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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달의 그림자

2005.06.09 05:16

아메바 조회 수:47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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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프의 윗부분이 모습을 감췄다. 박혔나? 괴력에 의해 그림자는 바닥을 긁으며 거의 10미터 가까이 미끄러졌다. 나는 손목을 흔들며 녀석이 밀려난 쪽을 노려보았다.

고작해야 잼 바르는 나이프. 집 한 채를 동강내는 괴물이니 그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그림자는 파헤쳐진 포석더미 가운데서 금방 몸을 일으켰다. 나이프는 본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다 그 어둠 속에서 퉁겨나왔다. 그림자는 나를 중심으로 둔 원을 천천히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디딤발과 무게중심을 옮겼다. 이제 쥘 무기도 사라졌지만, 아까 정도의 힘이라면 대항하기엔 충분하다. 공격은 할 수 없을지 몰라도, 회피까진 가능하니까. 자, 덤벼봐. 언제냐!
하지만 순간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내 시야 속에 그림자와 연이 함께 들어온 것이다. 이런, 망할! 긴장 때문에 배치를 잠시 잊고 있었어! 그림자는 내 동요를 알아차렸는지 연에게로 곧장 달려들었고, 나는 급한 김에 발로 지면의 돌멩이를 걷어찼다. 제발 막아줘라, 제발!

피잉! 그림자는 잽싸게 몸을 숨겼고 대신 뒤의 나무가 돌 탄환에 관통당해 구멍이 났다. 신발도 멀쩡하진 않아서 코 부분이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지금 운동화 따윌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다음 위치는? 나는 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며 그림자를 찾았다. 쳇, 주둥이가 달린 주제에 목소리는 절대 내지 않는군. 짐승답지 않아. 기척도 거의 없고.

“연 씨! 정신이 들어요?”

연은 그 때까지도 의식이 없던 상태였다. 내 말에 반응을 보인 연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결국 아까처럼 쓰러져버렸다. 어쩔 수 없나. 나는 어느새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인 이마를 쓸어넘겼다.

이 근방은 그림자투성이인 데다 나무가 너무 빽빽해서 지형이 안 좋다. 이 앞, 분수대가 있는 넓은 공터가 그나마 최적의 장소이다. 놈도 몸을 갖고 있는 만큼 달리면서 필연적으로 소리를 내게 되어 있었다. 그것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지금의 내 감각은 충분히 감지해낼 수 있다. 나는 연을 안아 올린 뒤 마지막으로 근방을 탐색했다.

없군. 어디에도 없어. 이대로 공터로 이동하면 될 텐데… 이상해. 지나친 고요가 내 몸을 간지럽혔다. 극도로 달아오른 털끝 하나하나가 위험을 알리고 있다. 이렇게까지 불길한 기분이 몸을 엄습하는데, 왜 녀석은 보이지 않는 거지-.

“—.”

잠깐만.

위는?

“설마!”

경악한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고, 동시에 컴컴한 암흑 속에 갇혔다.

이게 뭐야? 잔상조차 남지 않는 진짜 암흑. 축축하고 뜨거운, 엄청나게 기분 나쁜 곳이다. 습기 찬 공기가 뿜어 나와 숨을 막히게 했다. 뚫려있는 곳이라곤 아래. 이건 마치 봉지를 뒤집어쓴 것 같은… 그러니까 여기는… 녀석의 입 안이야!

“우와앗!”

나는 바닥에 드러누우며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코앞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인 공기의 파열음. 제길, 이게 정말 생물의 턱이야? 그림자는 입을 다문 동시에 굵은 팔을 옆으로 휘둘렀고 미처 자세를 바로잡지 못한 나는 대신 팔과 어깨로 공격을 받아내었다.

비명도 못 지를 만큼 상처는 깊게 패였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도 잠시, 끔찍한 고통과 함께 팔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건 멀미를 일으킬 것 같은 머리에 비하면 약과였다. 우욱, 이건 숫제 포탄이나 다름없잖아! 무시무시한 속도로 튕겨나간 나는,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한 화장실의 외벽 철창을 부수고 말았다.

쿵! 제길, 이게 훨씬 아프다고! 나는 부서뜨린 창살들과 함께 적갈색 벽돌 벽에 재차 충돌하고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우… 제기랄,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다. 갈비뼈라도 나간 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칼을 꽂아 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통을 이기며 벽에 간신히 몸을 끌어올린 뒤 상태를 확인했다. 응급실에 실려 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완벽한 중환자다. 연은 간신히 보호했지만, 그 대신 어깨가 찢기고 흰 셔츠가 피로 물들었다. 아드레날린이 고통을 그나마 막아주고 있지만 그 것도 언제까지 계속될 지.

이래서야 연을 데리고 이동하는 건 무리다. 나는 연을 벽에 기대놓고 성한 팔로 떨어져나간 창살 하나를 붙잡았다. 단순한 구분용이라 끝에 가시 같은 건 달려있지 않다. 나는 속이 빈 파이프 끝을 억지로 우겨넣은 다음 앞으로 뛰었다. 이렇게 된 이상 가능한 멀리 유인해야 해!

“나와!! 이 새끼야!!”

나는 공터로 달려가며 바닥을 창살로 세차게 긁었다. 창살 끝에서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불똥이 튀겼다. 몇 번을 반복하자, 창살은 날카롭게 갈려서 제법 그럴 듯한 흉기가 되어 나왔다. 나는 그 걸 칼처럼 거머쥔 채 공터 앞에 멈춰 섰다.

그림자는, 너무도 고요하게 나타났다.

놈이 바닥에 발을 디디던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놈의 전신을 대하게 되었다. 어린애도 집어넣을 것 같은 굵은 목과 거기서 뻗어 나오는 기괴한 머리통. 목이 가늘어지면서 끝에 난 부스럼 같은 그 머리는 단지 몸통에 비해 작을 뿐, 사람을 통째로 씹어 먹을 만한 턱을 갖고 있었다. 활처럼 휘어진 뒷다리의 근육은 철근을 꼬아서 만들었다 해도 믿을 것 같다. 이제라도 곧 폭발할 것만 같은 탄성이 가득 차있다. 저게 한번 폭발하게 되면 어떻게 될 지는… 방금 겪어봤군. 새삼 몸이 욱신거린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거대한 놈이 우리 집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내가 망설이던 사이 녀석이 돌진했다. 나는 빠르게 창을 뒤로 뺐지만 정작 그림자의 방향은 내 반대쪽이었다. 에? 무슨… 설마! 또 연을 노리고 있는 건가!

“이 놈이!”

나는 창을 치켜든 채 놈의 뒤를 따라 있는 힘껏 달렸다. 향상된 내 속도로도, 거침없이 달리는 저 놈은 따라잡기가 힘들다. 빌어먹을, 기껏 여기까지 끌고 왔더니 도리어 나를 유인하려 들어? 기껏 만들어놨더니 이젠 또 던지게 생겼군. 하지만 그 것도 저런 재빠른 녀석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놈을 잡으려면 최소한 두 개. 하나로 동선을 끌어낸 뒤 나머지로 일격을 날려야 한다. 하지만 고작 하나 가지고 뭘 하라고?

하는 수 없지. 동선까지만 유도하고 그 다음은 몸으로 박아버린다!

“으랴아아앗!!”

달리는 상태에서 한쪽 팔로만 하려니 쉽지가 않다. 창을 위로 던져 역수로 붙잡은 나는 그대로 있는 힘껏 놈의 좌측에 창을 날렸다. 제, 제길! 넘어지겠어! 던지는 반동으로 멋지게 한 바퀴 돌아버린 나는 간신히 땅을 디뎌 그림자의 우측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좋아! 망설임 없이 그대로 일격이다!

-팟!

“어?”

이런 바보 같은! 놈은 내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좌로 더 빨리 움직여 창의 통과지점을 지나쳐버린 것이다. 목표를 잃은 창은 바닥에 비스듬히 박힌 뒤 경쾌하게 튀어 올라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젠장, 오늘 보도 많이도 깨먹는군.

…내가 여유부릴 상황이 아니다. 바로 앞에 나무가 있다고! 충돌한다!

“으왓!”

간신히 나무를 박찼지만 그건 또 다른 나무로 돌진하는 꼴이 되었다. 나는 갈지자로 이 곳 저 곳을 옮겨 고도를 높여갔다. 숲의 최정상! 빼곡한 나뭇가지들을 헤치자 나는 허공에 뜨게 되었다. 적은… 내 바로 아래에!

“으윽!!”

그림자는 입을 쩍 벌린 채로 아래에서부터 나를 덮쳐들고 있었다. 완벽하게 노린 공격이다. 흡사 늪에 빨려드는 꼴. 공중이라면 피할 길이 없다. 발을 뻗어보지만 헛된 저항일 뿐이다. 저 녀석의 턱은… 훨씬 크게 벌어지니까! 중력이 계속 내 몸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커져가는 암흑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끝인가? 나란 인간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나?

그러나 그림자는 의도대로 나를 먹어치우지 못했다. 어디선가 날아든 빛덩어리가 녀석의 옆구리를 꿰뚫은 것이다. 하지만 놈은 빛에 밀려나가며 내 정강이를 들이받았고 나는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젠장, 살맛나는군!

물레처럼 두어 바퀴 돈 나는 간신히 근처 전나무의 꼭대기를 붙잡았다. 그림자는 나무들을 부수면서 요란스럽게 떨어져나갔다. 오랫동안 쌓여있었을 먼지들이 그 기세에 날아가 버렸다. 콜록, 콜록! 어쨌든 살아남았으니 다행인가. 그런데 그 빛덩어리… 설마? 나는 빛이 날아온 곳을 보았다. 그 곳에는 연이 있었다. 반가움 반, 고마움 반에 그녀를 부르려던 나는 그 자세로 천천히 굳어버렸다.

거의 40미터 가까이 자란 전나무다. 그 위에서 나는 공원의 거의 전부를 내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은 그보다도 더 높게 떠 있었다.

연의 그림자가 조그만 달을 반쯤 먹어치웠다. 그 아래, 디딜 바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싸늘한 공기만이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 밤하늘의 한 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그 모습은 너무도 고고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자그마한 인간의 몸이 저 거대한 짐승보다 더 공포스럽게 다가왔다면, 그건 거짓말일까? 연의 두 눈에 맺힌 안광은, 붉다. 렌즈 따위가 아닌, 홍채에 새겨진 선천적인 붉은 색이다. 나는 새삼 깨달은 사실에 전율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연은 결코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을.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지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존재라곤 오직 연뿐이었다. 바람이 한 차례 그녀를 쓸고 지나간 뒤, 천천히 가라앉는 머리칼 속에서 연은 입을 열었다.

“들어라. 하찮고 미력한 짐승아.”

…….

나는 갑작스런 통증 때문에 다친 팔로 가슴을 움켜잡을 뻔 했다. 제길… 숨이 가빠. 나이프를 들었을 때부터 줄곧 그랬는데, 왜 이제서야 새삼 깨닫는 거지. 현기증이 날 가지에서 떨어뜨릴 것 같았다. 나는 전나무 줄기를 부서지도록 움켜잡았다. 연은, 분명 그림자에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관계없는 3자인 나까지도 숨이 막힐 정도의, 묵직한 중량감이 그 말 속에 서려있었다.

연은 허공을 계단처럼 밟고 한걸음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먼지만한 목숨에 매달린 미물 주제에, 잘도 모습을 내놓고 있구나.”

뚜벅 뚜벅.

뚜벅 뚜벅.

그건 하늘을 걷는 자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깔끔함은 잘 벼려진 칼의 그것에 가까운 종류였다. 보기만 해도 잘려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이미지. 형상은 실상을 얼마나 담보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건조해져 타들어가기 시작한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따랐다.

한 걸음, 한 걸음, 가상의 층계가 낮아질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붉은 안광. 그 눈을  흉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별조차 사라진 밤 속에서 홀로 광채를 내는 왜소한 만월. 이해할 수 없는 광기가 머리 속을 휘몰아쳤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풍경 속에, 유일하게 남은 의미는, 오직 연의 살의뿐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누군가에게 감히 죽음을 주겠다 선언할 수 있는 자라면, 반드시 그녀여야 한다. 이유 없는 강제마저 정당화해버릴 의미는, 오직 그녀만이 가지고 있다. 아아. 난 미쳤어. 난 미친 거야. 제 정신으로 저런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야…!

“더러워서 소름이 돋을 정도군. 뒤집힌 제 몸도 세우지 못할 역겨운 벌레 같으니. 꺼져. 쓰레기.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멸시와 증오뿐이다. 타인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마. 네게 어울리는 장소로 돌아가라. 삶을 조롱하나 죽음에 겁먹는 개들 속에서, 그 비루먹고 썩은 몸뚱이를 놀리는 것이 네게 허락된 전부다.”

연은 차게 웃었다.

“알았나? 이 곳은 네 것이 아냐.”

공포.

귀기 때문에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처절하리만큼 강압적이다.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계산할 수 없는 지독한 한이 담겨 있다. 믿을 수 없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저런 식으로 미워할 수 있는 걸까? 얼마나 큰 원한이 쌓여야 저렇게 존재 자체를 모욕할 수 있는 거지? 언어를 뛰어넘은 힘, 경멸이란 조악한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연의 말에 깊숙이 엉겨 붙어 있었다. 아무도 저 말을 똑같은 느낌으로 발음할 수 없을 거다. 아무도.

연의 발끝에 날아오른 나뭇잎이 스쳤다. 스산한 밤공기가 바람이 되어 숲을 쓸었다. 등에서는 오싹한 기운이 올라온다.

“여기서 함부로 숨을 내뱉지 마라.”

연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마치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처럼, 그녀는 허공에 노호했다.

“그 천박한 입을 감히 들이대지 말란 말이다!”

파악! 나무의 바닥을 뚫고 그림자가 연의 밑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림자는 연의 옆구리를 세차게 후려쳤고 연은 팽이처럼 허공을 돌았다.

“꺄아악!!”

“………….”

체중이 갑자기 열 배로 불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숫제 연극 클라이맥스에서 파투난 꼴이다. 나는 좌절과 동시에 하마터면 굴러 떨어질 뻔 했지만, 간신히 자제하고 연에게로 몸을 날렸다. 짐짝처럼 취급하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연을 받쳐 안고 공원 위를 달렸다.

“좋아, 캐치!”

연을 놓친 그림자는 허공에서 방향을 바꿔 이 쪽을 노렸다. 젠장, 저 자식도 하늘을 나나?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듯, 그림자는 나와 같이 나무 꼭대기를 밟으면서 수십 미터 상공을 내달렸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저 녀석은 지나갈 때마다 나무를 반쯤은 박살내 버린다. 망할 놈. 이 나라에서 나무 한 그루 세우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지 알아? 어쨌든 그런 보람이 있었는지 녀석은 내 뒤를 금방 바싹 따라붙었다. 연을 안은 채로는 피하기가 어려운데!

콰앙! 그림자는 무식하게 가속을 해서 나를 몸통채로 들이받으려고 했다. 멍청한 녀석.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지, 설마 그런 공격에 먹히겠냐! 나는 위로 훌쩍 뛰어올라 쫒아온 녀석의 등을 밟으려고 했다. 하지만 눈앞에 뾰족뾰족한 윤곽이 비치자 나는 아뿔싸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이 놈은 온 몸에 가시가 나 있지! 하지만 그 때 연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갑자기 나에게로 밀착하더니 내 어깨 너머로 양팔을 뻗었다. 웃, 이, 이봐요. 너무 붙었어. 도대체 뭘 하려고?

연은 뻗은 팔을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림자의 등이 보이는 곳이다.

“타앗!!”

쿠- 웅!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위쪽이 갑자기 앞으로 쏠렸다. 제, 제길! 회전하잖아! 한편 그림자는 등에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먹고는 아래로 푹 꺼져버렸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숲의 일부가 함몰된다. 흡사 절벽에서 낙석이 일어나는 꼴이다.

연이 받은 반작용이 워낙 큰 탓에 회전속도는 장난이 아니었다. 나무 수 그루를 몸으로 박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정상 궤도를 달릴 수 있었다. 연은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불안정한 자세를 교정한 뒤 이마를 손등으로 쓸었다. 옆구리의 옷은 찢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상처는 없다.

“휴, 위험했다.”

“…아까 대체 뭐한 겁니까?”

“그거요? 언어에 아우라를 실은 거예요. 원시적인 마술이죠.”

“그 내용은….”

연은 고개를 젓더니 딱 잘라 말했다.

“내용은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아우라죠. 적대적인 아우라가 들어가면 사랑한다고 말해도 구역질이 나죠. 온화한 아우라를 쓰면 욕설을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요.”

우음… 그럼 내가 느꼈던 살의는 아우라 때문인 건가. 솔직히 좀 섬뜩한 기분이었다. 연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언어도 인간의 약속인 만큼, 그 자체의 내용으로도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저는 그 상징성을 최대한 이용해보려고 했지만… 안 통하네요.”

“그렇게 위험한 상대에요?”

“네. 제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상대가 저보다 더 권위 있는 존재란 얘기에요. 후, 자연체 주제에. 조금 열 받는걸?”

내가 완전히 이해한 건 맨 처음의 대답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의 것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하하. 그래, 위험하단 말이지. …알고는 있었지만, 말로 들으니 더 걱정이 되… 으왓?!

“이크크!”

다른 생각을 하다가 연을 놓칠 뻔 했다. 나는 황급히 균형을 잡았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친 팔을 써서 연을 받쳐버렸다. 밀려오는 고통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크악…!”

“어, 시현 씨?”

당황한 연은 몸을 움직였고 그게 더 악영향을 미쳤다. 결국 나는 발을 헛디뎠고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으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악!!”

파사사삭! 파삭! 가지들이 끊어지면서 감속을 시켜주지만 그전에 몸이 박살날 꼴이다. 저 밑에 보이는 건… 바닥이잖아! 위험위험위험! 바닥과의 충돌 직전 나는 간신히 나무 하나를 박찰 수 있었고 두어 번의 재도약 끝에 우리는 숲의 위쪽으로 복귀했다. 휴우, 살았군. 하지만 안도하긴 일렀다. 내 목을 꽉 붙들고 있던 연은 앞을 돌아보더니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시현 씨, 앞앞앞!”

“…안 보여요! 그러니까 허리 좀 세워주실래요?”

“자! 치워줄 테니 빨리 멈춰요!”

연은 허리를 뒤로 젖혔고 나는 앞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시원스런 호수가 잔잔한 물결을 띄우고 있다. 건너편까지는 상당히 멀다. 이런, 빨리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발은 벌써 마지막 나무를 박찬 상태였다. 생각보다 긴 체공감이 우리를 휘감았다.

“…….”

“…….”

“…으아아아악! 이런 거였음 진작 말했어야죠!!”

“말했는데 멈추지도 않은 게 누군데 큰 소리에요!!”

“그러면 때려서라도 억지로 멈췄어야죠!”

“시현 씨는 좀 말이 되는 소리를…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풍 — 덩!!

…….

“푸아!”

촤아악!

나는 허우적거리며 위로 부상했다. 푸앗, 퇘퇘퇘! 사람들이 생수를 사먹는 이유를 알겠군. 잔뜩 내려앉은 머리칼에서 부연 호수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자연의 냄새일지는 몰라도 향긋한 냄새는 절대 아니다. 제길, 좋은 경험 했다.

연은 나와 비슷한 꼴로 머리만 내놓고 있었다. 충돌의 여파로 물이 출렁거리며 우리를 띄웠다가 내려놓곤 했다. 참방거리는 물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림자는… 어떻게 된 거지? 습격하지 않나? 어쨌든 물에서 나오는 게 급선무였다. 연이 내게로 헤엄쳐왔다. 물기를 머금은 채 얼굴에 달라붙은 초록빛 머리칼은 묘하게 고혹적이었다. 연은 내 앞에서 감속하며 말했다.

“어때요! 헤엄칠 수 있겠어요?”

“그, 글쎄요. 발만을 쓴다면 어떻게든.”

“잡아요. 도와줄 테니.”

나는 멀쩡한 오른팔을 연에게 내밀었다. 연은 그걸 어깨에 두른 채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나는 연을 따라 흘러가면서 호수 위로 떠오르는 혈향을 맡았다. 희미한 불빛에서 얼핏 보이는 명도차. 뻣뻣해진 왼팔의 감각을 느끼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찰박. 찰박.

물 속을 유영하는 그 기분은 어쩔 수 없이 내 몸을 진정시켰다. 달아올랐던 몸이 식으며 잊었던 통증이 다시 내게 찾아온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 모든 게 끝난 것처럼 굴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야. 하지만 호수 가운데서 바라보는 하늘은 원망스러울 만큼 평화로웠다. 도시의 불빛을 반사한 채 연하게 빛나는 구름.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지상을 훑어보는 달. 아까까지만 해도 저보다 더 공허하게 보일 수 없던 하늘이었는데….

이대로 정신을 잃고 싶다. 그런 날 붙들어 매는 통증이 없었다면, 나는 이걸 꿈이라고 믿어버렸을 지도 몰랐다.

우리는 콘크리트 제방에 다다랐다. 해수욕장이 아니니만큼 경사가 상당하다. 먼저 호숫가 위로 올라간 연은 내 팔을 붙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우와, 연의 힘도 장난이 아닌걸. 저 가는 팔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걸까. 난간을 타넘은 나는 비틀거리며 옆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부력을 잃은 몸이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푸웃! 허억… 허억… 허억….”

“하아… 하아….”

진정이 되자 침묵이 찾아왔다. 이상한 부유물들을 털어내고 옷을 대충 짜낸 나는 연을 돌아보았다. 연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림자….

새삼 찢긴 왼팔이 저려온다. 차갑고, 검붉은 빛을 띤다. 그 팔로 후려친 거다. 뭔가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팔로. 신체가 향상되었는데도, 이 정도의 피해를 입는다. 그 턱에 씹히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 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지금까지 피하기만 했을 뿐, 제대로 된 타격은 단 한 번도 먹이지 못했다. 그건 그림자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그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적이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건 일방적인 사냥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닥쳐올 고통이 조금이라도 적은 쪽이기를 바랄 뿐일 테지.

나는 연에게 질문했다.

“우린… 살 수 있을까요?”

…….

우리…라.

나라고 해야 하잖아. 이기적인 놈.

“…….”

연은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그 존재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곤,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는 공기뿐. 원래라면 열 번도 넘게 습격했어도 이상할 게 없는 놈인데, 어찌된 일일까.

호수엔 아직도 파문이 남아 떨어지는 빛을 차곡차곡 접고 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뭐? 나는 호수에서 눈을 떼었다. 연은 어느 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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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는 딱히 할 말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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