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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연애 군주의 귀환

2005.09.01 06:41

리듬을타고 조회 수: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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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동아들이라 그런지 뭐 하나 모자라는 것 없이 커왔던 것 같아.

부모님은 항상 나를 믿어주는 편이었지. 아니 믿어준다기보다는 순박한 분들이야.

아버지는 유명한 모 제지회사를 다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를 하시는데, 예전에 아버지가

땅장사를 잘 해서 땅하고 건물이 몇 채 있다더군.

그렇다고 해서 겉으로 보기에 크게 잘 사는 건 아니야. 어차피 부동산이라고 해 봤자

지방일뿐더러 아버지가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으셔서 그쪽으로 빠지는 돈이 적잖거든.

어머니도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으셔서 봉사단체에 뛰어다니곤 하고.

잠깐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하여튼 부모님이 저런 분들이시라 내 백수생활에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어. 하나뿐인 아들이 놀고먹으니 당연히 걱정은 되셨겠지만 겉으로 내색은

안하셨지. 아마 내가 스트레스 받지는 않을까 해서 배려해주신 것 같아.



그렇게 백수로 잘 먹고 잘 살던 그해 겨울 어느 날이었어.

그날은 왠지 만화책이 보고 싶더라. 엄청 잔인하고 통쾌한 걸로.

저금통을 털어 보니 달랑 200원. 그래도 한 권은 빌려볼 수 있겠다 싶어서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책방으로 신나게 달려갔지.

그런데 횡단보도를 건너던 도중 갑자기 책방에 안낸 연체료 5천원이 떠오르더라.

어림잡아 반년은 넘게 쌩까고 있었던 돈이었지.

하지만 내 시신경은 현란한 칼부림을 원하고 있었고 내 혈액은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원하고

있었으며 내 귀는 칼 부딪히는 소리를 쫓고 있었고 내 코는 피 냄새를 갈구하고 있었어.

그렇기에 나는 내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책방으로 뛰어갔지. 빌기라도 해봐야겠다 싶더라고.


책방의 두꺼운 유리문을 여니까 방울소리가 뎅뎅거리더라. 난 왠지 주인아저씨가 날 알아보면 어쩌나 싶어

서 일단 안면몰수하고 만화책부터 골랐지. 기억에 북두신권을 골랐던 것 같다.

알지? ‘넌 이미 죽어있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그 만화책.

고른 만화책을 들고 카운터로 갈 때의 내 심정도 비슷했어. ‘난 이미 골라왔다.’

카운터에 만화책을 올려놓으니 예상대로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묻더라.

“전화번호가 뭐에요?”

그런데 조금 이상한거야. 목소리가 꼭 여자 같더라고.

나는 아저씨 얼굴에 여자목소리를 머릿속으로 합성하며 심한 이질감을 느꼈어.

그리고 ‘이 아저씨가 목젖을 떼버렸나’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살짝 주인아저씨와 눈을 맞췄지.

그런데 뇌에서 내린 판단과 시신경이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더라.

카운터에는 아저씨가 아니라 웬 아가씨가 서있더라고.

나는 잠깐동안 머뭇대다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대답했어.

“0632”

아가씨는 다시 몇 번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이내 다시 눈을 내게 맞추며 물어보더라.

“조민희 씨?”

아가씨가 나에게 되물었을 때 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어.

왜냐하면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할 말을 잃었었거든.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어. 단지 머릿속의 압력이 자꾸 올라가더니 얼굴이 빨개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