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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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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영윤은 정체 모를 여자를 뒤쫓아 걷고 있었다. 여자는 느긋하게 걸으며, 조금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정면만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뒤따르던 영윤도 조금 긴장이 풀려서 멀리서 보면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두 사람이 거리를 둔 채 여유로운 밤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겨질 듯했다. 영윤에겐, 어제 그 소란을 피웠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광경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지 몰랐다. 눈 위를 물들인 붉은 기운은 피가 아니었을지 모르고 쓰러진 남자도 시체가 아니었을지 모르며 저 여자가 들고 있던 권총도 모델 건이나 혹은 전혀 다른 물체, 예컨대 소주병 따위였는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때 앞서가던 여자가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천천히 왼쪽으로 돌렸다. 영윤은 조금 옆으로 비켜서 걷긴 했지만 처음 뒤를 밟을 때처럼 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의 시선은 불 꺼진 상점 간판들 중 어느 하나를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계속 돌리며 걸음을 서서히 늦추던 여자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영윤도 조금 긴장하면서도, 이제와 멈춰서면 행여나 이상하게 볼까 싶어 자연스레 계속 걸음을 옮겼다. 둘의 거리는 점차 가까워가고, 여자도 이제는 완전히 영윤을 향해 몸을 돌린 채였다. 영윤은 고개를 숙인 채, 겨울밤 혹독한 추위를 도무지 견디지 못하겠다는 양 온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양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아직도 어느 간판인가를 쳐다보는 여자 곁을 그대로 지나칠 생각이었다. 여자와 불과 대여섯 발자국 거리를 남겨두고 영윤은 힐끔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보았고, 여자 역시 시선을 내려 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영윤을 보았다. 두 시선이 서로 맞닿는 순간 여자는 씩 웃었고,



 "이제 슬슬 눈치채줄 때도 되지 않았어?"



 분명하게 영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윤은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여자를 보았다. 당혹감과 두려움, 불안이 섞인 그의 두 눈을 보고서 여자는 헛웃음 쳤다.



 "처음엔 나름 눈치라도 있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계속 따라오기에 배짱은 있는 녀석인가 했더니 물 빠진 생쥐마냥 굴고."



 영윤이 가게 안에서 느꼈던 여자의 희미한 존재감은 점차 무게를 더해가며 예리한 칼날처럼 그를 노렸다. 섬뜩하고 차가운 여자 눈앞에서 영윤은 전날처럼 잔뜩 얼어붙어서 빠져나갈 길이 없을까 주위를 두리번댔다. 그가 발견한 건, 어느새 그들 주위에 인적도, 차량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선지 여자는 영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쿡쿡 웃었고, 또 그렇게 말했다.



 "이제야 눈치 챘어? 둔하구나, 너? 보통은 이렇게 말을 걸기 전엔 눈치를 챌 텐데."
 "들어본 적 있어."



 단 한 가지, 영윤은 비로소 그녀에 대한 단서 한 가지를 잡았다. 그에게서 두려움이 조금 누그러지고 당혹감도 한결 덜어져 보였다. 여자는 영윤에게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다.



 "만일 네가 무인도나 폭설로 고립된 산장에 있지도 않고, 침몰하는 배나 불타오르는 건물 속에 있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지상에서 1만 km 이상 떨어진 상공이나 수면 아래 마찬가지로 그만큼 떨어진 심해에 머무르지도 않는데도 이상하리만큼 고독하고, 꺼림칙하고, 위협적이라 느낀다면 그게 바로 네 자신이 '마법사의 장원'에 들어왔다는 의미다."
 "알고 있구나?"
 "그쪽으로 아는 사람이 있거든."



 사실 마법에 대해 영윤이 아는 건 그것이 거의 전부였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마법은 있어도 없는 듯, 쓰여도 쓰지 않는 듯 고려되는 수많은 무의미한 것들 중 하나에 불과한 탓이다. 그 때문에 영윤은 자기 앞에 정체를 드러내려는 그 여자 마법사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환영해, 내 영지에 들어온 걸. 느와르 천사의 검은담비, 다미의 세상에 온 걸 말이야."
 "먼저 이야기를 해 보자."



 거창한 소개 후 여자는 영윤을 빤히 쳐다보며 반응을 기다렸다. 영윤은 잔뜩 긴장해 그 다미란 여자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무방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거기에 질린 다미가 한숨을 쉬며 먼저 말을 꺼냈다.



 "난 싸우는 거 질색이야. 지저분하거든. 이리저리 흔적을 남기고. 혹시 알려나, 양복쟁이 양반은?"



 영윤의 양복 코트 차림을 마뜩찮게 보면서 다미는 코웃음 쳤다. 순간 영윤은 이 여자가 어젯밤 어디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떠올렸다. 영윤이 주춤대며 뒷걸음치자 다미는 이상하단 듯 그를 보다가 별안간 뭔가 떠올린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잠깐만. 이 옷. 어째선지 생각이 날 것 같거든."



 친구 집에서 자고 바로 출근한 탓에 영윤이 입은 옷은 전날 차림 그대로였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영윤은, 자기 코트 자락을 집으려는 다미 손을 저도 모르게 뿌리쳤다. 잠깐 놀란 듯 표정을 지었던 다미는 이윽고 생각이 났는지 배시시 웃었다. 소름끼치는 그 얼굴에서 영윤은 얼핏 깊게 팬 보조개 자국을 보았다.



 "이제 알겠어. 당신 어제도 날 만났지? 그 골목길에서 말이야. 맞아, 그때 부리나케 도망치던 녀석. 그래서 쫄아 있구나? 근데 그럴 거면 왜 쫓아온 걸까?"



 어째서, 라고 다미는 물었지만 영윤은 자신이 대답하지 못할 거란 걸 잘 알았다. 그녀를 쫓아오던 그 때, 매 순간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다미도 그런 영윤의 생각을 짐작한 건지 불현듯 한숨을 푹 쉬더니 그를 보고 말했다.



 "불나방 같은 타입인가보네, 당신은."



 네, 맞아요. 저는 불나방입니다. 온 몸을 불 속에 던져 사르지 않고선 스스로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가여운 존재입니다.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지르는 비명을 영윤은 어렴풋이 들었다. 그것은 다미에게, 혹은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지르는 비명이라기 보단 자신을 향해 지르는 아우성이었다. 생전 처음 듣는 그 목소리에 영윤은 소름이 돋았다.



 "오케이. 그럼 불나방 아저씨. 기왕 얽힌 김에 분명히 하죠."



 어느 샌가 손에 권총을 들고서 다미는 영윤에게 말했다. 총구는 영윤의 이마 한가운데를 불과 몇 cm 앞에서 겨냥하고 있었다. 다미는 속삭이듯 말소리를 낮췄다.



 "어제 난 한 사람을 천사에게 보냈지. 그러니까, 죽였다고."



 대답 대신 영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언제든 그 꼴로 만들 수 있어, 알아?"
 "그래."



 그러면 자아, 다미는 영윤의 오른쪽 정강이를 걷어찼다. 영윤은 신음하며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하이힐 부츠 위에서 그 담비 여왕은 거만하게 영윤을 내려 보았다.



 "하지만 살 기회를 주지. 선택해. 천사의 마중을 받던가, 아니면 네가 천사를 초대하거나."



 다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라 영윤은, 내키진 않지만 다시 물었다. 다미는 불쾌해하며 총구를 더욱 바짝 영윤에게 대었다.



 "말 많은 사람이 먼저 총을 맞는단 말, 혹시 들어는 봤으려나?"



 조금 후에 영윤은 입을 떼었다. 그 말을 듣고 다미는 입 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고, 권총을 다시 품에 넣었다. 택시 한 대가 빠른 속도로 그들 옆을 지나쳤고, 두 사람 건너편엔 술 취한 행인 하나가 전봇대에 기대어 토악질을 해댔다. '마법사의 장원'에서 벗어난 것을 깨달은 영윤은 그제야 한 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럼 가볼까?"



 무릎을 꿇은 영윤에게 다미는 제 손을 내밀었다. 영윤은 그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일어섰다. 아직 채인 정강이가 꽤나 쓰라렸다.



 "한동안 당신 집에서 신세 지겠습니다. 잘 부탁해."



 정강이를 문지르는 영윤을 보며 다미는 꽤나 유쾌한 듯 떠들어댔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영윤 또한 속으로 조금 들떠 있었다. 주체 못할 호기심에 사로잡힌 어린 시절 당시 심장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독특하게 뛰곤 했다. 오래전 잊혔던 그 박동이, 어째선지 다미란 이 정체모를 여자 앞에서 서서히 재현되는 듯 느껴진 것이다. 오랜만에 영윤은 재미있다고 느끼면서도, 어째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 전전긍긍해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상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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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어찌 중간에 인터넷 쓰게되서 조금 올립니다.


 그나저나 하늘 님 어떻게 전줄 아셨나 했더니 최근 쓴 글 목록 보면 대체나 알기도 하겠네요;;


 


 서귀포시에서도 한참 먼 제주도 시골 마을에 있습니다만 비오는 것만 아니면 날씨는 괜찮네요. 춥지도 않고. 간만에 잘 쉬고 있네요.


나중에 또 기회 되면 들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