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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연애 A Tale That Wasn't Right

2007.11.09 10:34

LiTaNia 조회 수:1087 추천:4

extra_vars1 10-C. 초대받은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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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가.. 오늘 끝나고 호진이가 자기 집에 같이 가는게 어떨까 하고 말했었어."


잠깐. 수영이네 집에?


수영이가 나를 집으로 부르다니, 무슨 일일까.


"내가.. 수영이네 집에?"
"응. 나도 놀랐어. 수영이가 남자애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적이 없었는데."


그만큼 수영이한테 내가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일까. 수영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긴 한데. 웬지 많이 기대된다.


"알려줘서 고마워, 효선아."
"수영이랑 잘 되고 있는 것 같으니 나도 기분이 좋아. 수영이가 친구가 별로 없어서 안타까웠거든."


효선이는 자리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업종이 울리고 희연이가 잠에서 깼다.


"호진아. 방금 무슨 얘기 한거야? 뭔가 여자애랑 얘기했었던게 들린것 같은데."


역시 희연이는 눈치가 빠르다. 잘못 얘기했다가는 정말 큰일날것같다. 에이, 별 수 있나. 그냥 둘러대야지.


"아.. 그냥 시험공부 얘기 한거야."
"정말 불안해. 나.. 이대로라면 호진이 뺏겨버릴것 같아. 나, 누구한테도 호진이를 뺏길 수 없어. 내가 호진이를 지켜줄테니까."


하지만 나는 희연이한테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단말야. 희연이, 무서워.


뭐 점심시간에 희연이랑 같이 옥상을 향하는것도 어느샌가 일상이 되어 있다고나 할까. 옥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못본것도 다행이고. 어제 수영이랑 우연히 마주친것을 제외하면 말이지.


"희연아. 오늘도 도시락 갖고온거야?"
"응. 내가 전학오기 전보다 일찍 일어나고 있는게, 호진이한테 내 도시락을 먹여주고 싶어서."


어이. 희연양. 그래서 더 부담된다구.


"희연아. 미안한데.."
"왜, 호진아?"
"나.. 다음주부터는 그냥 식당에서 먹으면 안될까. 웬지 눈치보여."
"호진아. 내가 싫은거야?"


아니, 그렇게 물으면 또 어쩌란 말입니까.


"아니.. 싫은건 아니지만."
"내가 호진이 좋아하는게, 그렇게 눈치보여?"
"조금.. 다른 애들의 시선이 부담된다고 해야할까."
"할 수 없지.. 호진이가 싫다면.. 나도 호진이를 위해서였는데."


뭐 그런 이유로 다음주부터는 다시 식당으로 고고 인생 복귀인건가.


"하지만.. 요새 호진이가 다른 여자애들하고도 친한것 같아서.. 그게 싫어. 그 수영이라는 애라던가 말야.. 호진이는 내껀데."


하지만 나는 오히려 수환이가 희연이를 가져가줬으면 하는 생각인데. 도대체 희연이같은 애가 왜 우리학교로 전학온 것일까.


그런데 도대체 점심방송에 라르크엔시엘의 Driver's High 같은거 트는 사람 누구냐. 현석이놈은 점심방송은 별로 관심없는것 같고. 이런 일본노래를 틀 만한 사람이 우리학교에 있었던가. 아니면, 민애선배의 개인적인 취향이었던 건가.


뭐, 오늘도 교실행. 교실로 내려가는 도중, 수환이녀석을 만났다.


"희연아. 기억해둬. 나는. 지금 너 옆에 있는 놈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희연이를 나한테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꺼야!"
"글쎄."


이상하게 수환이녀석한테는 말이 짧은 희연이였다.


"호진아. 저런거 신경쓰지마.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하잖아."


어이. 신경이 안 쓰일수가 있냐구. 왜 다들 내 의견은 전혀 묻지도 않고 이러는거야. 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구.


남은 수업도 다 끝나고 종례를 하기 직전, 현석이가 내 자리에 다가와서 말했다.


"호진아. 요새 여자애들이랑 잘 되나봐. 나도 그렇게 여자애들이랑 친하고 싶다."
"이봐이봐, 너는 2차원의 세계에서만 벗어나고 자기관리 한 뒤에 좀 말해라."
"나 요새 2차원만 하는게 아니라 3차원도 한다구. '학교친구'라는 게임인데. 요새 3차원이 이렇게 발전한 줄은 몰랐다."
"...그런게임이 3차원으로도 나왔냐."
"요새 미연시의 발전, 무시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현석이 너는 미연시라는 것에 좀 손을 떼란 말이지."


그리고 현석이가 자기자리로 돌아간 뒤에, 희연이는 물어봤다.


"호진아, 2차원의 세계랑 3차원의 세계라는게 뭐야?"
"아.. 옛날에 게임들이 그냥 2차원 평면으로만 나왔잖아."
"응. 그랬었어."
"그런데 요새 게임들 해보면 입체적으로 막 나와. 시점도 막 돌아가고. 그래서 그거를 3차원이라고 하는거야."
"아하. 그렇구나, 호진아. 그런데 미연시라는건, 또 뭐야?"
"아.. 미연시는."


당연히 희연이한테 미연시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말하면 안되겠지. 대충 둘러대자.


"'미사일 연사 시스템'이라고, 게임 중에서, 미사일을 발사해서 외계에서 침공하는 적들을 없애는 그런 게임이야."
"와. 재미있을것 같아. 나도 그 미연시라는거 해보고싶어."


...이봐요. 희연양. 당신은 미연시라는게 뭔지 알면 안돼요.


"그런데.. 여자가 하기에는 좀 그래. 그 적들이 파편이 터지면서 눈으로는 보기 힘든 장면들이 나오고.."
"아.. 그런데 현석이 쟤는 왜 그런걸 좋아한대?"
"쟤가 원래 좀 특이한걸 많이 좋아해. 뭐 덕분에 쟤네 집에서 신기한 것들을 많이 봤지만."


사실 나도 미연시를 많이 해보진 않았지만 아주 약간 해보긴 했지. 물론. 내가 둘러댄 의미 말고, 원래 의미에서의 미연시를.


그런데. 이거 수습이 된거 맞을까. 아니면, 희연이도 미연시가 뭔지 알면서도 일부러 떠볼려고 이러는것일까.


어쨌든, 종례가 끝났다. 하지만 오늘은 희연이랑 같이 못간다고 말해야지.


"희연아. 나 오늘도 다른 약속 생겼는데."
"흐~음. 호진이. 요새 조금 수상해. 나를 피하는것 같아."


역시 희연이. 눈치가 대단하다.


"혹시.. 그 수영이라는 애랑 같이 가려고 하는거 아냐? 나 오늘 아침에 호진이가 날 빼놓고 그 애랑 같이 학교에 와서, 기분이 좀 안좋았어."
"아냐.. 다른 약속이야."
"누구랑 한 약속이야? 내가 알면 안되는거야?"
"그게.."


도대체 희연이한테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솔직히 수영이네 집에 수영이랑 같이 간다고 말하면 희연이가 정말 들고 일어나겠지. 그리고 나를 안 보내주려고 하겠지.


"호진이, 말을 못하는거 보니까, 역시 나 몰래 여자애랑 약속했구나? 나, 호진이를 다른 애한테 못 보내줘. 호진이가 다른 여자애랑 있는거, 싫어."


역시. 오늘 수영이랑 같이 가야 하는데 희연이 때문에 상황이 안 좋아졌다. 도대체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가야 할까.


그 때, 마침 수환이 녀석이 우리반 교실로 왔다. 이 녀석이 우리반에 와서 할 말은 뻔하지.


"희연아. 이번 시험에서 꼭 저 녀석을 이겨서, 널 차지하고 말거야. 저 녀석이 내 앞에서 무릎꿇는 모습, 보여주고 말꺼야!"
"나, 너가 이겨도, 너한테 안갈꺼야. 호진이가 내꺼지, 넌 아무것도 아냐."


희연이한테는 미안하지만, 희연이의 관심이 수환이 쪽으로 쏠려있는 틈을 타서 10반 교실로 가야지. 살다보니 수환이 녀석이 고맙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네.


10반 교실로 가 보니까, 수영이도 마침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앗, 수영아!"
"나.. 호진이랑 같이 가려고 호진이네 반으로 가고 있었는데.."
"효선이한테 얘기 들었어. 수영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도 솔직히 궁금했는데."
"알고 있었구나."


수영이는 살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영이가 웃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가 않은데, 정말 수영이한테 있어서 내가 특별했던 것이었을까.


수영이랑 같이 계단을 내려가면서, 또 다시 별로 보고싶지 않은 아름이랑 마주쳤다.


"어머, 호진이네. 수영이라는 애랑 사이가 좋나봐?"


어이, 그렇긴 하지만, 그 얘기를 너같은 애한테는 듣고 싶지 않다구.


"사이가 좋긴 한데.."
"하지만 둘이 그냥 평범하게 잘 되기만 하면 재미가 없어. 한 여자를 두고 남자들이 서로 다툰다던가, 그 남자를 좋아하는 다른 여자가 있다던가, 그리고 그 다투는 남자들이 BL에 눈을 뜨는.."
"어이, 이봐, 스톱."


도대체 이런 말들이 고1 여자애의 입에서 나올만한 얘기냐구요. 현석이 녀석은 덕후이긴 해도 나랑 오랫동안 같이 지내서 익숙하지만, 이 유아름이라는 애한테는 아무리 생각해도 호감이 안 생겨. 게다가 지금 나랑 수영이랑 같이 있는데, 수영이가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 또 기분이 어떻겠냐구.


"호진이는, 참 순진해. 장난치기 딱 좋아. 그럼 난 바쁘니까 이만."


이봐, 유아름양. 난 너 따위의 장난감이 아니라구. 수영이랑 아름이랑 둘 다 효선이랑 친한데, 그 둘이 왜 이렇게 극과 극인거냐. 효선이가 부디 저런 애한테는 물들지 않기를 바란다.


반대 방향으로 가버린 아름이를 보고 수영이가 말했다.


"저 애.. 웬지 기분 나빠."
"수영이도 쟤 알아?"
"응. 효선이랑 있을 때 가끔 봐."


역시 수영이가 보기에도 아름이라는 애, 도저히 호감이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효선이는 왜 저런 애랑 친한 것일까.


에이. 지금은 아름이같은 애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 수영이네 집에 가게 되는게 중요한데. 괜히 쓸데없는 데에 신경쓰지 말자.


교문을 수영이랑 단둘이 나와보기도 처음이다. 물론 여자애랑 같이 하교는 이미 희연이랑 많이 했지만 희연이랑 같이 갈 때의 느낌과 수영이랑 같이 갈 때의 느낌은 완전히 180도 다르다구.


수영이한테 뭔가 말을 걸어야 하는데, 딱히 수영이한테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 때, 수영이가 나한테 먼저 말을 걸어줬다.


"혹시, 괜찮다면 호진이 생일 물어봐도 될까."
"생일은.. 왜?"
"누군가가 태어난 날은, 그 사람한테는 소중하니까. 친해지게 되면 축하해주고 싶어서."


뭐 요새는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하도 생일빵만 때려대니 이게 축하하는건지 화풀이하는건지 모를 지경이지만, 내가 보기에 수영이는 그럴 애는 절대 아니다.


"11월 20일이야."
"정말이야?"


수영이한테 내 생일을 말하니까, 수영이가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응. 1991년 11월 20일 맞아."
"효선이도 그날이 생일인데."
"앗.. 진짜?"
"나도.. 생일이 같은 사람, 처음봤어."


뭐야. 나랑 효선이가 생일까지 같았단 말야? 덕후인 친구(각각 현석이랑 아름이)를 한 명씩 두고 있는것 말고도, 나랑 효선이가 닮은 점이 또 있었구나.


"그러면, 수영이는 생일이 언제야?"
"나.. 10월 4일이야."


10월 4일이라.. 월과 일 빼고 숫자로 적으면 1004가 되네. 천사라.. 수영이랑 어울리는것 같기도 한데, 살짝 애매하다.


이렇게 걷다 보니까, 수영이네 집이 있는 유일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쪽에 오면 뭔가 불안해. 희연이도 이 유일아파트에 살고 있지. 하지만 생각해보니 희연이가 만약 먼저 도착했다면 오다가 만났겠지. 안심하자.


수영이네 집에 수영이랑 함께 들어와 보니, 집 안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어디 가셨나봐?"
"응. 우리 부모님, 맞벌이 하셔."


하긴 요새 맞벌이를 하는 집이 많다고 들었다. 먼 데 갈 필요 없이 우리 집 부모님도 지금 엄마랑 아빠 두분 다 해외출장 가시지 않으셨던가. 이거는 엄마가 아빠따라 간 거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 수영이는 분명히 생과일주스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그런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면 굳이 수영이가 알바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는데.. 수영이도 알바해?"
"그냥.. 일이 하고싶어서."


수영이 얘. 확실히 나보다 뭔가 나은 애네.


"그런데, 다른 형제자매는 없어?"
"응.. 없어."


하긴 수영이한테 다른 형제자매가 있었다면 수영이가 이렇게 낯을 가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집 안 분위기는, 확실히 우리집하고는 뭔가 180도 달랐다. '여자애가 사는 집'이라는 건, 이런 느낌인걸까.


"여기가 내 방이야."


전학오기 전 나래네 놀러갔을 때 이후로 여자애의 방을 보는건 처음이네. 역시 내 방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수영이 얘. 나랑은 사는 세계가 완전히 다른 애야. 그런데 어쩌다가 나랑 이렇게 알게 되었을까.


그런데, 한 쪽에 수공예 악세사리 몇 개가 보이는데.. 귀걸이라던가. 목걸이라던가..


"혹시 이것들.. 그 때 자수정팔찌처럼, 이것들도 수영이가 만든거야?"
"응.. 맞아."


사실이라면 정말 무섭다. 누가 이런 수공예 악세사리들을 고1 여자애가 만들었다고 믿겠는가. 얘 커서 이런 쪽으로 나가도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을것같아.


방의 다른 한쪽 구석에는,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수영이.. 피아노도 치나봐?"
"응. 잘은 못 치지만.. 한번 들어볼래?"


수영이의 피아노 연주라.. 한번 들어봐야지.


겸손이라고 했지만, 이거 엄청 잘 치잖아. 이건 뭔가 희연이가 EZ2DJ에서 200억 하드를 깬 걸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놀라운데.


지금 수영이가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는 곡. 분명히 TV 같은데서 많이 들어본 잔잔한 피아노곡이다. 이게 아마 이루마의 'Kiss the rain'이었던가. 그 수공예품들을 보고 수영이가 손재주가 대단한 건 알겠지만, 이렇게 피아노까지 잘 치다니.


듣고 있으니 정말로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야.


수영이는 Kiss the rain 연주가 끝나고, 또 다른 곡을 연주했다. 이 곡도 분명 TV에서 많이 들어봤었지. 내 기억이 맞다면, 야니의 'Reflection of Passion'인 것 같은데.. 가만. 내가 이런 곡들을 어떻게 다 알고 있는거지.


그리고 연주는 끝났다. 듣고 있다보면 어느샌가 끝나있는 연주. 나는 수영이의 연주를 보고 조용히 박수를 쳤다. TV같은데서 공연을 보면 분명히 곡이 끝나고 박수를 치지. 하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혼자 박수를 치려니 뭔가 쑥스러운걸.


"호진아, 고마워."


사실 내가 아까 그 두 곡을 광고같은데서 많이 듣긴 했어도, 연주하는 것을 실제로 들어본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수영이가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런데.. 수영이한테 궁금한게 하나 더 있어. 그 혜림이라는 애.. 왜 그렇게 수영이를 괴롭히는거야?"


내가 말 하고 나자, 수영이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아보인다. 역시 혜림이 얘기는 해서는 안 될 얘기였던가.


"그게..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4월달부터 어느샌가.."


그리고 수영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버렸다.


"수영아.. 미안.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나봐."
"아냐.. 그냥 내가 나쁜애인걸."


수영이가 나쁜 애면, 도대체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얼마나 존재하는 것일까. 물론 나도 착한 사람 축에는 절대 들지 못하겠지.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수영이는 확실히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애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까. 그나마 효선이같은 애가 있다는게 수영이한테는 다행인 것일까.


내가 이렇게 멍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수영이는 방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호진아. 먹을거 가져올까?"


이렇게 있는 사이에 약간 배가 고파졌으니 안될 건 없지. 가만, 식사시간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마침 잘됐네. 뭔가 먹고 싶었는데."
"잠깐 기다려."


그리고 수영이가 쟁반에 들고 온 것은, 잼이 발라져 있는 식빵이었는데, 잼 색깔이 뭔가 못보던 색이었다.


"이거.. 뭔가 잼 색깔이 이상한데. 뭐야?"
"집에서 선물받은 복분자 가지고 직접 만들어본거야."


오호. 수제 잼이라. 아까 수공예 악세사리들도 그렇고, 피아노 연주도 그렇고, 이번엔 잼까지. 수영이 손재주 보통이 아닌데, 확실히 먹음직스러워보인다.


그런데 이 복분자라는거, 원래 '산딸기' 아니었나. 왜 다들 복분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복분자가 건강에 좋긴 하다는데, 여튼, 한입 먹어봐야지.


"..!"


잼이 혀에 닿는 순간, 내 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 맛.. 수영이한테는 미안하지만, 가히 최악이다. 마치 985 헥토파스칼 킥(주1)을 맞은듯한 느낌이랄까.


도대체 복분자로 만든 잼은 원래 이렇게 맛이 없는 것일까. 정말 복분자로 만든 게 맞는걸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호진아.. 미안. 나, 역시 이런건 잘 못해서.."
"아..냐. 괜..찮아."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영이라서 용서가 된다.


"잠깐만 기다려. 포도주스라도 따라올께."


수영이는 다시 방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간다. 그런데, 수영이가 냉장고 안에서 한참을 헤매는 듯 했다. 포도주스가 혹시 냉장고에 없는건 아니려나.


수영이가 헤매고 있는 사이에 문자가 왔지만,


'필요댸.츌.정보 무료샹☆댬해드립니다'


이봐. 이런 스팸 지겹단말이다. 게다가 '대출'과 '상담' 필터링을 안걸리려고 글자를 저런식으로 쓰네. 저런거 법에 안걸리려나.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찾았다."


한참 뒤에, 수영이는 포도주스를 결국 찾은 듯, 유리잔 두 잔에 포도주스를 따라서 가져왔다.


"늦어서 미안해, 호진아."
"와~ 잘 먹을께."


설마 포도주스까지 아까 복분자잼처럼 이상한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한 순간, 안타깝게도 내 예상은 맞아 떨어진 것 같았다. 이거, 포도주스라고 보기엔, 향도 뭔가 이상하고, 맛도 뭔가 이상해. 이거, 한 모금밖에 못 마시겠어.


혹시 이거, 포도주스가 아니라, 포도'주' 아냐? 만약 그렇다면, 초등학생 때 잔에 담긴 맥주를 보리음료 맥콜로 착각하고 잘못 먹었다가 아빠한테 혼난거 이후로 두번째 음주 경험인데.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수영이는, 유리잔에 담긴 포도'주'라고 생각되는 것 한 잔을 다 마신 것이었다. 이미 수영이의 눈은 풀려있고, 얼굴도 빨개졌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다.


"수영아, 괜찮아?"


수영이가 풀린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다. 수영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


"호진아.. 나, 기분이 이상해. 막 호진이를 유혹하고 싶어.."


역시 지금 이 상황, 한마디밖에 안나온다.


수영이 얘.


'취했어'.


"수영아, 갑자기 왜 그래.."
"몰라아, 호진아.. 나.. 호진이를.. 꼬옥 껴안고.. 그러면.. 기분이 좋아질것 같아."


정말 내 앞에 있는 애. 내가 알고 있는 수영이가 맞는 것일까. 평소의 수영이랑 애가 완전히 180도 달라졌어. 역시 술에 취하면 사람이 바뀌어버리는 것일까.


이거, 뭔가 난처해지는데. 게다가, 지금 수영이의 모습을 보면, 정말 뭔가 '녹아버릴' 것 같아.


"나.. 정말 호진이만한 남자애.. 못봤어. 호진이가 안오면.. 그냥 내가 호진이 안아줄께."


뭐야. 안아준다니.. 이건 위험하기가 희연이랑 나래 이상이잖아. 수영이가 이런 애일 줄이야. 만약 희연이나 나래가 옆에 있었다면 나는 그날로 제삿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수영이네 집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어쩔 수 없이 수영이한테 안기긴 했는데.. 나. 정말 이런 느낌 살아생전 처음이야.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 수영이한테 말 그대로 '파묻히는' 느낌이랄까.


"호진이도.. 기분 좋지?"
"응.."


솔직히 기분은 좋으니까.


"나.. 호진이랑, 키스같은것도 막 하고 싶은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냥 호진이가 좋아.."


이봐요. 구수영양. 아무리 취했다고 하더라도, 키스까지 시도하는건 좀 아니지 않나요.. 도대체 '술'이라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수영이한테 꼬옥 안겨있는 상황. 빠져나갈 수가 없다. 특히 수영이가 고1 여자애 치고는 키가 좀 크고, 가슴도 큰 편이라 더더욱 파묻혀버린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수영이의 키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윽. 뭔가 술냄새가 팍 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 뒤에 느껴지는건 정말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한 '달콤함'이랄까.


올해 발렌타인 데이 때 현석이 녀석한테 카카오 99% 초콜릿으로 낚인 적이 있어서 '달콤함'이라는 것에 목말랐을지도 모르겠지만, 나 이호진, 17년 인생 처음으로 키스라는걸 해보는데, 그 느낌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 내 입 안으로 뭔가 들어오는 것 같기도 한데.. 나도 한번 따라서 해 볼까.


수영이도 이게 첫키스였던 것일까. 궁금하네.


이렇게 수영이한테 파묻혀있는 사이에,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이 아닌 집 전화벨소리.


수영이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듯.


"앗.. 내가 뭐 하고 있던거지?"


나를 안고 있던 것을 그만두고, 전화기 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네. 지금 오신다구요? 네.. 조심해서 오세요.."


전화를 끊고, 수영이는 아까 전의 그 모습은 사라진 채 다시 원래의 수영이로 돌아갔다. 물론 얼굴은 여전히 빨개져 있었지만.


"호진아, 미안해.. 나 호진이 앞에서.. 뭔가 큰 실수한것 같은데."


실수라면 실수였다랄까. 수영이의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고 말았으니.


"아냐.. 괜찮아."
"지금 아빠 퇴근하신다고 전화가 와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고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남의 집에 오래 있으면 실례지.


"호진아, 정말 미안해.."


수영이는 내가 문으로 가면서 계속 사과하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사과할 필요 없다니까.


"아냐, 수영아. 그럼.. 내일은 놀토니까, 다음주에 봐."
"맞다, 호진아. 혹시 이번 일요일날 시간 있어?"


뭐 이번 일요일이야 딱히 할 것이 없지만.


"시간은 있는데.."
"효선이가 나랑 호진이랑 보라고 영화표 두 장 줬는데."


오호. 정말 여러가지로 효선이가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내가 그나마 수영이한테 다가가게 된 것은, 어쩌면 효선이가 아니면 불가능했는지도 모르겠지.


"무슨 영화야?"
"'시간을 뛰어간 소녀'라고.. 극장용 만화라는데. 사람들이 다 재미있게 봤대."


'시간을 뛰어간 소녀'. 나도 제목은 얼핏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17살이나 먹고 극장에서 만화를 보는건 좀 아니지 않을까나.


뭐, 그래도 수영이랑 같이라면, 어떤거든 괜찮다.


"그럼, 일요일날 봐."
"호진아, 아까전에 정말 미안해.."


수영이는 내가 문을 나가는 순간까지 계속 사과하고 있었다.


오늘의 교훈.


술을 마시면 사람이 180도 바뀌어버린다.


수영이는 아마 나중에 커서도 술같은건 마시면 안 될것 같아.


유일아파트를 나서려고 보니까, 누군가가 내 앞길을 막고 있었다. 이 여자애도 분명히 어디선가 많이 봤어. 아마, 희연이 동생이었던가.


"호진오빠, 맞죠?"
"맞는데.. 내 이름은 어떻게?"
"언니한테서 자주 들어요."
"언니라면.. 혹시 희연이?"
"네, 맞아요. 저는 '희정'이구요."


희연이 동생 희정이라. 뭔가 역시 자매다운 이름이네.


"호진오빠 때문에, 오늘 언니가 하루종일 학교에서 헤맨 거 아세요?"


뭐야. 그랬었나. 수환이랑 말하고 있는 틈에 살짝 빠져나왔더니, 그 뒤로 그렇게 되었나.


"그리고 호진오빠를 못 찾고, 오늘 하루종일 언니가 울었던거 아세요?"


..그 정도였단 말인가. 이건 내 쪽 문제가 아닌것같은데.. 감이 안 잡히네.


"저.. 언니가 호진오빠랑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아도, 오늘 하루종일 언니 달래느라 힘들었어요. 언니도.. 마음이 많이 여려요. 언니한테 상처 주지 마세요."


희정이는, 말을 마친 뒤 아파트 쪽으로 가버렸다. 내 행동이 그렇게 희연이한테 상처를 많이 줄만한 것이었나. 분명히 처음부터 나보고 맘대로 자기꺼니 뭐니 하는 희연이 쪽이 문제였던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곰곰히 생각해봤다. 정말. '이성간의 우정'이라는 것은, 불가능한것일까. 왜 '우리, 친구로만 지내자'라는 말은 다들 싫어하는 것일까.


정말. 모두와 그냥 친하게 지낼수는 없는것일까. 나는 정말 모르겠다. 내일은 놀토라서, 간만에 조금 휴식을 취할 수 있겠구나.


덕분에 수영이의 전혀 다른 모습도 오늘 보게 되었고. 그게 수영이의 속마음이었던걸까, 아니면 그냥 술에 취해서 평소와 전혀 다른 행동이 나왔던 것일까.


그런 묘한 기분 속에서, 오늘도 남은 하루를 보내야지. 내일이 놀토라고 해서 하루종일 놀면 좀 곤란하겠지. 시험기간이긴 하니.


...그런 이유로, 오늘도 잠자리에 들어야지. 요새도 모기가 자주 들어오니까, 홈매트는 꼭 피워야지. 요새 TV프로같은데서 모기향이 오히려 담배보다 사람 몸에 해롭다니 뭐니 하는 얘기가 들려오지만, 피우는 모기향이 아닌 전자모기향 홈매트같은건, 괜찮겠지?


아함. 간만에 뭔가 잠을 푹 잔것 같네. 가만. 지금 저기에 걸려 있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10시??!!!!!!!!!!!!!!!!


으악. 안돼. 지각이다. 나 지금까지 지각은 한번도 안했었는데. 희연이가 먼저 가버렸다면 이거 낭패인데. 일단 아침은 거르고 교복을 허겁지겁 입어야지.


그리고 나가려고 달력을 보니까..


맞다. 오늘 놀토였지. 학교 안가도 되는구나. 휘유. 십년 감수하는줄 알았다. 그냥 밥이나 먹어야지. 간만에 오락실이나 갈까.


오늘이 놀토라서 그런지, 아직 점심시간도 안되었는데 몇몇 학생들이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이. 너희들은 시험공부 안하냐.


펌프는 오늘도 펌프팀 'Only One'이 꽉 잡고 있어서 내가 할 엄두가 안나고. 뭐 펌프대회 국내예선을 준비한다나 어쨌다나. 다들 실력이 굉장하다. 도대체 저 어나더스텝은 뭐란 말이냐.


이제 동전을 교환하고 EZ2DJ에 돈을 넣으려고 하는데, 동전교환기를 오락실 주인아저씨가 고치고 있네. 하긴 여태 천원짜리 신권이 많이 풀렸는데도 이 오락실의 동전교환기는 아직 신권 교환은 안되었지.


"아저씨. 이제 신권 교환 되는거예요?"
"응. 이번에 동전교환기 바꿔서 신권이 된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리듬게임 하나를 새로 들여오기로 했거든."


오호. 새로운 리듬게임이라. 리듬게임 좋아하는 나로서는 뭔가 너무나 반가운데.


"무슨 게임인데요."
"아마 이 세가지 중 하나 들여올거야. 팝픈뮤직 피버하고, 드럼매니아 V3하고, 파라파라 파라다이스 2nd. 그 중 어떤거 들여오면 좋을까?"


팝픈뮤직 피버. 팝픈뮤직의 14번째 버전이지. 비시바시 챔프같은 동그란 버튼으로 하는 뭔가 귀여운 분위기가 가득한 게임이지. 인터넷에 나돌던 클래식연주 동영상도 나름대로 유명하고. 다만 이 팝픈뮤직도 어려운 곡들은 진짜 어렵다니까. 조이플라자 같은 곳 아니면 하기 힘들지.


드럼매니아 V3. 드럼을 치는 게임인데, 이 오락실에도 드럼매니아 10th는 있지. 그런데, V3에는 진짜 노래가 많다고 들었다. K, 리라이토, 사쿠란보, 카르마... 이렇게 어느정도 알려진 노래들도 있고 말이지. 역시 조이플라자 아니면 하기 힘들었고. 지금은 풀린 오락실이 약간 있긴 해도.


파라파라 파라다이스 2nd.. 말그대로 팔이 아픈 게임이지. 지금은 시리즈가 끊겼지만, 빠른 댄스곡에 맞춰서 '파라파라'라는 팔동작을 이용한 춤을 추는 게임인데, 노래마다 정해진 동작이 있지. 그래서 그 동작에 맞춰서 하는 사람들이 꽤 많고. 옛날에 조이플라자에 있었다 없어졌고.


셋 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게임인데. 마음같아서는 셋 다 이 오락실에 들어왔으면 좋겠지만. 셋 다 들여놓을 여유는 절대 없는것 같으니까. 결국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뭐 셋 중 하나라도 들어오면 정말 좋지.


어떤것이 들어오면 좋을까나. 물론 내가 한 결정으로 들어오게 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 다음회에 계속 -


주1. 985 헥토파스칼 킥 : 어떤 TV드라마에서 여자애가 날아차기를 한 상황에 밑에 '태풍 민들레 중심기압이 985 헥토파스칼'이라는 기상특보 자막이 떴고, 그 날아차기 포즈 또한 멋지구리해서 그 장면을 캡쳐한 사진이 '985 헥토파스칼 킥'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 돌고 있다.


네. 이번 편은 수영이네 집에 가게 된 호진이입니다. 덕분에 희연양이 좀 많이 안습이 되었죠. 효선이랑 호진이의 생일이 같은 것이 밝혀졌고.. 수영이가 다른 손재주는 참 좋은데 단지 '요리' 하나만은 못하고, 또 냉장고에서 한참 헤매다가 포도주를 포도주스로 착각하고 마셔버려서 정말 사람이 바뀌어버렸죠. 그리고 효선이가 호진이랑 수영이를 위해서 '시간을 뛰어간 소녀' 표도 사 줬고요. 희연이 동생 희정이가 나와서 희연이가 많이 울었다는 얘기를 해 줬죠. 그리고 또다시 시작된 놀토. 과연 이번의 호진이의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