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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달의 그림자

2005.06.06 22:39

아메바 조회 수:59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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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다. 경쾌하게 진동하는 매미 소리도, 밤마다 달려드는 모기떼도 없지만, 어쨌든 여름이 왔다. 굳이 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방학이 된다면 여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테지.

금요일 오전. 짧은 방학 동안 제발 사고치지 말라는 간단한 내용을 반시간 이상 늘린 훈시가 끝나고, 간단한 종례 끝에 아이들은 교실을 나섰다. 이른 시간의 해방과 텅 비어있는 일주일 덕택에 아이들은 잔뜩 들뜬 채로 잡담을 나눴지만, 나는 거기에 동참할 수 없었다. 인파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홀로 조용하게 걷고 있는 것이 지금 내 모습이다. 별 수 없는 일이다. 아침부터 머리가 욱신거려서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교실에서의 두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누가 말이라도 걸면 난 그대로 쓰러져버릴 꺼다.

“요이, 시현!”

…쓰러질까?

“뭐냐, 천박한 놈.”

“네 녀석은 방학식 때조차 시니컬하게 놀기로 작정을 했구나. 이 형이 엉덩이를 걷어차기 전에 사과하지 않을래?”

“미안. 몸이 안 좋아서.”

“또 빈혈이냐? 헤헹. 편리한 녀석.”

텁, 하고 묵직한 무게감이 등에 와 닿았다. 친구끼리는 기댈 수도 있다지만 이 녀석 크기면 거의 폭행 수준이다. 나도 작은 편이 아니란 게 그나마 다행이지. 나는 신음처럼 말했다.

“어이, 좀 비켜… 정말 아프다구.”

“알았어.”

현빈이는 내 어깨에 걸어놨던 턱을 떼었다. 그러니까, 정말 떼어달라고 하고 싶은 건 네 몸이지 턱이 아닌데 말이야…. 남한테 기대서 걷는 건 좀 삼가주지 않겠어? 아니면 사이즈라도 좀 줄이던가.

“요즘 한동안 멀쩡한가 싶더니 결국 오늘 터지는구나. 엉아가 집까지 데려다줄까?”

“그렇게 심각한 거 아니야.”

“작년에도 그러다 쓰러졌잖아.”

“네 놈이 졸업여행 집결지를 엉뚱한 곳으로 가르쳐준 덕분이었지!”

나는 나도 모르게 발끈해버렸다. 네 녀석 덕택에 나는 예정에도 없던 안압지 관광을 한 시간씩이나 했다고. 그것도 무지막지한 햇볕 아래서! 그런 가슴 아픈 기억을 찔러줬는데도 이 남자는 헤벌쭉 웃어 보이더니 곧 진지한 얼굴로 뭔가 생각하는 낌새를 보였다. 네 놈 속은 안 봐도 뻔해. 기억이 안 나서 되짚고 있는 걸 테지!

“뭐, 좋아 좋아. 어차피 옛일이니까.”

“뭐가 좋아….”

“그런데 말야, 너 뭔가 계획이라도 있어?”

“계획?”

나는 녀석의 팔에 묶여있던 고개를 들었다. 현빈이는 날 향해 씩, 하고 웃어보였다.

“다음다음 주부터는 보충수업이니까. 놀려고 한다면 다음 주밖에 시간이 없다구?”

난 녀석의 말을 곱씹었다. 논다… 논다라. 현빈이답군. 사실 뭘 하려고 해도 일 주일은 너무 짧은데. 왠지 우습다. 학기 중에는 쉬게 해달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막상 자유가 주어지니까 갈피를 못 잡겠어. 나는 의욕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글쎄… 아마 될 대로 되겠지. 그게 내 신조야.”

“생각 없긴. 그럼 나 먼저 간다! 쓰러지지 마!”

“그래.”

현빈이 녀석은 걸쳤던 몸을 빼서 교문 밖으로 신나게 뛰어갔다. 땀 한 방울 없는 말끔한 모습.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저 녀석은 체력의 화신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지금의 나도 좀 닮았으면 좋으련만. 나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게 8년 전 일 때문이지.

8년 전, 이맘때쯤 이 도시는 거의 지옥처럼 변한 적이 있었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원인 불명의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야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활동량이 많던 시간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교통사고의 수는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전력공사, 가스공사, 통신 회사 등 어떻게든 연루될 만한 회사들이 공박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단지 혐의일 뿐이다. 아직까지도 그 전무후무한 사태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날 이후 내 몸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러니까, 나는 가끔씩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질 때가 있다. 예전부터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그 걸 제대로 깨닫게 된 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난 직후의 일이다. 그 때 내가 100미터 질주에서 7초대가 나왔었지, 아마. 그 덕택에 나는 영웅이 되었었는데, 그건 인간을 초월할 정도로 빨리 달려서가 아니다. 선생님이 혼절하셔서 체육 시간 내내 공을 차고 놀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현빈이 녀석도 그 때 알게 된 거다.

그런 터무니없는 기록을 세웠는데도 육상 선수가 되지 않은 까닭이, 지금 내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 빈혈에 있다.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대가인지, 이런 빈혈도 내게 비슷한 빈도로 찾아온다. 빈혈이 찾아올 때면 늘 어지럽고, 기운이 빠지고,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진다. 심할 때는 환각까지 볼 정도이다. 의사들도 이 빈혈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별 대책 없이 이대로 지내는 형편이지.

요즘은 강해지지도, 빈혈이 오지도 않았는데 하필이면 방학식 날에 딱 걸려버렸군. 제기랄, 어떻게든 집까지는 들어가야 하는데. 하지만 머리 위를 가열하는 태양 아래서 어지럼증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한다. 난… 길바닥에 쓰러지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집에 도착하는 게 먼저일까…?

“-큭.”

나는 비뚜름하게 쳐져버린 가방끈을 어깨로 들어올렸다. 무겁다. 버티기 힘들 만큼. 방학식이라 별로 들고 오지도 않았는데. 눈도 반사된 햇빛 때문에 따가웠다. 귀에서 웅성거리는 건… 아마도 아이들의 잡담 소리겠지. 아닌가? 여긴… 바깥이구나. 학교를 나선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제 갈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 내 곁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일의 낮 시간,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왜 이리도 시끄러운 거지….

-빠아아아앙

차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면서 내 옆을 지났다. 나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그렇게 큰 소리로 빵빵거리지 마! 이 멍청한 차는 또 뭐야? 차라면 차답게 차도로 다녀야 할 거 아냐? …아니다. 난 어느 샌가 길을 벗어난 채 차도로 내려와 걷고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인도로 다시 올라갔다. 가로수를 잡지 않고는 그 낮은 단을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피곤하다.

“…….”

쉬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았다간, 그대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압력은 척추까지 관통하는 듯 하다. 기력을 하나하나 절단하는 극심한 피로 속에서 나는 간신히 눈을 들었다.
눈앞의 풍경은 제멋대로 춤추고 있었다. 생동감이 넘치다 못해 쏟아지는군. 이게 제정신인 사람이 볼 수 있는 풍경인가? 뒤섞이는 배경. 사라지는 피사체. 정상이 아니다. 나는 쓴웃음이라도 지으려 했지만, 고통이 억지로 내 입가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눈꺼풀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을 덮어 누르고 있었다.

침침하다. 모든 것이 눈부셔야 할 시간이지만, 뭘 보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어둡기 짝이 없다. 제길, 정신 차려. 김 시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지?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제길, 누가 날 좀 도와줘. 난 지금 깨어있다는 것 자체가 벅차. 그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

순간 나는 뺨을 호되게 얻어맞았다. 하지만 과부하가 걸린 머리는 통증마저 무시해 버렸다. 건물들이 온통 옆으로 누워있다. 말라붙은 입술에선 짠맛이 흘러나왔다. 나는 팔을 움직이려 해보았지만, 경련에 가까운 동작을 취하는 데에도 엄청난 힘이 들어가야 했다. 나는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내가 그 시점에서 느낀 것은, 괴로움도, 공포도 아닌, 차라리 체념에 가까운 안도감이었다. 고통으로 난도질당한 머리에선, 그 정도의 생각이 내가 할 수 있는 다였다. 나약하군. 나약해. 하지만 어차피 움직일 힘도 없다. 나는 사고를 끊은 채 몸을 늘어뜨렸다.

저항할 수 없는 두통은 계속해서 머리 속을 찔러대고 있다. 그러나,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는 지금에 와서는, 고통이란 도리어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좋은 자극이다. 그러나 이제 그 고통마저도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벌써 잃어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의식이 아직도 남은 감각들을 간신히 끌어당기고 있다. 이게… 인간의 생존 본능일까? 그럼 이건… 죽음에 가까울 만큼 절박한 상태고?

검게 변해가는 시선 속에, 알 수 없는 뭔가가 나타났다. 이런… 보이지 않아. 사람인지, 물체인지, 그도 아니면 그림자인지조차… 파악할 수가… 없어. 뺨을… 만지고 있다. 그만둬… 그렇게 코 앞에 들이대면… 숨을… 쉬… 기… 가….



* * * * * *



나는 눈을 떴다. 머릿속이 너무나 멍해서, 내가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애매모호하게 느껴졌다. 나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우… 어지러워. 하지만 약간 머리가 쑤신 것 빼고는 굉장히 상쾌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러니까 기분 좋은걸. 그런데 묘하게 생각이 텅 비었는데.

보자… 어제의 기억이 전혀 없다. 맙소사. 방학하고 나서의 피 같은 열 두 시간을 기억 없이 멍하게 보냈다고?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자자, 생각 좀 해보자. 생각. 방학식이 끝나고 나서, 좋아라 집에 와가지고는, 그리고….

…제길, 그 부분부터 벌써 틀려먹었어. 난 집에 간 적이 없잖아! 노상에서 현기증 때문에 쓰러진 녀석이라고, 난!!

“으아아악?!”

상황을 깨닫고 기겁한 나는 벌떡 일어났다. 뭐야? 여기 어디야? 병원인가? 하지만 병원이라 보기엔 너무 습기 차다. 무엇보다도, 병원 안에서 밤바람 따위가 불 리는 없겠지.

내 눈 앞에서는 도심의 자그마한 불빛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전형적인 심야의 풍경. 여긴… 바깥이군. 옷은 교복 그대로다. 쓰러질 때 조금 더럽혀진 것 빼고는 말끔한 상태다.

한편 내 몸은 기다란 벤치에 누워 있었다. 이런 벤치가 있다는 말은… 요 앞 공원이다. 네모난 돌들로 포장된 도로 위를 나트륨 등이 노랗게 밝혀주고 있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곳에 오게 된 거지. 나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웬 낯선 사람이 바로 옆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깨어난 뒤 두 번째로 놀라버렸다.

“당신은…?”

상대는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나와 같은 벤치 끝 편에 무릎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나는 아마도 깨기 직전까지 저 사람의 무릎을 베고 있었나 보다. 쑥스럽군.

그 여자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단정했다. 시원스런 차림에 그런 모습은 나오기 힘든데 말이야. 노란 조명 때문에 확인하긴 어렵지만, 짐작컨대 머리칼은 깔끔한 초록색이다. 어깨 직전까지 내려오는 그 머리칼은 커팅한 것처럼 끝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네, 이 앞에 쓰러져 계시기에 잠시 그늘로 옮긴 거예요. 일사병인 것 같아서요. 그냥 놔두고 갈 수도 없어서 같이 있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이 앞에? 집으로 가는 줄 알았더니… 이상한 데로 새버렸구나. 워낙 정신이 없다보니. 아차차, 지금 딴 생각 할 때가 아니던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마주 숙였다.

“고, 고맙습니다. 이 일을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 지.”

내 서툰 인사에 상대는 가볍게 웃었다. 그 미소는 지금의 나에게는 마치 인자한 군자의 그것처럼 비쳐보였다. 우웃, 눈물난다… 이 세상에 아직 이런 모범적인 사람이 남아있었을 줄이야. 도덕 교과서에서나 볼 줄 알았는데.

“괜찮으신 거예요? 혹시 병원이나 그런 곳은?”

“아아,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그냥… 단순한 빈혈이니까.”

…내가 생각해도 말이 좀 안 되는군. 빈혈 때문에 쓰러지면 심각한 상황 아닌가?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행히 거기서 더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다.

“저기,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네. 전 연이라고 해요. 연.”

“연….”

짧으면서도 뭔가 예쁜 이름이다. 하지만 성도 뭐도 없이 달랑 한 글자라니, 이국적이군. 나는 예의상 내 이름도 소개하려 했지만 연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보는 사람이 왠지 편안해지는 미소다.

“그 쪽은 시현 씨이죠? 명찰을 봤어요. 아직 고등학생이신가 봐요.” “아, 넷. 그러니 그냥 말을 낮추셔도.”

“괜찮아요. 이 편이 저에겐 더 편해요.”

“예에.”

나는 속으로 진땀을 뺐다. 자, 자, 이제 대충 말문은 트였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하지? 어떻게 대우를 해야 할 지 짐작도 안 간다. 장대 높이 달려있는 공원 시계를 보면… 10시가 다 되가는 깊은 밤. 몇 시간이나 남의 무릎베개를 해준 채 의자에 앉아있었단 건지. 입이 천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시간 많이 뺏기셨을 텐데.”

“아뇨. 어차피 갈 데도 없었거든요.”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연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쿡 하고 웃더니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어보였다.

“실은 저… 집이 없거든요.”

아, 그래서였구나. 나는 마주 미소지으며 천천히 수긍했다. 그래. 들어갈 집도 없다면야 얼마든지 오랫동안 무릎베개를 해줄 수도 있겠지… 라고 당연하게 수긍해버리면 어쩌겠다는 거야?!!

“에에엣—?! 그거 정말이에요?!”

“어, 그게 말이죠. 전 사실 이 곳 사람이 아니에요. 오늘 막 입국하긴 했는데… 여차저차하다보니 미아 신세가 되어버렸네요.”

연은 말해놓고는 자신도 쑥스러운지 어물쩍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우습지 않다. 나는 앉은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혹시 여기 지인은 있으세요?”

“없어요.”

“…한 명도?”

“네.”

“그럼 돈은요?”

“한 푼도.”

“비자는요? 아니, 여권은?”

“없는…데요?”

“하하. 밀입국이라도 하신 모양이네요.”

“…….”

“…진짜 하셨어요?”

“…….”

“………….”

허허, 허허허허허. 이거 장난이 아니구만. 정말로.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거야 원… 입은 은혜가 있는데 차마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나라에 온 거지? 관광하러 왔는데 주머니라도 털린 건가? 하지만 평범한 관광객이 저렇게 우리말이 능숙할 리가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군. 도대체 그 여차저차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어쨌든, 속사정을 차치하고 보자면, 이 연이란 아가씨는 집도 돈도 없는 생판 노숙자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신세를 진 사람이고. 달리 내릴 결론도 없는 건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연에게 말했다.

“할 수 없죠. 신세 진 것도 있고 하니 일단은 저희 집에 묵으세요. 바로 요 앞이거든요.”

“네.”

“아아, 너무 사양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서로 주고받는 셈이니까….”

“예?”

…….

뭐, 뭔가 어긋났다.

“…어… 바,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네라고요.”

“…아.”

너무 당당해서 잘못 들은 줄 알았군.

“그, 그럼 따라오세요.”

나는 무안함을 숨기고자 서둘러 앞장을 섰다. 연은 조용히 일어나 내 뒤를 따랐다.

밤거리는 보통 낮보다 더 현란하기 마련이지만, 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 시간에 여길 거닐어볼 일은 없었구나. 익숙한 거리에서 의외의 생경함을 느끼면서 나는 가방을 고쳐 매었다. 내 발걸음 소리에 섞여 연의 발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연의 신발은 날씨에 걸맞지 않게 튼튼해 보이는 가죽 장화였기 때문에, 따각, 따각, 하는 소리가 어딘가 리듬감 있게 들리고 있다.

튼튼한 신발을 신는다는 건… 그만큼 움직일 일이 많다는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괜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지만 밀입국자를, 아니, 굳이 그런 걸 따지지 않더라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함부로 집안에 들이는 게 이 냉정한 사회에서 될 법한 일인가? 게다가 그 은혜란 것도, 도와준 본인한테 들은 것이니, 마냥 믿어두기엔 불편한 점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뭐랄까, 그런 치졸한 면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라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는 느낌. 그리고 돌봐줬으니 돈 내놔라 따위의 소리도 꺼내지 않고, 날 도와준 게 특별히 나쁜 의도를 갖고 행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 그렇게 남을 이용해먹을 정도로 약은 사람이, 밀입국한 사실을 털어놓는 맹한 짓을 할 리도 없을 터이니… 생각이 막 꼬이는데 결국 결론은 집안에 들여도 되겠지 이거야! 에잇! 어차피 훔쳐갈 만큼 비싼 물건도 없고, 나도 그렇게 삭막하게만 살고 싶지는 않아. 젠장, 나 자신을 납득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군. 나는 혼란한 머리를 달래고자 연에게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연 씨는 어쩌다 우리 나라에 오셨어요?”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대답은, 물어본 내가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야무지게 돌아와 버렸다. 으윽. 처음부터 뭔가 막히는군. 따지고 보면 밀입국할 이유가 말하기 쉬울 리는 없다. 아아니, 그럼 애초에 말을 꺼낼 이유가… 젠장. 머리 아프구만. 나는 어색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말이 굉장히 능숙하시네요. 혹시 전에도 들리신 적 있어요?”

“그렇진 않아요. 다만… 배웠을 뿐이죠.”

“혹시 오신 이유에 무슨 관련이라도?”

“….”

연은 갑자기 침울하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런, 실수다. 너무 파들어 가버렸나?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상황수습. 상황수습.

“말하기 곤란하시면 대답하지 마세요. 저도 묻지 않을게요.”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녀의 모습에서 화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가지로 모를 사람이야.

조금 뒤,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연은 내가 문을 여는 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더니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탄성을 질렀다.

“와, 집이 굉장히 넓네요.”

“자취방치곤 크죠? 원래 여러 명이 쓰는 곳인데, 지금은 저 혼자 들어와 있어요. 집 주인이 친척 분이셔서 얘기가 쉬웠죠.”

“헤에… 시현 씨 혼자 산단 말이군요.”

“네.”

무심결에 대답한 나는 대답의 무게를 깨닫고 질려버렸다. 그,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낯선 여자를 들인 셈이잖아?!

“아, 아니 그렇다고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건 아니고…!”

“네?”

“아뇨, 아무 것도.”

천진한 얼굴로 되묻는 연을 보고 나는 딱 잡아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릎베개를 해주는 사람인데 그런 오해를 할 리가 없잖아. 믿을 수 없는 건 나로군. 반성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 나는 일단 가방을 벗었다. 손님을 세워놓고 교복을 갈아입진 못하겠고… 그러고 보니 점심이랑 저녁을 굶었던가? 연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했지. 그럼 뭘 먹지는 못했겠군. 나는 굳은 팔을 돌리면서 부엌으로 걸어갔다.

“배고프시죠? 뭐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 있으세요?”

“스트로베리 슈크림 케이크요.”

“…….”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구나.

“그런 건 없지만… 에… 여기 음식은 맞으신가요?”

“먹어본 적이 없어요.”

“그럼 빵은요?”

“아, 감사히 먹죠.”

“그럼 저기 좀 앉아계세요.”

나는 부엌의 식탁으로 연을 안내했다. 학생 혼자 사는 집에 가구 따윈 특별한 필요가 없는 고로, 저 식탁이 주인 외의 누군가가 앉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연을 일단 의자에 앉힌 나는 토스트기를 찾았다. 은인에게 대접하는 식사치곤 조악하긴 하지만, 빵이라고 해봤자 자취생이 만들 수 있는 수준은 거기서 거기다. 잠시 후, 나는 식탁으로 빵과 계란 등을 들고 갔고 연은 기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와- 고마워요! 정말 맛있어 보이네.”

“하하, 고맙습니다.”

나도 두 끼나 굶은 터라 내 걸 따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연은… 광고배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고작 토스트 하나를 가지고 저렇게 예쁘게 먹는 사람은 처음 본다. 정말 배경이 궁금한 사람이야. 도대체 어떻게 살면 저런 성격이 나올까?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왔다. 가볍게 목례한 연은 내가 물을 따르는 걸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시현 씨는… 특이하네요. 보통 학생들은 집에서 통학하거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학교가 특별히 좋은 곳인가 보죠?”

“하하하, 그건 아니에요.”

그럼 나는 둘째치고라도 현빈이 녀석이 붙을 리가 없지….

“저희 집은 학교에서 너무 멀거든요. 버스를 타면 금방이긴 하지만… 전 버스를 타지 못해요. 그래서 이 쪽이 더 경제적이죠. 친척 집이니 거의 공짜로 살고 있기도 하고.”

“버스를 못 타신다고요? 왜죠?”

순간 나는 움찔했다. 연의 눈빛이 날카로워진 것 같은 건… 나의 착각일까?

착각이 아니었다.

연의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그 눈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뭔가를 캐내 보이려는 듯한 탐욕적인 눈빛. 연녹의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 이질성은… 소름이 끼쳤다. 추워지는 속에서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어떤 호의를 보인다 해도, 그 대답만큼은 할 수 없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자라버린 공포가, 내 입을 봉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연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의지가 새겨져 있었다.

두렵다.

나는 간신히 언급을 회피하는 대답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굳어진 마음이 이렇게까지 흔들려본 기억은 없는데.

“그건 좀 말씀드리기 곤란하….” “전 듣고 싶어요.”

나는 약간의 당혹감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이 말했다.

“이유를 들려주세요. 시현 씨.”

가슴 속에서부터 가시가 돋아난 느낌이다.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거북한 느낌. 그 모든 원인이 연의 저 뜻 모를 눈동자에 서려있었다.

그 속에서는, 연한 분홍빛이 반사되어 둥근 겉면을 따라 회오리친다. 몽환적이면서도 묘하게… 관능적인 적색. 이도 저도 아닌 감정이 겹치고 겹치며 결국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는 혼돈을 일으켜버린다. 바라보는 이를 미치게 만들 것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내 입에 채워진 자물쇠를 찢어버렸다. 의식적 자상을 입은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입 밖으로 내어선 안 된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지금의 나에겐 연을 거스른다는 것이 그 어떤 무엇보다도 더 두려운 일이었다.

어째서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사고가 있었어요.”

나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연은 모호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8년 전, 그 때도 여름이었죠. 저는 부모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어요.”

보통의 기억이 부드러운 펜으로 쓰인 기록이라면, 이 건 달궈진 선철로 눌러 내린 각인과 같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선명한 풍경들. 추억보다는 악몽으로 불러야 알맞을, 그런 과거의 여운을 짙게 드리운 기억은, 나를 순식간에 8년 전의 그 곳으로 옮겨버렸다.

서늘한 차 안의 공기.

빗살 치는 빗물의 자취.

그리고 그 너머의… 산처럼 솟아오른 도심과, 그 한가운데 지지된 암흑의 탑.

거기에 올라타게 된 건, 단순한 나들이였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 거로 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중요하지 않았던 이유 때문에, 부모님은 망각의 강을 건넜고, 나는 씻기지 못한 상처를 품게 되었다.

창가에서 우연히 목격해버린 검은 탑은…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절대적인 절망이었다.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무한한 절규였다. 세상의 모든 음적인 감정을 모아놓은 듯한 궁극의 공포. 그건 단지 그 존재 자체로 나에게 죽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감정은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그 탑은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의미를 타락시켰기 때문에.

버스는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실은 채 상가 건물로 돌진해 들어갔다. 붕괴된 건물에서는 화염이 솟구쳤고 무너진 잔해들이 차를 찌그러뜨렸다. 이틀 밤을 그 속에서 보내다 깨어난 나는, 그 끔찍한 사고의 생존자가 나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목 놓아서 울었다. 가족을 잃은 것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부모님을 잃은 것보다 그 탑을 본 것이 더 두려웠다.

그 탑을 보았다는 것이 내게 있어 가장 최악의 순간으로 느껴졌다.

“-웃.”

도저히… 더… 얘기를 꺼낼 수가 없어. 빈혈이 다시 도지는 것만 같다. 눈앞이 지독하게 어른거린다. 그 속에 뜬 흐릿한 초록색 얼룩은…. 눈이 붉어져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나는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드르륵, 하고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뜨거운 볼에 타인의 머리카락이 스친다. 연은 의자에 앉은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머리를 옆에서 살짝 마주 대었다. 귀 옆에서는 그녀의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내 청각을 자극했다.

“미안해요.”

…….

아냐.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나는 메인 목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넘쳐흐를 것 같은 눈을 두 어 번 깜빡이고 나서, 나는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실례할게요.”

나는 비틀거릴 듯한 몸을 이끌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세면대 안으로 미지근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튀면서도 묘하게 규칙적인 소리가 나를 진정시켰다. 고개를 들자, 거울에 울상인 얼굴이 비쳐보였다.

어리석긴. 이제는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했었다. 언젠가는 남에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꺼라 믿고 있었다. 허튼 소리. 막연한 기대감은 결국 철없는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이 공포, 이 떨림. 아마도 평생 동안 잊을 수 없겠지. 나는 무덤까지 이 악몽을 끌고 가야 되겠지.

“크윽!”

바보야. 생각하지 말자고 했잖아. 나는 세면대를 붙잡고 들려선 안 될 울음을 토해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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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긴 거 같아서 (정확히는 편집이 귀찮아서 (..) 한글에서 붙여넣기 하니까 엔터 친게 묘하게 안 먹혀서)
하루당 2화로 잡았습니다.
참고로 본편은 총 열흘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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