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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달의 그림자

2005.06.16 16:25

아메바 조회 수:34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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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가 조금 길었군.”

남자는 나타난 이후로 처음 발걸음을 떼었다. 저벅. 저벅.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그 주위에서 작은 물꽃이 피어올랐다. 남자는 자유로운 손을 치켜들며 외쳤다.

“선배가 올 수 없다면… 나 혼자라도 상대해드리지!”

남자와 연은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텅 비게 된 공간을 빗물이 메우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내 감각은… 그 둘을 감지했다. 두 명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서로의 모습을 감추고 끔찍한 속도로 맞부딪치는 것. 그 증거로… 곳곳에서 빗물들이 폭죽처럼 터져나가고 있었다. 운 나쁘게 폭발에 휘말린 거리는 움푹 패어 들어갔다.

20여 합을 겨뤘을까, 둘은 처음 있던 장소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함께 나타났다. 남자는 멀쩡한 손에 금잔을 들고 있었다. 연을 압박하는 것은 그 금잔에서 뻗어 나온 기묘한 물의 덩어리였다. 중력을 무시한 채 뻗어 올라온 그 물은, 뭉친 채로 떠 있는 것만 제외하면 빗물과 구분이 불가능해보였다. 연은 양손으로 그 것을 받아낸 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한 손으로 불안정하게 누르는 데도 그 정도이다. 힘의 균형이 깨졌다 이뤄지길 반복하면서 둘의 접촉부분은 엄청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잔은…?”

“세마란츠. 평온의 존재인 당신에겐 별 효과가 없겠지만… 혼돈의 아우라를 갖고 있다면 사정이 다르지. 게다가, 이 검은 비가 올 때 가장 강해지는 법이라서 말이야…!”

“크윽!”

연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검을 튕겨냈다. 하지만 그 수검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다시 연에게로 달려들었다. 연은 재빨리 위로 뛰어올랐고 대신 연이 있던 장소가 물기둥을 만들면서 박살나버렸다.

위로 올라간 연은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떠있었다. 남자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런 연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저 남자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재주 같은 건 없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놀랍군. 내가 마도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자연체 따위가 이렇게 오래 버티다니 말이야. 자연체가 결계를 친다는 말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데.”

“겸손해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마도사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니까.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저 요령으로 간신히 견딘 거겠죠.”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빳빳한 긴장 속을 빗소리가 메워갔다. 남자는 금잔을 옆으로 뿌렸다. 낙하하던 빗물이 속도를 늦추더니 잔으로 빨려 들어가 날렵한 검신을 만들었다. 남자는 내게 얼굴을 돌렸고 나는 순간 멈칫하였다.

“너, 도망가.”

“뭐…?”

“이 지역은 도시 행정면으로 볼 때는 쓸데없이 땅값만 높은 지역이지만, 이 세계의 밖에서는 여러 가지 신경 쓰이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골치 아픈 곳이다. 그리고 너의 아우라는 아우라를 모르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거대해. 이 자연체가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널 이용하게 될 꺼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자리에서! 아침부터 널 유인해온 걸 너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남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빗물 속에서 처량하게 서 있었다. 남자는 패악스럽게 외쳤다.

“내가 이 놈을 막아주마. 그 사이에 빨리 가! 어서!”

나는 뒷걸음질쳤다. 남자가 다시 외쳤다.

“가—!!!”

나는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빗물이 비참하게 내 얼굴을 때려대었다. 뒤에서는 다시 이 세계의 밖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파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감히 뒤돌아보지 못했다.

빗물이 부서뜨린 난잡한 기류가 내 다리를 휘감았다. 묵직해진 앞은 자꾸만 내 몸을 잡아채었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다.

“허억-. 허억-.”

빌어먹을. 눈이 왜 이렇게 뜨겁지? 울보 자식. 뭐가 그렇게 슬프다는 거야.

연에게 배신당한 것이? 암시에 걸린 거라고 깨달아버린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이 무력함이 저주하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이 무지함, 이 무력함, 이 무자비한 현실이 나를 괴롭혔다. 저렇게 격렬하게 살고 있는 자들 앞에서… 내 삶의 무게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도구로 나를 보고 있고, 나는 그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왜냐면…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겐… 저 곳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이 없었으니까.

그저, 도망칠 뿐.

“으아앗!”

물이 조금 많이 고여 있는 곳을 밟았다. 평소 같으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나는 너무 빨리 달리고 있었다. 균형을 잃은 나는 빗길 속에 미끄러졌다. 거친 아스팔트는 내 몸을 세게 긁었다.

물 덕분인지 옷은 찢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닥에 닿았던 부분은 쓰리기 짝이 없었다. 비가 피 냄새를 공중으로 튀겨 올린다. 씁쓸한 쇠맛을 느끼면서 나는 빗물 속에 누워 있었다.

위를 향한 눈으로 비가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비가 들어올 때의 자극이 눈을 괴롭혔다. 몇 번을 깜빡이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파서 흘리는 눈물인데… 자연스럽게 나오는 눈물일 뿐인데… 목이 메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흐느꼈다.

-콰앙

지척까지 다가온 폭음이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쓰러져 한탄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게 주어진 자유가 달리는 것뿐이라면 나는 그 자유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달릴 준비를 했다.

“제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남자가 내 앞까지 밀려와버렸다. 기울어진 남자의 뒷굽에서부터 파도가 깨져나갔다.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아직 도망가지 않았나?”

“그 건….”

말하려던 나의 앞에 이상한 장벽이 생겼다. 그 것은 투명했지만 흘러내리던 빗물이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당황한 남자는 앞의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수검은 앞으로 나아가는가 싶더니 한 공간 앞에서 단순한 물벼락이 되어 수직으로 쏟아져 내렸다. 남자는 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대신 손바닥으로 그 장벽을 두들기며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편의 무언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무언극?

어느 샌가 빗소리도 그쳐있다. 바닥에 살짝 고인 물들은 더 이상 부서지지 않았다. 그 잔잔한 수면이 장벽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도로 한복판을 차지하는 정사각형 형태의 결계. 남자는 고요한 안과 대조되는 소란 속에서 계속 장벽을 두드리며 뭔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그 다급한 표정에서 내용의 경중을 짐작할 뿐, 그 의미까지 파악할 능력은 내겐 없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을 보는 것처럼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장벽에서 한 걸음 물러나 뒤를 돌아보았다.

연이 후줄근한 모습으로 결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의 자락자락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지만 내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어버린 것 같았다. 발밑에서는 북을 치는 것 같은 낮은 진동이 올라온다. 둥글게 퍼져나가는 파형. 결계에 충격을 주는 것인가.

“시현 씨.”

빗소리가 사라진 지금, 연의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더 또렷하게 들렸다. 먹지는 않았나보군.

나는 연을 주시했다. 그녀는 흐려진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제가… 밉죠?”

쿵. 쿵.

장벽의 가장자리에서는 되튀는 물이 작은 파도가 되어 부서져내린다. 연의 발밑에서도 밀려나간 물이 파원이 되어 복잡한 선의 교차를 만든다.

“그렇다면… 절 미워하세요. 절 증오하고 절 경멸하고 절 저주하세요. 저는 시현 씨의 동정을 받을 만큼 고귀한 존재도 아니고, 그런 행동도 또한 한 적이 없으니까. 모두에게 상처주지 않고 사는 삶이란 환상에 불과하겠죠. 저같이 천한 사생아에게 그런 건 더더욱 무의미하겠죠. -하지만, 저는 살겠어요. 시현 씨에게 상처를 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살겠어요.”

나는 무표정하게 연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이 속에 갇힌 순간부터 나는 무감각한 인형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 모든 것이 뒤바뀌는 그 속에서는, 내 감정에조차 충실해질 수가 없다. 연을 만나게 된 후부터, 난 이미 그래왔는지도 몰랐다.

연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아… 아무도 환영하지 않더라도… 신에게 허락, 허락받지 못한 생이라도… 저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 어요. 모두가 죽기를 바라지만… 저에게는… 소중한….”

결계는 거의 깨진 듯싶었다. 거의 지진과도 같은 충격이 결계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연은 내 앞에 섰다. 자꾸만 몸이 흔들려서 눈앞을 정확히 보기 힘들었다.

온통 물에 젖은 연이었지만 묘하게도 눈물 자국이 구분이 갔다. 저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데.

“시현 씨.”

연은 간신히 내 이름을 내뱉고는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것을 거부했다.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저주이든 용서이든, 연에게는 아무 말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이 돼든 간에 그녀에게 상처가 되리란 건, 인간관계에 미숙한 나로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상처가 되는 이유 또한… 왠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난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걸까.

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나요?”

결계에는 금이 가고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계. 지독하게 좁은 세계가 천둥처럼 찢어져나갔다.

“…네. 그렇군요.”

연은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서는 환한 빛이 피어올랐다.

그래… 저건, 내가 그림자를 죽일 때 썼던 그 빛.

연은 나를 죽일 생각인 거다.

“용서 따윈 바라지 않아요. 시현 씨.”

모아진 빛은 점점 눈부시게 밝아질 뿐이었다. 저것이 내 가슴을 찌를 것이다. 그리고 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야 하겠지. 하지만 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나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이건 또 무력하게 도망치던 나에 대한 반발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무언가를 향한 체념일 뿐인 걸까.

바닥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파문을 그렸다. 그리고, 연은 빛나는 손을 내뻗었다.

“제겐 그 것조차 과분하니까!”

연의 손은 내 가슴을 꿰뚫었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숨이 막힌다는 것이었다. 아픔은 그 후에 찾아왔다. 신경을 점거한 고통 때문에 힘이 빠져나가며 다리가 굽혀져 버렸다. 나는 연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천장에서부터 물이 쏟아 부어졌다. 내 몸은 순식간에 폭우가 내리는 거리 속으로 복귀했다. 그와 함께 등 뒤에서 남자의 고함소리가 내 귀를 멍하게 울렸다.

“빌어먹을 자식!! 사지를 찢어버릴 테다!!!”

달려온 남자의 기세는 무지막지했다. 두어 번을 막아내던 연은 결국 그 수검에 어깨가 베이고 말았다. 그러나 연은 성한 팔로 남자의 발밑을 가리켰고, 그 곳의 물은 세차게 튕겨나갔다. 남자는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 시야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시 고함소리가 들리지만 빗소리에 묻혀 잘 알아듣기 힘들다. 아니면 내가… 그걸 들을 여유가 없거나. 찢어진 옷 안으로 살조각이 천처럼 나풀거린다. 이렇게 허술해진 몸을 지탱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바닥에 완전히 누워버렸다. 미칠 것 같은 통증은 천천히 몸에 배여 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검은 빛 안개가 불타듯 하늘로 올라가 곧 스러진다. 단편적인 시야로 볼 때, 그 것은 거대한 원을 따라 솟는 것 같았다. 원의 안쪽은 색상을 잃고 점점 검게 변해갔다. 그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결계였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춥다.

머리도 어지럽고, 무엇보다도 이 고통 때문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지만, 가슴에 구멍이 난 터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배설되지 못한 고통은 끝없이 몸에서 되풀이될 뿐이었고, 그 것은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제길, 죽이려면 확실하게 죽이라고….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고통만 느끼게 하다니.

불같은 증오심이 치밀어 올랐다. 증오 외에 고통을 덜 수 있는 출구는 떠오르지 않았다. 연, 연, 연! 나는 팔을 넘겨서 간신히 몸을 뒤집었다. 팔을 구부릴 때마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다. 나는 손가락을 구부려 땅을 긁다시피 했다. 망가진 몸이 어처구니없이 손에 끌려간다. 아우라가 불어나 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기는 것보다 더 처절한 몸짓으로 나는 앞으로 전진했다. 망가진 근육을 움직이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가슴 쪽의 격통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고통으로 고통을 중화시키는, 그런 터무니없는 짓거리까지 감행할 정도로 내 몸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바닥은 이미 검게 변했다. 바닥에 붙은 위치에서는 검은빛 외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비가 머리카락을 때려 눈을 뜨기 어려웠다. 어차피… 이미 어두워지고 있다. 어떻게 시선의 초점을 맞췄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익힐 필요가 없는 능력이었지. 내 눈은 완전히 풀렸고 그래서 눈앞의 물체는 하나가 아닌 둘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하나이든 둘이든 눈에 보인다는 것은 곧 검은 빛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암흑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연뿐이었다. 그녀는 어둠에 뒤덮인 채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고통으로 뒤범벅이 된 흙탕물 같은 감정만이 머리를 지배한다. 나는 반병신이 된 몸을 그녀에게로 억지로 끌고 갔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본다면 귀신같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테지.

얼굴. 얼굴을 보아야 한다. 하지만 내 눈은 사람의 형체만을 분간할 뿐, 표정 같은 섬세한 모습까지 읽어낼 수는 없었다. 결국 힘이 달린 나는 몸을 끌고 가는 짓도 그만두었다. 가슴의 상처는 그 억지스런 행동 끝에 더욱 벌어져있었다. 나는 단순한 고통이 아닌, 신체의 이상으로 인해 머리를 빗물 투성이의 바닥에 쳐 박았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모든 감각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고통 또한 마찬가지다. 조금 낫군. 그나마 다행이야.

목이 저절로 돌아갔다. 누군가 내 뺨을 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 걸 감각하지 못했다. 마치 무성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시각 외에는 철저히 배제된 나는 흐릿한 눈을 들어올렸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초록색 머리뿐이었다. 당신이… 당신이 뭘 하려는 거지? 내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나는 입술조차 달싹거릴 힘이 없었다. 눈앞이 환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암흑이 더 강하다….

빛이 가려졌다.

무슨 일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몸이 급격하게 쏠렸다. 때문에 갑자기 치밀어 오른 고통은 신경을 타들어가게 했다. 일순간, 죽었던 감각들이 다시 개방되면서 나는 주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몸은 검은 소녀에게 안긴 채, 하늘 높이 떠올라 있었다.

바닥에는 검은빛 반구가 불길한 모습으로 거리 한가운데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 괴기한 모습을 보는 것도 잠시, 내 몸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 닿자 끔찍한 고통이 올라온다. 떨어진 높이치고는 놀랄 만큼 부드러운 착지였지만, 구멍 난 내 몸은 그 정도의 충격도 흡수하지 못했다. 나는 피를 입과 가슴으로 뱉어냈다.

“콜록! 콜록콜록!!”

날 탈출시켰던 사람은 내 몸을 세게 안았다. 그 몸에서부터 조금씩 배어나온 빛이 몸에 스며들며 고통이 완화되었다. 전신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나는 간신히 눈앞의 얼굴을 확인할 만큼의 체력을 회복했다.

“세파티…?”

세파티의 몸에서는 어른거리는 후광이 보였다. 그 뒤는 아까와 같은 암흑이 아닌, 보통의 비 내리는 거리와 같다. 세파티는 내 머리를 받쳐 들어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게 했다. 좀 참아달라고. 이 것만 해도 내 몸에 남아있는 피의 반은 될 것 같은데….

“바보, 정신 차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무슨 꼴이냐고? 아프고 춥고 배고프고 심심한 차에 가슴엔 구멍까지 내신 꼴이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해 킬킬거렸고 곧 그 행동을 후회했다. 제길, 이젠 아픔에도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 말이야. 웃음을 그친 나는 대신 신음을 흘렸고 세파티가 그런 나를 타박했다.

“웃긴 뭘 웃어. 칠칠맞긴…! 죽지 마! 괴로워도 숨쉬고 있어!”

시끄러워… 누군 죽고 싶은 줄 알아.

쏴아아아아아.

빗물에 피가 혼탁하게 씻겨나갔다. 내 혈관 속에는 피보다 빗물이 더 많이 흐르고 있을 꺼다. 내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은 세파티의 파랗게 질린 얼굴이다. 쿡, 얼간이 같은 소리를. 저 검은 얼굴이 질린다고 해서 티가 날 턱이 없잖아. 그래도 그 건방진 녀석이 저런 얼굴을 하니 의외인데….

피곤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시현!! 눈 떠, 시현! 어서, 제발! 안 그러면 죽게 된다고!”

떠봤자 별로 살 것 같지도 않던걸.

익숙한 암흑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전신을 뒤덮던 아까의 것과는 달리, 이것은 단지 내 두 눈을 감쌌을 뿐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통증마저 흐려지는 죽음에 감사하며, 나는 기꺼이 떠나기를 선택했다. 내 의식은 조용히 외부와 단절된 채 무의식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Day 4.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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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끝났습니다.
이제 당분간은 재미없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액션이 안 나와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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