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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19禁 The Magic 2부

2008.11.15 10:47

Rei 조회 수:628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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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by 김게맛


 


 


2.


 


겨울.


 


티아롬으로 이사를 온 이후 처음으로 겨울을 맞이했다.


 


나하로에 있을 적엔 작은 난로하나, 따뜻한 모포 한 장이 없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풍족했다. 집 안엔 따뜻한 공기가 맴돌았고 이불을 포근하고 두꺼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눈으로 덧칠된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만 파 내려가면 더러운 오물이 모습을 드러내듯, 따뜻한 공기는 가슴 한구석에 박혀있는 빙정(氷晶)을 녹이지 못했다.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서 퍼져 나오는 한기의 정체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언젠가부터 시에나는 레이를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똑같은 일상이었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들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레이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타인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레이를 보지 못했다.


 


시에나는 모든 관심과 정을 끊어놓고 자신의 틀 안에 가두어 놓은 다음, 자신의 것으로 레이를 사육하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정에 굶주려 있던 레이는 시에나의 작은 관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흡족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레이는 이제 완전히 자신만의 것이 될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것을 머리털 하나라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레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진 그녀의 유일한 소유물이었다.


 


“무슨 생각해?”


 


시에나는 남매간의 정사라는 패륜적인 행위가 끝난 후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 레이를 향해 물었다. 레이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시에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냐, 아무것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지만, 시에나는 본능적으로 아주 작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너무나 작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알아채기 힘든 것이었지만 시에나의 가슴에 작은 흔적을 남겼다. 그녀는 찝찝한 기분을 날려버리기 위해 애무를 시도했지만, 조금 전과 달리 흥이 나지 않았다.


 


결국 시에나는 한껏 달아오른 레이만 남겨둔 채 잠을 청했다. 한편 간신히 달아오른 몸을 식히던 레이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사람이 스쳐지나갔다.


 


몇 달 전 우연히 만난 자신을 구해준 여자.


 


레이는 카렌을 생각하자 어느 샌가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구토가 치밀었다.


 


급히 침대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간 레이는 벽에 기대어 서서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웨엑! 웨엑! 우욱! 웨에엑!”


 


쓴물만 나올 때 까지 속을 비워낸 레이는 헉헉 거리며 주저앉았다. 차가운 눈 바닥은 순식간에 레이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기운이 다 빠진 레이는 멍하니 카렌이 살고 있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등불에 홀린 나방처럼 비틀거리며 그녀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똑, 똑.


 


이제 잘 준비를 하고 있던 카렌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쓰레기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서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냥 모른 척 할까 생각을 했지만, 어차피 자신을 노리고 찾아온 사람이라면 그것 또한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카렌은 부엌칼을 찾아 오른손에 꼭 쥐고 조심조심 문으로 다가갔다.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이제 멈췄지만, 그녀는 문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벌컥 열어젖힌 카렌은 갑자기 자신을 향해 쓰러지는 사람과 함께 넘어졌다.


 


차가운 바위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칼질을 하던 카렌은 상대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다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간신히 자신을 짓누르던 상대를 옆으로 치워내고 얼굴을 확인한 카렌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다, 당신이 왜 여기에?”


 


싸늘하게 얼어붙은 몸 때문에 혹시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던 카렌은 레이가 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자 그녀는 부랴부랴 문을 닫고 레이를 벽난로 앞으로 옮겼다.


 


이제 곧 잘 참이었기에 불을 줄여놓았던 카렌은 장작을 집어던지며 불길을 키웠다. 가까이 가는 게 뜨거울 만큼 불길이 거세지자 이번엔 집에 불이 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얼어죽어 가는 마당에 다시 불길을 줄이기도 힘들었던 카렌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뒀다.


 


땀이 날 만큼 집안이 더워지자 레이가 정신을 차렸다. 카렌은 레이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고 우유를 데웠다. 그녀가 우유를 다 데웠을 무려 레이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자, 일단 이것 좀 마셔요.”


 


레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우유를 받아 호호 입바람을 불며 마셨다. 카렌을 팔짱을 낀 채 레이가 우유를 다 마실 때 까지 기다렸다. 레이가 우유를 다 마시고 빈 컵을 건네자 선반에 올려놓은 카렌은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했다.


 


“이 밤중에 갑자기 왜 찾아온 거예요?”


 


살짝 노기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질문에 레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한건 됐고. 갑자기 찾아온 이유나 말해 보세요.”


“저, 그게...”


 


레이는 어째서 자신이 카렌을 찾아 왔는지 설명하기 힘들었다. 한동안 우물쭈물하던 레이는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냥요.”


“그냥?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네?”


“죄송합니다. 그럼 이, 이만 가볼게요.”


 


레이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렌은 그의 가슴을 쳐서 다시 침대에 앉혔다. 레이는 가벼운 두려움을 느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지금 멋대로 와서, 죄송하다고 몇 마디 한 다음 멋대로 가겠다는 거예요?”


“지금, 지금 당장은 곤란하지만 어, 어떻게든 보상해 드릴게요.”


“보상도 됐고요. 기껏 이런 일 가지고 보상 운운 하는 것도 우습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야기나 좀 해요. 대체 갑자기 왜 찾아온 거예요?”


 


레이는 안절부절 못하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정말, 그냥...”


“또, 그 소리. 아 좋아요. 그럼 그냥 찾아왔다고 치고.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 동안은 왜 안 찾아 온 거예요?”


“시에나랑 줄곧 같이 있다 보니 그게, 어쩔 수 없었어요.”


“같이 있다니, 당신 그 시에나랑 같이 살기라도 한다는 거예요?”


“네, 어찌됐건 제 동생이니까...”


“동생? 정말요?”


 


카렌은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이 되물었다. 레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카렌이 혼자서 감탄사를 유발하며 놀라는 동안 레이의 불안증은 극도로 치달았다. 한없이 눈치만 보던 레이는 카렌의 관심이 잠깐이나마 자신을 떠나있을 무렵,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 저, 저기!”


 


카렌이 급히 레이를 불렀지만, 레이는 도망치듯 그녀의 부름을 무시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렌의 집에서 탈출한 레이는 전력으로 자신의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차갑게 얼어붙어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할 무렵, 레이는 집에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급히 문을 걸어 잠그고 그대로 문에 기대어 무너져 내렸다.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도 시에나는 꽤 깊이 잠들었는지 깨지 않았다.


 


은은하게 집안을 비추는 화로를 보며 레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 일이 있고난 며칠 후, 시에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왔다.


 


“나 이제 가게에 안 나가.”


 


레이는 자신이 잘못들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됐든 레이는 기뻤다. 홀에서 대기하는 동안 모르는 남자들이 시에나의 방으로 들어갈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레이는 싱글싱글한 얼굴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레이의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구겼다.


 


“재수 없으니까 그만 웃어. 아무튼 가게에서 일하는 건 그만 두기로 했어. 대신 마지막으로 할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 때문에 한두 달 정도 집을 비울 거 같아. 그러니까 그 동안 꼼짝 말고 집에서 기다려.”


“알았어. 아무데도 가지 않고 기다릴게.”


 


시에나는 특별히 챙겨가는 것이 없었다. 말 그대로 맨손. 레이는 대체 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리고 묻는다 해도 시에나가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시에나는 나가기 전 인사를 대신하여 딥키스를 했다. 셀 수 없이 경험한 일이지만 아직도 온몸이 떨릴 만큼 황홀했다.


 


“저기, 시에나.”


“뭐?”


 


레이는 키스가 끝난 후 밖으로 나가려는 시에나를 불러 세웠다. 가볍게 인사라도 할 작정이었는데, 돌아선 시에나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싸늘한 한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레이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 한 기분을 느꼈다.


 


“자, 자, 잘 다녀 오, 오라고...”


“흥, 너 같은 게 걱정 안 해도 잘 갔다 올 거야.”


 


더듬더듬, 힘겹게 인사를 건넸지만, 시에나의 무시하는 듯 한 대답을 듣자 풀이 죽었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끈적한 적막감에 레이는 몸을 떨었다.


 


 


시에나가 사라진 며칠 동안 레이는 죽을 만큼 심심했다. 화장실을 가거나 하는 일을 제외하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걸터앉아 시에나 생각만 했다.


 


시에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힘든 일은 아닐까? 몸은 건강할까? 밥은 잘 챙겨먹고 있을까? 잠자리는 편안할까? 언제 돌아오는 걸까? 등등.


 


전에도 그러했지만, 지금은 시에나가 없는 세상을 생각 할 수조차 없었다.


 


레이의 머릿속이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가던 어느 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에 앉아있던 레이는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시에나가 돌아온 걸까?’


 


기대감에 부푼 채 문을 연 레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헛바람을 들이키며 문을 도로 닫아 버렸다. 하지만 레이가 문을 닫는 것 보다 문 밖에 서있는 여자가 문틈으로 발을 밀어 넣는 속도가 더 빨랐다.


 


“헤에, 정말로 여기 있었네?”


“저, 저기 여기엔 무, 무슨 일로...”


 


당황한 레이의 질문에 카렌은 아리송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당신은 마음대로 남의 집문 두드리면서 난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상관없겠네요. 들어가요.”


 


레이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출입을 막아보려 했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완력이 레이보다 강했다. 한동안 실랑이를 하던 레이는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온 카렌은 집안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생각보다 엄청 좁네.”


 


레이는 멋대로 집안의 이것저것을 들춰보는 그녀를 보며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웬만한 것은 다 훔쳐본 카렌은 아예 침대에 걸터앉아 버렸다. 그녀는 레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서있으면 피곤할 텐데, 좀 앉지 그래요?”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여기 혼자 사는 거예요?”


 


카렌의 물음에 레이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시에나랑 같이 살아요. 지금은 어디 갔지만...”


 


레이의 대답에 카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 당신 설마, 시에나가 어디 갔는지 모르는 거예요?”


“네,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흐음, 신기하네. 그걸 왜 말하지 않은 거지?”


“혹시 시에나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아세요?”


“일? 그런 걸 일이라고 하나?”


“저... 아신다면 좀 말해주시면 안될까요?”


 


레이의 간청을 들은 카렌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글쎄요. 공짜로 알려주긴 싫은데...”


“돈이라면 많진 않지만 사례를 해드릴게요.”


“사례라... 아!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보상해준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 그건...”


 


레이의 대답이 궁해졌다. 돈이라면 두세 달 정도는 풍족하게 지낼 만큼 있지만, 보상 운운할 만큼 많은 것도 아니었다. 레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 때, 카렌이 놀랄만한 제안을 했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저번의 보상도 없던 걸로 하고, 시에나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려줄 수 있는데...”


“무...슨 부탁인가요?”


“그건 비밀. 할래요? 말래요? 이상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기... 그게...”


“싫어요? 음, 표정을 보니까 싫은 모양이네. 알았어요.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카렌이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고 하자 레이는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하, 할게요. 뭐든지 할게요.”


 


레이의 애원 비슷한 대답을 들은 카렌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 레트인 신전 알아요?”


“네? 알고는 있지만... 거긴 왜...”


“내일 정오에 그리로 나와요. 그럼 말해 줄 테니까. 내일 봐요. 안녕.”


 


레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엔 몇 가지 단어가 비틀거리는 나비처럼 날아 다녔다.


 


‘레트인 신전, 정오, 카렌, 시에나.’


 


 


다음 날, 레트인 신전 앞에 나타난 레이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대와 두려움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색 없는 색 바랜 헌옷을 입은 레이는 머리칼마저 흔한 갈색이었다면, 누구하나 기억하지 못할 만큼 평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레이는 초조하게 신전 앞 광장을 전전하며 카렌을 기다렸다.


 


분명 정오가 넘은 것 같은데도 그녀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렌이 나타난 것은 한참을 기다리던 레이가, 혹시 속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녀는 푸른빛이 감도는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특별한 장식이 없이 수수한 모습이었다.


 


“죄송해요, 뜻밖에 일이 하나 생겨서 조금 늦었네요. 많이 기다렸죠?”


“네, 사실 안 오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살짝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솔직하시네요. 보통은 얼마 안기다렸다고 하던데. 그보다 아직 점심 안 먹었죠? 내가 살게요 따라와요.”


 


레이는 시에나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돌아가려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으나 카렌은 레이가 거절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레이는 울상을 지으며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카렌을 따라갔다.


 


카렌이 향한 곳은 비싸다고 하기엔 모자라고, 싸다고 하기엔 가격이 조금 나가는 어중간한 식당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식당 내부는 한산했다. 카렌은 햇볕이 잘 드는 자리를 잡고 앉아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아, 저기... 그런 건 먹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왜요? 바쁜 일이라도 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면 상관없겠네요.”


 


카렌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하자 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왠지 그녀의 웃는 얼굴이 부담스러웠다.


 


멀뚱히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던 두 사람은 애피타이저가 나오자 카렌이 레이의 신변잡기를 묻는데서 부터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에 할 말이 없었던지라 레이의 대답은 간단하게 끝났다.


 


“에? 그게 끝?”


“네.”


“대체 어떻게 살기에 그렇게 할 말이 없어요?”


“죄송해요.”


 


카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미건조한 레이의 생활에 비해 그녀의 생활은 무척이나 파란만장했다. 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카렌은 레이가 자신의 이야기에 생각 외로 큰 반응을 보이자 점차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손대지 않은 메인디시 이후 디저트가 나올 무렵, 카렌은 감정에 북받쳐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는 본래 시골귀족의 외동딸이었다. 풍족하진 않지만 모자란 것 없이 자란 그녀는 허영심 따위와는 거리가 먼, 예의바르고 소소한 아가씨였다. 적어도 그녀의 아버지가 정체모를 거부에게 속기 전까지는 그랬다.


 


밀 장사를 하는 거부에게 속아 섣불리 사업에 손을 댔다가 망하는 바람에, 그녀의 가문은 완전히 파산해 버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해 버렸고, 어머니 또한 아버지가 자살하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버렸다.


 


결국 갑작스레 부모를 잃고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된 카렌은 하는 수 없이 거부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노리개 취급하며 아무렇게나 대했다. 이 또한 일 년을 넘지 못해서, 카렌에게 실증이 난 거부는 그녀를 매음굴에 팔아 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 몇 개의 가게를 전전하다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나은 편이에요. 빚을 거의 다 갚아가서 나름대로 자유롭게 지내고 있으니까... 처음엔 도망이라도 칠까봐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방에 가둬놓고 매춘을 시켰는데... 다시 떠올리기도 싫어요. 그 때는 거의 짐승처럼 지냈어요.”


 


레이는 그녀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신만은 못하지만 그녀 또한 나름대로 고충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눈시울을 붉히던 카렌은 소매로 눈물을 닦은 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 음식이 다 식어버렸네요.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만 끌어서 미안해요. 지금이라도 드세요. 먹을 만 할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은 레이는 황급히 고개를 처박고 음식을 먹는데 집중했다. 맛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입속으로 꾸역꾸역 음식들을 쑤셔 넣었다. 레이가 음식을 다 먹자 카렌은 계산을 하곤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이나 하기로 했다. 말없이 시작된 산책은 광장을 두 바퀴 돌고 끝이 났다. 카렌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레이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쓸데없는 말만 해서...”


“아, 아니에요.”


 


레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지만, 카렌은 다 알고 있다는 듯 한 미소만 지었다.


 


“아니에요. 정말로 미안해요. 그럼 전 밤에 일을 나가봐야 해서 이만 들어가야겠네요. 레이씨도 피곤해 보이시는데 이만 들어가세요.”


“아, 아... 네. 저, 저기 그런데...”


“네. 말하세요.”


“또, 또 보, 보, 볼 수 있을...까요?”


 


카렌은 대답 대신 싱긋 웃은 후 레이에게서 떠나갔다. 레이는 점차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레이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피로가 쏟아졌지만 이상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카렌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말, 그녀의 미소, 그녀의 숨결.


 


그녀의 모든 것을 떠올리던 레이는 불현 듯 숨이 막힐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어느 샌가 시에나가 자리하고 있던 공간을 카렌이 차지해 버린 것이다.


 


시에나는, 그녀가 어떤 짓을 하던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동생이었다. 하지만 카렌은?


 


레이는 카렌에 대해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공포가 한층 가중되었다.


 


카렌과 시에나.


 


레이는 두 사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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