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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Travelin' Boy

2007.08.06 07:41

우중낭인 조회 수:773 추천:3

extra_vars1 [생존으로의 손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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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은 가고 또 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아간다. 만물은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또 다시 꽃을 피운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돌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파괴되고 또 새롭게 결합된다. 존재의 동일한 집은 영원히 재건된다. 모든 것은 서로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난다. 존재의 원환은 영원히 충실하게 자기의 자세를 지키고 있다. 모든 <순간>마다 존재는 시작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언젠가 읽은 책에 있던 구절이 문득 알베르의 새하얀 머릿속에 스미듯이 새겨졌다. 존재의 영원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그 줄글대로, 넓게 보자면 분명 만물은 돌고 돌고 도는 거니까 영원하다고 할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만물을 이루는 한 개체이자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더 나아가 ‘나’에게 있어서는 실질적인 영원이란 있을 수 없다고 깊이 결론지어 놓은 지 오래였다. 만약 있다면,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만은 영원할 수 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지금 알베르는, 영원의 가능성을 엿 본 기분이 들었다. 저 소년의 신비한 우물 같은 벽안을 본 순간, 그로부터 비롯된 영원- 세상 모두가 흔히들 말하는 ‘시간이 멈춘 것 같다’라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알베르는 정신이 멍한 와중에도 그 개념을 이해함을 자각했다.
 알베르가 이렇게 속 편히 있는 동안 마나난의 상황은 급박했다. 아까 샘물을 발견하고 물을 뜨던 와중에 돌연 비가 내려 피할 곳을 찾아 사위를 둘러보던 중, 갑자기 무언가가 뒤에서 달려드는 것을 느낀 것이다. 얼른 오른쪽 허리춤에서 파냐드 대거를 휘두르며 피했지만, 그 무언가는 하나가 아니었다. 열 마리가 넘게 무리를 지은 이리떼. 마나난과는 아마도 면식이 있던 녀석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복수라도 하러 온 걸까.’
 무섭게 으르렁 대는 이리의 목을 오른손으로 단단히 죈 채로 마나난은 입술을 간질이며 흐르는 빗방울을 혀를 내밀어 천천히 핥았다.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못됐다. 오른팔은 상처가 벌어져 무기를 휘두르기엔 무리가 있었고, 아까 어떤 이리에게 왼쪽 다리를 물린 게 벌써 시큰해져왔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 종일 걸은 탓에 싸울 여력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몇 마리 죽이긴 했지만 상대는 아직도 10마리는 족히 되어 보인다. 어찌 해 볼 틈이 도저히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지- 라며 마나난은 눈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체념한 것처럼. 그러나 입가에는 빗물에 젖어 식은 미소가 박혀 있었다.
 
 컹! 컹!


 사납게 울어대는 이리들은 그러나 마나난의 아래 짓눌려 있는 동료 때문인지, 아니면 마나난의 기이한 분위기 때문인지 사납게 짖거나 옴찔 옴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로 위협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 앞에 있는 소년의 행동에 이리들은 몇 걸음 씩 뒤로 물러나게 된다.
 마나난은 왼손에 들고 있던 파냐드 대거를 거꾸로 들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 깔려 있던 이리의 옆구리를 푸욱 찔렀다. 그 이리가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마나난은 단검을 빼어 이번에는 등허리에 박아 넣었다. 즉사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나난의 손에 목이 꽉 쥐어진 탓에 이리는 고통에 찬 소리도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바람이 빠지는 듯한 고르릉 거리는 신음만을 연신 빼냈다. 거세게 몸을 움직여 저항했지만, 마나난은 더 빨리 손을 놀려 이리의 몸 여기저기에 칼을 꽂아 넣을 따름이었다. 앞다리에, 등에, 다시 등허리, 반대편 옆구리에 파냐드 대거를 순식간에 찔러댔고 귀를 잘라 떼어냈다. 능숙하게 솜씨를 발휘하는 소년은 파란 눈동자를 한 번 깜짝 안 하고 차라리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리의 가죽을 뚫고 살 속에다 칼을 박아 넣을 때마다 들리는 푹 푹 거리는 소리는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비는 쏟아져도, 그 소리와 이리의 몸에서 솟구치는 핏물은 다 씻어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목 뒤에다 단검을 꽂아 넣었을 때, 그나마 들리던 그 이리의 신음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마나난은 고개를 들었다. 지면 위로 부딪는 빗발은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 이유 때문에 이리들의 귀를 찢는 으르렁거림이 들리지 않게 된 것이 아니었다. 이리떼는 누렇게 드러냈던 이빨을 감추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채로 마나난을 황망히 쳐다봤다. 마나난과 눈이 마주쳤을 땐 몇 마리인가 움찔 거리기까지 했다.
 “아직 안 갔네.”
 자의는 아니지만,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마나난의 얼굴에 죽은 이리의 상처에서 돌연 피가 솟구쳐 묻었다. 흰 눈밭 위로 붉게 물든 단풍이 쌓인 것처럼. 그런 모순을 품고 있는 소년은 이미 숨통이 끊어진 이리 위에서 내려왔다. 이리떼가 겁을 집어 먹고 몇 걸음 주춤주춤 물러섰고, 마나난은 죽은 이리의 시체를 뒤집었다. 그리고, 배를 갈랐다. 
 다시 시작할 셈이다- 이리떼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정확히는 털끝 하나하나를 쭈뼛 세우게 할만치 끔찍한 소름을 느끼며 꼬리를 내림과 동시에 순식간에 숲속으로 도망쳤다.
 이 모든 과정을, 알베르는 지켜보고 있었다.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에 오히려 침착해진 눈매로, 그러나 입술이 창백해지고 파르르 떨리는 걸 어찌할 수는 없이.
 “…아…….”
 마나난은 이리떼가 사라진 쪽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리의 배를 가르느라 굽혔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곧 크게 휘청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알베르는 입술을 씹듯이 깨물고는 마나난에게 달려갔다.
 “…괜찮냐?”
 겉으로 드러나는 뜻은 몸이 괜찮냐고 물어 본 거지만, 안으로는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냐’라는 의미도 내포 돼 있었다. 그러나 그걸 알 리 없는 마나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냥 좀 진이 빠진 것 같아.”
 알베르는 마나난의 바지가 조금 찢어진 왼쪽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힐끔 봤다.
 “엎여.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
 마나난은 잠시 멍한 눈으로 알베르를 올려다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향해 내어진 갈색 꽁지머리 소년의 등 뒤에 엎였다. 눈을 감은 채 마나난은 자신을 엎고서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알베르의 비 비린내 섞인 아릿한 땀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동갑이면서도 자기 보다는 훨씬 널찍하고 또 의외로 따뜻한 등을 꼬옥 껴안았다. 감고 있는 마나난의 눈에 타는 듯한 빨간 긴 머리가 등허리까지 내려온 다른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그 표상 속에서도 엎여 있는 자신의 머리를 간질이기도 하고 덮어주기도 하는 빨간색 머리칼에선 아침에 맺힌 이슬에서나 맡을 수 있는 싱그러움이 배어있었다. 전혀 다른 향이긴 하지만, 맘을 편하게 해주는 점에선 알베르의 땀 냄새와 분명 비슷했다. 빨간 머리의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환하게, 몹시도 환해서 바보 같을 정도로 밝고 상쾌한 미소.
 “아빠…….”
 졸음에 빠지는 것처럼 정신이 아늑해져가는 마나난은 명치 언저리까지 뭔가 울컥 치미는 것을 꾸욱꾹 눌러 참았다.
 “야, 다 왔다.”
 짐을 놓았던 장소에 도착한 알베르는 아까 비를 피하던 곳으로 갔다. 그런데 뒤에 엎인 마나난은 영 반응이 없었다.
 “자냐? 빨리 내려와 짜샤. 난 이래봬도 육체파가 아니란 말이다!”
 버럭 성을 내며 알베르는 거의 매치다시피 해서 나무 밑동 위에 마나난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 정신이 든 마나난은 잠시 멍하니 알베르를 바라보다가 문득 뭔가를 깨닫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왼쪽 소매로 얼굴을 쓰윽쓱 문질렀다.
 “그럴 거면 얼른 지울 것이지, 쯧.”
 알베르는 마나난이 아까 얼굴에 튄 이리의 피를 지우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마나난이 소매로 닦아낸 건 빗물도, 피도 아니었다. 그 보다도 더 차갑고 뜨거운, 눈가에서 흘러내린 한 방울의 물기였다.
 “가만히 있어 봐.”
 아까 수풀 속에 던져놓은 짐을 뒤적거리더니 웬 붕대를 가져온 알베르는 마나난의 왼쪽 바지를 걷어 올렸다. 그리 깊진 않았지만 이리에게 물린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베르는 마나난의 다리를 세게 잡고 붕대를 칭칭 감기 시작했다. 조금 아프긴 했지만 마나난은 내색 않고 알베르가 하는 양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렇게 쳐다보면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건지 마나난은 맑고도 끈질긴 시선을 알베르에게 고정시켰고, 그 응시의 희생양은 짜증과 압박을 동시에 느꼈다. 
 “미안.”
 그래서 사과를 하는 말도 조금 퉁명스럽게 툭 튀어나왔다.
 “별로 그래 보이진 않네.”
 마나난이 싱긋 웃으며 딴에는 농담을 건넸지만, 알베르에겐 꽤 데미지가 셌다. 그래서 묶고 있던 붕대를 힘을 줘서 무지하게 세게 두르기 시작했다.
 “앗, 아파!”
 “시끄러!”
 곧 붕대 묶는 걸 마무리 짓고 알베르는 마나난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울창한 나무들이 가려주긴 했지만 간간히 그들의 머리 위로 빗물이 떨어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아니어도 이미 두 소년은 옷 입고 샤워라도 한 듯한 꼬락서니였지만. 
 “비 오니까 좋다.”
 미소 띄운 입가를 헤에 벌리며 얼빠진 소리를 하는 마나난의 옆얼굴을 보며 알베르는 심정이 복잡해졌다. 아까 아무렇지도 않게 한 생명을 유린하고 상대를 압도해 보인 자가, 바로 이 아이라니. 그리고 순간을 영원의 심연으로 빠트리는 눈동자의 주인. 
 “난 가출 중이다. 두 달 전쯤에 지긋지긋한 미치광이 노인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왔지. 우선 최초의 목적인 ‘도주’는 달성했는데 말야, 막상 이 마을까지 오고 나니까 뒷날이 걱정되더만. 애초에 그리 중요하거나 무거운 목적의식을 갖고 출발한 여행길도 아니었고.”
 돌연 시작된 알베르의 이야기에 마나난은 조금 의아해졌지만, 그렇다고 말을 끊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잠자코 얘길 들었다. 조금 약해진 빗소리에 녹아들듯 어울리는 알베르의 낮은 목소리가 희미한 졸음을 툭툭 자극했다. 눈을 감아, 눈을 감아- 마나난의 귓가로 어떤 달콤한 유혹이 속살거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널 만났다. 야, 내가 왜 진짜 널 따라왔는지 아냐?”
 알베르가 사뭇 진지하게 물어왔지만, 마나난은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반쯤 감고 침을 흘리며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고 있었다. 알베르는 파박 하고 성질이 나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며 마나난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 어 자는 거 아냐. 뭐? 아, 쿠키 좋아하냐고 물었지? 응 좋아해.”
 “그러냐. 그거 다행이네. 그럼 네놈 무덤가에 초코칩 박힌 쿠키를 놓아주마.”
 “와, 고마워 알베르.”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알베르는 지친 듯 한숨을 푸욱 내쉬었고, 마나난은 작은 소리로 키득키득 웃었다.
 “그건 네가 말해줬잖아. 나랑 싸웠던 무술가한테 협박 받아서 그런 거 아니야?”
 마나난이 그제야 똑바로 답하자 알베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역시 듣고 있었잖아’라고 속으로 궁시렁댔다.
 “단지 그 이유뿐이겠냐, 설마. 물론 그 절명인지 절망인지 요상한 조직도 성가시지만, 그렇다고 겁에 질려서 헛짓할 성격은 아니거든.”
 마나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알베르의 성격이 이상하긴 하지만, 분명 어떤 단단한 자신감과 절대로 꺾이지 않는 무언가를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 마나난의 눈에도 선했다. 단순 협박에 지레 겁을 먹고 갈팡질팡하는 위인은 아니었다.
 “널 따라온 건, 순전한 내 의지다. 그때 그 자와 네가 싸우고 있는 도중에 도망치지 않은 것도, 어제 기절해있던 너를 경비단에 넘기거나 하지 않은 것도.”
 그 말에 마나난은 알베르와 처음 만났을 때 한 대화를 기억해냈다.
 “왜 그렇게 웃고 있냐고, 했지. 내가 깨어나길 기다린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까 넌 수배범인 내게 겁도 내지 않고 말했어.”      
 알베르는 고개를 돌려 마나난을 바라봤고, 마나난도 알베르와 눈을 맞췄다. 알베르의 진지한 얼굴 위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그리곤 맺혔다가 흘러내렸다. 느리게 그리고 갑자기 빠르게, 그리고 턱으로 내려가서 다시 맺힌다. 마나난은 그 과정을 지켜봤고, 알베르는 피부로 느꼈다.
 “그래. 그게 오늘도 네 옆에 내가 있는 이유야.”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서?”
 “그래. 그래서, 미안. 단순 호기심 때문에 널 괴롭혀버렸다. 그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
 그 말에 마나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눈동자만 움직여 잠시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그리곤 다시 눈길을 알베르에게 올리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용서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베르는 직감했다.
 “그런데 변명 좀만 더 하자면, 처음 네놈 기절해있는 얼굴을 봤을 때 난 정말 놀랐다. 의식이 없는데도 웃고 있는 낯이라서. 근데 그 웃는 게 실은 절대 웃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아서.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면 웃는 거라 할 수 있냐? 그건 흉내지. 혹시 콜로디(Collodi)가 쓴 춤추는 인형에 대한 동화 아냐? 몸이 부서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을 만들어준 인형사의 시체 앞에서 진혼한답시고 미쳐서 춤을 추던 밀랍인형 이야기 말야. 네 녀석의 면상을 보자마자, 난 지금 동화 속에 들어온 거 아닐까, 그리고 내 앞에 있는 건 그 미친 밀랍인형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나난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후두둑 후두둑 내리는 빗소리는 더 세지거나 약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칠 기미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오늘 밤새 내릴 작정인 듯이.
 “무슨 소린지 알겠냐. 정상이 아니었다고, 이 미친 녀석아. 아까도 그랬어. 이리떼와 싸우던 네 모습 말이야. 그 입 끝만 말려 올라간 얼굴 안에 들어있는 건 투명함이 아닌 허무함에 가까운 공허였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알베르는 혀뿌리까지 올라와 맴도는 ‘하지만 환상적이었다’라는 말은 억지로 참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이 불안한 세계가 네 안에 있어. 나란 놈이 딱히 오지랖 넓은 녀석이 아니란 건 나도 알고 있지만, 어째선지 두고만 볼 수 없었고 그렇기에 난 네게 물어 본 거다. 뭘 좀 알아야 도움을 주던지 할 거 아니야?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물어서 네가 답을 해주는 것 자체가 네 금이 간 세계를 새롭게 해줄 방법이 되진 않을까 싶다. 아, 참고로 말하자면 실은 지금도 네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거다.”
 조금은 신랄함이 섞인 목소리가 그치자, 공기 중을 울리는 것은 빗소리뿐이었다. 말을 마친 알베르의 표정은 조금 나른해 보이면서도 쉬이 꺾이지 않을 것 같은 의지가 묻어 있었다. 마나난은 알베르의 이마를 바라봤다. 이번엔 화를 내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마주 화를 낼 듯한 얼굴이었다. 처음 봤을 때 느낀 인상 그대로, 고집이 만만찮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나려 했다.
 “말 정말 잘해.”
 “감사의 말씀 천만에.”
 마나난은 아직 상처 때문에 시큼한 왼쪽 다리는 쭉 뻗은 채로 가만히 두고, 오른 다리만을 세워서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는 어깨에 힘을 풀고 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내가 아빠라고 하고 있는 사람은, 친아빠가 아니야.”
 마나난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길 시작했다.
 “나랑 내 동생 브란은 린다우 중부에 있는 어떤 시골에서 태어났어. 이상하게도, 그 마을 이름이 뭐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 사실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내 친아버지는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병이었다는데, 너무 어렸을 때라 잘 기억도 안나. 여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뒤에 병에 걸려 돌아가셨거든. 그리고 어머니는,”
 순간이었지만, ‘어머니’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마나난의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고, 경청하고 있던 알베르는 그것을 눈치 챘다. 그러나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는 것은 이어지는 마나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우울증이 조금 심하셨어. 그래… 아버지가 죽기 전까진 그냥 우울증 정도였다고 들었어. 그런데 그 후로는 점점 심해지시더니 내가 여덟 살 무렵엔 기어이 미치더라. 밤낮으로 히스테릭한 소리를 질렀어. 무슨 단어의 조합도 아니었고, 그냥 고함. 동물이 내는 것 같이 말야. 그러다가 한 달에 한 번, 정확히는 생리주기가 오면 식칼을 들고 브란을 죽이려 들었어. 사타구니에서 흐르는 피는 닦지도 않고 뚝뚝 흘리면서 우릴 따라왔지. 그때마다 나와 브란은 옆집 그라첸 아주머니 댁으로 피하거나 언덕 위 호두나무까지 죽을힘을 다해서 도망쳤어. 그리곤 서로 부둥켜안고 울곤 했지. 그러다가 내가 11살 때, 북부 왕당파와 남부 공화당파 간의 세 번째 전쟁이 일어났고, 그 둘 사이에 끼어있던 우리 마을까지 전쟁터로 변해버렸어. 그리고 그 통에 어머니는 죽었어. 하지만, 솔직히 왕당파의 군인이 어머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을 땐 차라리 안심이 됐어. 내게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닌 악마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금발이었던 내 머리 색이 처음으로 바래진 건 분명 그때였어. 지금의 은빛머리가 된 건 며칠 전 일이지만.”
 알베르는 장갑을 낀 왼손으로 이마를 쓱쓱 비비며 자꾸 힘이 주어지려는 것을 풀었다. 코  끝에 어떤 아련한 향이 어른거렸지만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어 없앴다.
 “어떻게든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나랑 브란은 남부로 내려갔어. 전쟁터에서 멀리,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러 마을을 전전했지. 시장바닥을 전전하면서 구걸도 했고 소득이 없는 날엔 어쩔 수 없이 먹을 걸 몰래 훔치면서 목숨을 유지했어. 하지만 그래도 1주일에 3,4 일은 예사로 굶었던 것 같아. 그렇게 한 달은 넘게 버텼을까. 나와 브란은 어떤 얼굴에 상처 있는 사내 손에 잡히게 됐어. 정말 무섭게 생긴 남자였지. 그 사람은 노예상인이었어. 그는 우리 남매와 다른 아이들을 가득 실은 마차를 끌고, 그 지긋지긋한 중부 쪽을 향하더라. 노예매매는 귀족들이 있는 북쪽 땅에서만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가는 도중에 도적들을 만났어. 도적들은 사내를 죽였고 곧 마차에 실려 있던 우리들을 발견했어.”
 처음엔 담담하던 마나난의 목소리가 이야기가 점점 깊어짐에 따라 어둡고 쓸쓸해져갔다. 그런 이야길 듣는 알베르도 맘이 편할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묘한 공감대를 느끼기 시작했다.
 “도적들은 남자애들이나 아직 어린 여자애들에겐 별 다른 이용 가치를 못 느꼈는지 그냥 놓아줬어. 하지만 아이들 중에는 막 성장기를 끝낸 여자애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 애들만은 놓아주지 않았지. 마차 안에서 그 애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지만 나와 브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어.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그저 달아나고 싶어서… 앞만 보고 뛰었어. 몇 번을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지 몰라. 그렇게 숲길을 달리다가, 정면에서 걸어오던 어떤 남자와 부딪쳤어. 그 남자의 이름이 라우 더 레이븐(Low The Raven), 내 양아버지야.”
 긴 숨을 내쉬며 마나난이 불쑥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 우습다는 듯이. 분명 밝지 못한 우울한 얘기였는데도 갑자기 마나난이 웃음을 터트리자 알베르는 의아해져서 이마를 구겼다.
 “아, 미안. 갑자기 아빠가 우리 둘을 보자마자 한 말이 생각나서.”
 “뭐라고 했는데?”
 “혹시 먹을 거 갖고 계신 거 있으시면 좀 나눠주세요, 라고 했어, 푸하하!”
 “…뭐라고 반응해야 하는 거냐.”
 알베르는 괴이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쩝 다셨다. 마나난은 웃음을 끊어보려 숨까지 참아 봤다. 하지만 한 번 쏟아진 웃음은 봇물 터진 듯 하여서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어떻게 겁에 질려 울면서 뛰어오는 아이 둘을 붙잡고 불쌍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야. 그것도 존댓말이라니, 웃기지 않아?”
 알베르는 하아, 하고 한숨만 내뱉을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나난은 웃음을 거두고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게 됐다.
 “그때 이야길 하자면 좀 더 길어질 것 같으니까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갈게. 아무튼, 그렇게 처음 만나게 돼서 나와 브란은 아빠와 함께 다니게 됐어. 여행자였던 아빠는 우리 남매를 끌고 마르덴 산맥을 넘어서 바로 여기, 로이드 왕국에 정착했어. 내가 12살 되던 때야. 그리고 4년… 정말… 행복하단 말로는 한없이 모자랄 정도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믿을 수 없는 생활이었어. 전쟁 이후 웃음을 잃고 울음만을 얻었던 동생은 누구보다도 더 크게 웃음소릴 내며 닭과 달리기 경주를 할 수 있게 됐고 쿠키를 맛있게 굽는 법도 배웠어. 그 모든 게 우리의 진정한 부모인 아빠 덕이었지. 아빠는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남자야. 그는 웃는 법을 알고 있었어. 그거 하나만으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이었어.
 알베르는 왜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물었지? 나도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해. 난 아빠가 좋았어. 그래서 아빠처럼 되고 싶었어. 어떤 난관이 와도 그 앞에서 여유 있게 웃을 수 있는, 웃음으로 모든 걸 이겨내는 그런 사내가 되려했어. 그런데 얼마 전, 소중한 두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가서… 그래서 그 둘을 내 손으로 직접 땅에 묻어주고, 그런데… 그 앞에선 도저히 웃을 수가…….”
 그 둘의 무덤가에 서서 마나난은 다짐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다시 이렇게 울 일도. 전처럼 웃을 일도.’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알베르에게 과거를 털어놓는 도중에 마나난은 즐거운 듯이 웃어버렸고, 라우와 브란을 묻는 순간을 떠올리는 지금도 이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늘은… 안 그치겠네.”
 알베르는 쏟아지는 빗물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반은 나른함에, 반은 연민에 젖은 눈으로.
 “그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차라리 시원하게 퍼부었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마나난의 귀에도 알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나난은 알베르가 하는 얘기를 알아들었고, 그 순간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걸 참지 못하여 결국엔 입 밖으로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오열했다. 그 소리는 하늘이 눈물을 떨구는 소리와 어우러져 숲속을 비애로 가득 적셨다.
 알베르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 소년의 비정상적으로 강한 삶에 대한 집착과 금방 무너질 듯이 위태로워 보이는 세계- 서글픈 미소. 그러나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소년의 미소도 분명 맑게 갤 거라고 확신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비가 그치도록 먹구름을 두들겨 패서라도 해와 하늘의 얼굴을 드러나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리라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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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의미 있는 연재였네요. (별로 봐주시는 분은 없었지만, 적어도 한 분 정도는 재밌게 읽어주셨으리라 소망합니다 ㅎㅎ)
 이로써 이 이야기의 도입부인 '생존으로의 손짓' 챕터는 마무리 지었는데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인 관계로 당분간은 연재하기가 힘들 거 같습니다. 대학 문제를 얼른 처리하고 이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 볼 생각입니다. 하하핫
 여하튼, 좋은 생활이 함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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