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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연애 현경이, 그리고 작은 현경이....

2005.05.23 18:16

책벌레공상가 조회 수:472 추천:4

extra_vars1 Love is not wai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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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진현경.
유학생.
지금은 로스엔젤러스에서부터 날아온 비행기를 타고 와서 지금 김포공항에 서 있다.
로스엔젤러스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내가 갑자기 서울로 온 이유는 하나.
바로 유학가기 전에 한때 사귀였었던 옛날 친구...아니, 애인...아니, 친구...아니,애인...

...그냥 친구라고 해 두자.
장민석이의 얼굴이 왠지 보고 싶었다. 사실, 얼굴 뿐만이 아니다. 그 인간이 어떻게 사는지, 또 뭐 하고 지내는지...
뭐 뻔하겠지만...


한 2년전에 장민석이에게서 전화를 받았었다.
"여보세요?"
"응, 현경이니?"
내가 로스엔젤러스로 유학간지 정확하게 2년 7개월 21일만에 전화가 왔다. 그 동안 전화를 한통도 안했기 때문에 내가 민석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척 궁금하던 차 였다.
"응, 요즘 어떻게 지내? 무슨 별일 없었어?"
"실은......"
지금에야 생각났지만, 말끝을 흐릴때 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뭔데?"
한참 말을 않고 있던 민석이가 잠시후에 입을 열었다.

"...그게...나...내일 결혼해..."
순간, 나는 그 말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농담이거니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농담 치고는 말투가 너무 진지했다.
나는 이내, 전화기를 들고 한동안 가만 있었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축하해."
그리고는 재빨리 전화를 끟었다.

사실, 유학가기 전에 민석이랑 사귄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석이에게 무슨 특별한 감정 같은걸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뭐 그냥 마음 편한 친구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막상 민석이가 결혼한다는 말을 들으니까 왠지 마음 한쪽 구석이 허전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다시 김포공항.
가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했다.
정민석이라는 인간은 지금쯤 다른 여자랑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만약 그러고도 행복 안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행복하면 그나마 다행이고...

가는길에 악세서리 가게에 들렀다.
그래도 명색이 동기이고 친구인데 선물 하나 정도는 예의 아닐까?
어디보자...
예쁜 리본이 있군.
유학가기 전에 민석이가 나에게 한번 머리에 달아줬던 그 리본과 똑같은 종류 이다...


"현경아, 내가 보니까 넌 너무 감정 표현을 안하는 성격인것 같애."
"그래서 뭐 어쨋는데?"
민석이가 나에게 난데없는 충고를 하였었다.
"넌 말야...딴건 다 좋은데...자기 감정에 조금만 더 솔직해봐."
"내가 뭘? 내가 무슨 감정이 있다고?"
그때 내 말이 진심이였는지 아님 내숭이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기, 이거 어때?"
라고 하면서 민석이는 나에게 리본을 보여 주었다.
노란 바탕에 빨간 점무늬가 있었다.
나는 하마터면 "정말 이쁘다."라는 말이 나올 뻔하다가 참았다.
그리고 이내 말하였다.
"이거 왠 리본이야?"
"응, 이거...니 머리에 달면 멋질것 같아서..."
"그래? 그럼 한번 달아봐. 안 멋지면 어디 두고봐."
나는 톡 쏘는듯이 말했다.
민석이는 조심스레 내 머리에 리본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는 어디서 구했는지 손거울을 꺼내 들고는 내 얼굴 앞에 비춰 주었다.
"어때? 이쁘지? 이쁘지?"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대신에 민석이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민석이의 표정을 읽었다. 민석이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난 그 미소뒤의 민석이의 마음을 읽을수 있었다.
지금 민석이는...내가 만약에 '별로..."라고 말을 할 까봐 두려워 하고 있는거다.
나는 입을 열었다.
"별로..."
내가 예상한 대로 민석이의 입이 약간 돌아갔다. 민석이는 실망한 모양이다.
"미안해...내가 너에게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리본을 들고와서..."
"됐어, 그래도 선물인데 내가 가질께."
나는 민석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와서 리본을 벗어서 아무데다 놓아 두었다.
......그러다 그 리본을 잃어버렸다.


"얼마에요?"
"네, 2만원입니다. 손님 안목 좋으시네요. 그거 전국에서 딱 500개 밖에 없는 아주 희귀한 리본이에요."
리본치고는 비싸다. 그럴 수밖에. 전국에 딱 500개 뿐이니까.
그 리본을 구하기 위해 분명 민석이는 이리저리 황급히 뛰어 다녔을 것이다.
"흥, 머리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더니."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 나왔다.

딩동딩동~♬
"누구세요?"
나는 지금 벌써 민석이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올때 민석이의 집을 봤는데...단독주택이다.
아담한 집이였다. 분명히 행복하게 웃으면서 사는 단란한 가족에게나 어울릴 집이지, 맨날 부부싸움 하고 지지고 볶는 가족에게는 절대로 안 어울리는 집이다.
결론은...아마 민석이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다.
"누구시냐니깐요?"
안에서 재차 물어온다.
"나야. 현경이."
끼이익~
문이 열린다.
그리고 민석이가 얼굴을 내민다.
"어, 현경아! 오랜만이야. 이게 몇년만이지?"
그리고는 들어오라고 손짓하면서 말한다.
"그래, 유학생활 잘 돼가?"
"남 걱정하지마. 난 니가 결혼했다길래 한번 너희 가정을 구경하러 와 봤어."
"어서 들어와! 먼데서 왔는데 차라도 한잔 하고 가."
어느새 나는 민석이의 현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와 있다.

"자기야, 저 여자는 누구야?"
거실에서 민석이의 마누라가 나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응, 내 대학생 동창."
민석이는 자신의 마누라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동창? 그러고 보니 요새는 동창을 빙자하여 별의 별 사람이 들어오더라마는...며칠전에 학습지 구독을 권유한 외판원도 당신 동창이였고, 또, 저번에 돈좀 빌려달라면서 찾아온 사람도 당신 동창이였고, 그리고...지금 우리집에 찾아온 왠 여자도 당신 동창이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러더니 그 마누라라는 녀석이 민석이에게 다가오더니 아주 느끼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자기야~ 자기 날 얼마나 사랑해?"
"또 물어? 벌써 23번째야."
"그러지 말고 한번만 더 대답해 주라~"
민석이는 팔을 쭉 펴고는 원을 크게 그리면서 말했다.
"이마~안 큼!"
아앙을 떨어대는 마누라라는 녀석을 보고 있으면 왠지 닭살이 돋는다. 하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저 마누라라는 녀석이 왜 저러는지 짐작이 간다. 단란하던 가정에 갑자기 '나'라는 외부여자가 '민석이의 동창'이라는 명목하에 침입해 들어오자 위기감을 느끼고 민석이에게 자신의 사랑을 재차 확인시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하려는 의도이다. 아마 저 마누라라는 녀석은 멜로드라마를 많아 봤을 것이다.

이렇게 단란해 보이는 가정 앞에선...난...민석이의 동창이라 하더라도...이방인일 뿐이다...
갑자기 민석이에게 전해 주려던 리본을 전해 줄 용기가 사라졌다...

마침 한 여자아이가 민석이에게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다.
'어유 귀여워라'라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그대신에 민석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딸이야?"
"응."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름은 현경이라고 지었어."
"현경이라고? 그건 내 이름이잖아?"
그리고 톡쏘듯이 말했다.
"이자식! 내이름 함부로 쓸래! 저작권료 물어내! 물어내!"
"...하하. 얼마면 되겠니?"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저 여자아이가 내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나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 나는 앞으로 그 아이를 작은 현경이라고 부르겠다.

따르릉~♬
갑자기 전화가 온다.
민석이가 잽싸 달려가서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아, 과장님! 예? 아예, 예, 아뇨. 예예. 예? 예. 예예, 예. 네? 내, 내일이라고요? 저기...아, 아닙니다! 예, 아뇨, 예예. 예, 아뇨, 예, 예. 살펴가십시오."
딸각!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나에게도 들린다. 민석이의 표정이 약간 어두운 모양이다.
민석이는 조용히 자기 마누라에게로 다가가서 말한다.
"저기...미안해서 어쩌지? 내일 회사에 긴급 프로젝트가 있데. 그래서 내일 회사에 꼭 가봐야 돼."
"그럼 우리 현경이 데리고 내일 나미동산에 못 가겠네?"
"아마도 그렇게 될거야. 아니면, 자기가 혼자서 현경이 데리고 가던가."
"자기는! 난 나미동산이 어딘지도 모른단 말야. 그리고 나라고 뭐 집에서 가만히 놀고먹는줄 알아? 나도 바쁘다고! 아무래도 내일은 현경이 그냥 집에 있어야 겠네."
옆에서 듣고있던 작은 현경이,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싫어 싫어 싫어! 난 나미동산에 꼭 가고 싶단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그리고는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목소리 한번 정말 우렁차군.
지금 민석이의 마누라라는 자가 작은 현경이를 달래려고 애쓰고 있다.
"현경아, 나미동산은 나중에 갈 수도 있잖니, 그만 울어, 뚝! 울면 못써요."
내 어렸을때 경험에 의하면 어린아이는 저래 가지곤 절대로 울음을 안 그친다. 민석이의 마누라라는 자의 주부경력은 확실히 왕초보 단계이다. 그대는 수련이 더 필요하오. 크크크!
...물론 경력도 없는 내가 감히 남을 판단한다는 것이 건방지겠지는 하겠지만 말이다.
"싫어 싫어! 난 내일 가고 싶단 말이야! 으아아앙!"

저렇게 울어대는것을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난 이내 민석이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민석아?"
"왜? 우리 딸이 좀 말괄량이지? 네가 좀 이해해 줘라. 우리 집사람이 어렸을때 애를 마구 싸고 도는 바람에 요새는 버릇이 좀 없어."
"싸고돌긴 누가 싸고돈다고 그래! 당신이 맨날 회사일을 핑계로 집에 늦게 들어오니까 애가 애정결핍에 안걸리고 배겨?"
...그 엄마에 그 딸이다.
난 다시 민석이에게 말을 걸었다.
"뭐 너거 딸이 씩씩해서 좋구만. 그건 그렇고 말야, 내가 현경이 데리고 나미동산에 가면 안될까? 내가 나미동산하면 너보단 빠싹하게 알고 있거든. 어렸을때부터 난 나미동산에 가는걸 좋아했다고. 특히 나미동산에 있는 91˚까지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팍 올라가는 바이킹은 정말 스릴만점이지!"
"...니가 우리딸 데리고 놀러가는 건지, 우리딸이 널 데리고 놀러가는 건지 구분이 안간다."
민석이의 마누라라는 자가 민석이에게 이야기한다.
"자기야, 낮선여자에게 괜히 딸 달려 보냈다가 어쩔려고 그래? 그러잖아도 요새 뉴스에 유괴사건이 많이 나오던데, 난 그 뉴스 나올때마다 몸서리가 쳐져! 으으으..."
"낮선 여자는 무슨 낮선 여자야, 얜 내 동창이라고. 설마 동창이 그런 일을 하겠어?"
"요새는 동창, 친구를 빙자하고 들어와서 온갖 나쁜일을 꾸미는 자들이 더 무섭다고."
아마 민석이네 마누라는 내가 낮선 여자라서인 것보다도 내가 민석이 옛날 친구였다는 사실에 더 마음을 놓지 않고 있을 것이다.

민석이와 그의 마누라라는 자가 한참 말다툼을 하는 동안, 작은 현경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는 누구야?"
윽! 아줌마라니! 내가 어딜 봐서 그렇게 아줌마로 보이는 거야!
"나 아직 결혼 안했어. 그냥 언니라고 불러."
"싫어."
싫어? 너 죽을래! 니 입에서 '언니'라는 말이 나올때 까지 엉덩이를 때려줄까?
...라는 말을 하마터면 할 뻔했다.
그 대신,
"그러지 말고 좀 언니라고 불러주라. 응?"
이렇게 애원을 하는 척! 했다. 내가 했지만 닭살 돋는 짓이다.
"좋아, 사탕 하나주면 언니라고 불러주지."
나에게 마침 어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사탕 바구니에 사탕(식당에서 고객 들에게 후식으로 서비스 해 주는것)을 꺼내려고 보았는데 사탕이 없어서 그 식당 주인을  무지 닥달을 해서 주인이 근처 슈퍼마켓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 사온 새로 산 사탕 봉지를 뜯게 만들면서까지 겨우 얻은 사탕 하나를 깜빡 잊고 안먹고 놔 둔 것 있다.
그 사탕을 작은 현경이에게 주었다.
"에이, 누룽지맛 사탕이잖아? 난 이맛은 별로 안좋아하는데. 그래도, 정성이 갸륵해서 그냥 언니라고 불러줄께."
그냥 주는대로 먹어! 내가 이 사탕 구하려고 얼마나 식당주인을 달달 볶았는지 알아?

사탕을 다 먹은 작은 현경이가 나에게 물었다.
"언니 이름 뭐야?"
"나? 나도 너랑 이름 같애. 현경이야."
"뭐? 언니는 왜 내이름 따라해?"
"누가 널 따라했다고 그래? 니가 날 따라한거 아냐?"
"아니야! 분명히 언니가 내 이름 따라했어!"
"니가 내 이름 따라한거잖아!"
"언니가 따라했잖아!"
"니가 따라했잖아!"
...전에 민석이네 집에 대해서 한 말, 취소다. 취소. 역시 맨날 부부싸움하고 달달 볶는 집에나 어울리는 집이다. 그리고 이 집에 네 사람이 말싸움을 하고 있으니까...

"그만하자, 그만해. 내가 니 이름 배꼈어."
나의 항복으로 알단은 큰 현경이(물론 나다.)와 작은 현경이와의 전쟁은 휴전협정을 맺었다.
"근데 언니 우리집에 왜 왔어?"
작은 현경이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이렇게 말했다.
"현경이는 좋~겠다. 내일 나미동산에 놀러가고."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작은 현경이가 나에게 덤벼들었다.
"언니 지금 누굴 약올리는 거야! 우리 아빠가 회사를 핑계대고 나미동산 안데려가 주는데! 언니가 아빠 대신 나미동산 데려다 줄꺼야? 줄꺼야?"
"응."
크크크...왠지 모르게 통쾌하다.
"물론, 니가 내 말 잘 듣고 동생으로써의 도리를 잘 지킨다면 데려가 줄수도 있지. 말썽만 피우고 떼쓰는 아이를 데리고 누가 놀이동산에 가겠니?"
맞다! 생각해 보면 지금 사탕 하나를 절약할수도 있었는데...아깝다.
여기서 작은 현경이의 대답이 걸작이다.
"됐네. 이사람아."
이녀석이 TV를 너무많이 봤군.
"뭐 싫으면 관둬, 나미동산 가기 싫으면 계속 말썽 부리고 떼 쓰던가."


역시 애들은 단순하다.
어쨋든 내일 작은 현경이를 데리고 나미동산에 놀러가기로 민석이랑 약속은 했다.
아~ 내일은 정말 재미있는 날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참고로 리본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여기는 나미동산.
나미동산은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별로 없다.
뭐 그럴만도 하다. 볼만한 것으로는 기껏해야 동물원에 동물 몇 마리와 벛꽃 몇십그루나(그나마 지금은 가을이라 꽃이 다 진지 오래되었다.) 식물원 온실 몇개와 그리고 놀이기구로는 바이킹 한개가 전부이다. 나머지는 전부다 순진한 사람들의 빈약한 주머니를 뒤지는 경품 공기딱총 사격장과 다트장, DDR 몇개와 펀치, 두더쥐 잡기 몇개와 길거리 솜사탕 오토바이나 혹은 닭꼬치 구이 포장마차들로 가득차 있다. 이런 걸 어렸을때 좋아라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근데 왜 내가 민석이에게 내가 나미동산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 것처럼 말했는지...
그러나 작은 현경이는 이 모든것에 흥미를 가지는 모양이다.
나는 작은 현경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여기 나미동산에 왔는데...뭐 할래?"
"언니, 우리 DDR해!"
DDR이란 Dance Dance Revolution의 약자로 발을 사용하여 플레이 모드를 선택한 후, 곡의 리듬에 맞추어 화면에 나오는 상하좌우의 화살표를 따라 4개의 발판에 스텝을 밟는데, 제대로 적시에 밟으면 ‘Good’, 타이밍을 놓치면 ‘Bad’ 등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임이다.
뭐, 그정도는 알고 있다고? 시꺼!

작은 현경이에게 끌려오다시피하여 난생 처음으로 DDR에 올라가 있다. 옆에 작은 현경이는 여유만만한 표정이다.
좁은 사각형 안에서 왠 펑크머리를 한 인간이 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레디~고!"
앗! 화살표가 올라온다. 밟자! 에잇! 에잇! 에잇!
...열심히 밟았지만 화면에 뜨는건 'Bad'. 화살표가 왜 이렇게 빨리 올라오는 거야? 도데체 사람이 밟을수는 있긴 있는거야?
문득, 주변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리고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저길봐, 저 여자 웃긴다. DDR 왕초보인가봐."
"이보쇼, 살살하쇼, 기계 다 망가지겠쇼."
"옆에 애는 잘하는데, 더 나이를 먹은게 못해? 나이값좀 해라~"
쪽팔린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면 더 쪽팔리기 때문이다.
나는 슬쩍 작은 현경이를 보았다. 작은 현경이의 시선은 오직 작은 네모안에 있다. 놀랍다. 어떻게 안보고 화살표를 밟을 수가 있지? 나는 화살표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밑에 화살표를 찾아서 밟는데...

"얘, 빨리가자!"
DDR이 끝나자 나는 작은 현경이를 데리고 얼른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가능한 그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데로 부지런히 걸었다.
"헉헉..."
"언니, 다리아파, 좀 쉬었다가."
"그래, 쉬자."
나와 작은 현경이는 근처의 벤처에 앉았다.
마침 벤처에는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위에 청설모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청설모가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더니 이내 길바닥으로 내려온다.
작은 현경이는 저 청설모를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다.
나도 저 청설모를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다.
저 청설모는 무엇을 찾기 위해 이 길바닥에 내려온 것일까...도토리 몇조각일까...아니면 또 다른 청설모일까...아니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무작정 내려온 것은 아닐까...저 청설모가 찾는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찾지를 못하고 나무로 되돌아가지는 않을까...나 처럼...무작정 한국에 왔지만 결국은 저 청설모가 나무로 되돌아 가듯이 나도 미국으로 되돌아가야 하겠지...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근데...내가 얻으려는게 뭐지?
그 순간에 청설모 앞에 왠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청설모는 화들짝 놀라서 나무도 도망친다. 누구냐? 청설모를 나무로 쫓아보내듯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한 나를 미국으로 돌려 보내려는 자냐?
...생각을 너무많이 하더니 과대망상증에 걸린것 같다.
그 발에서 시선을 조금 올려 보았다. 검은 양복에 단정한 헤어 스타일, 그리고 콧수염...
"박다식 교수님!"
내가 한국에 대학을 다니고 있을때, 그 점수 째째하게 주기로 악명높은 그 박다식 교수!
"오, 진현경양, 그동안 잘 지내고 있나?"
박다식 교수가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한다.
"그 옆에는 자네 동생인가? 귀엽게 생겼구먼."
나는 '아니요, 쟤는 제 동생이 아니고요, 제 친구중에 결혼한 애가 있는데 걔 딸인데요, 오늘...'이라고 말하려다가 귀찮아서 관뒀다.
"네. 근데 친동생은 아니고 사촌동생이에요."
나는 귀차니즘 때문에 이렇게 거짓말을 했다.
"동생 이름이 뭐지?"
"혀...현경이요."
"현경이! 너랑 이름이 똑같군. 정말 잘 어울리는 현경이 자매로군."
현경이 자매?
"근데 나미공원엔 왠일인가?"
"거 뻔하죠. 당연히 놀러왔잖아요. 교수님이야말로 여긴 왠일이세요?"
"나야 뭐...나이 먹으니까 그냥 심심해서...사색을 할 공간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지."
그리고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진현경양, 내가 3년전 6월 17일날 강의 시간에 강의한 내용을 기억하나?"
"...세상에, 그런걸 여태까지 기억할 학생이 어딨어요?"
그 교수는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허, 그렇다면 전에 준 C학점은 취소하고 F학점을 줘야 겠는데. 농담이고, 그때 내가 공기에 대해서 강의했었지."
"공기요?"
"공기는 분명 우리 주위에 있는 거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네. 분명히 존재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것...비단 공기뿐일까? 아니지, 다른 것도 있겠지..."
그리고 박다식 교수님은 돌아서며 말했다.
"나에게 더이상 말 걸지 말게. 난 지금 사색을 즐기고 싶으니까."
라며 발길을 돌려 제 갈길을 갔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동물원에서 작은 현경이가 사자를 보고 괜히 으르렁 거리다가 사자가 포효를 하는 바람에 기겁을 해서 나에게 달려온 일, 바이킹을 타자고 바이킹이 무섭다는 작은 현경이를 꼬드껴서 타다가 정작 바이킹을 타고나니 내가 더 기겁을 한 일, 작은 현경이가 솜사탕 10개를 사달라고 졸라대서 결국 5개만 사주고 달래느라 애 먹은 일, 식물원에서 작은 현경이가 바나나 나무에 달린 바나나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다 선인장 가시에 찔린 일, 작은 현경이가 두더쥐잡기에서 무려 30분을 버틴 일 등등이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지금 작은 현경이랑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작은 현경이에게 물어보았다.
"오늘 재미있었어?"
"응! 재미있었어! 내일 또 오자!"
뭐? 내일 또 오자고? 그럼 유치원은 안가냐?
"미안하지만 나 내일 미국에 가 봐야해. 그리고 넌 유치원에 가야 하잖니."
작은 현경이는 내가 미국에 간다는 말에 놀란 모양이다.
"언니 왜 미국가? 미국가지 말고 나랑 있으면 안돼?"
"미안해. 가봐야 해. 그대신, 내가 너에게 선물 하나 줄께."
나는 호주머니에서 리본을 꺼냈다. 그리고 작은 현경이의 머리에 달아 주었다.
"자, 됐어!"
작은 현경이는 리본을 선물받더니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거 달고 너거 아빠한테 반드시 자랑해야해. 알겠지?"
"응!"
갑자기 눈물이 나올려고 한다. 하지만 참았다.
"그리고 이 언니가 미국가도 이 언니 잊지마. 잊으면 안돼!"
그러나...끝내 눈물이 나오고야 말았다.
"언니...울지마..."


서울에서 출발하여 로스엔젤러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
나는 창문 너머로 한국을, 정민석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뒤돌아보았다.
작은 현경이는 그 리본을 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민석아, 잊지마라!
네 곁에는 언제나 현경이가 있다는 사실을,
네가 예전에 나에게 전해 주던 그 리본을 머리에 달고 있는 그 현경이가 네 곁에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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