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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달의 그림자

2005.06.08 05:01

아메바 조회 수:41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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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은 자신이 치우겠다고 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릇들을 씻는 동안 연은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대충 설거지를 끝낸 나는 식탁으로 돌아오며 말했다.

“일단은 제 방에서 주무세요. 나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까.”

나머지라… 창고도 모자라 아예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빈 방 말이지. 후후. 난 이제 끝난 거야. 차라리 업체를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니까. 내 피눈물 나는 속을 모르고 있을 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내일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는 못했다. 뭐, 스스로도 고민이 될 테니 내일 아침 물어보면 되겠지. 양심이 있다면 계속 묵겠다고 하진 않을 테고… 아니라 해도 정중히 내보내면 되니까. 후, 그래도 이런 예쁜 여자를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면 어쩌겠다는 거야, 이 얼간아!!

연은 속으로 자학하던 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시현 씨.”

“네?”

나는 머리를 싸매쥐다 말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깍지 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음, 자신도 뭔가 숨겨진 일을 얘기하려는 게 아닐까? 연은 왠지 나 같은 인간과는 다른 뭔가 신비로운 일이 얽혀있을 것 같다. 전 사실 이국의 공주인데, 조국의 내란 때문에 이 곳으로 피신해왔어요….

…소설을 쓴다는 표현을 이런 때 쓰던가?

“저기… 그러니까요.”

“네.”

“저….”

“….”

“고백할 게 있어요.”

그건 10분전에 시현 씨라고 불렀을 때 이미 포함된 내용이라고 보는데.

“뭔데요?”

“여기서는 곤란해요. 괜찮다면, 저와 잠시 나와 주실 수 있나요?”

나는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고백이라, 뭐, 그런 건 여기서도 단둘이니까 상관은 없… 잠깐잠깐! 오늘 따라 왜 자꾸 이상한 생각만 하는 거야?!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고 연은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한 듯싶었다.

“시현 씨?”

“옙!!”

“…그러니까 잠깐 나와 주실 수 있는지 묻고 있었어요.”

“어… 무슨 이유죠? 아니, 어디로요?”

연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으아, 답답해. 혹시 이 사람, 무슨 비밀 요원이라도 되는 거 아냐? 하지만 난 그런 데 얽힐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저 침묵의 의미가 뭔지 궁금해 미칠 것 같다.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연은 짧은 한숨을 쉬더니 입술을 떼었다.

“시내에요. 별다른 장소는 아니에요.”

“이 시간에 갑자기 왜?”

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또… 또! 한 마디 한 마디 꺼낼 때마다 도대체 몇 분을 기다려야 하는 거야? 연의 침묵은 길어졌고 견디다 못한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나가자고 말하려 했다. 그 때 연이 말했다.

“그건….”

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뭐지? 정전인가? 창문에 얼핏 비치는 불빛이 조명의 전부다. 순응되지 못한 눈은 망막에 비친 모습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 결과, 나는 무방비 상태로 연의 돌진을 받아내게 되었다.

“위험해!!”

“으왓?!”

나와 연은 함께 뒤로 넘어가버렸다. 쿠당탕! 으윽, 아프잖아, 이 아가씨야!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리가 앉아있던 식탁이 산산조각난 것이다. 뭔가가 벽에 빠르게 스치며 난 불꽃이 그 파괴를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빛은 정체모를 무언가에게 반쯤 가려져 있었다.

빛은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잔상이 남아 내 눈을 어지럽혔다. 나는 숨을 죽였다. 누군가가 있다. 연은 어떻게 됐지? 그녀는 내 옆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 눈빛은 방향과 상관없는 나도 섬뜩할 만큼 날카로운 것이었다.

잠깐, 내가 어떻게 연을 볼 수가 있지? 순응이 이상하리만큼 빠르다. 그렇다는 것은… 몸의 다른 기능들도 향상되었다는 증거. 잘 됐군. 낮의 반작용인가? 어쨌든 이제 들어온 것의 정체만 확인하면….

“피해요!”

“어?”

연의 외침 직후 공기가 날카롭게 갈렸다. 파공음이 예사롭지 않다. 젠장, 액션 영화라도 찍는 거냐?! 나는 디딘 땅을 박차고 앞으로 굴렀다. 장판이 찢겨나가는 소리. 보통 사람이었다면 피하지도 못하고 반 토막이 났을 것이다. 엄청나게 빠르다. 이래서야… 평범한 도둑이라고도 할 수 없겠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연은 한껏 자세를 낮춘 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바닥에 손을 짚은 그 모습은 적을 찾고 있는 한 마리의 맹수와도 같았다. 저 사람이 방금까지의 그 연이 맞기는 한 걸까? 나는 당황스럽게 소리쳤다.

“연 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혼돈의 자연체에요! 집안에서는 우리가 불리해요. 어서, 밖으로!”

“혼돈의 자연체? 그게 대체….”

“조심해요!”

제길, 또냐!

“우와앗!!”

바닥을 가르며 무시무시한 공격이 들어왔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접촉했다간 생명이 보장받지 못할 그런 공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띄웠고, 힘조절을 잘못한 탓에 하마터면 천장에 부딪칠 뻔 했다. 위쪽에 몸을 붙인 사이 뭔가가 요란하게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바닥에 착지한 나는 무릎 높이 이상의 물건들이 모조리 동강난 것을 발견했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따로 없다. 간신히 서 있는 물건들의 예리한 단면이 공격의 절단력을 짐작하게 했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잘려나간 식탁에서 쏟아져 나온 금속 식기들이 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나는 그 중 나이프를 하나 빼어들었다. 집안을 이렇게 만들어놔서야 원만한 해결은 벌써 별나라 저편 얘기다. 상대의 공격은 인간을 초월한 종류. 나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적을 살폈다. 어디 있지? 보이지 않아. 온통 암흑뿐인데… 순간 나는 적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 시야를 완전히 뒤덮을 만큼 거대한 암흑. 그렇다는 것은… 상대가 바로 내 앞에 붙어있다는 말!

“이런 제기랄!!”

상황을 깨달았을 때 머리 위에서 뭔가가 내려쳐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었지만 그래봤자 잘려나가는 부위가 더 늘어날 뿐이다. 제길, 뒤로 뛰어야 하는데… 너무 늦은 건가! 그 때 나를 잡아채는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뒤로 빠르게 끌려 나가며 내가 서 있던 근처의 바닥이 파헤쳐지는 걸 보았다. 이건 대체? 순간 나는 내가 연의 옆구리에 끼여 있다는 걸 알아채고 당황 섞인 비명을 질렀다.

“어? 연, 지금 뭐하는 거예요?”

“조심해요! 탈출할 테니까!”

응? 연은 자유로운 손을 내뻗고는 옆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그 방향으로 닫혀있던 창문들이 일제히 열려버렸다. 크르륵, 창! 열려버린 통로로 밤공기가 바람이 되어 집안으로 새어들었다. 말도 안 돼! 틀림없이 잠겨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의문을 제대로 떠올리기도 전에, 연은 창문틀을 밟고는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

날았다.

연은 날고 있었다.

중력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움직임이었지만 나는 거기에 감탄할 틈이 없었다. 불빛이 쏟아지는 창가, 집안에서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그 장소에는 얼룩이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얼룩. 그 것이 꼿꼿하게 선 채로, 날아가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사진 위에 번진 잉크자국처럼, 명암 없는 흑색만을 고집한 존재는 윤곽으로 형태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야수처럼 거대한 발을 창틀에 걸친 그 것은 뛰어오를 듯 몸을 움츠렸다. 연은 그 동안 상당한 거리를 날아간 상태였지만, 저게 그만큼 뛸 수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어!

“연 씨! 쫓아와요!”

연은 반 바퀴 몸을 돌려 집 쪽을 향했다. 급속한 회전에 나는 하마터면 튕겨나갈 뻔 했다. 연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손을 내뻗더니 그대로 허공을 할퀴었다.

-키르르르릉

귀를 뚫는 초고음이 내 머리를 직격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음이지만 그 것이 훨씬 고통스럽다. 단말마의 비명 같은 괴음 속에서 나는 어긋나는 공기를 보았다.

세 갈래의 선을 따라 풍경이 미끄러졌다. 그 것은 찰나, 원래대로 돌아오는 시야 속에서 나는 그 얼룩이 집안으로 도로 튕겨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바닥에는 그 단층의 흔적인 양 처참한 조흔이 선명하게 패여 있었다. 나는 신음을 흘렸다.

“당신….”

연의 얼굴은 창백했다.

집들은 아기자기한 장난감처럼 보였다. 우리는 몇 백여 미터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얼어붙을 듯한 공기였지만, 연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뜨거운 기운이 그걸 상쇄시켰다. 도저히 체온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다.

나는 터질 듯한 의문을 담은 채 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듯 우울하게 얘기했다.

“이제부터 외부와의 빛 교환을 차단할 거예요. 우리가 투명해지는 대신 시현 씨도 외부를 볼 수 없어요. 완벽한 암흑이죠. 자연체의 추적을 피하는 데에는 별 쓸모가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모습을 목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

“그럼, 차단합니다.”

다시 한번 어둠이 찾아왔다. 충분히 순응된 눈이었지만 물체를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 눈에 남은 건 춤추는 잔상들뿐. 정말로 내 시야는 차단되어 버렸다.

투명하게 된다고?

그런 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지?

하늘을 날고, 멀리 떨어진 창문을 열고, 공기를 절단하는 능력을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 속에서는 폭발적으로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 중 어느 것도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비현실에 이미 압도되어 버렸기에.

보이지 않아서인지, 시간은 길기만 했다. 남은 감각을 집중시켜보아도 외부를 분간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능력이 향상되었다곤 해도, 평소에 그런 훈련은 전혀 해두지 않았으니까. 다만 느껴지는 건 압력에서 해방된 발뿐이었고, 그 체공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연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연이 바닥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시력을 되찾았다.

연이 내려앉은 곳은 밤의 공원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누워있었던 바로 그 공원 말이다. 가로등은 여전히 켜진 채로 곤충들을 불러 모으고 있지만 비춰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니까. 생각보다는 짧은 비행이었다.

“-후아.”

묶여있는 동안 경직된 몸을 가다듬은 나는 주변을 살폈다. 아직까지 뭔가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무성한 덤불들 속에서 풀벌레들이 조용히 노래할 뿐. 평온하기 짝이 없는 공원의 모습은 방금 전까지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믿기 어렵다고 해서 , 누가 함부로 현실을 꿈이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나는 연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연은 입을 열다가 말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 행동을, 내게 말을 넘기겠다는 의도로 해석한 나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누굽니까.”

연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당신은 외국인도, 밀입국자도 뭐도 아냐. 그 이전에 과연 인간인 것인지, 그것부터가 의심스러울 정도야. 설명해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 범위는 이미 넘어서버렸지만,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게 해줘! 최소한 내가 미쳤다는 결론만큼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주변을 잠시 돌아본 다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많은 걸 얘기해야겠군요. 시현 씨. 잘 들어요. 이번 일은 이 세계의 밖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요. 넘치는 의식의 고양이 모든 걸 만들어냈죠.”

나는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 들었다. 세계의 밖. 그 포괄적인 단어의 크기는 내가 감당해낼 만한 종류가 아니었다. 그러나 연의 말은 무심하게 계속 이어졌다.

“인간의 지성은 이제 그 육체를 뛰어넘는 경지까지 다다랐어요. 육체를 뛰어넘는 경지… 그 것은, 인간의 정신이 이제 그 육신의 물리적, 화학적 조합을 넘어선 단계에 도달했음을 뜻해요. 때문에, 이 세계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은 부분들은 세계의 틀을 깨고 밖으로 흘러나오죠. 이 것들은 여러 가지 언어와 개념으로 읽히지만 보통은 아우라라고 불러요.”

“아우라….”

“세계의 밖에 모인 의식들은 크게는 두 종류로 나뉩니다. 혼돈, 그리고 평온. 방금 시현 씨를 습격한 그 그림자는 혼돈의 자연체에요. 혼돈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 그림잔 적어도 인간에게는… 악인 셈이죠.”

“자연체는 뭐죠?”

“인간은 결국은 이 땅에서 잉태된 존재에요. 인간이 아우라를 가지고 있듯 이 행성 역시 세계의 구속을 깨뜨리는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은 그걸 정기, 정도로 표현해두죠. 이 정기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하게 되면 본래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종의 찌꺼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 찌꺼기가 바로 자연체에요. 예부터 자연체는 여러 가지 신화적 존재로 나타났고 인간과의 교류도 적지만 존재하는 편이었어요. 하지만 신화가 사라진 지금, 현실에 나타나는 자연체들은 왜곡된 욕망만을 받아 추악한 야수로 변질되어갔죠. 그 그림자처럼.”

“그 자연체란 게 왜 나를 공격하는 겁니까?”

“그건 아마도 시현 씨의 아우라 때문일 거예요.”

내 아우라?

“그게 무슨…?”

“시현 씨. 혹시 예전에도 오늘 같은 빈혈이 없었나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현기증이 도질 것만 같다. 뒤로 두 어 걸음 물러난 나는 연을 바라보았다.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다급히 말했다.

“뭐죠? 아우라란 게 제 빈혈과 무슨 관계인데요? 대답해줘요!”

“저도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 시현 씨의 불안정한 아우라가 그런 빈혈을 가져왔을 거예요. 불안정하다는 건… 맥동을 의미하죠. 아우라가 다른 때보다 불어날 때면 시현 씨의 신체능력도 덩달아 상승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결핍 상태가 되면 반대죠. 체내 활동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아 그런 빈혈 증상이 발생하는 거예요. 저는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해선 그다지 지식이 없지만, 그런 표면적인 정보 수준은 알고 있습니다. 아까의 기동력으로 보아서, 지금은 다행히 아우라가 불어난 듯싶군요.”

“그래서….”

“자연체는 아우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현 씨의 비정상적으로 큰 아우라가 거슬리기 때문에 아마-.”


-콰아앙!

갑작스레 인 폭풍이 연을 덮쳤다. 순수한 충격량으로 일어난 거대한 폭발이었다. 공원 블록들은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순식간에 그 공간에는 짙은 모래안개가 피어올랐다.

뒤편의 나무 중 한 그루가 허리를 굽히며 크게 뒤흔들렸다. 튕겨나간건가?!

“연 씨!!”

제길, 보통 사람이라면 산산조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나는 반쯤 부러져버린 나무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연은 충격으로 떨어져 내린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들어올렸다. 다행이군.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아.

“으으음….”

“연 씨! 연 씨? 정신이 들어요?”

“시, 시현 씨….”

연은 고개를 들다가 결국 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설마? 나는 재빨리 연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다행이다. 아직 살아있다. 하지만 당장 움직이는 건… 무리일 듯싶군. 나는 연을 굳게 끌어안으며 눈앞을 노려보았다.

이 앞에 놈이 있으니까.

전신의 색은 오로지 검정. 정기가 만들어낸 세계의 그림자. 존재해서는 안 될 일탈한 존재가, 폭발의 잔구덩이 속에서 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거대한 바위에 비견될 만한 몸. 사방으로 돌출한 가시는 그 윤곽만으로도 위협적이다. 몸통 때문에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금방이라도 침이 흘러내릴 법한 거대한 턱을 상상할 수 있었다.

‘꿀꺽.’

목이 마르다. 불로 지지는 것처럼 목이 타들어가 견딜 수가 없다. 충혈된 눈은 습기를 요구하고, 움찔거리는 전신의 근육은 자극을 요구한다. 누군가 쥐어짜고 있는 듯한 심장은 평소의 몇 배나 되는 혈액을 단번에 끌어올렸고 헐떡거리는 폐는 가쁘게 공기를 교환했다.

무시무시한 흥분. 그리고 공포. 전신을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짜릿한 감각이 내 몸을 지배한다. 상반되는 감정이 내 가슴을 옥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도망 따윌 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건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어.

방법은 하나뿐.

나는 옆에 연을 내려놓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집히는 것은 차가운 금속의 감촉. 집에서 가지고 나온 유일한 물건이다. 그걸 굳게 잡은 나는, 왼발을 뒤로 빼며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무게 중심을 앞쪽으로 옮겼다. 탄환처럼 장전된 몸을 단단히 조인 후 난 녀석의 눈을 찾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가진 게 검정밖에 없는 녀석이라도, 눈 정도는 갖고 있겠지?

나는 그림자의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곳에 눈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달아오른 감각이 막연히 그 점을 지목했을 뿐이다. 녀석은 내 시선에 반응했는지 몸을 꿈틀했다. 무서울 만큼 동물적인 반응.

흥.

좋아.

“와라-!!”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림자는 바닥을 박차며 내게 돌진했다. 간신히 남아있던 바닥은 그 발길질 한번에 박살이 나버렸다. 그러나 지금의 내게,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 또한 녀석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게 후퇴해버리는 배경. 바닥에 튀는 돌멩이 하나하나를 분간해낼 것만 같다. 머리끝까지 치솟는 아드레날린의 잔영이 내 파괴욕을 마구 토해내었다.

어지럽게 뒤틀리는 시야 속에서 고정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어둠. 어둠. 저 빌어먹을 어둠! 녀석과의 간격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나는 감속할 요량으로 그 거대한 몸체의 틈바구니 안에 왼발을 비집어 넣었다. 발이 닿은 바닥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요란스럽게 꺼져든다. 내 의지로 죽음과 이렇게까지 밀착한 기분은, 처음이다. 그 느낌은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 짜릿했다. 너도 느끼게 해줄까? 나는 괴성을 지르며 그림자의 몸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박아 넣었다.



-Day 1.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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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검마님 감사합니다 (..) 사실 창도 소설란은 사람이 없어서 댓글은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첫 날 끝났습니다. 이제 아흐레 남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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