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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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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천사가 마중한다>


#1
 함박눈이 밤거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택시에서 막 내린 영윤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하얀 가루를 흩뿌리는 어두 칙칙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퇴근길에 거하게 걸친 술기운이 찬 공기에도, 하늘에서 흩뿌려 대는 얼음 조각의 서늘함에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잠에서 막 깬 양 흐리멍덩한 머리엔 어느 순간 현기증이 밀려와, 제멋대로 눈 앞 세상이 빙그르 돌다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시야가 불현듯 깜깜해졌다. 오른쪽 어깨가 몹시 아팠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자신은 문 닫은 가게 앞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왜 애꿎은 가게 셔터를 들이받고 그러냐. 키득대며 일어나긴 했지만 오른팔 전체가 심하게 아렸다. 아, 씨발. 영윤은 평소 하지도 않는 욕지거리를 툭 내뱉었다.



 망년회 분위기를 탔나. 영윤은 자신이 오늘 유난히 들떴다고 느꼈다. 들뜨지 않고선 왜 보통 때 같지 않은 행동만 골라하겠는가. 그날 영윤은 유난히 떠들어댔고, 유난히 나섰고, 유난히 평소 입에 잘 대지도 않는 술을 마셔댔다. 모험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그로썬 뜻밖의 행동이었다. 소주 2병 이상 마셔본 일이 없던 자신이 술자리에 자진해, 3차, 4차까지 따라간 이유가 뭘까. 영윤은 생각했다. 평소 바쁜 일이다, 상사 눈치다 해서 보기 힘들었던 입사 동기들을 오랜만에 만난 자리라? 한 해 마감하는 술자리라 그 숱한 회식이며 접대 자리와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아니면 줄곧 맞은편에 앉아 생글생글 웃던 신입 여직원의 얼굴이 유난히 귀여워 보여서? 암튼 그 중 어느 하나에 '꽂혀서' 부어라 마셔라, 자리를 옮겨가며 계속된 난리 브루스 속에서 겨우 정신 챙겨 슬슬 집에 돌아가 보자 한 그 때 영윤은 비로소 자신이 처음 와보는 포장마차 안에 딱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았다. 먼저 뻗은 세 명의 동기 녀석들과 그 신입 여직원 한 명이 한 자리에 있는 걸 보았고, 기억에도 없는 잔치국수 한 사발을 떡 하니 제 앞에 대령하는 종업원의 얼굴을 보았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툭 한 마디 내뱉었다. 뭐야 이 꼬라지들은. 뺨이 발그레해진 여자가 듣고는 피식 웃었다. 다른 것들은 인사불성이 되어 제 몸 가누기도 버거워 보였다.



 어찌어찌 그네들을 배웅해 보내고서 겨우 집 근처에 다다랐다 했더니 이 꼬락서니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영윤은 추하게 부들대는 다리로 애써 몸을 가누어 일어서려 하다 몇 번이고 언 바닥에 미끄러졌다. 겨우 담벼락을 기대어 선 그는 조심스레 한 걸음을 떼었다. 입으론 나직한 소리로, 집으로 향하는 길을 주정부리듯 외운다. 이 골목길을 따라 조금 걷다가, 두 번짼가 세 번째이던가 나오는 교차로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하지만 10여분이 지나도 두 번짼가 세 번째이던가 하는 교차로는 나오지 않는다. 계속 같은 자리만 뱅뱅 돌고 있는 영윤 자신만이 있을 뿐.



 한밤중 주택가 골목선 인적이라곤 보이지 않고, 간혹 서너 마리 도둑고양이만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들어가면 갈수록 낯설어만 가는 그 골목길에 영윤은 일단 한 발짝 들이 밀고, 다시 불안하게 비틀대며 다음 발걸음을 내딛어갔다. 하늘로 한없이 치솟은 전봇대, 징그럽게 여기저기 늘어진 수십, 수백 가닥 전선이며 케이블이 그 사이를 가로질러 다시 성벽처럼 솟은 담벼락 너머 이층집들과 빌딩 건물로 제각기 빨려 들어간다. 가로등 불빛들은 어쩐지 힘없이 흐릿하고, 도둑고양이 간혹 싸우는 소리만 멀찍이 들려올 뿐 거리는 소름끼치도록 고요했다.



 그 좁고 기분 나쁜 골목길 한 구석에 여자는 서 있었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밤공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왼손에 뭔가 묵직한 것을 든 채 발치에 놓인 어느 물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여자다. 그녀 머리 위에서 흐릿하게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이 비스듬히 비추었기에, 영윤은 그나마 거기 사람이 있다고 알 수 있었다. 한밤중 눈 내리는 거리에 여자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 곳에 있다. 영윤은 이 순간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감을 덜었다. 여자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가가며 영윤은, 대체 이 낯선 골목이 어딘지나 물어볼 생각이었다. 여자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살인자나 총을 든 강도만 아니라면야.



 그 때 우연인지 가로등 불빛이 일제히 환해지며 여자의 모습도 머리칼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드러났다. 뒤에서 한 갈래로 묶은 긴 머리칼과 베이지색 반코트에 청바지 차림, 영윤이 보는 위치에서 반쯤 등을 돌린 채지만 그녀가 쓴 알 없는 안경도 언뜻 보였다. 왼손에 들린 큰 권총과, 그녀 발치에 누운 가죽재킷 입은 남자 모습도 함께.



 그들 주위로 쌓인 눈은 붉게 물들어 있다. 주위가 환해진 순간부터 박동을 높여가기 시작한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영윤은 그 자리에서 조심스레 여자를 살폈다. 영윤이 있는 걸 눈치 챈 기색은 없었다. 영윤은 몸을 천천히 돌렸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내달음 쳤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곳곳에 눈이 쌓이고 얼어붙어 미끄러운 길 위에서 영윤은 수없이 넘어지며 구르다시피 그 골목을 빠져나갔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못한 건 도망치기 전 무심코 본 여자 얼굴이 잊히지 않고 생생해 참을 수 없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나 영윤은 멈춰 섰다. 주위는 환하고, 간혹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그는 처음 택시에서 내린 그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안도감 탓에 헛웃음이 절로 나고, 다리에선 힘이 빠져나갔다. 영윤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방금 전 보았던 광경들을 떠올렸다. 그 골목을 통과해 집으로 갈 엄두는 도무지 나지 않았다. 망설임 끝에 그는 길을 따라 조금 걸었다. 이럴 때 괴롭힐 친구가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그는 몇 블록 아래 버스정류장까지 내려갔다. 거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 대학 동창 녀석이 사는 원룸 건물이 있었다.



 안에서 문을 열어주자마자 영윤은 다짜고짜 들어가 코트와 머플러를 제멋대로 벗어던지고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친구는 별 기색도 없이,



 "새벽같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었다. 영윤은 귀찮다는 듯, 묻지 말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영윤이 내팽개친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옷걸이에 걸면서 친구는 말한다.



 "별로 상관없지만 나 두세 시간밖에 못 있어줘. 일이 있거든."
 "너 재택근무잖아."



 무슨 소리하냔 투로 영윤이 물었다.



 "평소면 그렇지. 오늘같이 고객을 만날 땐 아냐."



 아무렴 어때. 영윤은 모로 누워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마. 멋대로 자다 갈 테니. 그러고 보니 언제 쉬냐, 그 뭐지. 거래소?"
 "기타기술거래소. 신년 연휴엔 휴장인데 왜, 같이 술이나 한 잔 하려고?"
 "그래, 생각 있어?"



 전화해 주면, 하면서 친구는 제 옷을 꺼내 입는다. 영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맨바닥에 누운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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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참....


 


감 좀 잡으려면 오래 걸릴거 같네요. 암튼 이걸로 복귀신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