는 차라리 ‘남’인 관계가 편했던 것이다.

유희가 혈연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자, 유희의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었다. 눈을 볼 수 있었다. 정면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자, 그는 아주 예쁜 눈이라 생각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은 여전했지만, 진공청소

기에 흡입 당하는 듯한-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차원의 세계로 잡아끄는 듯한 - 전의 느낌과는 확실히 달

랐다. 유희가 자신을 보면, 그도 유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제는 시선관계가 반대로 되었다. 유희와 눈

이 마주치면, 이번엔 유희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자신의 돌변한 태도에 대해 수줍어한다고 생각했다.





전에 없이 저녁놀이, 새빨간 하늘의 물이 구름의 조각배를 밀어올리는 듯한 날, 그는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유희를 보았다. 약간씩 살랑거리는 바람이 애무하는 듯이 유희의 머리카락을 끼고 감돌았다. 그리고,

눈. 윤기나는 까만 눈동자에 희미하게 물든 발그스름한 노을빛.  흑진주에 홍옥을 덧입힌걸까.


그는 문득, 유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대입시험을 만족할만하게 친 그는 신경쓰는 것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이유도 없이 잠에서 깨어난 그는 부엌으로 물을 마시러 가던 도중, 유희의 방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보았

다. 빼꼼이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란 듯이 빛의 혀가 날름대었다. 그는 왠지 전에 겪은 듯한 느낌을 받으

며,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창가에 기댄 유희가 종이 쪽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들어와.


기척을 느꼈는지 유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는 미안함에 약간 망설이다 들어갔다. 침대 위에 걸터

앉은 그에게, 유희는 종이쪽을 내밀었다.


언더라인이 몇번씩이나 되어 너덜해진 ‘업둥이’라는 글자.


사전의 찢어진 페이지다…


―오빠, 알고 있었지.


그는 당황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빠가 날 그렇게 부른 날 찾아낸 거야.


그는 순간적으로 기억이 났다. 그날 밤도 부엌으로 가던 중, 무언가를 읽던 유희를 보았었다. 그래, 사전이

었구나.


―갑자기 오빠 태도가 바뀐 게 이상했는데, 이것 때문이지?


정확히 찔렀군. 그는 땀이 났다. 하지만, 정작 충격을 받아야 할 본인이 옛날에 알아버린 지금, 자신이 그

것을 안다고 크게 문제될 것이 있을까?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오빠는 영원이 있다고 생각해?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유희가 결심한 듯이 물었다. 뜬금없는 소리에 그는 당황했다.. 유희는 일어서서 전등

스위치를 껐다. 순식간에 방은 빛 하나 들지 않는 밤이 되었다.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것은 달빛인가. 하

지만 유희가 커튼을 쳐 버리자, 그 빛마저 사라졌다.


그야말로, 암흑.


자신의 어깨 옆에, 유희의 몸이 닿는 것 같다. 감촉만이 유희의 존재를 시사해줄 뿐, 유희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바짝 붙어있단 말이군.


―그날 이후로, 오빠가 나를 미워하면 어쩌나 싶었어. 다행히도 오빤 업둥이가 뭔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언

제 그 뜻을 알게 될까 두려움에 잡혀 살았어. 이 쪽도 그날 찢은 거야.


팔락, 하고 종이 소리가 났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오빠는 언제나 눈부시게 비쳐졌어. 멋지고, 대범하고… 오빠가 날 싫어해

도, 동생으로 있을 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했어. 그걸로 나의 행복은 그만이라 생각했지. 건방지게 날 동생

으로 아껴줘, 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런데…


울먹이는 것 같다.


―그게 아닌 거였어. 난 오빠를… 처음부터 좋아했던 거야. 그래서 날 봐주지도 않는 오빠를, 나만이라도

바라보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난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이렇게 업둥이란 말을 수없이 형광펜으로 그었

어. 난 업둥이야, 업둥이야, 업둥이야. 라고. 가족으로 인정해 준다는 것만이라도 고맙게 생각하라고. 하지

만… 오빠의 태도가 변하면서 항상 눈길을 피하던 오빠가 날 바라봐 주니까, 가슴이 두근거려서… 기쁜데

도…


그는 말문이 막혔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만, 이 영원속이라면 오빠를 좋아하는 게 용서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는 막힌 목을 가까스로 틔우며, 영원? 하고 되물었다.


―응, 영원이야.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걸 영원이라고 그러잖아? 여길 봐. 빛이 없으니 무엇이 가고, 오는

지 몰라. 오빠 눈 앞에 내가 있지만 보이지 않지. 물론 나 자신도 보이지 않아. 의식은 있어도, 차츰 자신을

잊을 수 있어…


어릴때부터 책을 봐서 그런가, 상당히 문학적인 말을 하는데.


유희가 손을 더듬어 그의 얼굴을 만졌다.


―오빠도, 지금은 내 오빠란 걸, 가족이란 걸 잊을 수 있어…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

이란 걸 말야.


그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유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 미안해 오빠. 싫어하진 말아줘. 이런 게 싫으면…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는 손을 돌려 유희를 끌어안았다.


―바보, 동생을 이렇게 안아주는 오빠는 없어… 지금은,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여자’야. 지금, 여기서

는.


어릴 적부터 유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 그것은 남에게 유희의 장점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이 유희를 빼앗아 갈 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소유욕은 아이러니하게도 무관심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그 스스로가 유희의 장점을 부정해야 했의니까.


드디어 알았군, 그는 피식 웃었다.



묘영이에 대한 감정이 시들해진 것은 그 즈음이었다.

오랜만에 단 둘이서 외출했을 때, 묘영이의 말투가 유희와는 아주 다르다고 새삼스레 느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지적’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유희와는 달리, 저속한 유행어를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

가 화장을 한 듯한 얼굴에 뭔지 모를 위화감도 느꼈다. 계속 몸을 밀착시키는 듯한 행동도 싫었다.

보이지 않아도 유희는 느껴졌는데. 얘는 눈 앞에 있어도 전혀 ‘느낄’수가 없어.


그렇게 데이트인지 모를 것을 치루고 난 뒤, 묘영이의 집 까지 바래다 줬을 때, 돌아가려는 그에게 묘영이

가 키스를 시도했다. 입술이 서로 맞부딪히려는 순간,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 젖혔다. 당황하는 묘영이의

얼굴이 보이자 그는 첫 키스란건 좀 더 로맨틱한 곳에서 해야 한다며 얼버무렸다.





―오늘은 달이 떠서 밝은데.


커튼을 치기 전 유희가 중얼거렸다. 그는 일어서서 커튼을 치려는 유희의 손을 잡았다. 빨개지는 유희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영원’ 속에서도 이렇겠지. 그는 귀엽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는 아까의 일을 떠올

렸다. 달빛, 희미한 실루엣. 로맨틱한 곳은 이런 곳이다.


아직 커텐 안 쳤는데, 하고 우물거리는 유희에게 그는, 어두우면 어디다가 입을 맞춰야 할 지 모르잖아? 하

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빛이 신경쓰이면, 눈을 감으면 되잖아?


―그 그래도…


‘빛’이 있어서 ‘동생’과 ‘연인’을 갈등하는 건가. 그는 기어들어오는 달빛 앞에서 약간 떨고 있는 유희를 안

았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감은 눈 위로. 그도 유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아까 순간적

으로 닿은 붉은 덩어리보다는 이 파들거리는 따뜻한 구슬의 느낌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가 입술을 뗌과 동시에 유희가 눈을 떴다.


―고마워, 오빠…


영원에서의 두 사람은 어둠속에서 자신의 오감을 다하여 서로를 애무했다. 그렇지만 충동에 사로잡혀 거

친 손으로 유희를 다룬 적은 없었다. 그런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불을 끄기 전 보는 흑진주의 빛이 그

를 정화시켰다.



영원히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깨어지는 것은 일순이었다.

갑자기 좋아진 사이가 이상하게 비친 것일까, 비가 쏟아지고 불그스름한 하늘이 음침하게 펼쳐졌던 날 붉

은 빛이 감도는 어두침침한 방에서, 단지 둘은 손만 잡고 있었을 뿐인데.

―…너희들, 뭐하는 거니?

친남매라도 그런 상황이었으면 충분히 의심받았을 터인데, 하물며…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한 적이 없습니다.

―불도 켜지 않고 손까지 잡고 있었잖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유희는 서울의 친척에게 보내졌다. 말이 친척이지 왕래가 거의 없는 집안이기도 했

다.

유희와의 영원은 그날로 영원히 끝나버렸다.

영원따위, 없었던거다. 아니 있을 수가 없었다. 유한 속의 무한은 유한의 선을 넘을 수 없다. 그런 것이다.

몰랐던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편지가 왔다. 그의 학교로. 용케 머리를 썼구나. 그는 반가워하며 보았다.

오빠, 돌아가고 싶어.

그는 답장을 보냈다. 그것에 대한 답신은 오지 않았다. 걸린 모양이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희가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한다는 말이 나왔다. 결혼시켜야 내가 손을 못 댄다는 건

가. 그는 씁쓸히 웃었다. 물론 그는 결혼식장에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삼일 뒤, 그는 유희가 실종되었다는 바다의 해안에 서 있었다.

-아니, 이럴수가 있습니까. 첫날밤도 보내기 전에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길래 같이 나갔더니만, 글

쎄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이리 뛰고 저리 가고 하더니 한순간에 어디론가 없어져 버렸다는 겁니다 글쎄.

유희의 신랑(이었던)인 사람이 게거품을 물며 한 말이었다.  

그런 건 소박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 해야 하나.

부모님은- 특히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렸다. 아버지 역서 입술을 떨면서 말을 하지

못하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처음부터 애정이 없었다면 20년이 넘도록, 그것도 철저히 숨겨가면서

까지 키워왔을 리가 없었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구조 수색에 관련된 기관엔 발 닿는 대로, 아니 전화 닿는

대로 손을 쓰는 등, 집안은 완전 초상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그는 웃음이 나왔다.

하늘엔 달이 떠 있었을 터이나, 뭔지 모를 두터운 구름층에 가려져 버린 지 오래였다. 바람은 잔잔했고, 파

도 소리는 너무나 규칙적이라 계속 듣고 있자면 마치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이 느껴졌다. 검게 유동

하는 바다를 보며, 그는 문득 그것이 유희의 눈동자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고 싶어.’


영원으로 말이지. 영원으로.


그는 바다에 발을 담궜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무릎까지 차였다.


―아직이다.


그는 더욱 들어갔다. 수면 아래, 사방, 어느 곳이나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는 영원의 대해 속에 떠 있었다. 이곳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손을 뻗어도, 잡히는 것은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다. 빛도 없다. 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을, 존재를 잊

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문득, 유희는 실종된 것이 아니라 영원의 속으로 돌아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소원대로.


―이곳에 있구나.


그는 중얼거렸다. 보이진 않았지만, 필시 어둠의 어딘가 유희가 있다. 약간 떨어져 있을 뿐.


‘오빠 눈 앞에 내가 있지만 보이지 않지.’  유희의 그 말을 상기했음이리라.


그는 유희의 눈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유희의 눈이, 나를 빨아들이는구나. 그는 몸에 힘을 빼었다.


‘이 영원속이라면 우리의 ’역할‘에 갈등할 필요가 없잖아?’


유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영원이라면.



영원이다. 이대로 영원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 때의 둘만의 영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