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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단편]마지막 작곡

2005.05.25 08:04

까마귀 조회 수:86 추천:2

extra_vars1 페르마의 마지막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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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마는 온 종일 착잡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나이 벌써 47세 이제 황혼기에 접어든 것이다. 빈에서 꽤 유명한 작곡가인 그는 젊은 날의 화려한 데뷔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황금빛 인생을 누벼왔다. 그러나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는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복을 갖추고 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며 여운에 잠겼다. 외진 구석에 자리 잡은 이 다리는 언제나 침묵을 지켜주었기에 조용히 명상에 잠기거나 적막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페르마의 기분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그의 감정의 기복은 극심했다. 절대 빠져 나갈 수 없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고 씁쓸한 미소로 마지막을 준비할까 라는 마음도 가져봤다.

그의 고민은 작곡가로서 중요한 문제였다. 27년의 작곡 인생에 비참하게도 만민이 인정하는 걸작 하나 있지 않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명성은 그것을 생각하면 정말 보잘 것 없었고 오히려 스스로를 한심하게 만들었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 라는 생각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그래야 한다라고 스스로의 영혼이 부축이는 느낌이었다. 그때 뺨 위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페르마는 정신을 차리고 깊게 한숨을 쉬며 중절모를 벗고 하늘을 쳐다 보았다. 검은 먹구름에 회색빛 하늘은 당장이라도 새찬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예감은 조금도 빗나지 않고 막 페르마가 다리를 내려왔을 쯤에 온 공간이 빗소리로 가득차며 온 몸이 빗발에 파묻혀 젖어나갔다. 잠시 사춘기 소년처럼 그는 그 시원함과 의미 모를 자유감을 즐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눈에는 빗물일지 눈물일지 모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의 졸작 '소나기'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었다.

*     *     *

"흑사병이 바로 옆 나라까지 퍼졌다네요. 이를 어쩌죠? 어서 피신이라도 해야하는거 아니에요?"

아내 엘리가 난로에 앉아 젖은 몸을 말리고 있는 페르마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귀찮기만 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작곡 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위험이거늘 그는 전혀 무관심 했다. 그러나 엘리의 눈빛이 워낙 간절한 지라 한마디 거들 수 밖에 없었다.

"걱정 안해도 돼. 그 흑사병이라는 것은 그 악마의 앞잡이 유태인이 퍼뜨리는 것이라 하지 않아? 알다시피 빈에는 그 따위 유태인은 아마 없을껄."

찍찍.

돌연 검은 생쥐 하나가 페르마가 앉아 있는 의자 다리를 유유히 지나며 그들만의 비밀통로인 쥐구멍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는 피식 웃었다.

"더러운 쥐는 있네요. 내일 사람을 불러서 청소 좀 해야 겠어요."

"음... 그러는게 좋겠군. 이만 자야겠어."

두 부부는 다정한 키스를 나누고 페르마는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곧장 올라 갔다. 엘리도 하품을 하며 졸려운 기색을 보이고 그냥 쇼파에 누워 잘려고 했다. 난로도 있고 따뜻해서 좋았기 때문이었다. 막 누우려고 하던 엘리의 시선에 아까 쥐가 들어간 쥐구멍이 보였다.

"밤에 나와서 깨게 할지 모르니까 막아 두는게 좋겠다."

엘리는 난로 근처에 있는 벽돌 하나를 집어 그 구멍을 막아 놓았다. 아주 작은 빈틈이라도 혹시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엘리는 일어나며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벽돌을 잡을 때 묻은 것이었다. 순간 엘리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생쥐는 유난히 검었네. 지금까지 흰쥐 말고 다른 쥐는 본 적이 없는데.. 좀 기분이 묘하네 으음.."

엘리는 눈을 잠시 깜빡이다가 그대로 쇼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찍찍..

조그마한 쥐소리가 났지만 엘리는 이미 곤히 잠든 듯 했다. 그 방금 전의 검은 쥐가 난로 위의 또 다른 구멍에서 나와 잠든 엘리를 쳐다 보았다. 마치 마음이라도 있는 눈빛이었다. 잠시 그렇게 엘리를 쳐다보던 그 검은 쥐는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 어느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 했다. 온통 검은 통로를 지나며.

*     *      *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페르마는 땀범벅이 된 얼굴을 갸늘게 떨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번에 꾼 악몽은 지독 했다. 최근 들어 늘어난 악몽은 점점 더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페르마는 악몽 속에서 관 속에 누워 있는 고인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 내려다 보는 자신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가득 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도 평온함을 갖을 수 있었다. 죽음이 의외로 두려운 것이 아닌 듯 싶어서 그랬다.

그의 관은 교회 안 차가운 석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윽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번에도 페르마는 흡족한 마음을 감추지 못 했다. 자신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일어났다.

악단이 와서 장송곡(레퀴엠)을 연주하기 시작 했다. 그 레퀴엠은 바로 페르마 자신이 작곡한 '당신의 최후를 맞이하며'라는 곡이였다. 페르마는 눈을 감고 내가 만들었어도 정말 멋진 레퀴엠이야 하며 자화자찬하고 있을 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 했다.

"저 노인네의 레퀴엠은 왜 저 모양이야? 활기찬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데?"

"하기야 페르마라는 작자가 음악적 감각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 자 잘 들어보라고 발랄한 소녀가 춤추는 듯한 음이지 않아?"

확실히 페르마의 레퀴엠은 그런 느낌이 담겨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비슷한 느낌으로 연주되는 레퀴엠이 식상해서 오히려 죽음을 편히 받아들이는 느낌의 작곡을 한 것인데..... 페르마는 그 중얼거림의 주인이 아직 젊은 새내기라는 것을 보고 다시 마음을 놓았다.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는가? 자신이 처음으로 음악에 뛰어 들었을 때 받았던 환호와 찬사를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나는, 하찮지 않아.

"정말 하찮군."

페르마의 읆조림과 정반대의 말을 한 자는 젊은 새내기가 아닌 머리에 백발이 가득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페르마도 잘 아는 자였다. 그의 등단시 가장 많은 찬사를 보냈던 로미오가 아닌가?

"로미오,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물론일세, 저 작자의 데뷔 때 있는 말 없는 말 다 짜내며 쓰레기 곡 하나를 천하의 명곡으로 만드느냐 얼마나 고생 했는가?"

"그러게 말일세, 아마 저자는 죽는 그 순간까지 몰랐을 거야. 빈의 '룰'을 말이야."

"쯧쯧....."

이 이상 그의 꿈이 이어질 수는 없었다. 페르마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거친 숨을 가다 듬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페르마는 당장에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 오선지를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 이게 아냐."

페르마는 막 쉼표를 찍고 완성된 악보를 꾸겨 뒤로 던져 버렸다. 뒤에는 이미 여러개의 꾸겨진 종이가 널려 있었다. 그는 깃털의 촉을 잉크에 다시 담그고 새 오선지를 꺼냈다.

잠시 창 밖을 보며 밤의 어둠을 주시하던 그는 다시 분주히 펜촉을 움직였다. 매우 빠른 속도로 어느 새 새로운 악보 하나가 눈 앞에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흡족한 것일까, 작은 미소가 떠오르던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악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페르마는 고뇌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은 채 극심한 두통을 겪는 양 부들부들 떨었다.

"왜, 왜 안 돼는 거지! 나에겐 마지막까지 허락되지 않는 건가?! ...... 신은."

그의 뺨으로 굵은 눈물이 흘렀다. 그의 눈동자에는 절망이 가득 했다. 젊은 날의 그 패기 넘치는 눈동자는 황혼의 나이에 이른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흐리멍텅한 눈으로 뭐라 알 수 없는 신음소리를 내던 그는 펜촉을 성난 느낌 그대로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펜촉을 받았다.

"....."

그는, 페르마는 멍한 눈으로 눈 앞에 서 있는 그를 보았다.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그늘진 눈동자에도 그의 모습이 분명히 맺혔다.

유난히 검은 색을 좋아하는 자 같았다. 훤칠한 키에 검은 중절모 그리고 마찬가지로 검은 양복을 입은 그는 유난히 말라서 기이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중절모의 챙으로 살짝 가려진 그의 흰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페르마는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

페르마는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되고 있었다. 갑자기 괴한이 출현했다, 라는 간단한 사고로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찾아올 자라면 그는 세상에서 딱 둘이라고 생각 했다. 신의 사자거나, 아니면 그 반대인

"저승사자....요?"

페르마는 간신히 쥐어짜듯이 물었다. 그에 비해 대답은 빨랐다.

"비슷합니다."

페르마는 허무함을 느꼈다. 막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 절묘한 타이밍에 죽음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끝났다, 죽음도 담담히 받아 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눈으로 찢겨진 종이를 보던 그의 눈 앞에 흰 손이 부드럽게 펜촉을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작곡가가 펜을 던지면 어떻게 합니까."

왠지 장난기 담긴 말투 같았다. 페르마는 그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그도 페르마를 쳐다 보았다. 검은 눈이 페르마의 회색 눈과 마주치는 순간,

"저는 페스트라고 합니다."

페르마는 알 수 있었다. 아니 확신 할 수 있었다. 저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 본론에 들어가지요."

저자가 무엇을 바라는 지까지도.

탁.

페스트가 손을 튕겼다. 그 순간 페르마의 방이 회색으로 번지며 전혀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 유일한 것은 페르마의 책상과 오선지 몇장, 그리고 펜촉 하나였다.

미소를 지으며 페스트는 중절모의 챙을 살짝 내렸다. 수줍어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이었다. 물론 그럴리 없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혹자는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다. 꿈을 갖지도 못하는 것이 불행한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저는 별 공감을 못 하겠습니다. 이루지도 못할 꿈, 가져 봤자 뭐하겠습니까."

페르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스트는 손을 내밀어 펜촉을 잡고 페르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페르마는 무엇일지 모를 희열에 빠져 페스트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물이 맺혔다. 아마 그의 눈물일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저는 그리 좋은 자가 못 됩니다. 그보다... 자. 시작하시지요."

능글맞게 웃으며 페스트는 양팔을 벌리고 외쳤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담아 보십시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짓지 마십시오. 한마디 해드릴까요? 당신은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떤 작곡가보다 멋진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최후의 작곡을 준비하는 페르마는 펜촉을 들어 오선지에 다가갔다. 마치 신선한 의식이라도 거행되는 듯한 느낌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일까.

그러나 펜촉은 오선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다시 책상에 내려 앉았다. 페르마는 다시 회색 눈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 안돼. 도무지 떠 오르는게 없어! 그저 이 무력함과 절망, 좌절과 울분, 끝 없는 슬픔만이... 나의 영혼이 자리 잡은 곳을 메우고 있네, 나는..."

"바로 그겁니다."

끝맞을 맺지 못한 채 페르마는 멍한 눈으로 페스트를 쳐다 보았다. 페스트는 인간의 웃음이라 볼 수 없는 어두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명곡과 즉흥적인 평곡은 닮은 꼴이라는 것을."

"......!"

번개가, 그것도 신이 내리는 천벌 엇비슷한 그런 충격이 페르마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페스트의 말을 완벽히 이해한 것이다. 명곡과 즉흥적인 것.. 그것의 닮은 꼴? 알고 있다, 나는 알고 있어.

"그 닮은 꼴이라는 것은 그 둘이 작곡가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래...! 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거다!

어느 새 펜촉은 오선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격렬한 춤을. 오선지 위에 검은 잉크가 페르마의 탐욕과 동일 했다. 욕망과 같았다. 페르마는 음악적 공식을 모두 잊었다. 아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지금 이 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그대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거다. 페르마는 지금 이 순간 스스로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었다. 페르마의 펜촉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검은 그늘이 그려지고 있었다.

페스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한번 휘둘렀다. 그 순간 페르마의 주변으로 악단들이 생겨났다. 기괴한 것은 그것들 모두가 해골이라는 점이었다.

보기만해도 오싹한 그 해골들은 각기 들고 있는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 했다. 페르마가 그리고 있는 마지막 작곡을 그대로.

"제목은?"

페스트가 물었다.

"타나..타나토스!"

"죽음의 미혹, 좋습니다."

끝까지 만족스러운 인간이었다. 페스트는 씨익 웃었다. 회색의 공간 전체에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곡이라 해도 조금도 과장되지 않을 만큼의 어두운 그늘을 연상케하는 절망곡이 연주 되고 있었다.

이 곡을 듣고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을까? 페스트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지었다.

탁.

펜촉이 드디어 내려왔다. 동시에 해골들의 연주도 끝이 났다. 페르마는 전율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당장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드디어 완성한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낸, 죽음을 앞둔 자신의 모든 마음을 영혼의 진심을 조금의 속임도 없이 표현한 것을!

드디어.. 드디어!

"수고하셨습니다."

찌익.

"......?"

찌익찌익.

한 순간 페르마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 했다. 그러나 현실은 곧바로 찾아왔다.

페스트는 페르마의 마지막 작곡을 찢고 있었다. 그 전 시대의 명곡이라 칭할 수 있는 그것을!

"뭐, 뭐하는 거냐!"

대답은 빨리 돌아 왔다.

"찢고 있습니다."

페르마는 벌떡 일어나서 페스트를 향해 악귀와 같은 얼굴로 돌진 했다. 그를 붙잡았다고 생각되는 순간 회색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도와줘 놓고 꿈의 실현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도대체 왜!"

"당신을 도와주긴 했습니다만, 한 순간의 우연이 빚어낸 이 곡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런 곡을 만들 재능도, 자격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 되면 시대에 이름을 떨쳤던 수많은 작곡가들이 얼마나 서러워하겠습니까 그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지요. 후후."

페스트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갈기갈기 찢겨진 종이조각을 손에서 툭툭 털었다. 그의 앞에는 어느 새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의 늪에 깊숙이 빠져버린 망가진 인간이 하나 보였다.

검은 옷의 사신은 페르마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머리를 잡아 채 눈높이를 맞췄다.

사신은 낮은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자아, 선택하시지요.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의 반복, 이 곳에서 당신이 바라던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죽음' 이죠. 불확실한 미래,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원하던 것을 다시 얻는다는 보장은 없죠. 그것은 당신의 몫이 아니거든요."

"....."

페르마에게 다른 선택 따윈 없었다. 그는 말 없이 행동으로 표현 했다. 그의 늙은 손이 찢겨진 악보를 웅켜잡고 있었다.

페스트는 빙긋 웃으며 결코 놓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굳센 손위에 자신의 흰 손을 포개어 올렸다.

"아주 현명한 선택이셨습니다, 그럼...."

"....."

"편히 쉬십시오."

검은 사신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됬다. 열린 창으로 새찬 빗발이 들어와 방안을 적셨다. 삐걱-삐걱 바람에 흔들리는 창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방 안에 쓰러져 있는 페르마를 처음 발견한 것은 그의 아내 엘리였다. 그녀는 남편의 쓰러진 모습을 보고 거의 혼절할 뻔 했다. 그나마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남편의 악취미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해도 속 마음은 그렇지 못한 페르마였다. 나이가 꽤 있긴 하지만 일종의 애교랄까.

하지만 이번에 엘리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느껴져서 뿐만이 아니었다. 페르마의 목 부분에 검은 반점 비슷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 늦게 들어온 하인들과 집사는 엘리와 비슷한 정신이 되었다. 거의 실성할 것 같았던 것이다. 윗도리가 벗겨진 페르마의 몸은 전체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지겹게 들어왔던 증상 아닌가,

흑사병. 그 악마의 병이 빈에 드디어 상륙한 것이다 그 첫번째 희생자가 바로 페르마였다.

그 상황이 파악되는 순간부터 빈 전체가 혼란을 넘어 절망에 빠졌다. 그 악마의 손길 흑사병은 피해갈 것이 못 됬다. 오히려 사람들은 광란에 미쳐, 숨어 있던 유태인들을 찾아 살인하기 시작 했다. 아니 살인이 아닌 그저 무차별 살육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유태인은 이미 사람이 아닌 악마의 하수인에 불과 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어둠에 휩싸이는 그 순간, 빈 전체에 어두운 음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희열과 전율에 빠질 듯한 그 선율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음악을 듣지 못했다. 이미 그들은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음악의 도시 빈이고 아니고를 떠나 인간의 청각자체가 그 음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인류 역사상 제일의 명곡이 될 수 있었던 그 음은 빈에 있던 그 어떤 인간도 듣지 못했다. 이 음악이 무엇이고 '타나토스'라는 제목을 알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둘 뿐이었다. 페르마와 그리고,

*     *     *

"와, 정말 멋진걸 안데르센?"

검은 날개를 떨며 감격에 빠져 있는 어린 루시퍼를 보며 네이 안데르센은 흡족한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천사계 제 2 층 심연계의 중앙에는 오직 루시퍼와 안데르센 두 천사만이 있었다. 그러나 관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 했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동화를 봐주는 자만 있으면 그 누구라도 족했다. 둘의 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보라색 보석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보석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담을 수 있는 특별한 보석인 '퓨처워커'였다.

퓨처워커에는 인간의 시간을 담을 수 있다. 즉 인간의 삶과 인간이 겪었던 일들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어설픈 기계처럼 영상 따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진짜 시간의 재방송 그 자체였다.

보석 안에는 한 인간이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이루고 싶다는 갈망에 빠진 인간. 바로 페르마였다.

그 안에서 페르마는 현실과 달리 자신의 최후를 멋지게 완성 했다. 인류 전시대 최고의 명곡을 이윽고 완성시킨 것이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는 받을 수 있는 모든 찬사를 받으며 죽음을 맞이 했다. 아주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보석은 다른 반면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페르마의 '현실'이였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 하고 오히려 도시 하나에 흑사병을 옮기면서 엄청난 희생을 냈다. 그의 시체와 그의 아내는 수많은 사람들의 칼과 창 아래 꿰뚫리고 찢겨 졌으며 여러 신발 아래 내려 찍히고 밟혔다.

결코 해피엔딩은 못 된 것이다. 어린 루시퍼는 하나의 보석 안에 담긴 그 둘을 번갈아 보며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왠지 슬퍼."

안데르센은 피식 웃으며 루시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당연한 거에요."

"당연한 거야?"

"그럼요."

꼬마 루시퍼는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다. 루시퍼는 오늘 또 한가지를 배운 것이다. 자신의 동화를 보며 항상 웃어주는 루시퍼가 안데르센은 좋았다. 그러나 이제 이별의 순간이었다. 루시퍼가 천사수업을 받으러 제 1 층 주신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곳은 단순한 하급천사인 안데르센은 가지 못하는 곳이다.

사실 이 2층 심층계는 루시퍼가 도와준 덕에 간신히 마련된 자리였다. 하지만 안데르센이 들려주는 그 동화가 좋은 루시퍼는 주신 할아버지의 불호령도 별 걱정하지 않으며 항상 이곳에서 안데르센을 만났다.

"그럼 안녀어엉"

"잘가요."

루시퍼가 천장의 밝은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안데르센도 등을 돌렸다. 여느 때와 같이 그의 하얀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했다.

안데르센은 검은 중절모의 챙을 살짝 내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자, 이번에는 어떤 동화를 만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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