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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연애 기묘한 이야기

2008.06.19 06:59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701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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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 또 비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아니, 퍼붓고 있다. 물론 비라는 것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비가 온다는 상황이 짜증스러울 뿐이다.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괜스레 기분이 음울해지는 것도 짜증스럽고, 무엇보다도 전용세라도 내놓은 건지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에 의해 튄 물이 온몸을 적신다는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생각해보라. 어느 누가 자기 몸에 물이 묻는 걸 좋아하겠는가? 잡설은 이쯤 해두고, 지금 내 앞에는 아담한 머그컵에 넘치기 직전까지 일렁이는 커피가 있는데, 적당히 황토색을 띠고 있어서 보기에는 꽤 그럴 듯하게 보인다. 일단 그 맛이 어떤지 음유해볼까. 음, 역시 커피는 맥심이군. 인스턴트커피도 마실만하다. 서민에겐 고급커피 같은 걸 먹을 기회가 없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울한 기분을 날려주기엔 충분하지.

하지만, 나는 한가로운 일상 이야기나 하자고 책상 앞에 앉은 것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블로그나 싸이월드에 올려도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가’라는 작자들은 해괴한 부류들이다.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아무리 지독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래서 죽을 듯이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거 소설로 만들면 죽이겠는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나 또한 그렇다. 어쩌면 이것은 ‘소설가’의 숙명과도 같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곤 해도 지금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부분이지만.

여기까지 써내려가는 동안 벌써 커피의 반을 마셨고, 이 글의 처음 부분을 쓸 때보다 어이없을 정도로 식어버렸다. 원래 커피란 것은 빨리 식으니까 그런 거겠지. 별다른 이유 없이 나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군.

하지만 ‘소설가’이기 전에 엄연히 습작생으로서, 써내려가는 소설에 그럴 듯한 스토리 라인이 없어서야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 어떤 이야기를 넣기로 했다. 지금 머그컵의 커피는 다 마셔버렸고, 지금 시각은 13시 37분이다. 사실 생각해둘 만한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글은 계속 써내려가고 있다. 농담 같지만 그야말로 지금 이 글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생각해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지금 내 생각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망설임. 그렇다. 내가 과연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을 것인가. 손가락이 움직여도 뇌가 가만히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글을 쓰면서도 자신이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결국, 글을 다 쓰고 나서야 ‘내가 무슨 글을 쓴 거지?’하면서 뒤엎는 상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바로 손가락을 푸는 것이다. 손가락이 고목의 뿌리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으면 활화산 같은 뇌가 분출하는 생각의 용암들이 마음껏 지면을 뒤덮지 못하게 된다. 손가락은 번개처럼 빠르고 거침없이 움직여야 할 것이며, 손가락을 푸는 것은 그러한 과정들이 마음껏 발휘되게끔 하는 준비이자 기초단계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강요라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이니 그냥 헛소리로 치부해도 좋고, 재미삼아 한번 시도 해봐도 상관없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글로서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피둥피둥 살이 두둑하게 찐 뇌라는 뚱보를 깨워야 한다. 역시 엉덩이가 무거운 만큼 일어나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군. …이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것 같다.

좋아, 시작하자.
어디서부터 하는 게 좋을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픽션으로 받아들여도 좋고, 논픽션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둘의 차이점은 허구냐 진실이냐 이지만, ‘나’에겐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다. 소설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따라서 진실을 예기한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 소설에 대해 어떤 것이 연상되나? 아마 80%는 연애소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쓰고자 하는 이 이야기 또한 연애소설로 분류될지도 모른다. 될지도 모른다, 라고 한 까닭은 나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그 점을 숙지하고 이야기를 봐주길 바란다.

길거리를 걷다가 옷깃을 스쳤거나 스치지 않았을 경우, 뒤를 돌아보게 하는 사람에 관하여 정의가 필요하다. 그 사람은 잘생겼을 수도 있고 예쁠 수도 있다. 좋은 냄새가 날 수도 있고 악취를 풍길 수도 있다. 이 정도의 때에만 한해서 이 정도의 정의만으로도 충분하다.

문제는, 지극히 문제 될 것이 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시선을 끄는 사람에게서 발생한다. 그 사람은 평범하게 생겼다. 냄새도 나지 않는다. 굳이 끄집어내자면 세수를 했을 때의 비누 향이 미약하게 묻어 있다는 정도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옆을 지나가는 순간, 발걸음이 멈춘다.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되지만 고개를 돌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의문이 든다. 어째서. 그러나 나와 그녀의 만남은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첫눈에 반했다, 라고도 할 수 있을 테고, 여러 가지 가설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나는 진부하지만 이런 표현을 쓰고 싶다. 그건 ‘운명’이라고. 아니,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 ‘운명’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내게 한 사람은 그녀가 최초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사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별달리 할 말은 없다. 나 자신도 사귀는 건지 알 수 없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연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숙맥이라 해도 좋다. 어떤 녀석은 나를 두고 천연기념물 감이라고 했지만, 그 점에 대해선 반박하고 싶다.

간단하다. 경험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하면 모두가 믿지 않는다.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지? 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면 거의 이렇게 대답한다. 마음에 들면 전화번호 받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영화보고, 밥 먹고, 다 그런 거잖아. 뭐가 어려워? 라고.

그래, 말은 쉽다.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휴대전화 번호를 얻어내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놀이공원 같은 곳에서 추억을 만든다. 그다지 해보지도 못했고, 해볼 기회도 없었지만, 그것들이 어렵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 정말 어렵다. 나에게는.

그렇게 말했더니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런 걸 못하냐는 듯이. 물론 당신들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행동들일 것이다. 하지만, 난 남들이 당연하게 하는 그것들을 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오면 따로 언급하기로 하겠다. 여기서 나의 정체성과 사상에 대해 장황하게 써버리면 이 이야기는 개똥철학만도 못한 너저분한 글이 되어버린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수필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 싶다.

그녀는 나보다 3살가량 어렸고, 몸집 또한 작았기에 자칫 초등학생으로 오해하기 쉬운 인상이었지만, 불가사의한 사실은, 인생 전반에 걸쳐 나보다 박자가 느렸던 그녀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경험이나 어떠한 분야에서의 기술 같은 것은 내가 더 깊다. 하지만, 성격이라거나 인내심, 배려해주는 마음, 희생, 그런 것은 그녀가 나보다 깊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순수한 인간. 나는 그녀를 그렇게 정의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서 고백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내 쪽에서 고백한 적도 없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와 그녀가 사귄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도 휴일에는 만나고 있으며, 서로 휴대전화 번호도 교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상한 일이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녀가 실은 시한부 선고를 받아 1년 안으로 죽는다는 그런 매우 흔한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는 장면은 없다. 만들려면 못 만들 것도 없겠지만, 굳이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다. 멀쩡한 사람을 왜 죽여야만 하나?

지금은 그저 솔직하게, 나의 일상을 바탕으로, 뇌에서 전달받아 손가락이 써내려 가는 대로 적고 싶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정말이지 사소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뜻밖에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허리가 불편하신 할아버지가 넘어진 것을 보고 우연히 일으켜 세워 드렸는데 불현듯 옆에 선 그녀가 웃는 얼굴로 어린아이 다루듯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짐짓 거칠게 그녀의 손을 내쳤지만, 쓰다듬어진 것에 대한 불쾌감보다는 어릴 적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 친숙감이 더 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묘한 감정이 일어 당황하였다. 순간 누나 같은,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어머니 같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내가 그녀보다 연상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그녀 앞에만 서면 꼬마가 된 기분이었다. 왜일까. 지금도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에겐 사소한 행복조차 과분하다. 애초에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괴물이니까, 미친놈이니까 말이다. 언젠가,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는 좋지 않다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잊어버렸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사라진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될까. 라는 두려운 상상이 매일 머릿속을 끊임없이 괴롭혔지만, 나는 애써 그 어두운 망상을 머릿속 한구석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문득 깨달았다. 아아, 나는 그녀에게 반했구나, 라고.

어쨌건 여자에게 고백을 받는 부류는 지구 위에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 하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이없을 정도로 둔감하고 서투르다. 그런 이유로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이런 말을 해선 안 되겠지만, 순간 그녀가 농담 하는 줄 알았다. 좋아한다고? 나 같은 인간을?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나도 기뻤고, 또한 너무나도 두려웠다. 기뻤던 것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두려운 것은 언젠가 내가 그녀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거짓말이다. 본심은 그녀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세상에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배신하지 않을까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 자신에게 가벼운 자기혐오를 느꼈다.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시원찮을 녀석이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세상에 ‘좋아한다.’라는 말은 썩어 넘친다. 별별 시답잖은 녀석들이 툭하면 내뱉어댄 결과 과포화 상태에 이른 표현이 바로 ‘좋아한다.’는 말이다. 대중 가사, 영화, 소설, 연극 할 것 없이 진부하게 쓰이는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까지 그런 싸구려 취급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해도 낯부끄럽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빠져 있었으니까.

그 사이 그녀는 많은 일로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녀는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해주었고 나에 관해 알아가려고 노력했다. 내가 쓴 소설과 잡다한 잡담, 아무 생각 없이 휘갈긴 농담까지, 그녀는 기억하려고 했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기뻤다.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상대가 여자고, 애인이 없다는 전제하에서지만 말이다. 그 점에서 그녀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었다.

익히 인정하고 있던 바이지만, 나에게는 악취미적인 성향이 있다. 사람을 시험하는 기질이 있다고 하면 알기 쉬울 것이다. 일부러 짓궂은 말이나 금방 답을 말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서 당황해 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 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바라건대, 나 하나밖에 없었으면 한다. 사람을 시험한다는 행위가 그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언젠가 이런 내 생각을 그녀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답했다.

'그건 불신이라기보다는 기대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당연히 비웃거나 모멸할 거라고 여겼던 자신이었기에 그 대답은 당혹스러웠다. 나와 같은 답을 하기를? 아니면 다른 답을 하기를? 그런 측면도 있겠지. 하지만, 그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나의 소년 시절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의 암울한 성장 환경 따위를 적어놓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먼젓번에도 말해두었지만, 나는 수필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직접 말로 털어놓은 것도 있었지만, 나 자신도 몰랐던 말버릇이나, 성격, 취향, 심지어는 어떤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고, 그리고 뭔가 숨기는 일이 있으면 시선이 불안정하다는 것까지.

거기서 문득 의문점이 하나 들었다. 이건 뭔가 불공평하다고.

아아, 그렇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없었다. 부모님은 무슨 직업이며,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이고, 무슨 음악을 즐겨 들으며, 어떤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것까지 전부. 그나마 집 주소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는 알고 있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래서야 애인 자격 따윈 박탈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곧바로 그 생각을 부정했다. 과연 우리가 사귀는 게 맞는 걸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사귄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나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기에 지금까지 만나는 게 아닌가?

그 사실에 뭐라 반박할 거리가 없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나도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그렇다. 믿음. 그녀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내가 정말로 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상 나는 그녀와 사귄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이걸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녀를 상처 입힐까 봐 두려워서? 틀렸다. 그로 말미암아 내가 상처받는 것이 두려울 뿐이지. 정말이지 얼간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마음이 말한다. 너는 정상적인 연애는 할 수 없어. 왜냐하면, 너는 미친놈이니까. 고개를 끄덕인다. 일리 있는 말이야. 나는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그녀를 잃어버리는 게 싫으니까. 너무나도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 하지만, 그녀는 추한 면도 긍정해주었다. 역시 과분하다. 나 같은 인간에게는.

…그래, 생각해보면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그날.

그날따라 하는 일마다 꼬여서 기분이 한창 예민해져 있었다. 스트레스와 불쾌지수, 잡다한 문제들이 내 뇌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도중에 그녀에게 내가 가진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대수롭지 않은 걸로 치부한 그녀에게 그만 화가 났다. 거기서 끝냈다면 좋았겠지만, …그 말을 내뱉은 것은 내 인생 최악의 실수였다.

“너에게는 굉장히 실망했어. 전화하지 마. 문자 메시지도 보내지 마.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건 정말 무심결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조차 변명에 불과하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러는 순간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기 전까지는.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그런 거지? 무슨 생각이야? 미쳤어? 그런 건 쓰레기나 하는 짓이야. 그건 네 문제잖아? 왜 그녀에게 화풀이하는 거야? 그녀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봐, 듣고 있어?! 그녀는 당연하게도 그 말에 심하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자기혐오와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기에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등을 돌렸다.

사춘기 따윈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계속되고 있었나? 혼란스러워 머리를 쥐어뜯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박살 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런 멍청이가! 역시 네 녀석은 최악이다! 그날 나는 죽도록 술을 퍼마시고 싸움을 했다. 상대가 누구건, 몇 명이건 상관없었다. 얼마나 때렸는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하지 않고서는 이 빌어먹을 기분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주먹을 틀어쥐었다. 파고든 손톱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화를 잘 낸다. 주먹으로 만사를 해결하려 든다. 성질이 급하다. 일단 소리부터 지른다. 사과하는 일이 잘 없다. 감사하는 일도 잘 없다. 눈을 피하면 지는 거로 생각한다. 생각하는 걸 싫어한다. 설교를 싫어한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싫어한다. 복잡한 걸 싫어한다. 싫어한다. 싫어한다. 싫어한다. 싫어한다. 여기도 저기도 싫은 것들뿐이다. 맞다. 나는, 쓰레기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래서 이걸로 끝낼 생각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NO다. 나는 아직 키스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도 적다. 이런 바보 같은 일로 끝낼 수는 없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과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30분 전으로 돌리고 싶었다. 목숨이 1년 정도 감소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난 또다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로부터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뭐라고 답장을 보내고 싶었지만, 마음이 혼란스러웠기에 어이없게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적어 보낸 것이다.

  '아무리 끌어안고 ‘사랑해’하고 말한다 해도, 그게 진실인지 어떤지는 몰라.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해. 사람은 말이야. …사랑하는 척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아니, 그전에 그녀에게 한 모든 잘못된 말들 자체가 진심이 아니었지만. 한 번 더 그 정신 나간 짓을 해버린 것이다. 나라는 인간은 쓰레기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딴 말을 보낼 리가 없다. 망할 개자식 같으니라고. 한바탕 난장판을 벌인 뒤 전봇대에 머리를 박았다.

무서워졌다. 그녀가 나 같은 거, 이제 질려버렸으면 어쩌지? 싫어졌다고 하면? 만일 이것들이 사실이라면 나는 나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더는 늦기 전에 사과해야 한다. 전화기, 전화기는 어디에 있지? 그녀가 과연 내 사과를 받아줄까?

초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중얼거렸다. 참을 수 없이 답답하다. 이런 때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유감스럽게도 난 전혀 대답할 수 없다. 다른 남자들과 달라서? 그런 것보다는 다른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그다지, 아니 눈곱만큼도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소설은 ‘나 같은 남자’가 ‘하는 생각’에 대한 이야기다.

원래가 서투르다, 고 넘어가기에 핑계가 너무 재수 없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해답을 제시해주면 좋을 텐데. 연애는 다 그런 거야. 라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나 자신이 아주 한심하게 느껴진다. 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러버린 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일이 지나, 1주일이 되는 어느 날,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문자 보내서 미안해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내가 싫은가요?
혹시 그렇다면, 답장은 주지 않아도 돼요. 그렇지 않다면, 공원에서 기다릴게요.'

아냐, 틀렸어. 난 네가 싫지 않아. 나도 모르게 버튼에 손이 닿았다. 짜증을 내면서 손을 뗐다. 추해지지 말자, 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과연 그녀 앞에 설 자격이 있을까? 없다면 이대로 놓아주자. 그게 당연한 거고,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두려워하거나 해서 마음에도 없는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면? 싫었다. 무엇보다 싫다. 나는 독재자가 아니야. 정신병자가 아니야. 내가 싫으면, 그냥 가면 되는 거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그’가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라면 그녀의 집 앞에서 석고대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를 울리는 것은 중죄에 해당하니까. 하지만, 이 글을 보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이런, 또 사람을 시험하는 ‘나’의 악취미적 기질이 발휘된 모양이군.

아무튼, 간에 건투를 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
여자의 한이란 건 뜻밖에 무서운 법이거든. 벌로 두세 대 얻어맞을 각오는 하라고.

비다. 또 비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아니, 퍼붓고 있다. 그리고 내 옆에는 평온한 모습으로 무방비하게 잠든 그녀가 있다. 무심결에 뺨을 쿡쿡 찌르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으나, 인간성을 겸비한 생명체가 할 망상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즉시 그만두었다. 왠지 모르게 아쉬운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 테지.

이른바 ‘소설가’라는 작자들은 해괴한 부류들이다.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아무리 지독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래서 죽을 듯이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거 소설로 만들면 죽이겠는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또한 전혀 다르지 않다.

자신과 동떨어진 사건과 인격체의 화합을 묘사하는 작업은 몹시 어렵다. 내면에 자신의 확립한 사상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 않다면, 이내 창조물들에 휩싸여 자신의 동일성을 잃게 된다. 자신의 인격과 차별화된 모습들을 작품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이 글은 과연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걸 픽션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논픽션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선택에 맡기도록 하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쪽이던 상관이 없다는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당신은 허구(fiction)와 사실(fact)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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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시외 공모전에 낸 글을 한번 올려봅니다.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이런 걸 잘도 냈구나 싶지만(...)

읽는 도중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느끼셨다면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럼 언젠가 다시 뵙죠. Ad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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