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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Fate [Give and Take]

2005.07.02 00:26

SoranoChki 조회 수:57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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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그랑...
손에 가볍게 그러쥐었던 투명한 얼음 큐브들을 술잔에 떨어뜨렸다. 안에서 미끄러지
듯이 조금 흔들리던 얼음 큐브들은, 곧 자신들의 최적의 자리를 잡은듯 더 이상 움
직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술 조차 채워넣지 않은 그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에 놓여 있는 술병을 집어 들고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여어, 오랫만이군, 엔티."

툭, 하고 나의 어깨를 치고는 나의 옆에 자리를 잡는 사내. 여전히 너절한 턱수염을
정리하지 못한채로 삐죽이 솟아나온 그것을 쓰다듬는것이 습관인 이 녀석의 이름은,
루아즈 크리스틴. 내 길드의 동료인 녀석이다. 최근에 만나지 못했던건 사실이지만.

"그 동안 어딜 그렇게 뺀질나게 돌아다니는거야? 마스터가 한참 찾아다녔다고. 네가
없어졌다고 노발대발 하셨고."
"...그래서?"

나는 차갑게 내뱉었다. 의도적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길드 마스터는 아무
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히 전략적이나 사업 구상등을 하는 수완은 뛰어난 것
같지만, 뒤에 숨어서 이리저리 시키기나 하는 꼬라지라니.

"또 차갑게 나오는군. 하기사, 네 성격이 어디 가겠나."

루아즈는 곤란한 목소리로 코 밑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나는, 하지만 아무말 없이
차가운 감촉이 전해져오는 술잔을 두 손으로 감싸쥔채로 가볍게 흔들고 있을 뿐이
다. 그리고, 그에 맞춰 들려오는 딸랑딸랑 거리는 맑은 소리도 마음에 들었고.

"이번엔 만만치 않은 녀석이야. 특별히 네가 필요하다고 하는것만 보아도 알 수 있
다구. 헤헷- 어때, 기대되지 않아?"
"어째서 네가 가지 않은거지?"

나는 조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우리 길드 내에서 실력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내 앞에 앉아 있는 루아즈 녀석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녀석이다. 물
론 그 성격 때문에 조금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단순한 실력으로는 분명
히 누군가에게 뒤질만한 인물이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바쁜 일이 있다구. 사실 이렇게 노닥거릴 수도 없는데 말이야."

녀석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아무래도, 녀석에게
는 다른 일이 맡겨진건가. 하기사, 요즘 이곳, 카바노스에는 꽤나 시끌벅적한 일이
일어나 버렸다. 라이베리아로 가는 보물선이 침몰해 버렸다는... 물론 그 금액은 대단
한것이여서 누구라도 탐을 낼만한 것이다.

"...내가, 말한 적 있지."

나는,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나직히 중얼거렸다. 루아즈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
더니, 곤란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연다.

"설마, 또 그 얘기냐."
"난 이 빌어먹을 길드 따위가 맘에 들지 않아. 절대 힘이 약해서 어쩌고가 아니야.
단지, 나는 마스터라는 작자와 살인이라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거다."
"...그래서, 이번엔 이야기 할 거야?"

녀석의 물음에, 나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 스스로도 아
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이 길드를 탈퇴해야 하는 것인지, 혹은 계
속 머물러야 하는 것인지. 물론 길드가 나를 호락호락 놔줄리가 없다. 온전히 보냈
다가 다른 길드에 가입이라도 한다면, 나는 그들의 적이 되어서 목에 칼을 겨눌테니
까 말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음을 내릴지도... 아니 틀림없이 그럴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으니까.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면서, 술잔을 감싸쥐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아직도, 그녀를 찾는건가."
"......"

꽈악.
나도모르게, 술잔을 감싸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 버렸다. 술잔은, 나의 힘
때문에  안에 들어있는, 액체의 찰랑임과 함께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무표정한 얼굴로, 술의 표면에 비추어지는 나의 일
그러진 얼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

"모를거라 생각하면 곤란해. 마스터도 눈치 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
"네가 충분히 조심하긴 했지. 덕분에 5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그걸 알 수 있었으니
까. 네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걸."
"......"
"네가 길드의 정보망을 이용해 그녀를 찾으려고 하는건 알고 있어... 그리고, 네가
길드를 탈퇴하려는건 더 이상 이곳에서 그녀를 찾을거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닌가? 결국, 다른 길드의 정보망을 이용하겠다는거겠지?"

...쳇.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면서, 아직 반이나 남아 있는 술잔의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목을 타고 짜릿하고 화끈한 감각이 온 몸을 스쳐지나가면서, 순간적으로 머
리가 하얗게 되어버리는걸 느꼈다.

"그래서, 그렇다면 어쩌겠다는거지."
"뭐, 굳이 그렇게 몰아세우려고 했던건 아니야."

루아즈 녀석은 어깨를 으쓱, 하면서 여유있는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잠시 그를 물
끄러미 노려보고는 다시 시선을 술잔으로 돌렸다.

"페이 세이버, 전 라이베리아 수상 그래그 세이버의 차녀. 반역죄로 모두 처형 당했는
데 그녀는 당시 이곳, 카바노스로 출장와 있어서 살았다는군. 뭐, 그 다음이 문제지
만 말이야. 감쪽같이 사라졌거든?"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녀를 찾으려 한다면 이 조건을 수락하라고. 맞바꾸자는거야, 간단
히 말하자면 말이지."

녀석은 나에게 서명서를 내밀었다. 이것은, 만약 받아들이다는 의사로 싸인을 한다
면 무슨일이 있더라도 완수해야 하는 그런 일이다. 실패는, 곧 죽음이다. 그 만큼,
길드원은 자신의 분수에 맞추어 임무를 선택해야만 했다. 철저한 능력 관리랄까.

"...하겠어."
"괜찮겠어? 읽어보지 않아도."
"조건이 너무 좋아서 말이야. 어떤 일이라도 손해는 보지 않을것 같군."

나의 대꾸에, 루아즈는 피식 웃고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려보였다. 그리고는 녀석
은 가볍게 자리를 털고 아무말도 없이, 바를 휘적휘적 나가버렸다. 언제나 저런 녀
석이지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마스터의 직인을 뜻하는 붉은 봉인을 뜯어 종이를 펼쳤
다. 꽤나 빼곡하게 적혀 있는 종이 안에는... 내가 해야 할 임무가 쓰여 있었다. 잠
시 그것을 훑어 내려가던 나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풋... 쉽진 않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