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게임 시리얼

2005.12.08 03:22

랑유 조회 수:32

extra_vars1 프롤로그 
extra_vars2 2702-1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서기 2010년 12월 31일>


"들어가."

"싫어."

"들어가!"

"싫어."

"들어가ㅡ라니까!"

그녀는 힘껏 소리치는 동시에 얼굴을 홱 돌려버렸다. 그 순간 형광등 불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하얀 바닥에 흩뿌려진다.

나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쭉 둘러본다. 하얀 바닥. 하얀 천장. 하얀 벽지. 그리고 하얀 안개꽃. 누가 갖다 놓은 꽃일까? 그 누군가가 과연 안개꽃의 꽃말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참을 말이 없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은다. 띄엄띄엄하게, 하지만 결코 중간에 말이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이미 결정한 것이다.

"들어가. 캡슐에 들어가서...... 1%의 희망을 붙잡아. 그래서.....끈질기게, 끈질기게 ㅡ"

나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는 일 뿐이란 사실이ㅡ

분하다.

"살아줘ㅡ. 나를 위해서."




안개꽃의 꽃말은 <죽음>.




***




<서기 2110년 12월 1일>


[뉴스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현재 시각 15:23. 반세계연합 단체인 KMA(Kiss My Ass)가 생명 유지관을 점거, 냉동캡슐의 생명유지 장치와 직원들의 안전을 인질로, 세계연합에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마침 오늘 인근 고등학교에서 생명 유지관에 견학을 왔으며, 학생들 중 대다수는 탈출했으나 일부 학생들의 행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우선, 범인들이 보낸 영상을 시청하시겠습니다.]

곧 까만 고글에, 까만 가죽점퍼를 입은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인지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머슥한 듯 한참을 뺨을 긁적이다가, 주위의 인물을 쿡 하고 찌르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에에......처음뵙겠습니다(좀더 세게 나가!). 전 KMA의 간부 A입니다. 이번 생명유지관 점거 테러에 대해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이봐, A! 요점은 그게 아니야!). 사람의 생명이란 비록 의식이 없어도 존엄성을 가지는 것이므로 저희의 행동이 비인도적이라는 걸 인정합......(컷! 그게 뭐야?! 됐어, 나와! 내가 다시 요구사항을 말할 테니까!)"

결국 A는 화면 밖으로 나갔다. 다시 화면에 잡힌 것은 까만 고글을 쓴 여자였다. 그녀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동료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다가(어이, 아까 그건 편집해줘.) 동료의 대답을 듣고는(불가능해, 생방송이라고!) 체념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이어서 그녀는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크흠, 나는 KMA의 대장(어이, '자칭'을 앞에 붙여!) E 다. 본론만 말하자면, 우리는 세계연합의 <마정석 수거법>에 반대한다! 우리의 요구 사항은 아-주 간단해! 세계정부는 이미 수거한 마정석 300톤을 내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생명유지관을 폭파하겠다! 설마 사람의 목숨 보다 그까짓 돌덩어리가 중요하고 말하진 않겠지? 제한 시간은 1시간. 그 안에 이 요구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계획을 실행할 것이다. 이상!"

더 이상 영상은 나오지 않았다.




***




<서기 2010년 12월 31일>


나는 냉동캡슐에 누웠다. 아직 냉동은 시작도 안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추웠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무서워졌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순 없다.

눈을 감을 순 없어.

내가 눈을 감은 뒤 언제 깨어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이르면 10년 후일 수도 있고, 어쩌면 100년 후일 수도 있고, 아니면 1000년 후일 수도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이후 그녀의 옆에 있어줄 수는 없다는 것 뿐.

눈을 감을 순 없어.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공기. 지금 이 모습을 내 각막에 또렷이 새겨놓겠어. 만약 시간이란 것이 흘러가는 강과 같다면, 이 순간을 나와 같이 얼려버리겠어.

얼어붙은 내가 다시 녹으면
ㅡ 그 시간이 다시 흘러갈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