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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달의 그림자

2005.06.10 03:36

아메바 조회 수:34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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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현 씨는 저 혼돈의 자연체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어요. 지금까지의 공방에서도 그게 드러났죠. 시현 씨. 저 자연체는 시현 씨가 생각하는 것과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에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시현 씨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겠죠.”

“상징성?”

“네. 시현 씨가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시현 씨가 특정한 사건이나 거기에서 파생된 추상적 개념, 다시 말해 하나의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는 얘기에요. 이 세계의 밖은 의미로 이루어진 장소. 그 곳에서 상징성은 명분 이상의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요. 시현 씨가 갖고 있는 상징성은 저 자연체와는 상극의 종류에요. 잘 이용하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지도 몰라요.”

연의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진 못했지만, 난 거기에 궁금해 할 틈이 없었다. 어쨌든 요지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들었으니까.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하지만 시현 씨는 그 상징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우라를 육체 능력의 향상에만 간접적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죠. 제가 약간만 도와준다면, 시현 씨도 저처럼 아우라를 직접 다룰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저 자연체도 어쩌면 소멸할 수 있겠죠.”

“좋아요! 그럼 어서 도와줘요!”

나는 들뜬 마음으로 낮게 소리쳤다. 연은 내게 다가오더니 다친 팔을 먼저 붙잡았다. 마비된 끝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야….”

“미안해요. 조금만 참아요.”

연은 내 팔 위의 허공을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연의 손이 스친 부분은 노르스름한 빛을 내며 밤공기를 차게 밝혔다. 나는 경탄을 느끼며 연이 하는 동작을 조심스레 살폈다. 빛이 무게감 있게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내 팔은 천천히 아물어갔다. 핏자국 아래의 살이 맞붙고 부어오른 부분이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은 조금 소름이 끼쳤지만… 연이 손을 떼었을 때 내 팔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멀쩡해진 손을 쥐락펴락하며 신기해했다. 이제는 아픔도 모두 사라졌다. 다 나았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신기한 능력이다. 하지만 연은 내가 계속 놀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끌어당겨 내 옆에 붙은 뒤 조심스럽게 내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그럼, 이제 시현 군의 아우라를 개방하는 주문을 걸겠어요.”

그러더니 연은 내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에아테,”

다음은 왼뺨에.

“아인사임,”

그리고 오른뺨.

“노르덱,”

마지막으로 턱에.

“미르더그.”

그리고 연은 내게서 멀어졌다.

에, 에헴. 주문을 외운 것뿐이잖아. 다른 뜻 없어. 없다고. 하지만 왠지 얼굴이 달아오른다. 나는 연의 입술이 닿은 곳을 어루만지면서 변화를 느껴보려 애썼다. 하지만 별다른 기분은 안 드는걸.

“아무 변화도 없는데요?”

“이미지를 떠올려야 하니까요. 손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해보세요.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안 돼요! 그냥 빛이 난다고만요. 광도도, 빛도, 형태도 떠올리지 말고.”

엑, 뭐가 그렇게 어려워. 나는 내 손을 노려보면서 열심히 생각했다. 자, 빛이 난다. 빛이 난다. 빛이 난다… 하지만 내 손은 묵묵부답이었다. 정말 주문이 걸린 게 맞긴 한 건가? 한동안 멀쩡한 손을 잡고 이리저리 째려보던 나는 연에게로 체념한 눈빛을 돌렸다.

“안 나는데요?”

그 순간, 밑에서 불빛이 올라왔다.

나는 조금 혼탁하긴 하지만 은은한 초록빛이 손에서 떠오른 걸 보고 당황했다. 이게 뭐야? 진짜 내 손이야? 랜턴에다가 손 모양의 껍데기를 뒤집어씌운 것 같다. 연이 말했다.

“그게 시현 씨의 아우라에요.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시현 씨의 의지를 이 세계에 구현시킨 거죠.”

“생각보다… 쉽네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은 주문으로 시현 씨의 의지를 자극시켰기 때문에 아우라를 쉽게 끌어낼 수 있는 거예요. 잠을 자게 되면 효과도 사라질 거예요.”

헤? 잠을 자면 사라진다라, 독특하군. 나는 빛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감탄했다. 초록색 빛은 모으면 모을수록 더 밝아졌고, 그만큼 불안정해보였다. 처음이라 어려울 줄 알았는데, 내가 의도하는 대로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다. 좋아. 이거라면… 죽일 수 있을 지도 몰라. 아니, 확실하게 죽일 수 있어! 나는 열기 섞인 눈으로 손에서 춤추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연은 초조한 지 들뜬 나에게 말했다.

“시현 씨. 시간이 없어요. 잠적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제 곧….”

그 순간 연의 말을 대변하는 것처럼 숲 너머에서 굉음이 울렸다. 호수를 타고 진동이 둥글게 전해져왔다. 그때까지 날아가지 않고 있던 새들도 잠에서 깨어 하늘로 도망쳐버렸다. 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왔군요.”

드디어 나타났나. 나는 흙먼지로 만들어진 구름을 앞에 두고 아우라를 있는 대로 손에 끌어 모았다. 점점 아래를 응시하기가 힘들어진다. 가로등의 불빛도 내 손에 덮여버렸다. 믿기지 않는 일이다. 나는 쓴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에 재미난 경험이나 하고 가는군. 잠깐, 마지막? 나는 내가 떠올린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어… 보장은 할 수 없지만, 일단 죽는다는 건 보류해두자. 목숨이 결정될 판에, 이 정도 여유는 갖고 있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오던 무언가가, 마침내 호수의 앞까지 도달했을 때, 나는 사방을 단숨에 찢어발기는 그림자의 팔을 보았다.

-콰아아아앙!!

호수 건너편의 나무들은 일제히 박살이 났다. 폭탄을 수십 발 떨어뜨리면 저렇게 될까? 그 기세는 흡사 돌풍과도 같다. 조각은 다시 조각으로, 방울은 다시 방울로. 눈앞의 모든 것을 극소로 수렴시키며, 호수를 반으로 가른 채로 그림자는 내게 돌진해왔다. 나는 뒤로 손을 내저었다.

“피해 있어요!”

발소리와 함께 연의 기척이 사라졌다. 나는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그 속에 담기는 빛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다. 나는 그림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중얼거렸다. 언어에는 의미가 있다고 했겠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던데….”

두두두두두두! 거대한 몸체에 비해 저런 속도는 차라리 희극이다. 갈라지는 호수는 거의 바닥이 보일 정도. 주변의 물들은 모조리 증기로 끓어오르고, 때 아닌 안개를 휘감은 그림자는 마치 유황옥을 뚫고 오는 악귀와도 같았다. 그림자가 그 거대한 입을 벌려 나를 씹어버리기 직전, 나는 그 입 속에다 내 손을 박아 넣으며 소리 질렀다.

“네 놈은 뭘 남길지 한 번 시험해볼까? 한번 뒈져봐, 이 개새끼야!!!”

전신에 불쾌한 기분이 치밀어 오른다. 그것도 잠시, 그림자의 몸속에서 섬광이 일며 눈 닿는 곳의 모든 것이 증발하였다.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림자를 놓쳐버린 채, 내 의식은 무서운 속도로 멀어져갔다.



* * * * * *



“아…!”

갑작스럽게 깨어나 버렸다. 그림자! 그림자는? 나는 황급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런 내 눈 앞에는… 연이 웃으면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이렇게 되었네요.”

똑. 연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떨어지며 내 코끝을 때렸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나는 연의 무릎에서 머리를 들었다.

또다시 공원이다…. 장소는 아까랑 다르지만. 나는 연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물 때문에 조금 후줄근하긴 하지만 멀쩡하다. 나도 그런 편이고. 적어도 죽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그렇단 것은….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요. 시현 씨. 성공하셨어요.”

“그렇다면…?”

“네. 자연체는 소멸했어요.”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멍청히 앉아있었다. 소멸했다고? 자연체가? 그러니까 그 말은… 그 자연체가 죽었다는 말?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눈앞을 응시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공원의 한 모습. 평화롭다.

아… 그래.

날 죽이려 하던 녀석이… 죽었다.

끝난 거다.

“하하.”

나는 짧게 웃어보았다. 그리고 한 번 더, 더 길게 웃어보았다. 그다지 나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지금은… 웃어야 하는 때이지? 웃어도 되는 때지? 그래서… 이렇게 짜릿한 느낌이 오는 거겠지!

“이얏- 호!!”

나는 환호하며 벤치에서 몸을 튕겼다. 연은 조금 당황한 웃음을 띄우며 날 바라보았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하하하, 살았다! 난 살았다고! 연이 도와주긴 했지만, 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불합리한 죽음을 내 손으로 당당히 벗어났다. 그렇게 해서 살아났다는 것이, 여간 기쁜 것이 아니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주변을 뛰어다녔다.

환호도 지친 나는 무릎을 붙잡고 가빠진 숨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보였다. 나와라, 빛! 나와라! 하지만 검푸른 그늘이 진 손은 그대로이다. 손등을 돌려봐도 마찬가지. 의식을 잃은 것도 자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내는구나.

나는 그 상태로 연을 돌아보았다. 연은 벤치에 앉은 채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들어보였다.

“연 씨. 우리가 해냈어요!”

“네.”

“그 그림자를 쓰러뜨렸다고요!”

“맞아요. 전 솔직히 시현 씨가 이렇게까지 자연체를 몰아붙일 줄은 생각지 못했어요. 아무리 주문을 외웠다지만, 지금껏 아우라를 다뤄본 적도 없는 사람이 그런 강인한 존재를 쓰러뜨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시현 씨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하하.”

“그런데… 저건 어떻게 하죠?”

“네?”

연의 얼굴이 갑자기 흐려지자 나는 의아해했다. 아직 뭐가 남았단 거야? 나는 연이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았고, 연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

아비규환이라고 해야 하나….

그림자의 마지막 돌진 때문에, 호수는 더 이상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졌다. 아우라를 집어넣었을 때의 그 폭발도 한 몫 했겠지. 넓어진 만큼 반으로 낮아진 호수의 위에는 이쑤시개처럼 변한 나무 잔해들이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대신 원래 나무가 심어져 있던 장소는, 뾰족뾰족한 밑둥만 남은 것이 고대 고문터를 보는 것 같다. 여기선 안 보이긴 하지만, 보도도 엄청 엎었었지. 그러고 보니 화장실도 부쉈던가. 박살난 제방 위로 조용히 물결치는 수면을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단점 중 하나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희박한 공공의식.

“뭐, 이런 일까지 고려해줄 수는 없는 거겠죠?”

나는 기지개를 켜며 벤치에 도로 앉았다. 에, 뭐, 좀 떠들썩하긴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잘 처리해줄 것이다. 한밤중의 돌풍 습격, 뭐 이런 거로. 이런 때면 꼭 한 두 개씩 엉터리 증언이 나오고 기자들은 빈약한 근거를 바탕으로 추측성 기사를 써대는 데 열심이기 마련이다. 좋은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선 나름대로 편리하다고, 그거.

나는 뒷머리를 깍지 낀 손으로 받치고 하늘을 보았다. 호수에서 보았던 풍경과 별로 다를  건 없다. 다만 달이 상당히 내려갔다는 정도. 그리고, 언제나 멈춰있는 것 같으면서도, 구름은 볼 때마다 그 모양이 바뀐다.
그림자는 결국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다. 그게 나름의 대답인가.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나는 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의 조금 달라진 시선을 느끼고 움찔하였다. 그 동작의 의미를 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 당신은 누구죠?” “….”

하늘을 날고 아우라를 다루던 여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이제부터 할 얘기의 짧은 준비처럼 느껴졌다.

“저는 마도사입니다.”

“마도사…?”

“네. 넓은 의미의 마도사는 아우라를 알고 다룰 수 있는 인간들을 의미해요. 좁게는 마도사 협회에 가입되어 있는 자들을 의미하고요. 저는 전자에 속해요.”

마도사…라.

그래, 그런 개념이 없이는 연의 이상한 점들을 설명할 수 없겠지.

“저는 사정상 여권을 취득할 수 없어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밀입국을 해야 했죠. 오늘 같은 일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시현 군이 습격당한 건 제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아우라를 다룰 줄 아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 자연체는 저를 주목했다가 시현 씨를 발견하게 된 걸지도 모르죠.”

“…….”

나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뭐, 그런 종류의 사람일 거라고 짐작은 했어요.”

“숨겨서 미안해요.”

“아뇨. 숨기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할 노릇이지.”

연은 멋쩍게 웃었다. 저런 얼굴을 보면 그저 따라 웃고 싶어진다.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가끔씩 있지. 난 이렇게 즐거운데 너는 왜 웃지 않고 있느냐- 따위의, 뭔가 보는 사람을 바보로 몰아넣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웃음 말이다.

나는 그냥 바보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씩 웃어버렸다.

“그런데… 절 불러낸 이유가 뭐였죠?”

“그건….”

연은 대답을 멈추고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도 무심코 그 쪽을 돌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덤불뿐이었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연은 눈을 떼었다. 그리고 쓸쓸하게 웃었다.

“…이제는 필요없어졌어요.”

새벽 공기는 차다. 입에서는 옅은 김이 피어올랐다가 금세 사라져버렸다. 연은 벤치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이제 떠날 거라는 걸,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걸 직감했다.

기묘하군.

“미안했어요. 시현 씨. 폐를 끼쳐서. 전 여기서 떠나는 편이… 시현 씨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아아.”

나는 손을 들어보였다. 그걸 얼핏 본 연은 이쪽으로 돌아섰다. 머리칼을 따라 역동적으로 떨어지는 광택. 그 그림 같은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고작 하룻밤이었지만, 꿈을 꾼 듯한 시간이었다. 아마도 평생 다시는 겪지 못할 경험이겠지. 나는 작별했다.

“잘 가요.”

연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맑은 웃음을 띄워보였다.

“안녕. 하지만 의미와 의지가 있다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연은 말을 끝내고 공원 저편으로 걸어갔다. 곧 그녀의 모습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여운을 한참동안 머리 속에 담고 있던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연못물을 잔뜩 먹은 옷이 쉰내를 풍긴다. 방학을 해서 망정이지, 학기 중이었음 큰일 날 뻔 했군. 다시 고개를 든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양팔을 벤치 뒤로 넘기며 질리지 않는 하늘을 본다.

“-후아.”

조금, 아쉽다.

말하지 않을까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잠자코 있었지만, 연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 * * * * *



짹짹짹짹….

“…흐음.”

낮인가…. 아침은 굶었지만 점심은 먹어야겠지.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우둑거리는 게 예사롭지 않다. 으윽. 역시 그건 아무리 능력이 발달되었어도 할 만한 종류의 운동이 아니었어. 나는 쑤시는 허리를 두드리며 방 밖으로 나왔다.

낮의 햇살이 창가를 두드린다. 가구들은 모두 원래대로 배치되어있다…. 쏟아졌던 식기들. 넘어졌던 물건들. 모두 다. 나는 새벽에 있던 그대로 올려져있는 쪽지를 집어 들고 씩 웃어버렸다. 새벽, 지친 몸을 끌고 왔을 때 복구된 집을 보고 놀란 채로 이 쪽지를 집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지.

“고마웠어요… 라.”

나는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쿡, 고마울 게 뭐가 있다고.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를 열었다.
식사를 끝내자,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오후의 시각, 방학이란 게 실감이 난다. 새벽에야 워낙 피곤했으니 금세 잠이 왔지만, 지금은 새벽의 일을 회상만 해도 금방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 없다. 거대한 적. 호수를 두 쪽 내고 나무를 예사로 날리는 거체를 내가 없앴단 말이지? 내가 이겼단 말이지? 크하하핫! 나는 홀로 유쾌하게 웃으며 침대 위에서 버둥거렸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절대로 못할, 그래서 훨씬 통쾌하게 느껴지는 동작이다.

“좋았어, 밖에나 가자!”

목적지는 없지만 무작정 나가보고 싶어진다. 그렇게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 집안에만 박혀있으라는 건 가혹한 처사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집을 나섰다.

역시 방학은 방학인지, 이 시간대에 있을 리 없는 연령대도 꽤 많이 보인다. 나는 큰 돌 하나를 차올려서는 손으로 부수어보았다. 와, 아직까지 힘이 멀쩡하네. 왠일일까나. 거기 아줌마, 침 떨어지겠으니 입 좀 닫아요.

여름임을 실감케 하는 강한 햇빛이 사람들의 머리를 달구고 있었다. 그 더위 속에서 간간히 부는 바람을 만끽하며 나는 숨을 들이켰다. 평범한 일상. 어제와 다를 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왜 그리 멋있게만 느껴지는지… 모든 걸 잃을 뻔한 경험은 확실히 나를 변화시켰다. 그래, 이게 살아있다는 거야!

8년 전도… 그렇지 않았던가?

“…….”

다르다. 이건 그 때와는 다르다. 난 모든 건 아니지만 많은 걸 잃었다. 집, 부모님, 그리고 내 몸. 이번 일도 결과적으로는 그 사고의 연장이다. 이 몸만 제대로 되어있었다면, 그 자연체란 것도 날 습격할 리가 없었으니까.

조금 추워졌다. 나는 어깨를 꽉 쥐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아냐. 과거를 억지로 끌어내서 자학하는 취미는 갖고 있지 않아. 난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해. 만족하고 있다고. 그림자 따윈….

“응?”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파들 사이로 얼룩이 보인 것 같던데…? 설마, 또 그 그림자가? 나는 멍청히 서 있다가 상황을 깨닫고 황급히 그 쪽으로 걸어갔다. 녀석이 아직 살아있었나? 하지만 대낮의 사람들 사이에 그런 게 멀쩡히 돌아다닐 리가 없는데. 크기도 훨씬 작은 것 같고.

나는 얼룩이 보였던 곳에 간신히 도착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인도일 뿐이다. 뭐야…. 잘못 본 건가? 나는 우두커니 서서 노려보기라도 하면 없던 그림자가 생길 것처럼 행동하다가 그만두었다. 바보 같은 짓이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그 때,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육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명한 느낌이었고 또 그만큼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나는 뒤로 몸을 홱 돌렸고 또다시 그 정체불명의 얼룩이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걸 보았다.

“…헷."

다문 이빨 사이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열 받는데? 누가 놓칠 것 같냐! 나는 얼룩이 보였던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달렸다. 행인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거친 질주다. 스친 사람들이 비명, 또는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시야 속에서 특기할 움직임은 없다. 좋아, 조금만, 이제 조금만 더…!

“…없잖아?”

멈춰선 나는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아까처럼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내가 헛것을 봤다는 건가? 아냐. 그렇지 않아! 분명히 얼룩이 있었다. 하지만 내 앞의 텅 빈 공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홀리기라도 한 것 같군.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상황을 이해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검은 소녀가 지나가고 있었다.

전신이 새까맣지만 흑인은 아니다. 저렇게 길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흑인의 것일 리 없지.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옷차림은 볼 수 있다. 위도 아래도 모두 검은색, 엄청난 차림이군. 저러니까 얼룩으로 착각할 만도 하구나. 사람들의 시선이 상당수 그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 시야에서 벗어난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그 날카로운 시선 또한. 나는 소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뒤돌아서는 일 없이 멀어지기만 했다. 이윽고 뒤섞인 인파가 소녀를 가려버렸다. 목표를 놓친 시선은 어정쩡한 곳에 떨어져 내렸다. 한동안 그렇게 서있던 나는 눈길을 거두었다.

여름의 햇빛이 무심하게 내려올 뿐이다. 이제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Day 2.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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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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