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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2008.10.28 09:41

LiTaNia 조회 수:946

extra_vars1 컴퓨터? 그게 뭐임? 먹는거임? 우걱우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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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들어가기 전에 - 한편 옥상에서는?


(15회의 점심방송 시점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옥상에서 같이 점심을 먹고 있는 호진과 희연. 얼마전에 유일고로 전학온 '지유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유누나.. 장난을 좋아하는 건 여전해."
"호진이가 그런 언니랑 알고 지낼 줄은 몰랐는데.. 어렸을 때 나래랑 지유언니랑 호진이랑 이렇게 셋이 어울렸던 거야?"
"응. 맞아. 그런데 도대체 유아름하고는 언제 그렇게 친해진거야.."


그 때, 때마침 들리던 점심방송 사연이었다.


"1학년 3반의 정다솜 학생의 사연입니다. 저한테는 친구가 있어요.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별로 만나지 못했죠. 그 친구한테는 좋아하는 오빠가 있었어요. 그 오빠가 전학을 가고 나서 헤어질 수 밖에 없었죠. 제 친구가 좋아하는 오빠를 다시 만났을 때, 그 오빠한테는 이미 다른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그 여자친구는 그 오빠한테 어울리지 않는데. 하지만 그 오빠는 다른 여자친구랑 갈 데까지 갔고, 생일케익을 전해준다던가 하는 것만 봤어요. 하지만 제 친구는 언젠가 그 오빠가 친구한테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 오빠의 여자친구라는 사람한테 그 오빠가 홀려있을 뿐이라구요."


호진이와 희연이는, 지금 이 점심방송에서 들린 얘기가 낯설지 않아보이는 모습이었다.


"내가 모르는 앤데.. 지금 이 얘기, 나래 얘기 아냐?"
"나래.. 아직도 호진이를 그리워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희연이보고 요물이라고 한 건 좀 아닌데..."
"나래가.. 아직 어리니까. 나래는 다른학교에 입학했지?"
"응. 새림여고라고, 여기선 좀 먼데야. 나래가 오해를 풀어줬으면 좋겠는데.."


호진이는, 휴대폰을 꺼내서 나래한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래야 나 호진인데 그동안 연락못해서 미안해 오늘 오후에 혹시 시간있어?'


그리고 그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온 답장.


'호진오빠 나래가 오빠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알아 ㅠ.ㅠ 이번 금요일에 유일고 정문에서 기다릴게'


하지만 호진이가 나래와 다시 만나서 대화를 한다고 해서 오해가 풀릴 것인가. 그리고 희연이를 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 본편 시작 --


유정이의 초대를 받고 나서 얼떨결에 유정이네 집에서 볼 일 다 봤던 어제. 그런데 유정이는 도대체 뭔 생각으로 윤화까지도 자기 경쟁자라고 말을 하는 것일까. 그냥 유정이가 민감해서 착각을 한 것이었나. 그러길래 윤화야. 손님한테 그런거 먹이는건 실례라구.


뭐 오늘도 새로운 하루는 시작되는구나. 어서 주말이 와야 내 주번활동이 끝나는데. 다행히도 이번주는 놀토 낀 주라서 오늘 하고나서 내일이랑 모레까지만 하면 된다. 야호.


오늘도 서연이는 아직 집에서 안 나온듯, 문 밖에 없다. 도대체 주번활동은 왜 이렇게 일찍 시작하는거야. 에이. 학교에나 가자.


학교에 도착한 뒤 오늘도 지겨운 주번활동을 마친 뒤에 교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교실 입구에 있는 저 녀석은 누구지. 평범해보이긴 한데, 뭔가 기분나빠.


"네놈이 주윤민이냐?"
"맞는데.. 누구?"
"유정이한테서 손 떼라. 좋은 말로 할 때."


유정이가 전학온 뒤, 주위에 유정이에 관심있는 애들이 많다는 것을 충분히 느꼈다. 유정이같은 '미녀'는 원래 내가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니까. 유정이가 나한테 계속 붙는데다가 지금 내 짝까지 되었으니 그 뒤로 유정이에 대한 다른 애들의 관심은 식은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 녀석은 뭐냐.


"유정이는.. 왜?"
"그런 보석이 너같은 놈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사실이 안타까워."
"윤민아, 얘는 누군데 갑자기 나 찾는거야?"


유정이는 이럴 때 마침 학교에 도착한 건가.


"이런 녀석은 너한테 안어울려, 안유정. 저런건 치워버려. 여기에 더 멋진 남자 '변광성'이 있잖아."
"뭐야.. 이 자뻑은. 기분나빠. 저리가."
"내가 왜 기분이 나쁜걸까. 모든 면에서 저 주윤민이라는 놈보다는 나은데."


이봐. 변광성인지 변태성인지, 지금 듣고 있는 나 주윤민도 기분나쁘다고.


"저리 가라고! 너같은 건 윤민이를 대신할 수 없다니까!"


유정이는 옆에서 애들이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유정이가 학교에서 애들한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유명한 상태인데, 그런 애가 저렇게 소리를 지르니.. 지금 시선이 상당히 두렵다.


"유정이 너는 지금 속고 있어. 두고 봐. 나 변광성이, 반드시 저 주윤민이라는 놈을 유정이한테서 떨어뜨리겠어!"


저 녀석,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면서 사라지네. 아침부터 기분 제대로 잡치게 만드는구나.


"걱정마, 윤민아. 나, 저런 재수없는 애한텐 안 가니까."
"미안, 유정아. 나 지금 얘기 별로 하고싶지 않아."
"윤민아.. 왜 그래?"
"아냐. 나 그냥 아무하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나 좀 가만히 있게 해 줘."


어제 유정이가 나를 초대해서 미약을 먹인 것이라던가, 오늘 변광성놈까지 겹쳐서 지금 유정이하고는 얘기하고 싶지가 않다. 오늘은 그냥 조용히 지내고 싶다.


어색한 분위기의 수업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고, 유정이는 뭔가 평소랑은 달리 안절부절한 모습이었다. 내가 좀 심한건가. 그리고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혜인이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이는 여전히 혜인이를 별로 탐탁치 않게 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서연이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성급한 결정을 한 것일까.


"미니는 왜 이렇게 둔한걸까? 요새 미니.. 너무 변했어."
"내가.. 변하다니?"
"요새, 미니가 나한테는 말 걸어주지도 않고, 다른 여자애들한테만 친절하고, 막 끌려다니고..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의 미니는 이런 애 아니었잖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도 지금 여자애들한테 '어쩔 수 없이' 막 끌려다니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서 어제는 유정이네 집에서 못 볼 꼴도 봤고. 내가 요새 정말 왜 이러는 걸까.


"미안해, 서연아."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민군.."
"그래도.."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나한테 보여줘. 미니가.. 어렸을 때부터 나랑 언제나 함께였던.. 그 미니라는 걸."


요새 내가 서연이한테 신경을 못 쓴건 확실하다. 고등학교에서도 같은 반이 되었는데 이번주에는 내가 주번이라서 같이 등교도 못했고, 나는 서연이가 아닌 다른 여자애들하고만 계속 얘기하고 있다보니까, 서연이가 이렇게 된 게 아닐까.


"서연이.. 윤민이랑, 어렸을 때부터 친했나봐?"
"나랑 미니한테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혜인이도 뭔가 궁금했는지 서연이에게 말을 걸었지만, 역시 서연이는 아직 혜인이한테는 차갑다.


"윤민이같은 좋은 애랑.. 한참 전부터 친했다는게.. 부러워."
"상관하지 말아줘."
"서연아.. 혜인이는 친구가 필요한 애야. 혜인이한테 친절했으면 좋겠어."
"민군. 정말 변했다니까. 항상 나한테 맞춰줬고, 내 편을 들어주는 그 민군 안같다니까.."


아무래도 이럴때는 끼어들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서연이랑 유정이가 처음 만났을때같은 스파크는 안 느껴지지만, 지금은 아직 꽃샘추위가 느껴지는 초봄이라지만 왜 이렇게 내 주변에 싸늘한 기분만 느껴질까.


그렇게 말없이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다가, 혜인이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 윤민이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어떤거?"
"컴퓨터라는 거.. 어떻게 쓰는 거야?"
"..!"


이미 컴퓨터라는 것은 21세기 생활의 필수품이나 다름없어진 상태. 아무리 컴퓨터를 잘 안쓴다고 해도 수행평가같은거 할 때 워드프로세서에서 문서를 작성해서 프린트를 한다던가, 인터넷에서 소희월드 미니홈피가 있다던가 하지 않나. 물론 나도 소희월드 미니홈피가 있긴 하지만 관리를 전혀 안하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하지만 혜인이는 '마녀'라는 것. 그래서 컴퓨터, 아니, 현대 문명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혜인이는.. 컴퓨터 안써봤어?"
"전산시간에.. 만지긴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눌러봤다가.. 컴퓨터 고장낸다고 혼나구.."
"..."


잠깐. 생각해보니 전산시간에 매번 컴퓨터가 고장난 자리가 한 자리씩 보이는데, 그러면 그 고장의 원인이 다름아닌 혜인?! 아무래도, 학교 컴퓨터를 위해서, 그리고 혜인이를 위해서 내가 나서야겠어.


"괜찮다면, 학교 끝나고 우리집에 같이 가는거.. 어떨까? 내가 아는대로 컴퓨터 쓰는 법 가르쳐줄께."
"정말.. 괜찮겠어?"
"응. 요새 다들 컴퓨터 어느정도 쓸 줄 아니까."
"고마워.. 학교 끝나고, 교실에서 기다릴께."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언제나 기분이 좋다. 혜인이한테 컴퓨터 잘 가르쳐주지는 못해도 최선을 다해야지. 그런데 서연이 얘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은거야..


"민군. 저런 애한테 컴퓨터 가르쳐 줄 때가 아니잖아."
"그래도.. 혜인이가 컴퓨터 쓸 줄 모른다니까, 가르쳐주고는 싶어서.."
"칫. 나빴어. 실망했어."


그렇지 않아도 서연이가 지금 기분 안 좋은데, 내가 또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서연이한테는 조심해야겠어.


"윤민이한테는.. 잘못이 없어. 나같은 애가 윤민이랑 친구가 되겠다고 해서.."
"아냐, 민군이 너무 둔한거야."


어색한 분위기의 점심식사를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또 만났군, 주윤민."


아침에 유정이를 원한다는 그 변광성인가 뭔가 하는 기분나쁜 녀석이랑 또다시 마주쳤네. 저런 녀석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다른 여자애들을 둘이나 끼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민군.. 쟨 뭐야?"
"몰라. 오늘 아침에 우리반에 왔는데."
"그러니까, 유정이 정도는 나한테 양보하란 말야. 사람은 남한테 베풀 줄 아는 인정이 필요한 거 아냐?"


결국 목적이 유정이였군. 그런데 유정이가 너 싫대잖아. 어떻게 할거야 그건.


"저기.. 윤민아."
"응?"


갑자기 혜인이가 내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애.. 뭔가 예감이 안좋아. 내가 한번 쟤랑 얘기해 볼께. 쟤. 옆반 교실에서 본 것 같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귀찮은 녀석은 혜인이한테 맡기고 서연이랑 같이 올라가야지. 그런데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하다.


"서연아. 미안해.. 나도 요새 어떻게 돌아가는지 막 헷갈려."


그제서야 서연이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 그래도 미니를 믿으니까."


라고 말했다. 목소리도 평소의 그 목소리로 돌아갔다. 휴. 이렇게 한 숨 돌리는건가.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수업시간이 되었지만, 분위기가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아까 그 변광성인가 뭔가 하는 녀석도 있었고, 지금 유정이랑 얘기하고 싶을 기분이 아니기에.


쉬는시간에 유정이도 뭔가 눈치챈 것 같지만,


"윤민아, 미안해. 나도 어제 윤민이를 놓치기 싫어서 이성을 잃었나봐."


어제 얼떨결에 유정이네 집에서 내가 유정이한테 한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관광을 간 기분이다.


"아냐.. 그냥 내가 기분이 좀 그래서 그래."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로 오늘 수업이 어찌어찌 끝나고 방과후 주번활동을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윤화한테서 왔군.


'오빠 나 희정이네 놀러가니까 집에 없을거야'


다행이다. 마침 혜인이한테 컴퓨터 가르쳐주는 것 때문에 혜인이랑 같이 집에 가기로 했는데, 윤화가 혜인이를 엄청 싫어하니까 둘이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윤화가 집에 없으니까 마주칠 일은 없겠군.


주번활동이 끝나고 가방을 메고 교실 밖으로 나가보니, 교실 밖에는 혜인이랑 유정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또 윤민이 때문에 온거야? 그쪽이 끼어 들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오늘은.. 윤민이랑 같이 가기로 해서."
"유정아, 미안. 나 오늘 혜인이랑 같이 가기로 먼저 약속했어."
"..칫."


유정이는 결국 혼자 가버렸다. 유정이의 발걸음이 이렇게 쓸쓸해 보이는건 처음이다. 하지만 나도 선약이 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


"저 애.. 오늘 윤민이한테 뭔가 실망한 것 같아."


내가 오늘 정말 유정이한테 심하게 대한건가. 사과하려고 했지만 이미 유정이는 한참 먼저 집으로 가버렸다. 내일 제대로 사과해야지.


혜인이랑은 같이 하교하는게 처음이다. 학교에서도 다른 반이라서 그렇게 많이 얘기할 기회는 없으니까. 그나마 어제부터 점심시간에 같이 밥먹기로 해서 그 때나마 볼 수 있긴 하지만, 평소에는 별로 볼 기회가 없지.


"나. 학교 끝나고 누군가랑 같이 하교하는거.. 처음이야."
"정말.. 처음이야?"
"응. 엄마 살아계셨을 때.. 다른 애들하고 같이 놀지 말라고 했고, 엄마 돌아가신 뒤 중학생이 되고 나서도 나랑 가까이 하는 애들이 없었어. 그래서.. 학교 끝난 뒤에 지금까지 쭈욱 혼자서 집으로 갔는데."


역시 혜인이가 '마녀'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보통 애들하고는 떨어진 생활을 하게 된 건가. 그게 계속 이어져서 지금까지 외톨이로 지낸 것 같고.


"하지만.. 나, 기뻐. 내가 처음으로 같이 하교하는 애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윤민이니까."


다행히도 혜인이는 나를 좋게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라, 다른 애들도 혜인이에 대한 편견을 깨고 혜인이를 좀 좋게 봐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까 서연이라는 애 있잖아. 그 애.. 윤민이가 요새 다른 애들하고 놀아서.. 실망하고 있는 것 같아."
"응.. 맞아. 서연이한테도 잘 해줘야 하는데."


혜인이도 서연이가 요새 나 때문에 섭섭한 것을 눈치채고 있다. 내일부터는 서연이한테 잘 해줘야 하는데.


"왜 다른 애들이 윤민이보고 '둔하다'고 하는지.. 알겠어. 하지만.."


요새 들어서 여러 애들이랑 많이 엮이면서 둔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내가 여자애들한테 맞춰주지 못하는 것을 나도 알고 있으니.


"윤민이가 잘못한 건 아닐거야. 나도 그렇지만.. 다른 애들이 윤민이를 잘 몰라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서연이랑은 어렸을 때부터 친했는데."
"그 애도 윤민이를 한쪽 부분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봐야 문제만 괜히 복잡해지니, 지금은 그냥 생각하지 말자. 혜인이한테 컴퓨터도 가르쳐 줘야 하니.


"나도.. 그 컴퓨터라는 거, 쓸 수 있을까."
"걱정마. 컴퓨터라는 거, 누구나 다 쓰는거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다보니, 벌써 집에 도착했다. 윤화는 희정이네 놀러갔다고 나한테 먼저 문자를 보냈고, 집에는 아무도 없다.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으로 혜인이랑 함께 갔는데..


"이거.. 그 TV인가? 그거같이 키는거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키는거야?"


우선 컴퓨터 전원을 키는 것부터가 문제군. 본체의 전원 스위치를 가르쳐줘야지.


"이거를 살짝 한 번 누르면 컴퓨터가 켜지는거야."


전원 스위치를 누르니까, 당연스럽게도 컴퓨터의 전원이 들어왔다.


"켜졌는데.. 이제 써도 되는거야?"
"아니. '부팅' 이라는 걸 하는 시간이 걸려. 좀 기다려야 해."


얼마 안 되어서 윈도우즈 XP 화면이 뜨고, 지렁이가 열 마리 넘게 지나간 뒤 계정 선택화면이 떴다. 우리집 컴퓨터는 내 계정과 윤화 계정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계정의 패스워드를 입력해서 로그인을 해야 한다. 나랑 윤화랑 바탕화면도 다르고 쓰는 프로그램도 달라서 이런식으로 나눴다.


"이건.. 뭐야?"
"나랑 내 동생이랑 컴퓨터 같이 써서 이렇게 나눠놓은거야."
"왜.. 둘이 나눈거야?"
"같은 컴퓨터지만.. 쓰는 게 많이 달라서, 둘이 안 나누면 서로 불편하니까."


내 비밀번호를 키보드로 입력하고 확인을 클릭하려고 하는데, 혜인이가 또다시 불렀다.


"윤민아, 이거.. 원래 이런거야?"
"왜?"
"뭔가 막 누르는것 같은데.. 화면엔 별표밖에 안보여."
"이건.. 암호를 입력하는건데, 이 암호가 화면에는 안 보이게 이렇게 별로 뜨는거야."
"그러면, 누른 것들이 다 별표가 되는거야?"
"화면에서만. 실제로는 그 암호가 다 입력이 돼."


컴퓨터를 잘 모르는 사람한테는 이게 왜 그런가 가르쳐주기 쉽지가 않지. 내가 과연 혜인이한테 컴퓨터를 제대로 가르쳐줄 수 있을까.


"주윤민. 잊을만하면 이상한 생각한다? 나도 컴퓨터라는 거, 배우려고 하는데,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길 바래."
"미안해, 혜인아.."


자꾸 잊어버린다. 혜인이는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 같기 때문에 혜인이 앞에서는 엉뚱한 생각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혜인이가 평소에는 조용하긴 하지만, 저럴 때의 혜인이는 솔직히 정말 무서워.


어쨌든, 암호를 입력하고 나서 버튼을 클릭하니, 컴퓨터 바탕화면이 보이면서 컴퓨터가 켜졌다.


"여기서.. 뭘 해야 하는거야?"
"화면에 있는 그림들이 '아이콘'이라는 건데, 그것을 누르면 프로그램을 실행하는거야."
"실행해서.. 뭐 하는데?"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한다거나, 문서를 작성한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그 때 윤민이가 봤던 (검열삭제) 같은거?"
"..."


그 때 그 수호천사인가 뭔가가 혜인이였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아니, 그 '수호천사'라는 게 내 앞에 나타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내가 야구 동영상을 감상했을 때, 혜인이도 '첫 경험'이라고 하니 충격이 좀 큰 게 아니었겠지.


"그런.. 것도 할 수 있긴 하지만, 컴퓨터로 할 수 있는건 정말 많아. 여기 아이콘을 눌러보면.."
"이렇게?"


어이. 이봐. 변혜인, 지금 모니터에다가 뭐하는거야.


"누르라고 해서 눌렀는데,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손으로 모니터를 누르면 되는게 아니라, 여기 있는 마우스라는 걸 움직이면 화살표가 따라가는데.."
"아.."
"이 화살표가 원하는 곳에 도착했을 때 마우스에 있는 버튼을 빠르게 두번 누르면.."


마우스 화살표는 '한글 2005'를 가리키고 있었고, 버튼을 더블클릭하는 순간 '한글 2005' 프로그램이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우와.."


혜인이의 표정을 보면 많이 놀란 것이 보인다. 나도 가끔 TV에서 평소에 못보던 것을 막 봤을 때 저런 게 있었나 하고 막 신기했는데, 혜인이가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것을 처음 봤다면,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런데.. 윤민아, 이걸로 뭐 하는데?"
"이걸로.. 문서 작성이라는 걸 하는거야."
"그건.. 또 뭐야?"
"이 키보드를 이렇게 누르면.."


키보드를 누르자, 화면에는 그 키에 해당하는 글자가 나오고, 혜인이는 이것을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와. 그런데, 이렇게 쓴 글씨, 지울 수 있는거야?"
"응."
"화이트 칠하면 되는..거야?"
"아니. 여기 엔터키 위에 왼쪽 화살표가 백스페이스라는 건데, 이걸 누르면 글자가 지워져."


키보드의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는 것으로 이미 친 글자를 지우고 나서, 새로운 문장 하나를 적었다.


'나 주윤민은 지금 변혜인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혜인이는 여전히 이 모든 것을 모니터가 뚫어지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신기해.. 이런 기계에다가 직접 글을 쓸 수 있다니."
"그리고, 어느정도 글을 썼으면, 이렇게 저장도 할 수 있고, 저장된 걸 이렇게 부를 수도 있어."


내가 듣기로 이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옛날 버전에서는 저장할 때 '새 이름으로'라고 써있어서 컴맹 교수님이 파일명을 까치 참새 두루미 도요새 이런 식으로 새(조류) 이름으로만 저장했다는 얘기가 있지. 지금은 그거 때문인지 '다른 이름으로'라고 바뀌어서 헷갈릴 일이 없지만. '테스트'라고 파일명을 지어서 저장한 뒤에, 중학교 때 수행평가로 낸 독후감 하나를 불러왔다.


'나나야 연대기를 읽고 - 31120 주윤민'


아무리 영화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 때 판타지 소설로 독후감을 쓴 것은 정신줄을 완전히 놨다고밖에는 얘기를 못하겠다. 하긴 다른 애들이 중3이나 되어서도 위인전 우려먹기를 한 것보다는 그나마 좀 나은것 같지만.


"저장된 문서를 부른 다음에 이렇게 인쇄할 수도 있고."


인쇄 메뉴를 실행한 뒤 확인 버튼을 누르자, 방금 불러오기를 한 독후감은 프린터를 통해서 출력이 되었다.


"와.. 요새는 집에 활자가 있는거야?"
"활자가 아니라, '프린터'라고, 컴퓨터로 글을 쓴 걸 이렇게 종이에다 인쇄하는거야."
"어쩐지.. 왜 학교에서 애들이 숙제한 게 활자로 인쇄한 것처럼 깨끗한가 했더니.."
"다 집에서 프린터로 인쇄했으니까."
"나도 이런거 있었으면 좋겠어.."
"혹시 프린터 쓸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나중에 숙제할 때 필요할 것 같아.."


이제 한글 2005는 그만 보여주고, 인터넷을 한번 보여줘야지.


"그리고 여기 인터넷 익스플로러라는 것을 두 번 클릭하면.."


인터넷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클릭하자마자, 화면에는 '네버' 첫 화면이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 주소창을 클릭한 뒤에 주소를 입력하면 '웹 사이트'라는 곳에 들어갈 수 있어."
'따르르르릉'


가만. 컴퓨터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갑자기 웬 전화벨소리야. 지금 이 시간이 딱히 전화가 올 만한 시간은 아닌데.


"혜인아. 잠깐만. 전화가 와서. 잠시 전화 좀 받고."
"응."


그래도 집으로 온 전화니까 어쩌겠냐. 받아야지.


"여보세요."
"귀하께서는 피쉬카드 이 백 만원을 연체하셨습니다. 상담하시려면 9번을.."


딱 들어보니까 요새 인터넷에서 얘기가 많이 나오는 사기전화같다. 서투른 발음으로 떠듬떠듬 말하면서 돈을 갈취하는 것이지. 저런거 중국에서 많이 건다는데, 감히 사기전화를 걸다니. 한번 역으로 엿먹어볼까.


"네, 안녕하세요. 피쉬카드 이백만원을 연체하셨으니, 계좌번호랑 이름을 알려주세요."


뭔가 위화감밖에 들지 않는 어투야. 저기서 계좌번호를 제대로 불러주면, 내 돈이 중국으로 확 빠져나가겠지?


"제가 홈페이지가 하나 있는데요. 그 홈페이지에 적혀 있어요."
"주소 불러주세요."


과연 이 주소로 낚일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말해봐야지.


"더블유더블유더블유쩜 엠이에이티.."


그리고 들려오는 엄청나게 낯익은 노랫소리. 성공이다!


"You spin me right round baby right round♬"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야 이 개새x야 사기치는게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할 것이지 이게 뭐야 x만한게!"


한국말 배울 때 너무 험하게 배웠네. 그러니까 이런 사기를 왜 쳐. 그런데 전화를 끊었는데 노랫소리는 계속 들리네?


"like a record baby right round round round♬"


뒤를 돌아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낚으려고 전화에다 불러준 주소를 혜인이가 들어가봤던 것이다. 이미 혜인이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고, 여차하면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아보인다. 여자애가 보기에 저 사이트 화면은 정말 민망하지.


"주윤민.. 실망이야. 이런 이상한 데가 윤민이 홈페이지..라는 거야?"
"미안.. 그냥 이상한 전화가 와서, 그 사람들 속이려고 그런거야. 내 홈페이지는 따로 있어."


웹 브라우저에 소희월드 주소를 적은 뒤에, 내 아이디로 로그인을 해서 미니홈피에 들어갔다. 나는 미니홈피 관리를 별로 안 해서 혜인이한테 보여주기가 민망하네.


"이게 미니홈피라는 거야. 요새 애들 다 하나둘씩 하고 있어."
"미니홈피.. 여기서 뭐하는거야?"
"그냥.. 자기만의 공간을 인터넷 안에서 꾸미는거야. 내 껀 볼 게 별로 없는데, 서연이꺼 한번 보여줄께."


링크를 클릭하고 서연이의 미니홈피를 보여줬다. 서연이의 미니홈피는, 내 것에 비하면 스킨도 그럴듯한 걸로 있고, 하나하나가 예쁘게 꾸몄다는 티가 확 난다.


"와.."


오늘 혜인이한테 보여준 거 하나하나 혜인이한테는 얼마나 신기했으려나. 그런데 미니홈피 인사말이?


'문서연 - 1992.9.3. 이렇게 내 맘을 몰라주는 그 애가 아니었는데.. 너무해. 애가 왜 이렇게 변한거야.'


서연이는, 미니홈피에서까지 나한테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든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가.. 그 서연이라는 애 미니홈피야?"
"응. 맞아."
"그 애.. 학교에서도 윤민이한테 실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에서도.. 그걸 이렇게.. 적은것 같아."


혜인이마저 이렇게 나에 대한 서연이의 마음을 인정하고 있는 시점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는 불 보듯 뻔한게 아닐까.


아차. 내가 오늘 뭐 하고 있는거지. 내가 자주 들르는 사이트에 들러야지. 오늘은 엔젤헤일로가 어떻게 업데이트되었을까.


"여기는.. 뭐하는데야?"
"그냥..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커뮤니티 사이트라는거야."


딱 게시판을 보자마자 새로 올라온 글이 보인다.


'요염한 조공명, 자신을 고발하려는 여성 '힐링비전'한테도 추태를 보이다'


글을 읽어보니, 조공명 저건 정말 답이 없다. 전에 여자 하나를 그 모양으로 망쳐놓더니, 그러고서도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인가.


"인터넷이라는 거.. 정말 별 게 다 있구나."


인터넷 브라우저를 끄고, 게임이나 한 번 해볼까. 혜인이 앞에서 건전 앤 파이터를 하긴 좀 그렇고, 슈팅게임 ESPRADE라는 걸 해야지. 3명의 캐릭터 중에 하나를 골라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슈팅게임인데, 총알이 상당히 많이 날아다니지.


"이거.. 어떻게 하는거야?"
"z랑 x가 총알, c가 폭탄, 화살표가 움직이는거야. 내가 하는거 잘 봐."


나도 이거 심심할 때마다 가끔 해서 처음엔 1스테이지도 못 깨고 죽었는데 지금은 한 3~4스테이지 정도는 간다. 하지만 예상대로 3스테이지에서 죽었네.


"윤민이.. 다시 봤네. 저런거.. 어떻게 피해?"
"하다보면 쉬워. 한번 해봐."


혜인이한테 키보드를 넘겨주고 혜인이는 1스테이지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1스테이지 보스도 가지 못하고 다 죽었다.


"이거.. 뭐야. 왜 이렇게 많이 나와."
"그래도 이거 난이도 최대한 낮춘건데."


하지만 난이도를 낮춰도 이런 게임을 전혀 안 해본 혜인이한테는 무리였으리라. 아무리 도전을 해도 1스테이지 보스까지도 가지도 못했다. 그러기를 수십번..


"와. 얘 결국 만났네. 한번 죽여줘야지."


하지만 죽여준다는 말을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총알비를 피하지 못하고 혜인이의 캐릭터는 이미 죽어버렸다.


"나.. 못 참겠어. 쟤.. 직접 죽여버릴거야."
"혜인아, 설마?!"
"말리지 말아줘. flxksldksms fhflzhsdlek flxksldksms fhflzhsdlek.."


혜인이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거야. 그리고 잠시 후.


펑.


컴퓨터의 모니터와 본체는, 완전히 터져버렸다, 혜인이도 폭발 때문인지, 그을린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도 본체의 부품은 멀쩡해보인다. 특히 하드디스크. 이건 아직 살았다. 그런데 그 때..


"오빠, 다녀왔어. 어?!"


윤화가 하필 이 때 들어온 것이다. 수습할 시간이 전혀 없이. 게다가 혜인이가 컴퓨터를 부숴버렸으니까.


"이.. 이 마녀.. 오빠. 언제 이 마녀는 집에 불러온거야."


그렇지 않아도 윤화는 혜인이를 엄청 안 좋게 보고 있는데, 혜인이의 이런 모습을 보니 혜인이를 더 안 좋게 보는 것은 안봐도 DVD.


"컴퓨터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가르쳐주려고 데려왔어."
"그런데.. 이 마녀가 우리 컴퓨터를 이렇게 부쉈잖아. 이봐요. 마녀씨."
"..네?"
"당장 이 집에서 나가요. 안 그러면 십자가로는 안 끝날거야. 마녀 쫓는 의식이라도 제대로 할 거야!"
"윤화야, 진정해.."
"오빠같으면 진정하게 생겼어? 저 마녀가 컴퓨터를 부쉈는데."


윤화는 화가 제대로 났다. 그 '마녀 쫓는 의식'이라는 게 뭔지 몰라도, 여차하면 정말 그걸 할 태세다. 어쩔 수 없이 혜인이는 집에서 나가야만 했다.


"미안해, 윤민아. 내일 학교에서.. 봐."
"마녀씨. 그냥 좀 조용히 나가요!"


다행히도 우리 집 컴퓨터가 산 지 5년이나 된 고물컴퓨터라서 돈만 있으면 새로 사도 되지만, 혜인이에 대한 윤화의 편견이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아서 문제다.


"오빠. 내가 그러니까 저 마녀랑 놀지 말라고 한 거잖아."
"미안해, 윤화야."
"저 마녀가 오빠한테 달라붙지 않게, 뭐든지 다 할거야."
"..."


지금 이 시점에선 할 말이 없다. 윤화도 화가 많이 났고, 윤화의 기분을 맞춰 줄 수밖에 없는걸까.


- 다음회에 계속 -


19. 변광성 : 17살. 남자. 유일고 1학년 4반에 재학중. 유정이를 좋아하고 있어서 이번에 윤민과 정면승부를 하려고 하지만, 유정이 받아들일리가 없다. 게다가 하필이면 혜인의 옆반이라서 혜인한테도 안 좋은 일을 당하게 될 인물. 겉모습은 윤민보다는 잘 생기고 키도 큰데.. 이런 이야기에 나온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시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시험기간도 있었고, 겹친 일이 정말 많아서 소설 연재가 늦어진 점을 사과드립니다. 이번 회에는 점심방송이 들리고 있는 동안 호진이와 희연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번외편으로 써봤습니다. 그리고 혜인이가 컴퓨터를 배우려고 시도했다가 결국 윤민이의 컴퓨터를 날려먹는 회가 되었는데, 확실히 마녀가 '기계치'라는 편견은 저도 역시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편견에 따라 컴퓨터를 제대로 쓸 줄 몰라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표현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요. 이 와중에 서연이는 윤민이를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고, 유정이랑도 사이가 멀어진 윤민이. 게다가 유정이를 좋아한다는 라이벌 변광성의 등장. 과연 윤민은 이 엉켜버린 관계를 어떻게 풀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