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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달의 그림자

2005.06.14 18:19

아메바 조회 수:37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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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한 가지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연을 찾아야 한다.

연이 이 도시에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벌써 이 나라를 떠났을 지도 모르지. 설령 있다고 해도, 수많은 인구 중에서 그녀 한 명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지독하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무가치를 따지기 전에, 나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연에게서 대답을 얻지 못하면, 이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순덩어리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정말 날 속인 것인지.

시내를 온종일 돌아다녔다. 짧았던 만남 중 그나마 행선지를 짐작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의 사소한 단서가 전부였다. 하지만 거리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연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비슷한 초록머리를 뒤에서만 보고 쫒아갔다가 낭패를 얼마나 보았는지….

헛된 낭비다. 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도 이런 나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지도.

여름의 낮은 길다. 그리고 무덥다. 구름이 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산과 구름 사이에 빠끔히 고개를 내민 해를 보면서 나는 이마에 가득 맺힌 땀을 훔쳤다. 땀을 먹어 무거워진 옷이 몸에 달라붙는다. 나는 5km 떨어진 시내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소득 같은 건 없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헛수고였다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석양을 보자니 침울해지는군. 배도 고프다. 돈이 얼마나 남았지? 주머니의 잔돈을 확인한 나는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적당한 메뉴를 고르고 돈을 지불한 나는 아무 자리에나 걸터앉았다. 마침 창가에 있었기에 나는 옆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전면유리 너머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저 중에 연이 있을 것 같지만… 착각에 불과하겠지.

한숨을 쉰 나는 유리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못 보던 여자애가 내 앞에 당연하다는 듯이 앉아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버렸다.

아니, 못 보던 여자애는 아니다. 태연하게 내 앞자리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고 있는 이 소녀는… 어제 낮에 보았던 바로 그 검은 소녀니까! 확실히 노림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긴 했었지만 그 뒤론 별 신경을 안 썼었는데? 의외의 만남에 나는 당혹감이 들었다. 그 감정은 소녀가 예법 자체를 완전히 날려버린 상태였기에 더했다. 보통은 모르는 사람이 한눈을 팔 때 말도 없이 앞자리에 앉지는 않는 법이다.

소녀는 내가 한 것처럼 유리 너머의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 한가롭고 당당해서, 오히려 내가 자리에 끼어들지 않았나 의심될 정도였다. 한참을 기다린 내가 가까스로 말을 걸려 할 때, 소녀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지나가는 투로 말을 걸었다.

“낮부터 계속 찾고 있더군.”

“뭐?”

소녀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온통 검은 빛의 얼굴, 오직 눈만이 그 색이 다르다. 그녀의 홍채는… 붉은 색이었다. 나는 조금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연 말이야.”

…젠장, 이제는 확실하게 오싹한데?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를 고쳐 앉았다. 오늘은 정말 무슨 날인가보다. 아침에는 평온의 파수꾼이란 작자가 증거물품을 모조리 긁어 오질 않나, 이번에는 시커먼 꼬마가 어제 일을 훤히 집어내질 않나. 나는 얼굴을 굳히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한 듯싶었다. 나는 체념한 채 말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넌 누구야?”

소녀는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세파티라고 불러. 일단은 마도사야.”

나는 새삼 세파티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마도사… 라고? 검은 탓에 나이를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나보다 어려보이는 건 확실한데. 이런 꼬마도 마도사가 될 수 있는 건가? 조금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용모도 범상치 않은데다 연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사람은 확실히 아닌 듯싶었다. 말투도… 좀 건방지고.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혹시, 그 그림자가 조금 늦게 나타났던 거 기억나?”

늦게라면… 아! 설마 그 호수에서? 나는 경악한 눈을 세파티에게 돌렸고 그녀는 흥, 하는 소리를 내며 한쪽 손에 턱을 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좀 더 일찍 나타났을걸.”

“뭐야… 미행이라도 한 거야?”

“응.”

…나는 순간 내가 ‘미행’ 대신 ‘산책’ 같은 단어를 쓴 게 아닌가 의심했다. 이 녀석, 미행이란 단어가 뭘 뜻하는지 모르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너무 자연스럽게 긍정한다고? 나는 진땀을 빼며 말했다.

“꼬마야.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말은 신중하게 하는 게 좋을 거야. 겉모습은 어려 보일지 몰라도, 난 시현보다 나이가 많아. 존댓말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연장자 대접을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상황에서는 증명해보라고 해봤자 더 유치해질 뿐이군. 나는 강력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세파티는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건…?”

“펴봐.”

세파티가 권유했다. 뭔가 중요한 거라도 적혀있는 건가…. 나는 긴장하며 내용을 보았다.

패스트푸드점 팸플릿이다.

“…….”

“거기 가격표 있지? 딸기 시럽 아이스크림으로 해줘. 콘 말고 컵으로.”

“…꼬마야. 아니, 세파티. 우린 초면이야. 알고 있니?”

세파티는 의외라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정돈 사줄 수 있잖아?”

…순간 나는 아주 심각한 갈등을 느꼈다. 신체상이나마 연장자의 체면을 살려 꼬맹이에게 설교를 하느냐… 아니면, 꾹 참고 인심 쓴다는 식으로 잔돈을 꺼내드느냐. 나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젠장, 봐줬어. 이쯤 되면 나도 성인 반열에 들지도 몰라… 따위의 헛소리를 속으로 지껄이며, 나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마침 내가 주문했던 메뉴도 나왔고 하니까. 햄버거와는 달리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나온다. 잠시 후 나는 사각 쟁반 위에 먹을 걸 받쳐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기 몫을 들고 가는 세파티의 모습은 상당히 능숙하다…. 젠장, 인심 따윈 죽 쒀다 개 주는 거라니까! 소스가 흐르든 말든 햄버거를 꽉꽉 물어뜯은 나는 속으로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어이. 아직 온 이유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세파티는 대답하기에 앞서 한 스푼을 떠 물었다. 아이스크림 전문점도 아니고, 그저 그런 소프트 아이스크림에 불과한데 꽤나 성실하게 음미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그녀가 대답을 보류하고 있자, 나는 조금 초조한 눈길로 그녀를 살폈다.

이윽고 세파티는 숟가락을 입에서 떼었다. 비워진 숟가락을 내려놓은 세파티는 입술을 움직였다.

“시현. 내가 온 이유는 이거야.”

“뭘…?”

세파티는 내 눈을 지긋이 응시하며 말했다.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해.”

…….

툭.

내가 햄버거를 내려놓는 소리였지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와 동일시되어 들린다. 정말… 한계군. 나는 어금니를 가볍게 깨물었다.

“뭐? 중단? 뭐 때문에 그런 소릴 하는데?”

조금 말이 격해져버렸다. 제길, 자기 나이가 뭐라고 주장하든 어쨌든 어린애인데 무슨 소리를. 하지만 세파티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것도 없는 쟁반의 구석을 주시하다가 말했다.

“연은… 찾을 수 없을 테고, 찾는다 해도 좋을 일은 없을 테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판단하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이해해. 하지만 날 믿어. 그 것은 위험한 존재야. 난 지난 1년 동안 그 것을 추적해왔지.”

세파티가 연에게 붙이는 대명사는 소름끼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지는 것은 바보짓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되물었다.

“1년?”

“그래. 1년. 알고 있겠지만, 난 외지에서 왔어. 만 8천 킬로미터 너머에서부터 이 곳까지 왔지. 시현. 에두를 것 없이 확실하게 말하겠어. 연은- 자연체야. 평온의 자연체.”

—.

자연체… 연이 자연체라고?

아니야….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감전된 듯한 충격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테이블과 함께 고정되어 있는 의자가 밀릴 리 없고, 때문에 내 등은 상당한 압박을 느꼈다. 머리가 어지럽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두 명씩이나 내게 연을 의심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이 못 견디게 싫었다.

“연이 마도사라고 생각했어? 안 됐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 것은 자연체야. 대지의 정기에서 떨어져 나온 찌꺼기.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지. 지금의 자연체는 고대와는 달리 별 볼일 없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 것은 조금 사정이 달라. 지금까지 그 것만큼 인간과 흡사했던 자연체는 존재하지 않았어. 10년 동안이나 마도사 협회의 추적을 피한 전력까지 있지. 시현. 연은 위험해. 내 말 이해하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파티는 인상을 흐렸다.

“시현.”

“아니야…. 아니야.”

“시현. 당신은 지금 암시에 걸려있는 걸지도 몰라. 기다려 봐. 내가 확인해줄 테니까….”

세파티는 탁자 위로 몸을 뻗으며 내 이마로 손을 가져다대었다. 나는 그 손을 황급히 밀어냈다. 세파티의 얼굴은 더욱 흐려졌다. 제길, 숨이 가빠져. 나는 등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시현. 잘 생각을 해봐. 시현은 만난 시간이 하루도 안 되는 여자를 이상하리만큼 굳게 믿고 있어. 그건 암시가….”

“암시, 암시,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해! 난 멀쩡하니까!”

세파티의 눈썹이 갑자기 팍 일그러졌다. 탕! 그녀는 탁자를 양손으로 내려치고는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콜라 컵이 좌우로 진동하며 위험한 곡예를 한다.

“아, 정말! 바보 같은 건 시현이야, 이 바보야! 왜 생각을 못해? 시현한텐 원숭이만큼의 지능도 없는 거야? 뭐 때문에 그 여자가 자연체가 아니라고 믿는데! 심증 말고 물증을 대보라고!”

안 그래도 열이 올라있던 차에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나도 벌떡 몸을 일으키며 세파티의 말에 대꾸했다. 그 와중에 콜라 컵이 결국 엎어져 버렸지만 둘 중 누구도 콜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잘도 그런 소릴 해대시는군! 넌 증거가 있어? 연이 자연체란 증거가 있냐고! 피차 똑같은 주제에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지 마!”

“똑같긴 뭐가 똑같아! 어제 하던 일을 쭉 지켜봤어! 파수꾼은 연을….”

“쭉 지켜봐?”

세파티는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아무 말이라도 꺼내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를 계속 추궁했다.

“그래, 쭉 지켜봤단 말이지? 그런데 왜 그 파수꾼을 돕지 않았지? 오호라, 그러고 보니 오히려 파수꾼을 막아주셨군? 게다가, 연이 떠난 뒤에 곧장 추적하지도 않았고?”

“…불가피한 상황이었어. 내가 공원에 도착했을 때 시현은 이미 파수꾼을 공격한 상태였다고! 정상적인 파수꾼이라면 모를까, 그건 거의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존재야! 파수꾼이 연만을 노리진 않았단 걸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그리고, 연은 10년 이상이나 협회의 추적을 피한 자야! 내 존재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네게서 서둘러 떠나갔던 건 그 때문이야! 시현의 눈을 피하자마자 곧장 사라졌다고!”

나는 주춤했다. 할 말이 없어졌다기보다는, 세파티의 말이 왠지 기묘한 느낌을 가져와서였다. 그녀의 말은 분명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어딘가 변명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뭐야, 왜 그 전에 막아서지 않았지? 1년 동안이나 추적했던 존재인데! 단지 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 기회를 포기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부탁이니, 바보 같은 소린 시현이나 그만뒀으면 해! 그 때 시현은 연과 동료로밖에 취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내가 그 앞에 드러났을 경우 시현은 누구를 도울 생각이었지? 나? 아니면 연?” “그건….”

“난 최선의 상황을 택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 건 지금도 변함없어!”

“뭐야? 넌 지금 이게…!”

쾅! 걸레 하나가 어느 새 콜라 범벅이 되어 있던 테이블 위를 덮었다. 엄청난 힘으로 떨어뜨렸는데 튀지도 않는다. 실로 신묘한 솜씨였다. 그리고 그 건 우리 둘의 입을 순식간에 다물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걸레를 떨어뜨린 직원은 먼저 대걸레를 들고 바닥을 우악스럽게 밀어버렸다. 그러더니 그는 한 구석에 쓰러진 콜라 컵을 움켜잡았다. 코팅된 종이가 우그러진다. 와그드드득.

“…….”

“…….”

그 직원은 굳어있는 우리를 보고 싱긋 웃어보였다.

“손님들. 싸움은 나가서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 잉.

“인정 못 해.”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을 나온 뒤에도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뭐, 이런 상황이 늘 그렇지만 나중에는 뭐가 원인인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 낯선 녀석과 갑자기 말다툼을 하게 된 경위를 되짚어본 후에서야 꺼낸 내 말에 세파티는 지겹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껄끄러우면 껄끄러웠지 결코 친숙하지 않은 남과 보자마자 다투기부터 해야 하는 건 기분이 안 좋다. 하지만 난 뭔가 실마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 실마리의 정체조차 뭔지 모르겠다는 게 조금은 한심하게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난 아침에… 평온의 파수꾼이란 자를 만났어. 그 자도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

“그건 맞는 말이야.”

“뭔가 이상해. 그 여자는 내 기억을 지울 생각이었다고 말했어. 자신의 세계는 드러나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게 나타난 넌 뭐지?”

“눈 가리고 아웅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안 것뿐이지, 원숭이 씨. 어떤 암시인지는 몰라도 뇌세포까지 모조리 잠재워버린 모양인걸. 시현 말을 들어보니 그 파수꾼도 말해줬을 거 같은데, 시현의 아우라는 지극히 비정상적이야.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기억소거 같은 고위 마술을 걸란 말이야? 어차피 이 세계의 밖에 접촉해버린 이상, 가능한 빨리 해결하는 것이 낫지.”

세파티의 말은 무서울 정도로 냉철하다. 확실히 어린애가 할 만한 말은 아니군. 제길, 흥분한 터라 대충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겼더니 돌아오는 건 원숭이 취급뿐이다. 하지만… 암시라니.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넌 어제 날 보았지.”

세파티는 걸음을 잠깐 멈춰 세웠다. 그래, 그 노골적인 시선.

“그 때 왜 내게 나타나지 않았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럼 지금은 필요가 생겼다는 거야?”

“내가 온 이유는 벌써 말했을 텐데?”

“이해할 수 없어. 연의 어디가 그렇게 위험하다는 건지.”

“-휴우.”

세파티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귀를 붙잡고, 아래로 거칠게 끌어내리더니, 내가 항의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거기에 대고 고함을 빽 질러버렸다.

“이 바보야아앗—!!!!”

바보야아앗… 야아앗… 아아앗… 아앗… 앗… 아….

나는 귀를 꽉 틀어막고는 심각한 여운에 괴로워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모두 다 이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전의 상황과 비교한다면, ‘거의’라는 단어가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세파티의 검은 전신은 이 곳에서는 엄청나게 튈 수밖에 없다. 세파티의 고함은 단지 그 범위를 좀 더 넓혔을 뿐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쾅쾅 울리는 두통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세파티는 숨을 가라앉히며 입술을 비죽 세웠다. 나는 신음처럼 말했다.

“이, 이봐, 너…. 대체 무슨 짓을.”

“시현, 정말 끈질겨. 정, 말, 정, 말 끈질겨.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설명해줄까? 꼭 그래야만 내 얘길 좀 이해할 것 같아? 웃기지 마! 어차피 변명을 생각하기에 바쁘겠지. 그런 사람에게 무의미하게 과거사를 읊어주고 싶지는 않아! 나도 열을 받을 대로 받고 있으니까 말야!”

“세파티!”

“됐어. 이제 깨달았어. 시현은 완벽하게 암시에 걸린 거야.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생각을 못하는 바보였거나!”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 하는 말치곤 너무 심한 거 아냐? 하지만 내게 몸을 돌린 세파티의 얼굴은 정말로 화나보였다. 그녀는 연설이라도 하듯이 두 손을 쫙 펼치고는 내게 소리쳤다.

“암시라는 건 말야, 건 사람이 아니면 풀기가 정말 어려운 거야! 게다가 시현한테 걸린 건 악질이라서 풀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방해해버려! 부탁이니까, 생각을 해! 자기가 왜 연을 믿고 있는 지 생각이나 해보라고! 원숭이 같은 짓만 하지 말고!”

“누가 원숭이 짓을 한다는 거야?” “물론 시현이지! 논리적인 소리는 하나도 못하고 있으니까!”

“너….”

“됐어! 이제 관둬! 실컷 그 자연체나 찾아보라고! 그러다가 죽든지 말든지 난 신경 안 써! 그 때 가서 후회나 하지 마!!”

세파티는 꺼낸 말만큼이나 빠르게 뒤돌아섰다. 그녀의 긴 머리채가 커튼처럼 흩날렸다. 그녀는 빠르게 거리 안쪽으로 달려가 버렸고 나는 그 뒤에서 허무하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야! 세파티!”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소용없는 짓이다. 나는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 성격도 어지간히 모나군. 건방지긴. 나는 이를 북북 갈며 방금 전까지의 일을 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뭔가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다.

대화하고 있는 동안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었어. 어딘가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 너무도 조그만 생각이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세파티가 떠난 지금 새삼 생각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나 둘 씩 켜지는 가로등 위로 별빛이 희미하게 구름 사이를 뚫었다. 그 것은 밤의 시간을 알림과 함께 하루의 막이 내려질 때가 되었음을 넌지시 고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Day 3.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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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의 '지-잉'은 자동문 소리랍니다.. (..)
4일째는 조금 스토리상의 변혁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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