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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검고, 검은 우리들의 시간

2008.01.17 21:38

misfect 조회 수:612 추천:3

extra_vars1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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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흐른다. 이것은 상식이다.
 지금 놓치면 내일은 영영 오지 않는다. 이것이 예감이었다.
 상식, 아니 당연한 진리보다도 더 강력한 예감에, 어둠 속에 한 발을 디딘 그녀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들 수밖엔 없었다.
 탕.
 총알이 발치를 스쳤다.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는 내게 총을 쏜 여자, 다미는 말했다.
 "쓸데없이 다가오지 마. 바보 녀석."
 총구를 겨눈 채 그녀는 다시 몸을 들이밀었다. 허무에 가까운 강렬한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보였다.
 강렬한 예감은 환각 단계까지 도달했다.
 그러지 마!
 목 쉰 외침이 와 닿지 않는지,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나는 암담함에 환각만을 바라보았다.
 다미의 뒤로 수많은 시간들이 회오리쳤다. 두 시간 후의 약속, 여덟 시간 후의 저녁, 열두 시간 뒤 잠자리와 눈을 떴을 때 맞을 새 아침. 그것들 전부가 누군가의 미래이자 내일, 앞으로 올 날들을 가리켰다. 그것들은 모두 다미를 선두로 한, 지옥 밑바닥으로 행차하는 긴 퍼레이드가 되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올 날(來日)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어야 하다니.
 "미안."
 오른쪽 눈에서만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다미. 애처로웠지만 다가갈 순 없었다. 다미의 총구는 여전히 내게 향했다.
 적막 가운데 흐느낌과 목쉰 신음만이 남았다. 그리고 아차, 하는 한 순간. 적막이란 누구도 예기치 못할 때 깨어졌다.
 "안녕."
 다미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어둠 속에 내던져졌다. 동시에 환각들, 누군가의 미래가 그를 따라 빨려 들어갔다. 사물들이 빛깔을 잃고 제자리에 정지한다. 미래를, 내일을 박탈당한 것들이 영혼으로 신음한다.
 그 직후, 나는 필사적으로 뛰쳐나가 막 가라앉아가는 다미의 손을 붙잡아 홱 잡아끌었다. 기적적으로 다미를 꺼내자 어둠은 흔적 없이 사그라졌다.
 "위, 위험했다."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순간 다미가 손을 들어 뺨을 쳐올렸다.
 짝, 하는 소리에 뺨이 얼얼해졌다. 화난 듯, 우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다미가 물었다.
 "왜, 왜 그랬어! 뭣 때문에 넌!"
 대답하지 않자 다미는 그 자리에 쓰러져 흐느꼈다. 달랠 생각은커녕, 단 한 가지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제발 내일은 무사하길.


 "얼마나 사라졌을까, 내일은?"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하지만 상당히 없어졌어."
 눈에 보일 정도니까.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상당수, 절반 이상의 부분이 잿빛으로 변했다. 자살 충동을 가진 히로인과 그녀가 짊어진 인간의 '내일' 이 대결한 결과였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절망한 우리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예견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쏘아진 은빛 탄환처럼, 다미는 거침없었다. 동시에 스스로도 걷잡을 수 없도록 자신을 몰아가기도 했다. 처음엔 인간과 가능성을 수호하는 순수한 은빛이던 다미란 총탄은, 저도 모르게 이 혼란스럽고 탐욕스런 세상의 피에 물든 차가운 납덩이로 변해 내일의 심장을 꿰뚫었다.
 탄환을 장전시킨 건 역시 그때의 질문이었을 거다.
 "최근에 누가 시계를 보여주지 않았어?"
 모른다, 라고 답했다. 감추려는 게 아니라, 의도를 몰라서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처음 보는 시계가 많아졌다는 걸. 요란한 디자인을 한 스포츠시계는 굳이 보이지 않아도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다미가 그 시계를 쫓고 있단 건 조금 지나 알았다.


 "미래시계라는 거야."
 다미에게 밝혀진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눈앞에서 친구가 죽어나간 이유를 그녀에게 묻던 중이었다.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줘. '내일은 어떻게 될까.'란 호기심, 불안감에 작동하고, 의심이 커지면 미래를 강제로 실현해 현재와 충돌시켜."
 "이게 결과야?"
 친구였던, 죽은 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짙은 녹청색 피부. 원인과 늑대의 중간 정도 되는 얼굴로 칼날 같은 손톱을 휘두르며 녀석은 나를 죽이려 들었다. 그게 우리의 미래라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래 중 하나, 혹은 충돌의 결과 왜곡되어버린 미래지."
 "끔찍한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내가 끔찍하다 말했던 그것이, 실은 욕망이자 미래 그 자체인 줄 알았더라면…….
 알았다면 어땠을까?


 인간과 미래를 지키기 위해 다미는 괴물을 사냥했다. 비록 다미는 그 괴물을 야수라고 불렀고, 자신의 행위를 사냥이 아니라 체제 보호라고 항변했지만.
 "체제, 체제라. 어떤 체제를 말하는 거지?"
 "지금 같은 체제. 당연하잖아? 인간과 야수, 둘의 균형과 자율 유지."
 "그건 불가능해, 알잖아."
 사냥감인 여우는 비웃듯 말했다. 인간 모습의 구미호는 바로 미래시계의 설계자였다.
 "수호자, 이스IS의 통찰력으로도 깨닫지 못하나? 아니면 진실을 회피하는 건가? 똑바로 봐. 인간은 유지능력 따윈 없어. 파괴와 자멸을 반복하는 단세포일 뿐이지. 대기를 유지하던가? 먹이사슬을 유지하던가? 사슬에서 벗어난 데다 자신의 원래 위치를 망각하기까지 해버린 순간, 그들에겐 존재 자격은 없어진 거야."
 여우는 발밑에 널브러진 흉측한 괴물들을 툭툭 찼다.
 "똑똑히 봐, 아가씨. 이건 가능성도, 왜곡된 것도 아냐. 약속된 미래, 파멸 그 자체라고."
 "시끄러."
 다미는 총을 쏘았다. 여우가 몸을 틀어 피하곤 계속해 떠벌렸다.
 "손에 묻은 피를 봤어? 미래가, 내일이란 괴물이 흘린 피야. 내일을 지키는 자가 상대하던 게, 실은 내일이었단 건 어떤 기분일까?"
 "닥치고 어둠의 마중이나 받아."
 여우가 뭐라고, 라고 묻는 순간, 누군가 등 뒤에서 두 팔로 여우를 끌어안았다. 온통 짙은 검정으로 칠한, 유채화속 사람 그림자 같은 녀석이었다. 덜덜거리며 떠는 여우를 안고 새의 것과 비슷한 윤곽을 가진 검은 날개를 펴 감싼 녀석은 다시 제가 나온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총구를 내리고 한참 묵묵히 서 있던 다미가 갑자기 어둠을 향해 달려든 건 이때였다. 나는 그녀를 말리려 뛰어들었고, 그녀는 총을…….


 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도시는 완벽한 흑백영화 톤이 되었다. 산등성이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던 우리는 가까이 있던 팔각정으로 뛰어 들어가 비를 피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데 다미가 같은 것을 물어왔다.
 "어떡하지?"
 현실감이 없어진 도시 앞에서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걸 듣지 못한 걸로 착각했는지, 다미는 다시 물었다.
 "만일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글쎄, 기다릴까?"
 뜻밖에도 내 입에선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어둠이 걷히길 기다리는 거야. 그러면 내일이 오겠지."
 "이 황무지에서?"
 그녀의 말과, 때마침 내려친 천둥에서 나는 한 편의 묵시록을 떠올렸다. 죽은 시인에게 감사하며, 나는 머릿속으로 하염없이 그 구절을 반복했다.
 
 살아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간다
 약간씩 견디어내면서 (T. S. 엘리엇, 황무지 중)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비는 계속 흑백 도시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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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에 나와서야 숨통이 트이는걸 보니 죽어도 제때 전역해야겠습니다;;


 어쨌건 세상은 아직 화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