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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무한정다각면체환상곡

2005.06.25 09:49

misfect 조회 수:180 추천:1

extra_vars1 어둠의 아라크네, 빛의 거미줄 
extra_vars2 전주[Prelude] (2) 
extra_vars3 1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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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여 분. 기차가 왼편의 산맥과, 오른편의 강물과 함께 달린 시간이다. 이제는 슬슬 지겨워져가는 풍경에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별안간 그 풍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기만 할 것 같던 산맥이 별안간 우뚝, 등뼈 같은 육중한 바윗돌을 드러내며 땅 아래로 꺼져버리기라도 한 듯 사라진 것이다. 대신 그 동안 산맥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집들이 한두 채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맥도리라는 조금 괴상한 이름을 가진 이 마을이, 바로 내가 학교를 다니기 직전까지 살았던 동네이다. 20여 채 가량의 집들을 두고 ‘펼쳐져 있다’라고까지 표현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집들을 보며 내가 실제로 느낀 것이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놀란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을의 모습에 있었다. 이미 20여 년 전, 한 씨 사람들은 모두 이 ‘저주받은’ 땅을(이것이 증조부께서 쓰시던 표현을 그대로 빌린 것임을 미리 말해 둔다.) 떠났다. 하지만 일가 친족이 모두 떠난 후로도 이 마을은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온전히 지키고 있었다. 이제껏 기차가 곁에 끼고 달리다시피 한 강물에서 뻗어 나온 한 가닥의 물줄기가 마을을 절반쯤 감싸 돌다가 우뚝 솟은 산을 앞에 두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이라던가, 형형색색의 슬레이트 지붕들, 심지어는 밥을 짓느라 하늘로 오르는 연기마저도 마을을 떠나온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뭐랄까, 이건 마치…….

“허무한 꿈같군. 죽어버린 시골 마을의.”

얼떨결에 중얼거렸지만, 사실이 그랬다. 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일가 친족이 모두 떠난 집성촌이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순간 나의 머릿속에 마지막까지 마을을 지켰던 한 씨 종가가(바로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내었던) 떠나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채 정든 마을을 떠나지 못한 모두가 아쉬워하며 마을을 돌아보는데, 유독 증조부께서는 무덤덤하게,

“땅의 기운을 이기며 살아오신 선조들께서도 이 땅의 기운에 억눌려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사람 살지 못할 땅을 떠나는데 무엇을 그리 아쉬워하느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이 땅의 기운이 부를 것들도 들어올 것이고, 선조들의 기운이 부를 녀석들도 들어올 것을.”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땅의 기운이라느니, 땅이 사람을 부른다느니 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물론 지금으로서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유난히 한 씨 종가의 며느리로서의 의무감이 어머니께서 반드시 한 씨 일족이 대를 이어 전해야 한다는 일족의 전설을 이야기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용은 여의주를 품고 태어난단다. 여의주의 기운은 땅의 기운을 이기고, 무덤 터를 집터로 바꿀 수 있다고 그러더구나.”

그러면 한 씨 자손이자 용띠인 내가 물었다. 정말? 정말 용이 태어나는 거야? 그러면 어머니께선 대답 없이 나를 꼭 안아주셨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이야기를 대대로 전해오는 걸까 싶을 정도로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다. 용이라는 것이 어떤 상징, 쉽게 생각하면 용띠라던가 특징을 가지고 태어난 자손이라던가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 여의주란 뭘까. 땅의 기운을 이긴다는 건? 결국 나는 그것 역시 한 씨 집안의 수많은 미신 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유난히 한 씨 집안에는 가문 내에만 전해지는 미신이 많았다. 물론 종가집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신의 내용들은 제사 형식과 같은 특정한 상황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두 일반적인 상황을, 그리고 집안사람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워낙에 미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반발도 다른 집안에서보다 크게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특히 반발이 심하셨던 것이 아버지셨다.

“그런 건 미신이야. 바보같이 애한테 무슨 소리야!”

어머니께서 자신의 신앙이나 다름없는 집안의 미신을 내게 이야기해줄 때면 아버지께선 항상 그런 식으로 어머니께 화를 내셨다. 그래서 일부 이야기들은 마치 카타콤의 크리스트교인들 사이에서처럼 비밀스럽게 전도되기도 했고.
어릴 때는 그런 것들을 대부분 믿고 지냈던 것 같다. 그건 나뿐 아니라 마을의 모든 아이들이 그러했던 듯하다. 조금은 순진했달 까. 그런 순진함이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역시 어렸다.

“어디 잡스런 것이 귀한 한 씨 자손들을 건드리느냐! 썩 물러가라!”

어떤 계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빨간 꽃 파란 꽃 아름답게 피어도 미싱은 잘도 도는 계절이었는지, 아니면 영광을 넘어 성스러운 주님 오신 날이 있는 그 계절이었는지는. 하지만 날씨는 그리 덥다거나 춥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고, 내 손은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억세게 할아버지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그 험악한 상황 속에서 똑바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불호령을 듣는 어린아이였다. 아니, 실제로 고개를 든 건 여자아이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아무래도 아이의 키가 더 작았을 테니까, 할아버지께서 아무리 고개를 들어 보시려 해도 그러실 수 없었겠지.
처음 보는 아이였다. 그리고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우리에게 그런 건 문제되지 않았다. 가끔 변신한 여우와도 논다고 해서 마을 전체가 야단을 떨도록 만든 우리였다. 게다가 때는 팀을 나누어 놀다가도 사람 수가 홀수면 깍두기를 만들어 한쪽 편에 집어넣던 시대였다. 그 아이가 옆집 아이건 처음 보는 아이건 그건 별로 상관없었던 것이다. 한 씨 일가의 여덟 자손이 노는 가운데 한 씨도 아닌 여자아이 하나가 끼어든 그런 일은 사실 우리 사이에서는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그런 일이었다. 우리 사이에서만은 말이다.

“요망한 것, 당돌한 것 같으니.”

하지만 할아버지 당신께는 그 일이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일인 모양이었다.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그저 붉어진 뺨을 쓰다듬으며 할아버지를 노려보는 여자아이를 보며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혀를 끌끌 찼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모두 볏짚에 엮인 굴비 모양으로 손을 서로 잡은 채 그 자리에서 끌려나왔다. 그 와중에도 나는 힐끔 여자아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뭐랄까. 마을 어귀에 세워진 솟대. 정확히는 그 위에 올린, 나무로 깎은 새 같달 까. 어떤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지 않은 그 모습에, 나는 묘한 한기마저도 느꼈다. 그리고 그 날 저녁부터, 나는 꼬박 삼 일 가량을 누운 자리에서 앓았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께서 항상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셨기 때문에 원인을 전혀 모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삼일 정도 앓은 뒤, 나 스스로는 그 여자아이의 사건을 ‘낮도 밤도 아닌, 불완전한 시간에 일어난, 너무나도 짧고도 강렬했던 사건’이라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렬했다’는 것은 한동안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그 일이 잊히지 않았다는 뜻인 동시에 그 사건이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일부 아이들이 그동안 저항 없이 자연스레 믿어온 금기에까지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느냐, 왜 저건 손대지 말아야 하느냐, 왜 어떤 아이와는 놀 수 없느냐. 이런 식으로. 아마도 맨 나중의 질문이 가장 많이 터져 나온 불만이 아니었을까.
어르신들은 노발대발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참아온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도화선은 역시 그 때의 여자아이였다. 놀이를 끝내고 이야기를 하는데 깍두기 여자아이가 우리가 당연히 여기던 것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만족할 만한 질문이 나오지 않았을 때, 아이는 한숨을 쉬며 이 말을 던졌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유도 모르는 걸 하고 있다는 거네. 생각해 본 적도 없이.”

비웃음인지 교훈인지 모를 아이의 말에 우리 모두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불호령을 받고도 아이가 전혀 기세가 죽지 않은 것처럼 보이자 우리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에서 우리가 벗어나기까지는 한참이 지나야 했다. 그나마 그 충격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더 이상 그 아이가 질문을 던졌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어진 탓이었다. 아이들이라 잊어버리기도 했겠지만, 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러한 미신적 풍속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교육받은 탓도 컸다.
일족이 마을을 비운 뒤로는 그나마 있던 미신들 중 대다수가 쓸모없게 변해 버렸다. 미신들 중 대다수를 차지하던 땅에 대한 미신이 더 이상 유지될 필요가 없게 된 탓이었다. 어르신들은 땅의 기운에서 해방되었다고 하셨지만, 사실 그것은 미신으로부터 해방된 것인지도 모른다. 뭐, 나름대로의 생각에 불과하지만.
기차는 과거의 한 씨 집성촌을 넘어서 계속해서 달린다. 한 십여 분 뒤에는 기차가 설 만한 도시가 등장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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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공상가님과 웅담(?)님께...

건축무한육각면체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빌려쓴 것이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가장 주제를 은밀하고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제목을 찾다보니 저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주제에 충실한 글이 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하지만 건축무한육각면체와는 전혀 상관 없는 글이 될 거에요. 웅담 님(이거 맞나요?)의 추천 감사합니다. 그 책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영화만 봐서...

핏빛노을님께...

일단은 노래니까요. 되도록 노래가사를 이것저것 써 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하지만 역시 부분적 시도에 그치고 마는구요. 우연스럽게 떠올랐달까요. 사실 적으면서도 이수영 노래인지도 확실치 않아했다는;;

삼 일 만에 다음 연재로군요...생각보다 많이 늦었습니다만. 어쨌든 관심있게 봐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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