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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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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윤은 긴장이 풀려 그대로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다미는 총을 들고 있었다. 총구에선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영윤은 멀쩡했다. 마지막 순간 다미가 총을 비틀어, 총알이 영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 땅바닥에 박혀 있었다.
 영윤을 내려다보며 다미는 말했다.



 "전에도 말했었지? 너 불나방 같아."
 "불에라도 뛰어들지 않으면 사는 것 같지가 않더라고."
 "나이도 어린 게 얼마나 살아봤다고."
 "그러는 넌!"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이 일시에 마주쳤다. 빤히 상대 얼굴을 보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키득키득, 쿡쿡쿡 숨죽여 웃다가 서로를 보며 참을 수 없어져 깔깔대고 웃는다. 언제 살벌하게 총을 겨누고 상대를 윽박질렀냐는 듯 유쾌하게 웃는 사이 긴장감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검은 천사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해."



 이윽고 다미가 웃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영윤은 이번엔 흔쾌히 그 손을 잡았다. 다미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힘껏 그를 끌어당기고 옆에서 부축해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영윤은 신음을 흘렸다.



 "어둠이 마중 나와 줄 때까지, 잘 부탁할게."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아픔 탓인지 영윤의 눈가엔 눈물까지 살짝 고여 있었다. 볼썽사나운 얼굴을 보고 다미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영윤은 투덜대긴 했지만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일단 집에 가자. 다 얘기해 줄 테니까."
 "당연하지. 아, 근데 다리 어떡하지? 병원 가야하나?"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미소를 짓는 다미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친근해 보였다. 영윤은 잠자코 부축을 받으며 그 골목을 떠나갔다.
 두 사람의 모습을 조금 멀리 떨어져 선 마녀도 보았다. 반려를 오른쪽 한 팔로 껴안고는 그 뺨에 입을 맞추며, 인형처럼 새하얀 여자를 탐미하면서.



 "저들 봐. 한 쪽은 저주받은 낙오자, 다른 한 쪽은 우리를 향해 기웃거리는 가여운 희생자."



 두 눈을 감은 여자가 그 얘기를 듣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녀는 개의치 않고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가 원하는 데로 해주자. 재미있을 거야. 저 어리바리한 남자가 끝내 진창 속을 헤매고 싶어 한다면, 내가 빠트려줄게.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이 어둠 속에."



  기웃거리기만 해서는 진짜 재미있는지 알 수 없거든. 달빛을 등에 업은 마녀는 킥킥대며 웃었다. 희뿌연 연기가 그녀의 발에서부터 일어나 이윽고 두 사람 모두를 휘감아 사라져 버렸다.


 


     *          *          *


 


 숱한 신과 왕들도 그 전쟁에서는 무기력했다. 최후의 전쟁이자 최초의 전쟁.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태어나 그것을 준비하며 자랐던 다미조차 그 앞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다미는 그날의 일들이 악몽처럼 떠오른다. 위대한 신들, 거인과 괴물들은 서로 뒤엉키고 불꽃을 튀기며 맞붙어 싸웠다. 일찍이 신의 전사들이요, 준비된 지도자들로 불리던 발키리들은 우왕좌왕, 공포와 두려움에 떨면서 전장에 뿔뿔이 흩어졌다. 양 진영의 첫 접촉에서 발키리와 그들이 이끄는 영웅 전사들은 2/3가 목숨을 잃었고 그 이후로는 전장에 펼쳐진 어떤 싸움에도 끼어들지 못했다. 사기를 잃은 자들은 냉정을 잃고 거인들에게 달려들다 목숨을 잃거나, 아니면 겁에 질려 도망치다가 적들, 혹은 아군의 실수로 죽어나갔다. 마녀의 반려 역시 그렇게 죽은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참담한 모습을 다미는 모두 보았다. 신들의 왕이며 가장 현명한 자가 거대한 늑대에게 삼켜지는 것도, 가장 강력한 영웅 신이 세계를 감싸 쥐어짜는 거대한 뱀과 맞부딪쳐 함께 죽는 것도 두 눈으로 보았고, 이윽고 저 아름다운 하늘 궁전이 분노한 거인들로 인해 불태워지는 것까지 숨죽여 지켜보았다. 불길은 좀처럼 사그라질 줄 모르고 세상을 삼킬 듯 이글거렸다. 그 모습을, 다미는 숨어서 모두 보았다.
 자신이 그 싸움만을 위해 준비된 자라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그녀도 다른 발키리들처럼 신들을 위해 제 몫을 다할 각오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이끄는 죽은 영웅들에게도 그러한 사명을 일깨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세계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 참가할 수 있단 것만으로도 명예롭게 여긴 그들이었다. 이겨서 혹은 방패 위에 얹혀서 돌아오리란 말은 인간들만을 위해 준비된 경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미를 좌절케 한 것은 눈앞에 펼쳐진 실제 전투의 모습이었다. 마술사 왕의 창과 영웅 신의 해머가 휘둘러지고 배신자 신과 거인 왕들의 공격이 곳곳에서 펼쳐지는 가운데 발키리들과 영웅들의 공격은 무의미했다. 그들은 거대한 늑대의 털 한 오라기도 자를 수 없었고 사악한 뱀의 비늘 하나도 상처 입히지 못했다. 수많은 자들이 짚단처럼 베어져 사라져갔다. 마녀의 반려도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거인들의 칼을 맞고 하늘에서 떨어져 버렸다. 온몸에 피칠 갑을 하고서도 악을 쓰며 칼을 휘두르는 그녀를 보던 한 거인 왕이 저주를 담아 그의 검을 그녀에게 던졌다. '장미 가시'라고 불린 그 검은 그 여자의 가슴팍을 관통해 바닥에 박혔다. 여자는 나비 박제처럼 땅에 박혀 피를 흘리고 천천히 고통스럽게 숨을 거뒀다. 수많은 이들이 그녀와 같이 비참하게, 혹은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그들이 준비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적들이 너무도 강했다.
 그래서 다미는 전장을 빠져나와 정신없이 도망쳤다. 하늘에서 다리를 건너 대지로, 강으로, 산으로. 너무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통에 주변 풍경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겨우 알아본 것은 저 멀리 궁전이 타오르며 붉게 물드는 하늘과 귀에 맴도는, 전우들의 처절한 비명뿐이었다. 애써 그것을 보지 않으려, 듣지 않으려 애쓰며 다미는 발키리들의 화려한 날개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몇 날 며칠을 날고 또 날았다. 바다를 앞에 두고서야 그녀는 겨우 멈춰 설 수 있었다.
 한밤중이었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해안선 너머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이 넘실대었다. 설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미는 자신을 가로막은 그 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껏 도망쳐왔던 등 뒤, 눈앞으로부터 그녀 왼편 멀리까지 둘러선 검은 물을 제외하면 이제 갈 방향은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밖엔 없었다. 다미가 한 번도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그것을 보던 다미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혼자인 것을 깨달은 것처럼, 여태껏 단 한번 어머니에게서 떨어져본 적 없는 어린 아이처럼 끔찍이도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마르고 목이 쉬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서야 그녀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유일하게 그녀에게 남은 한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지치면 굴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잠자고, 배가 주리고 목이 마르면 눈을 주어 삼켰다. 혹독한 시기가 오래 지속되었지만 그녀는 모든 고통을 죗값이라 여기고 감내했다.
 세월이 바뀌고 삭막하던 주위 풍경도 서서히 변해갈 무렵 이윽고 다미는 전쟁이라곤 알지도 못하는 순진무구한 사람들을 만났다. 선량한 그들의 대접을 받으며 다미는 또다시 울었다. 기나긴 고행이 그렇게 끝나는구나 하면서, 두 번 다시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발키리는 그렇게 검은담비가 되어갔다.



 "너무 길지? 재미도 없는 얘기가."



 막 옛날 얘기를 마친 다미가 웃으며 영윤에게 말했다. 곁에 앉은 영윤은 얘기가 끝난 후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그가 떠올린 건 얼마 전에 보았던 신화 속 이야기였다. 암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엄한 비극 속 주인공들과 다미 이야기를 비교해 보았다. 무척이나 비슷하면서, 너무나도 다른 두 이야기였다.



 "왜일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긴데, 어째선지 무척 와 닿는 건."



 영윤이 중얼대는 말을 듣고 다미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민망하리만큼 유심히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녀에게 영윤이 물었다. 왜?



 "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어."



 다미가 이야기하는 건 분명, 저 옛날 북쪽에서 내려온 자신을 맞아준 순박했던 그들일 것이다. 영윤은 그렇게 지레짐작했다. 다미가 말을 덧붙이곤 웃어 보였다.



 "그것 때문에 그네들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데."



 영윤도 웃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것, 그녀가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나니 그녀가 좀 더 친밀하게 느껴졌다. 다미도 영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었다고 알아서 기뻤다.
 이제, 다미가 몸을 털고 일어나 영윤을 보았다. 영윤은 멍하니 그녀를 올려보고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근데 꼭 이렇게 해야겠어?"
 "어머, 네가 기대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어째서, 라고 영윤이 항변할 새도 없이 다미는 자기 총을 그에게 디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영윤은 오른팔을 붙들고 쓰러졌다.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는 영윤 옆에 다미는 나란히 누워 피를 흘리는 팔을 빤히 내려 보았다.



 "얘, 어때? 많이 아파?"



 대답은 없었다. 다미는 잠자코 그 곁에 누워 영윤이 흘리는 피에 자기 입을 대고 핥았다. 깨끗이 나은 영윤의 허벅지 위에 제 허벅지를 기대고, 두 손으론 그의 목과 허리를 감싼 채 목으론 그의 피를 넘기며 새벽이 오기를 눈을 감고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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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 더 올립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실 신화를 빌려왔습니다..이전에도 몇 번인가 등장시켰던 캐릭터입니다만 배경설정은 이번에 처음 올리는 듯하네요. '검은 담비'로서 다미 얘기는 이번엔 아껴두려 합니다. 다음에 능력이 되면 올리도록 할게요.


이야기도 슬슬 후반부로 접어듭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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