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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Fate [Give and Take]

2005.07.02 17:00

SoranoChki 조회 수:24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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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첫번째는 도구를 챙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단순한 검사이기에 별달리 챙길것은 없다. 단지, 내
목숨과 브로드 소드 하나면 괜찮으니까.

꽈악.
손에 감고 있던 붕대에 힘을 주면서, 단단히 묶었다. 너무 꽉 묶은것이 아닌지 천천
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펴 보면서 시험해보지만, 감촉은 좋았다. 잠시 그러기를 반복
하던 나는, 살짝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건틀렛을 집어 들었다. 이미
여기저기 흠집이 많이 나있는 건틀렛이지만, 나에게 있어 소중한 녀석임은 틀림없
다.

- 암살자의 기본은, 실력이다. 지금부터 가르쳐주는걸 반드시 따라와야 해.
- ...하지만, 살인은 싫습니다.
- 어리석은 소리 하지마라, 엔티!

스윽.
살짝 돌려 손에 고정시켜 끼우는 이 건틀렛의 원래 주인이자 내가 속해있는 블루 시
드(Blue Seed) 전(前) 길드 마스터, 페이턴씨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버렸다.
그는 회색빛 머리칼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중년의 멋진 분이셨다. 실력도 가히
최고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 이곳 카바노스에서는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그 분은, 라이베리아에서의 비극 이 후 정처없이 길을 헤메이던 나를 거두고, 가르쳐
주신 분이셨다. 또 다시 혼자가 되어버리고, 또 다시 의지할 곳이 없어져버린 나를
구해주신 분이셨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론가 행방불명 되어버리시고 "제이슨" 이라
는 밥맛없는 녀석이 길드 마스터를 맡고 있다. 대행도 아니고, 임시 직도 아닌, 정
식 길드 마스터를.

물론 그 녀석에게 냄새가 나긴 했다. 호시탐탐 길드 마스터를 노리던 녀석이였고,
또 페이턴씨의 실종. 동시에 길드 마스터가 되어버린 녀석의 타이밍은 너무나도 착
착 맞아 떨어졌다. 모든것은 미리 준비되어있었다는듯, 반대파는 모두 제거 되었다.
압도적인 제이슨의 지지자에 의해서.

- 이걸 오늘 내로 끝내라, 엔티.
- 말도 안되요! 이건...
- 그렇지 않으면, 너에게 실망이다.

스윽.
오른손에도 건틀렛을 끼우며 나는, 다시한번 옛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암살자로
서 훈련 받았던 것 중 가장 지독한 것이였다. 보통은 페이턴씨가 직접 나서서 손수
누구를 가르친다는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페이턴씨는 나와 루아즈에
게 직접 모든걸 가르쳐 주셨다.

어쨌든 그 때의 훈련은, 검을 이용해 목표로 하는 것들을 베어나가는 것이였다. 가
장 기본적이고, 가장 기초적인 것이지만, 그 차원이 틀렸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목표는 여럿, 그리고 그것들을 한 순간에 베어나가야 하는것이다. 더구
나 움직임은 랜덤, 목표 역시 랜덤하기 때문에 목표가 아닌 것을 실수로 베어버리는
날에는 페이턴 씨에게 혹독한 벌을 받았다.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것을 궁극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것이 페이턴씨의 목표였
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본적인것은 모든것의 바탕이
되는 것, 그렇기에 가장 밑을 차지하는 그것이 크고 튼튼하다면 그 위에 쌓을 다른
것들 역시 더욱 크고 안정적으로 쌓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레인 스나이퍼씨에게 배웠던 검술은 암살에 있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1:1
이나 정당한 싸움에서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만, 살상 효율을 극대화 시킨 죽음의 검
술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사실, 그것은 레인씨가 부족하다는것이 아니라 당시
내가 검을 잘 다룰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쉬운것부터 가르쳤기 때문이겠지만.

- 잘했다... 만족스럽구나.
- 실망... 안하셨습니까?
- 물론이다. 오히려 자랑스럽다.

꽉...
건틀렛의 손목 부분의 끈을 조여 단단히 고정시키며 그 훈련의 결과를 떠올렸다. 당
시 나는 탈진 상태까지 되어버려서 그 훈련 이후 몇 일 동안 몸도 움직이기가 힘들
었다. 하지만, 무리로 오게된 몸의 고통보다도 페이턴씨가 자랑스럽다고 해 주신 말
씀 하나가 더 큰 기쁨이었다.

- 암습은 배우고 싶지 않다고?
- 네.
- 알겠다.

그 때 당시, 암살의 기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가장 중요한 "암습" 을 배우
기를 나는 거부했다. 그러나 페이턴씨는 더이상 이유조차 묻지 않으시며 아무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나의 마음을 모두 이해했다는걸 알았다. 아
무말이 없어도, 그는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어둠속에서 생활하는 자객에게 암습을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이율배반적
인 일이다. 어둠에서 소리없이 나타나 목표로 한 자를 암습으로 해치우고, 다시 어
둠으로 사라져야 하는것이 당연한것이지만, 만약 암습을 하지 않는다는것은 몸을 드
러내고 정면 돌파를 한다는걸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다. 절대로 어둠속으로 파고들어 목표로 한 자만을 해
치우고 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나의 이런 행동에 길드 내부에서는 분분한 이견
이 많았지만, 결국 페이턴씨는 나를 비호해 주실 뿐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맡은 자들.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죽
음을 내린다. 적어도,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 내가 베푸는 친절이다. 암살로 인해 그
들이 지켜야만 했던 한 누군가만이 죽어버리면, 그들은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절망과 자책감에 망가져 버릴 것이니까.

나 역시 누군가를 결국 지키지 못했기에, 누군가를 지키지 못한 이들의 괴로움을 나
는 잘 알고 있다. 그 괴로움을 해소시켜주는것은 바로 나의 몫이다. "죽음" 으로.

혹시나, 자신의 목숨을 의무보다 우선시 해 도망가는 자들은 입에 담을 가치조차도
없다. 물론 나 스스로에게 죽음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안해본것은 아니다. 하지
만, 나는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혼자가 되어버리신 페이 아가씨를 찾아야
만 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 부끄러운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
어섰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져 있는 나의 브로드 소드를 집어 들고, 조용히 내 방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쇼 타임이다.

.
.

터벅, 터벅.
어두운 밤거리를, 나는 조금 힘없이 걷고 있었다. 이제 조금 후면, 길드 마스터 녀
석으로부터 받은 임무를 수행해야 할 시간이다.

녀석이 나에게 시킨것은, 카바노스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한 도시의 시장을 암살하
라는 것이다. 단순한 "마을" 도 아니고, "도시"다. 즉, 그 규모와 치안이 대단하리
라는건 보지 않아도 뻔한 일. 그리고, 나는 지금 이곳에 와 있다.

녀석이 나에게 이 일을 시키는데에는 속셈이 있을게 뻔했다. 길드를 탈퇴하려는 나
를 남의 손을 빌려 제거하겠다는 것이겠지. 녀석은 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절
대로 한 명만을 죽이지 않고, 호위병을 포함해 정면 승부로 나를 향해 덤벼드는 모
든 이에게 죽음을 내린다는걸. 하지만, 이번의 적은 시시껄렁한 개인이 아니라 한
도시의 통치자인 시장이다. 사병과 호위병이 득시글 거릴것은 뻔한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했군, 마스터 녀석.

떨림은 없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미련은 있다. 삶에 대한 집착이 아닌, 페이 아가씨를 모시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이다. 나는, 그녀를 보호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내리지 않은 의무이지만...

어째서인가.
나의 아가씨는, 내가 보호해야만 했던 세리스 아가씨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
고, 페이 아가씨는 물론 내가 모셔야 할 분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분을 보호해
야만 했다. 말했듯이 죄책감이라는, 단순한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그러기 위해 이를 악 물고 강해지려 노력했다. 약한자로서의 설움은, 그 때 한번으
로 충분하다. 약자는, 절대로 누군가를 지킬 수 없다는 그런 단순한 사실을 나는 너
무나도 큰 대가를 지불하고 알아버렸으니까.

터억.
꽤나 긴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내가 서 있는곳은 시장의 저택이였다. 나는, 천천
히 고개를 들어 거대한 정문을 올려보았다. 이미 사방은 어두워져 있어서, 보라빛의
월광만이 비스듬히 사물들을 비추어 주고 있을 뿐이였다.

카아아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나를 가로막은 정문의 잠금쇠는 깨끗히 두조각이 나버렸
다. 그리고, 나는 가볍게 문을 밀어 젖혔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가로막
고 있던 정문은, 활짝 열려졌다.

"누구냐!"

파앗.
아무말 없이, 녀석의 머리는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굴러다닌다. 목을 잃어버린 몸
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대며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고.

"엔티 레이필드. 혹은, 사신(死神)의 레이필드..."

나는, 이미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말에 가볍게 대꾸해주면서, 어둠속으로 휘
적휘적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의 시장이라는 녀석을 처리하기 위해.

.
.

쿠우웅.
땅이 가볍게 울린다. 나를 가로막은 녀석은, 꽤나 육중해 보이는 클럽(club) - 몽둥
이 - 을 위압적으로 땅에 내려 놓아 그 무게를 자랑하는 모습이다. 기세를 꺾겠다는
건가. 물론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허세는 통하지 않는다.

"괴물같은 솜씨는 인정하지..."

녀석은, 내가 거쳐온 통로에 쓰러져 있는 십여명의 병사를 바라보며 씨익 웃으며 대
꾸했다. 물론 그들 외에도 이곳까지 거쳐오면서 수 많은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인간은, 공포에 극에 이르렀을때 오히려 용기가 생긴다. 나는 그런 경우를 적지 않
게 보아왔고, 그리고 그 공포의 대상은 바로 나였다. 이 녀석도 크게 다르진 않다.
단지, 다른 녀석들보다 조금 더 강한건 사실이였다.

"허나 세이턴 시(市)의 호위대장, 베넨이 있는이상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이다!"

쿠우웅.
녀석은 다시 클럽을 들었다가 강하게 바닥을 내리쳐서 위압적인 소리를 만들어 낸
다. 더불어, 녀석의 시끄러운 목소리도 함께. 어쨌든 생각대로라면 시장 녀석은 도
망갈 곳이 없다. 호위 대장까지 모습을 드러낸걸 보면, 이 곳이 지킬 수 있는 마지
막 길목일 것이다.

"세이턴 시의 호위대장이라는 이름의 명예를 걸고 네 녀석을..."
"시끄러워."

파앗.
촤아아아아악-

허공에 그어진 섬뜩한 검광의 반월을 따라, 녀석의 목은 붉은 피와 함께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나를 상대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으로 죽었다. 자신이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시간속에서 말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내려 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죽음이었으니까...

털썩...
힘없이 무너진 몸을 뒤로 한채, 나는 마지막으로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고급스런
나무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내 눈에 보인건, 일렁이는 촛불의 흐릿한
불빛속에서 구석에 두려움에 떨고 이는 시장이였다. 적어도 예상이였지만.

"...세이턴 시(市)의 시장, 레이번 인가."
"워, 원하는거라면 무엇이든 주겠다.... 돈을 원하나? 아니, 권력...? 이 도시라면
충분히 너를 만족시킬 수 있을테니까... 살려줘..."

녀석은 바들바들 떨면서 겨우 그 말을 뱉어냈다. 나는 묵묵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섰다. 어둠속에서, 흐릿하게 겨우 형체가 드러나 보이는 그의 몸에서, 유
일하게 빛을 머금고 있는것은 눈이였다. 물론, 그것은 공포였지만.

"저들은 당신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을 희생시키고 혼
자 살아남으려 하고 있어. 얼마나 더러운가."
"으.. 으으...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다... 제발 살려줘..."

꽈악.
나는 순간적으로 손에 쥐고 있는 브로드 소드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주저없이
나의 검은, 하얀 빛의 검영을 어두운 허공에 그었다.

촤아아악-
무언가 터져나오는 소리와 함께, 고급스러운 벽지에는 붉은 빛의 혈흔이 남는다. 어
둠속에서도 섬뜩히 빛나는 붉은 빛은 언제 보아도 기분좋을리 없다.

어차피 그런 녀석이다.
이런 멍청한 지도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들이 더욱 가엾다는 생각이 들 뿐이였
다. 역설적이지만, 나도 그런 축에 속해버린다. 그 멍청한 마스터 녀석 때문에.

나는, 잠시 물끄러미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시장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몸을 돌
려 건물을 나섰다. 물론, 이미 주변에는 도시의 치안을 맡는 병사들이 왁자왁자 떠
들면서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귀찮아.
나는 가볍게 한 마디 내뱉고는, 3층에서 뛰어 내려 나뭇가지를 붙잡고 그 탄력으로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어차피 퇴로 정도는 미리 계획해 두었으니까, 문제는 없다.

어차피 내가 쓸어버려야 하는것은.
나와 같은 불쌍한 존재들...
시장의 사병들로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