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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수水-음飮

2005.05.31 08:19

물로쓴글씨 조회 수:34

extra_vars1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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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느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 때문에 인간들을 피해 살아남은 엘프들이 최후의 피난처로 선택한 산맥. 그곳의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 자리한 마을. 그곳에 한 어린 엘프가 앉아있다. 가을하늘처럼 맑은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지독한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는 시커먼 가을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한 엘프가 말을 건넨다.

“이제 그만 가자.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단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인간들에게 끌려가던 누나가 내뱉었던 발악에 가까운 외침만이 맴돌 뿐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또래에 비해 키가 작고, 유난히 말라서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다는, 어머니가 말해줬던 누나의 모습을 그는 멀게만 느꼈다. 그가 누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목소리가 예뻤다는 것, 그리고 바보 같을 정도로 착했다는 것뿐이었다.

앞을 못 보는 동생을 위해 매일같이 동생의 길잡이별이 되어주곤 했던 누나, 그러나 그녀는 이제 이곳에 없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누나의 성격이 이 마을에 화를 부른 것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누나, 그 자신에게도.

그는 허공으로 손을 내민다. 일으켜달라는 표시, 이 마을에서만 통하는 표시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일어선 그는 어른들을 따라 조용히 어디론가 걸어간다. 어린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발걸음으로.

******

어느 이름모를 산에 있는 석재광산. 강제로, 혹은 속임수에 속아서 끌려온 인부들이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어떤 귀족에게 얼마를 받았는지 모를 광산 감리들이 한손에 채찍을 든 채 그들을 지켜본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리면 당장에라도 내려칠 기세이다.

돌을 운반하던 한 인부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다.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가늘고 긴 채찍이 얇은 옷을 뚫고 살갗에 붉은 선을 긋는다. 그러자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쓰던 그가 옆으로 넘어지고 만다.

“너무하지 않소! 저 자의 일까지 내가 다 할 테니, 저 자는 좀 쉬게 하시오.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소.”

옆에서 돌을 나르던 드워프가 소리친다. 평소 같으면, 그에게도 채찍이 날아들었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가만히 있다.

“드워프는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맞겠지?”
“그렇다.”

드워프는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일단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인간. 지금 그를 이곳에 잡아와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것도 인간, 그리고 지금 그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도 인간이다. 그러나 그에게 전자와 후자는 달랐다. 전자는 자신과 같은 인간도 동물처럼 부리는 그런 인간이었지만, 후자는 그와 같은 약자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 적어도 이곳의 인간에게는 호감을 가졌다.

감리가 입을 연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저 자는 계약한 10년에서 하루 일찍 집에 돌아갈 수 있겠군.”

감리의 말이 이상하다.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드워프에게 감리가 다시 말한다.

“이해가 안 되나? 저 자에게 오늘 일을 빼주는 대신에 내일 일을 앞당겨서 시키겠다는 거야. 자네 말대로 했으니 불만은 없겠지. 자, 자네는 저 자가 오늘 할 일까지 어서 하게나. 물론 저 자도 내일 할일을 앞당겨서 해야겠지.”

감리의 말이 끝나자 그의 말을 들은 인부들 전부가 분노에 찬 욕설을 내뱉는다. 그중 몇은 그 분노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감리의 말 한마디는 그들을 눈뜬 바보로 만들고 만다.

“자네들 가족의 안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나?”

*******

수-음(水-飮) 32512년 1월 1일, 어느 도시. 평민들이 도시 밖의 한 공터로 모여든다. 그들은 새해에 뜨는 보름달에 소원이라도 빌어보려는 사람들이다. 1년 중 유일하게 모든 노역에서 해방되는 날, 귀족들이 허락한 유일한 향연의 날. 그날의 시작을 알리는 월출을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많은 이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달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망설이고, 또 망설인다. 그러나 계속 망설이기만 할 뿐이다.

마침내 달이 뜰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새카만 하늘로 향한다. 그러나 달은 뜨지 않는다. 그때, 누군가 소리친다.

“저기! 저기 좀 봐요!”

그곳에는 달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라던 둥글고 노오란 달은 아니다. 그 대신 그곳에는 마치 피라도 뒤집어 쓴 듯한 눈썹 모양의 달이 있다. 너무나도 얇아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달.

사람들이 바라던 달은 고통과 원한이 이룬 칼날에 상처입어, 둥글고 풍만한 몸을 다 잃고 간신이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마저도 피에 물든 모습으로.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그 웅성거림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도시의 중심까지 퍼져간다. 그리고 마침내 귀족들도 그 웅성거림에 동참한다. 그들이 믿는 헛된 종교에서도 붉은 달은 불길한 징조이기 때문이다.

그 뒷날, 그 다음날에도 달은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그 상처는 더 깊어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이 흘리는 핏방울은 비가 되어 내렸다. 가장 오래된 역사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산성비였다.

주기적으로 계속된 그 비는 강과 바다의 물고기를 죽였고, 대지의 동식물의 씨를 말렸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몇몇의 종들도 끝내 그 끈질긴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는 ‘온실안의 화초’가 되고 말았다.

평민들은 산성비로 척박해진 땅이라도 일구어 작물을 길러야 했다. 귀족들의 수탈이 더욱 심해진 까닭이었다. 그러나 마른 우물에서 물이 나올 리가 없듯이, 척박한 땅에서 풍년이 들 리가 없었다. 평민들은 최소한의 양식도 가지지 못한 채, 수확한 모든 작물을 귀족에게 바쳤다. 그래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귀족들의 수탈은 더욱 더 심해졌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귀족들의 창고도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입이 적으면 절약을 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다만, 창고를 가득 채우기 위한 방법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각해낸 방법이 군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군대를 보내서 좀더 직접적으로 위협 하면, 겁을 집어먹은 평민들이 더 많은 작물을 바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귀족들은 몰랐다. 그들의 군대가 섬기는 주인은 귀족이 아니라 돈이라는 것을. 그리고 충분한 돈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더 많은 돈을 위해 귀족에게 등을 돌릴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귀족 자신들에게는 지금 충분한 돈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 귀족들은 그들의 강력한 무기인 군대를 잃고 말았다. 더불어 더 이상 평민들이 두려워할 존재도 아니었다. 그랬지만 지배체계가 무너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듯 보였다. 아직까지 귀족을 두려워하는 평민들이 다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지배체계를 무너뜨린 것은 평민도 귀족 자신도 아니었다.

붉은 달이 뜬지 5년쯤 지난, 즉 수-음(水-飮) 32517년 어느 날. 이제까지 단 한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괴이한 생물체가 나타났다. 인간과 흡사한 모습의 그들은 마치 중무장을 한 병사 같았다. 두꺼운 갑옷으로 된 그들의 몸은 가벼운 검 따위에는 별 충격도 받지 않을 정도로 강했고, 전투능력은 인간의 것보다 곱절은 더 되었다.

대륙의 북쪽 어딘가에서 생겨난 그들은 아무런 질서도 체계도 갖추지 않은 채로 남하했다. 아무런 방향도 없이 달려가는 우스꽝스런 그들의 모습, 그러나 인간을 비롯한 대륙의 모은 종족들은 감히 웃지 못했다. 조그만 마을들이 하나하나씩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들은 막연한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그들의 횡포 속에 귀족, 아니 국가라는 개념은 서서히 그 존재의미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종족들은 새삼스럽게 뭔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많은 음유시인의 입에 올랐던, 아이들에게 해주는 이야기에나 나오는,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언 혹은 전설 등으로 불리는 짧은 글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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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한마디

: 1주일에 한편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