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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project[X] - prologue.

2005.06.21 13:23

레이가르크 조회 수: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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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개의 별들이 매일 밤 그 머리 위를 맴돌았어도, 그는 오늘도 그 별들의 이름을 다 알지 못한다. 별의 이름 따윈 아는 게 없었다. 사실 관심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저기 북쪽하늘에 떠있는 저것이 북극성인가 했다. 저 별은 움직이지 않는다지? 검은 커튼에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별들이 하나둘 달라붙어 빛을 내는 그날 밤의 하늘은 아름다웠지만, 사실상 땅의 풍경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시간은 이제 저녁 열 시밖에 되지 않았건만,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도에는 차가 다니지 않는다. 걷다 보면 가끔 거리귀퉁이로 보이는 차들은 모조리 박살이 나 있었다. 터진 의자에 누군가 가져가 버린 라디오. 심지어 핸들마저 보이지 않았다.

차도 한가운데에 서서 고개를 들고 왼쪽을 본다. 거기는 주택가였다. 그러나 사람은 살지 않는다. 발길이 끊긴지 십 년은 되었을걸. 아무도 살지 않는 몇 백 채나 되는 집들이 그렇게 방치되어있었다. 무너뜨릴 계획도 없다. 누군가 살 계획도 없다. 언제부턴가 그 집들은 폐가가 되어 그저 그렇게 거기 있을 뿐이었다. ‘제한구역’이라는 이름과 함께. 무려 300㎢라는 엄청난 넓이의 땅을 주인도 없는 폐가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이번엔 오른쪽 거리로 시선을 옮겼다. 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거리에는 온갖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나나양복점, 코렉스자전거. 가게들의 이름을 하나둘 되뇌었다. 하지만 그런 현대식 자전거가게의 간판은 땅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 있다. 떨어진 저 자전거 집 간판을 다시 달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주인이 없다고 해서 양복점에 들어가 옷을 훔칠 만큼 대담한 도둑도 없을 것이다. 제한구역도 아닌 멀쩡한 동네가 그렇게 버려져 있었다. 화려한 건물들이 서기 2004년의 모습을 너무나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건너편 주택가가 제한구역으로 지정되던 그 해 이후부터 이 동네에는 술을 파는 사람도, 술을 마시는 사람도 없었다.

이쯤 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다만 시간이 늦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골목길로 들어서는 곳에는 매직으로 급하게 갈긴 듯한 『제한구역』이라는 글자가 턱 하니 철제표지판에 쓰여 있었다. 이미 그 정도 되면 이 부근은 낮이라도 조용해야 정상이라는 게 적어도 이 시대 사람들의 통념이었다.

골목길엔 온통 검게 물든 낙엽뿐이었다. 찬바람이 한번 세차게 불었지만 축 젖은 채 땅에 달라붙은 낙엽들은 날릴 줄을 몰랐다. 하지만 낙엽이 땅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이유가 다만 어제저녁에 비가 내렸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낙엽들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간간이 ‘asics'라고 새겨진 발자국을 누구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오늘밤 사람하나 없는 것은 거리뿐이었다. 정작 사람은 제한구역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둘씩이나.

이제 두 사내에게로 가보자. 그 둘은 낡아빠진 싸구려 술집의 나무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진청색 방한모를 뒤집어쓴 늙은이는 말없이 먼지투성이 파카를 여미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조금 열려있던 미닫이를 콱 닫았다. 어지간히 추운 모양이다. 말없이 다시 의자에 앉더니 빨간 코를 파카에 처박았다.

그런 늙은이를 아무 말 없이 보고 있는 청년은 이제 갓 스물 먹은듯한 얼굴이었다. 상당히 까무잡잡한 얼굴에 부스스 웃는 것이, 솔직히 말해서 순한 것보다는 멍청해 보였다. 그 역시 아무래도 조금은 추웠는지 점퍼의 지퍼를 쭈욱 올리더니, 말없이 오징어를 하나 집었다.

몇 년이나 묵혔을지 모를 대단한 오징어는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했으나, 그 오징어를 빠득빠득 부숴 먹는 청년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늙은이도 피식 웃더니 얼마 남지 않았던 캔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OB라거가 망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건만,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저렇게 눈앞에서 OB라거를 들이키고 있는 늙은이는 분명 그런데 개의치 않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 안 있으면 새해가 밝는군.”

“2019년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청년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늙은이는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아들놈의 기일(忌日)이구먼.”

늙은이의 한스런 소리가 또 시작되었다. 이미 셀 수 없이 지겹게 들은 얘기지만, 가볍게 무시할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여느 때 버릇처럼 듣는 척 하면서 살짝 눈동자만 창문 밖으로 향했다.

창문을 통해 청년의 눈에 비친 달은 유난히 새파래 보였다. 그는 동쪽으로 갈수록 시커멓게 변하는 하늘을 보며 내일은 이곳을 떠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갈 곳이라곤 또 다른 제한구역밖에 없었지만…….

“……그놈이 살아있었다면 딱 네놈만 했을 게야.”

온 동네가 이렇게 조용한 건 새해가 다가오기 때문일까. 이 동네 사람들도 해돋이를 기다리며 들뜬 마음으로 잠들고 있을까. ……참, 여긴 제한구역이지.

“……그 앤 그때 겨우 네 살배기였어. 겨우 네 살짜리였다고…….”

경찰들도 설날에 쉬던가? 특별휴가를 받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을까? 해돋이를 보기 위해 일찍 잠들었을까? 희망찬 신년을 생각하며, 제한구역 따윈 까맣게 잊어버렸을까?

“이 나라가 내 아들을 죽였어!”

늙은이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상념에 빠져있던 청년은 화들짝 놀래며 덩달아 일어났다. 청년의 눈에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늙은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 없이 청년은 늙은이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그 입 닥쳐요! 누가 들어요!”

“들을 테면 들으라지!”

청년은 재빨리 늙은이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늙은이가 좀 더 빨랐다. 미친 듯이 울부짖던 늙은이는 테이블을 움켜잡더니 카운터 쪽으로 던졌다. 나무로 된 테이블은 박살이 나고, 카운터 뒤에 있던 양주병들이 차례차례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조, 조용히 해요, 형!”

형이라 불린 늙은이는 그를 만류한 청년을 돌아보더니 씨익 웃었다.

“크큭, 수우~, 수민군, 대체 뭘 위해애 조용히 하라는 건지이 설명해보겠나아?”

묘하게 마디를 늘어뜨리는 늙은이의 어투에 수민이라 불린 청년은 다시 한 번 얼굴을 찌푸렸다. 단순히 말투가 짜증나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몇 시간째 늙은이가 입을 열 때마다 그 입 속에서 썩은 생선비린내가 술 냄새에 섞여 나왔던 것이다.

늙은이는 수민이라 불린 청년을 한번 비웃더니 재빨리 다른 테이블을 움켜잡았다. 수민은 그 와중에도 생각했다. 160Cm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늙은이가 두 손으로 테이블을 들고 씨익 웃는 건 사양이다.

“당장 그만둬요! 경찰이 올지 몰라요!”
테이블을 막 던지려던 늙은이가 움찔하더니 동작을 멈췄다. ‘경찰’이라는 단어가 효과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 테이블, 어서 내려놓아요!”

늙은이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수민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수민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자 늙은이는 못 이긴다는 둥 투덜대며 테이블을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내던져진 테이블은 또다시 요란한 소리를 냈고, 수민은 고집쟁이 늙은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경찰이 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수민의 물음에 고집쟁이 늙은이는 또다시 씨익 웃었다. 보면 볼수록 기분 나쁜 웃음이다.

“그땐 튀면 돼.”

너무나 쉽게 말하는 늙은이를 보며 수민이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앞뒤사정이야 어쨌건 그들은 죽어라 달려야했을 것이다.

“……앉을 데가 없군요.”

좁고 좁은 술집에 고작 두 개 있던 의자가 박살이 나있었다. 하긴 테이블이 날아다니고 팽개쳐진 그 상황에 싸구려 의자가 무사하면 그게 이상한 건가?

둘은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 바닥에 앉은 채 등을 기댔다. 늙은이는 술맛이 당겼는지 다시 일어나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더 꺼냈다.

“큭, 좀 괴팍하게 보일런지 몰라도 십 년 된 OB라거가 자꾸 내 맘을 끄는군.”

늙은이는 다시 한 번 씨익 웃더니만 움켜쥐고 있던 캔을 들이키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다. 허공으로 들려진 손이 그의 입을 향해 움직일 때, 이미 그 손엔 캔이 없었던 것이다.

“이 부근 어딘가 술 깨는 약이 있을 것 같네요. 찾아보고 올게요.”

“이봐, 내가 어디 맥주 마시고 취할 놈으로 보이나?”

수민은 손가락으로 깡통이 수북이 쌓여있는 카운터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캔을 한두 개 뜯으셨어야죠. 약 찾아올 테니까, 더 이상 마시지 마세요.”

수민은 투덜거리며 골목길 구석에 있는 쓰레기더미에 캔을 던지더니 곧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어졌다. 시야에서 사라진 수민이 마치 보이는 것처럼 늙은이의 시선이 왼쪽으로 쭉 이동하더니, 금세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런…… 큭큭, 아닌 게 아니라 머리가 좀 지끈거리는구먼.”

늙은이는 벌게진 얼굴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휘청휘청 미닫이를 향해 걸었다. 딴에는 똑바로 걷는답시고 걸었건만 자꾸만 다리가 꼬이려했다. 수민군 말대로 취하긴 취했나보다.

아까는 춥다고 미닫이를 닫더니, 이번엔 활짝 열고 밖으로 나왔다. 벌게진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계절은 겨울이건만 눈이 내릴 기색은 전혀 없다. 하긴 이곳은 따뜻한 지방인데다, 요즘은 온난화니 뭐니 해서 저 위쪽 지방에도 눈이 잘 안 온단다. 흠, 중강진쯤 가면 눈을 잔뜩 볼 수 있을 텐데……. 오늘만큼은 그 시린 눈이 무지무지 보고 싶은걸.

하지만, 재수 없는 하늘은 다만 시커멀 뿐이다.

“젠장, 또다시 잡념이 드는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아들놈의 기일이라 그런 건가.”

머릿속에 들어간 잡념을 떨쳐내듯 늙은이는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애비를 내버려두고 먼저 나자빠진 녀석이다. 못된 녀석이야.

어느새 방울방울 눈에 맺힌 눈물을 슥슥 닦아내며, 이게 다 늙어서 이렇게 눈물이 많아진 거라며 투덜대던 늙은이는 한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으응?”

늙은이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골목길 끝에 있는 주택 앞에 무언가 새까만 것이 아른거렸던 것이다. 무엇인가 했지만 눈이 침침해 잘 보이지 않았다. 별로 멀지도 않은데 이리 눈이 침침한 것은 순전히 늙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짜증이 일었다. 늙은이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러나 아른거리던 건 그 사이에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새까만 그림자가 서있던 주택의 거실에서 불이 켜졌다. 늙은이는 그 새까만 것이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군. 정부에서 십 년이나 방치해둔 곳에…… 전기가 들어올 리가 없잖아.”

그렇게 거의 멍한 상태로 주택을 보고 있던 늙은이의 시야에 또 다른 그림자가 들어왔다. 늙은이가 놓칠세라 눈살을 세게 찌푸리자 이마위로 주름이 굵어졌다. 흐렸던 시야가 좀 더 선명해지며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까만 중절모를 뒤집어쓰고 까만 롱코트를 입은 사내 녀석이다. 사내는 무료한 듯 하늘만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저놈은 문지기인가?

‘혹시 선글라스도 썼는감?’

늙은이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사내의 얼굴에 끼워져 있는 검은색 선글라스가 보였다. 그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냈다.

‘거참, 기묘한 놈일세.’

문지기 녀석은 분명 담배를 하나 물고 있었다. 담배는 그대로 문 채로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다 피워가는 담배를 훅 뱉는 것이었다. 새까만 구두가 땅에 떨어진 담배를 열심히 짓이기기 시작했다.

‘단 일초라도 담배 없인 못사는 놈이군. 그래도 너무했다. 입에서 담배가 떨어지는 건 양치질할 때랑 잠잘 때뿐이겠군.’

그렇게 늙은이가 혼자서 멋대로 생각할 때, 갑자기 담배를 피우던 녀석이 씨익 웃었다.

‘아뿔싸, 이번엔 삼형제가 오는구나.’

검은 중절모, 검은 롱코트. 묘하게 키까지 비슷하게 보였다. 세 명의 사내들의 입에는 모두 담배가 물려있었다. 문지기 사내에게 세 명의 사내가 동시에 손을 흔드는 것은 늙은이로서는 참 웃기는 일이었다. 세쌍둥이라도 되나보지? 늙은이가 키득거리는 사이 세 명의 사내는 주택으로 들어갔다.

이제 늙은이는 슬슬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경찰은 아닌 거 같은데, 그렇다고 무려 다섯이나 되는 일반인들이 한밤중에 다들 검은 걸 뒤집어쓰고 제한구역을 돌아다녀? 게다가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번엔 떼거지로 몰려오네.’

똑같은 검은 롱코트를 걸친 여섯 명의 사내들이 역시나 담배를 문 채, 문지기 사내에게 손을 흔들었다. 문지기 녀석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까지 보는데, 갑자기 늙은이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리 뚫어져라 보세요?”

“빌어먹을 수민군, 왜 이리 늦었는가. 하여간 저것 좀 보게.”

늙은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팔만 뻗어 녀석의 팔을 잡더니 말했다.

“빨리 이쪽에 주저앉아서 보란 말이야.”

“뭘 보라는 겁니까?”

목소리의 물음에 늙은이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급해죽겠는데 이 답답한 녀석이 또 내 복장을 터지게 만드는군. 이봐, 목소리 좀 낮춰!

“저기, 저 집을 보란 말이야. 한밤중에 경찰도 아닌 까만 것들이 떼거지로 모이고 있다고. 이게 벌써 몇 분 째람? 하여간, 무려 열한 명이나 되는 놈들이 전부 까만 걸 뒤집어쓰고 모였다고.”

“그런……가요?”

녀석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더 아둔하게 들렸다. 평소에는 그래도 제법 행동거지가 잽싼 놈인데 말야.

“게다가 저 집말이야, 저 집. 지금 저 집에 불 들어온 거 보이지?”

여전히 늙은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등 뒤에 있는 녀석의 머리를 연신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불 말이야, 불! 대체 어떻게 저기에 전기가 들어온단 말인가. 제한구역에 말이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흥분한 늙은이는 집을 보며 떠들다가 문득 혼자 이렇게 떠들어대는 자신이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답답한 녀석에게 좀 더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이 녀석은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녀석에게로 돌렸다.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엉? 무언가…….”

한창 떠들며 고개를 돌린 늙은이의 말이 딱 끊겼다. 더 이상 말하고 싶어도 성대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늙은이의 눈동자가 엄청나게 커졌다.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늙은이의 앞에서 검은 롱코트를 입은 사내가 웃고 있었다. 담배를 꼬나문 채.

“어르신.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담배를 문 입 사이로 쉭쉭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늙은이는 여전히 커진 눈동자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검은 중절모에 검은 롱코트. 그 사내는 결코 수민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늙은이는 강철 같은 손이 그의 목덜미를 죄는 바람에 괴로운 얼굴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마취제를 흠뻑 적신 스펀지가 그의 얼굴을 덮고 말았다.


* * *


“아마 이게 맞을걸?”

연신 손에 들려있는 초록색 약병을 보며 수민은 불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약국 한쪽구석에 처박혀있는 걸 용케 발견한 것이다. 열어보니 네모지고 하얀 알약들이 대여섯 개 남아있었다.

“형이 맨날 술 마시고 먹던 알약이 이거였어. 그것도 분명 네모난데다가 하얗게 생겼었더라고.”

꼴에 씨익 웃는 수민군은 불행히도 이 세상에 하얀 네모알약이 널리고 널린 것을 생각지 못하는 바보중의 바보였다. 게다가 수민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근데 왜 이리 알약에서 좋은 냄새가 나지? 보통 알약에선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나?”

본래 알약에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 수민의 손에 들려있는 저 초록색 약병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자일리톨』이라고.

올해 스물한 살 되는 수민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자일리톨을 먹어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 * *


“죽여버릴까?”

“죽이기엔 너무 아깝잖아.”

심한 두통과 함께 귓속을 울리는 대화들이 늙은이를 깨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애써 상체를 일으키니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수는 정확히 열두 명. 마지막에 자기를 덮친 놈까지 계산해보니 딱 맞다.

“깨어나셨나요?”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가 무릎을 굽혀 늙은이에게 다가왔다. 늙은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두통이 아니라 추위 때문이었다. 술이 깨는 모양이었다.

“네놈이 날 덮친 거냐?”

애써 두통을 참으며 늙은이는 사내에게 톡 쏘듯 말했다. 그 말에 사내는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들어 다른 열한 명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엄청 우스운 코미디쇼를 봤을 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열두 명의 사내가 똑같은 중절모에 똑같은 롱코트를 걸치고, 담배를 하나씩 꼬나문 상태에서 다 같이 웃는다. 늙은이는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꼈다.

“이런이런…… 어르신. 제가 어르신을 덮치다니요.”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을 덮친 건 ‘우리’랍니다.”

늙은이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유감스럽게도 사내들은 늙은이의 의문을 풀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시간이 없어.”

서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서있던 열한 명의 사내들 모두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다시 거기서 담배를 한 개비씩 꺼냈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어.”

저들은 담배가 시계인 줄 아는 건가? 황당한 늙은이의 기분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늙은이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이 무릎을 꿇은 사내는 자기 할 말 다 하고 있었다.

“죽이진 않을 거야. 시간이 아깝잖아.”

그는 씨익 웃더니 주머니에서 이상한 물건을 들었다. 은색빛깔을 띤 그것은…… 병따개?

한순간 늙은이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검은색을 테마로 잘 차려입은 사내가 은색 병따개를 들고 있다?

웃긴 상황이었지만 늙은이는 웃지 못했다.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엇인진 모르지만, 이건 분명 웃을 상황은 아니다! 늙은이의 이성이 그의 머릿속으로 세차게 경고하고 있었다!

“어라? 형, 거기서 뭐해요?”

순간 열두 명의 사내들과 늙은이는 경직됐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

늙은이와 열두 명의 사내는 천천히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수민이 웃으며 서 있었다.

“형, 약 찾았어. 술은 좀 깼어? 이 사람들은 누구야? 춥다, 빨리 들어가…….”

“도망가, 이 자식아!”

“……어?”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수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열두 명의 검은 사내들의 얼굴에서 어느덧 미소가 피어올랐다. 수민은 자신을 보며 웃는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늙은이의 커진 눈동자도 보았다. 술도 취하지 않은 늙은이가 이 위험지대에서 목청껏 고래고래 내지르고 있었다.

“도망가라고, 이 자식아!”

늙은이가 두 번째 고함을 내지르는 순간, 그리고 그 고함이 다시 메아리가 되어 온 골목길을 뒤흔든 그 순간. 그 짧은 순간, 수민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왔던 길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잡아!”

수민이 등을 보이는 순간,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의 목소리가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렸다. 다음 순간, 서있던 열한 명의 사내가 수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은 채 사내의 팔이 늙은이의 목을 강하게 쳤다. 사내의 팔이 늙은이의 목을 사정없이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사내의 팔 뒤로, 죽어라 달리는 수민의 모습이 막 늙은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검은 사내들의 모습도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늙은이와 한 명의 사내뿐이었다.

사내가 다시 한 번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천천히 병따개를 들었다.

“자, 어르신. 여기에 집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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