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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달의 그림자

2005.07.14 20:24

아메바 조회 수:13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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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6.

어두워….

빛은 어디에 있는 걸까?

달도 뜨지 않았으니, 이 숲 속에서 찾는다는 건 무릴 테지.

하지만 찾아야 해.

느낌이 이끄는 대로 간다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사박 사박

발소리… 설마 내 것일까?

아… 토끼였구나. 안녕?

-사박 사박

지나가버렸어.

보지 못하는구나. 그럴 만도 해.

너와 달리 난 발자국도 내지 못하니까.

그래도 그 덕분에 이 설경이 깨지지 않는다는 건, 마음에 들어.

“….”

아.

찾았다.

작고… 예쁜 집.

나무로 지어진 아담한 집.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아직 잠에 들진 않은 거겠지. 다행이야. 들어가도 될 것 같아.

자, 문 앞이다.

두들기면 열어줄까? 손등으로, 이렇게.

아… 통과해버렸어.

이렇게 되면, 노크할 방법이 없는데.

“…….”

바보.

통과할 수 있다면, 굳이 문을 열 필요가 없잖아.

….

자, 안에 들어왔어. 여기 계신단 말이지.

온도 같은 건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더 따뜻하게 느껴져. 저 벽난로 때문이겠지? 전구는 되게 낡았네. 아
무리 산중이라지만, 형광등 정도는 있을 법 한데 말이야. 주인 아저씨는… 자고 있구나. 소파는 불편할 텐데. 부인은 부엌에 있겠지. 식기 소리를 들어보면.

그리고….

“아가씨.”

의자… 는… 반응이 없네. 더 크게.

“아가씨!”

아, 흔들렸다. 앞뒤로 살짝.

“응? 거기 누구죠…?”

아가씨. 저에요. 저는 아가씨의 의지가 만들어낸 존재. 다른 누구의 개입도 없이, 오로지 아가씨에게서 비롯된 아가씨의 것이랍니다.

아가씨는 절 볼 수 없겠죠.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하리라고 믿고 있어요. 잠들어버린 그 눈을 깨우고 세상을 볼 때, 아가씨는 제 모습 또한 함께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도둑…?! 나 소리 지를 거예요!”

“그런 게 아니에요. 아가씨.”

손을 잡아드리고 싶지만… 야속하게도 그냥 통과해 버리네요. 제게 허락된 건, 그저 바닥을 딛는 것뿐이에요. 그게 절 품어준 대지가 남긴 유일한 선물이죠. 하지만 통과를 하더라도, 아가씨만은 그걸 느낄 수 있으실 텐데….

“누… 누구죠? 누구세요?”

떠시는 건가요?

그럴 테죠. 아직은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애니까. 하지만 아쉽네요. 전 누구보다도 아가씨와 가까운 존재인데. 부모보다도, 형제보다도, 언젠가 태어날 지도 모르는 자식보다도 더 가까운 존재인데-.

“전 아가씨의 종이에요. 아가씨가 절 만들어내셨죠.”

고개를 젓는다는 건… 아니란 말인가요? 아니면 믿기 어렵다는 얘기인가요? 왜 그렇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시는 거죠?

“아, 아빠. 어디 있어…? 아빠? 아빠…?”

“아가씨. 정말이에요. 믿지 못하시겠어요?”

으음.

이해하신 걸까… 부름을 그치신 걸 보면.

“…그게 정말이야? 그… 종… 이라는 게?”

“네.”

보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요. 모든 행동에는 의미가 있는 거니까.

“전….”



* * * * * *



“허— 억!!”

콜록! 콜록콜록! 숨을 들이쉬는 것과 내쉬는 걸 동시에 하면 이렇게 된다. 빌어먹을.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조금 난잡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구색이 잡힌 방이다. 걸레질만 하면 사람 사는 것처럼 보일 법 한데. 한 쪽 구석에는 꽉 찬 봉지가 묶인 채로 세워져 있다. 이상한데. 내가 어제 분명히 두 개를 채웠는데… 나머지는 내가 깔고 있었군.

다 치워놓고 잠깐 쉰다는 것이 그만 하룻밤을 꼬박 넘겨버렸다.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형광등은 무의미하다. 얼핏 보면 발견하기도 힘든 그 불을 끈 나는 잠시 스위치 옆에 선 채로 기억을 되짚었다.

산 속을… 걸었다. 침엽수의 거친 무늬, 티 없이 쌓인 눈의 언덕. 숲의 꼭대기가 그대로 지평선을 만드는 그 광경은 이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말도 안 돼. 꿈이… 꿈이 이렇게 선명할 리 없잖아. 하지만 분명한 만큼 꿈속의 풍경은 계속 내 머릿속에 박혀있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 내가 아니었다. 난 뭔가 다른 사람이었다. 제정신의 나였다면 토끼가 괴수로 보일 만큼 커 보일 리도 없고, 어린애나 입을 법한 잔뜩 부푼 치마도 입지 않는다. 그래… 난 여자였다구! 기가 막혀서! 거기까지라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세상에 문을 통과하는 사람도 있나? 나는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꿈속에서는 훨씬 작았지만 어쨌든 같은 사람이니만큼 비슷하게 생긴 손이었다. 나는 그 손과 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킨다. 그래, 이건 미친 짓이다. 하지만… 실패한다고 해서 누가 보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문 앞에 선 뒤 심호흡을 했다. 자, 조심스럽게 따라하는 거야. 분명 노크부터 했었지? 하나, 둘….

-퍽!

“크헉!”

방문을 연 세파티는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보고 어이없어했다.

“시현. 코를 깰 뻔한 건 미안하긴 하지만, 어떻게 서 있어야 그런 부위를 맞지?”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나는 신음소리를 냈다. 어쨌든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건 알았으니까…. 약간 거친 방법이긴 했지만. 나는 콧잔등을 꽉 누른 채로 몸을 일으켰다. 세파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들으니까 끙끙대는 것 같던데, 어디 아파?”

“아, 아니. 좀 이상한 꿈을 꿨어.”

“헤. 뭐길래?”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조그만 소녀였던 것 같아.”

“시현. 심리학 이론까지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꿈이란 건 원래 꾸는 사람의 내면을….”

“지금 누굴 변태로 모는 거야!!”

세파티는 눈을 크게 떠 보일 뿐 말을 덧붙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나만 더 비참해질 뿐이었다. 젠장. 일어나자마자 이런 소리부터 해야 하다니. 어쨌든 그 요상한 꿈 덕분에 잠은 다 날아갔다.

“에휴, 됐어. 씻고 얘기해줄게. 넌 안 씻어도 돼?”

“벌써 씻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그런데 그렇게 치부를 공개해도 괜찮겠어?”

“아 글쎄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래두요! 누님!!”

저건 숫제 악마다, 악마. 아무튼 이 녀석도 세야 못지않은 면이 있어…. 내 뒤에서 웃고 있을 얼굴이 훤하다구. 나는 속으로 내 인생의 암흑기란 주제로 짧은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수필이 끝났을 무렵에는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

“-후아.”

샤워기에서 뿜어 나오는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렸다. 새삼 정신을 깨우는 그 한기를 온몸에 뿌리면서 나는 꿈을 거듭해서 되짚어나갔다. 다른 게 되었다는 건 모습만을 얘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생각. 사고. 기억. 전부 나와 달랐어. 전부 달랐다고. 그리고 그 건 하룻밤의 꿈으로 그치기엔 너무도 정교한 체계였다. 정말 내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그런 논리적인 꿈을 사람이 꿀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몸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 그 곡선, 빛, 하나하나를 모두. 예술에 재능만 있다면 그 모습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나는 물방울을 가득 머금고 있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로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악— ?!!!”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걸 발견하고 소스라쳤다. 이, 이게 뭐야?! 제기랄! 내 몸 맞아? 내 가슴에는 분화구라도 되는 것처럼 일그러진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그 모양은 너무도 끔찍해서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였다. 만일 세면대 유리가 문과 마주보고 있었다면 난 들어가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을 터였다. 하지만 난 측면에 붙어있는 유리를 보지 않은 채 바로 욕조에 들어가 버렸고, 이제야 연이 남겨준 흔적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돌려 흉터를 보았다. 다시 보니 조금 진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산맥처럼 돋아난 자국은 흉측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새삼 공포심이 들었다. 빛나는 손이 내 가슴을 관통하던 때, 그 기억 속의 고통이 내게 그대로 현신했다. 본능적으로 저려오는 가슴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전과는 다른, 낯설고 딱딱한 촉감이 손가락 끝에 와 닿았다. 소름이 끼친 나는 반사적으로 옆 벽을 짚었다.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

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경악해서 옆으로 물러났다. 벽에는 내 손가락이 짚었던 부위를 중심으로 잔금이 뻗어 나와 있었다.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멀쩡하다. 별로 누르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제기랄. 왜 아직도… 이런 몸인 거야. 힘이 남아돌아 넘치고 있는 이상한 몸뚱이. 빌어먹을… 빌어먹을! 왜 정상인 구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거야!

-쾅!

“시현, 무슨 일이야?!”

세파티는 엄청난 기세로 문을 치고 들어왔다가 들어온 속도의 열 배 이상으로 되돌아 나갔다.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문이 부서져라 닫힌 후에서야 상황을 깨닫고 뒷벽에 붙어서버렸다. 바, 방금 도대체 뭐야! 밖에서 세파티의 높게 올라간 목소리가 들렸다.

“시, 시, 시, 시현!! 지, 지금 뭐하는 짓이야! 놀랐잖아!!”

“너, 너야말로!! 남이 버젓이 씻고 있는데 왜 문을 열어, 열기는!!”

“갑자기 고함을 지르니까 그렇지! 이 변태야! 샤워 같은 걸 하면 문 정도는 잠그는 게 상식 아니야?!”

“난 어제까지 혼자 살고 있었다고!!”

제길, 반 년 동안 남 신경도 안 쓰고 살다 보니 사생활 관리에 소홀해져 버렸다. 물 튄다고 커튼이라도 쳐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얼굴도 못 들 뻔 했네. 잠시 후 머리에 수건을 비비면서 나온 나는 세파티가 의식적으로 나를 외면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크, 크흠. 저런 식으로 고개를 돌리면 목에 무리가 갈 텐데 말이야. 나로서는 그냥 빨리 잊고 싶지만 저렇게까지 극심하게 반응을 하면 도리어 이 쪽까지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에… 밥 먹을까?”

“그래, 그렇게 해!”

“…….”

이 아가씨야. 본 것도 없으니까 진정 좀 해. 세파티도 반사적인 반응에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러니까, 시현이 피곤하면 별로 좋을 것 없으니까… 여차하면 혼자 도망쳐야 하는 사태까지 생길 지도 모르고.”

“…그런 일은 좀 없었으면 좋겠군.”

자, 밥이다. 밥. 2인분이다. 2인분. 그러고 보면, 학교를 제외하면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이모 내외는 일이 바쁘셔서 이 곳까지 찾아오시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세파티는 내가 분주하게 준비하는 걸 보더니 한 마디 감상을 남겼다.

“조리법이 꺼내는 거랑 데우는 것 말고는 없는 거야?”

…제길. 뭘 기대해.

잠시 후 나는 그럴싸한 밥상을 차려놓은 채 두 손을 들어보였다.

“자, 됐다! 맛은 보증 못하지만 안심해. 죽진 않을 테니까.”

“묘한 충고구나….”

세파티는 암울하게 중얼거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능숙한 손짓이다. 쓰는 방법도 올바르고. 진수한테 배우기라도 한 건가.

녀석은 반찬을 우물거리다 넘긴 뒤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시현, 아까 있잖아… 그러니까….”

“…….”

“…….”

“…왜 비명 질렀냐고?”

“으응.”

뭐, 곧 잊겠지.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비명을 질렀다는 사실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냥, 흉터 때문에.”

“가슴?”

“그래.”

“너무 침울해하진 마. 그건 속성으로 만든 피부가 아직 시현의 몸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서 생긴 흉터야. 몇 주 정도만 있으면 알아서 동화될 거야.”

“음….”

나는 입술을 조금 비틀었다. 낫는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나 자신도 두 번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슴 부위를 더듬었다. 우둘투둘한 굴곡의 느낌이 면 아래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이게… 내 몸이란 말이지.

제기랄.

“그런데 꿈이 어쨌다는 거야?”

“아, 꿈? 그러니까… 내가 소녀가 되어서, 잠깐. 지금 또 내 심리 상태가 어쩌고저쩌고 하려고 했지?”

“좋은 자세야. 치료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니까.”

“…관둬. 아무튼 숲 속을 걷고 있었어. 밤의 숲. 이 나라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숲?”

“그래. 그러다가 한 오두막에 들어갔지. 문도 맘대로 통과하더라. 웬 소녀를 보고 내가… 그녀의 종이라고 했어. 그 애… 장님인 것 같던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느낌이랄까, 본능이랄까. 단지 겉보기만으로는, 눈을 감고 있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대화 도중에도 눈을 뜨지 않던 걸 보면 장님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바로 확신할 수는 없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나는 세파티를 흘긋 보았다. 그녀는 수저를 내려놓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괜히 꿈 얘기를 꺼낸 게 아닌가 싶었다. 나름대로는 특별히 할 얘기도 없으니 어색함을 무마하려고 꺼낸 거긴 하지만, 뭐, 너무 생생했다는 걸 빼면 내용도 별로 현실감 있지 않은, 까놓고 말하자면 그냥 개꿈 같았다. 그런 허무맹랑한 꿈 얘기에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텐데.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든 세파티가 하는 말은 그런 내 머리를 강하게 치는 것만 같았다.

“그건 아마 그 자연체의 기억일 거야.”

“…뭐? 연의 기억?”

“그래.”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연의 기억을 왜 내가 꿈으로 꾼다는 거야?”

“네가 다쳤을 때, 자연체의 손이 심장에 닿았어?”

뭐? 세파티는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심장은 영혼의 상징이야. 이 세계의 밖에서 상징성이 어떤 건지는 대충 알고 있겠지? 아우라가 직접 접촉하면서, 연의 기억이 네게 일부 흘러 들어갔을 수도 있어. 자연체는 인간과는 근본부터 다른 존재야. 때문에, 네 몸이 그 것의 기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 그게 꿈이라는 형태로 해소되어 나온 거지. 아마도 며칠 안 가 그런 꿈도 사라지게 될 꺼야.”

연의… 기억이라.

그렇단 말이지.

나는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도 작아서 흔들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채, 모포와 따뜻한 옷을 두르고 온기를 쬐고 있던 소녀. 하지만 그 앞의 난로불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소녀의 눈은 멀었으니까. 어린 나이에 장애를 가진 불행한 소녀, 그녀가 연을 만들어냈다고….

순간 진수의 말이 소름끼치게 떠올랐다.

일가족을 몰살시킨 자.

설마… 그 가족을?

그럴 리 없다. 꿈, 연의 기억 속에는 살의나 이기적인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순수한 무욕(無.慾). 그것은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실로 이상적인 마음의 태도였다. 그런 연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

“….”

나를 죽이려고 했어… 연은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빌어먹을! 어쩌자는 거지? 악어가 눈물을 흘리면 물떼새는 기꺼이 먹혀야 하나? 연이 순수하다면 나는 그 손에 생명을 맡겨야 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눈물로 대양을 만들어도 그 바다에선 피 한 방울도 뽑아낼 수 없어! 가치 없는 동정으로 살인 따위가 정당화될 리가 없잖아!!

정신 차려, 김 시현! 연은 살인자다! 네 목숨을 빼앗으려 하는 명백한 적이다! 그런 살인자를 옹호하겠다고? 변명하겠다고? 모순덩어리 같으니라고. 이젠 이런 무용한 고민도 진절머리가 나!

정말로 죄를 이고 싶다면, 눈물 따윌 풀어내지 말라고! 왜 내가 너 따위 때문에 이렇게까지 갈등해야 하는 거야!!

“시현!”

세파티는 다시 한 번 외쳤다.

“시현!!”

두 번째의 외침이 가까스로 내게 잡혔다. 신경 쓰지 않고 있던 귀가 갑자기 열리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으, 응? 뭐?”

“왜 그래. 얼굴이 빨개.”

세파티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나는 엉겁결에 얼굴을 더듬었다. 확실히, 뜨겁게 달아올라있다. 제길, 나도 모르게 흥분해버렸군. 나는 더듬던 손을 내려서 수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괜찮아…. 별 일 아니야.”

나는 나 스스로도 믿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렸다. 세파티는 시선을 거둘락 말락 하면서 못 미더운 표정으로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그러고 보니 밥도 거의 다 먹었네? 반찬들은… 에엣, 설마 이 걸 저 녀석이 다 먹은 거야? 나는 파전을 집어내는 세파티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너 생각보다 되게 잘 먹는다.”

“음, 꿀꺽. 비꼬는 거야?”

“매사를 그렇게 보면 겉만 늙어.”

“…시현. 넌 아무래도 3류 독설가의 기질이 있어.”

고맙군. 그런데 왜 그냥 독설가가 아니고 3류인 거냐?

“뭐… 그냥 지난 한 주 동안 잘 먹지 못했을 뿐이야. 자연체의 이동속도가 워낙 빨라서, 제대로 숙박하지도 못했으니까.”

“에? 그럼?”

“건량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어. 독한 술하고.”

풉! 나는 하마터면 먹던 걸 뱉어낼 뻔 했다. 수, 술?

“고지대는 밤이 춥거든.”

세파티는 간단하게 덧붙였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가녀린 몸으로 잘도 그런 떠돌이 생활을 해오다니…. 나는 왠지 세파티가 안쓰러워지는 걸 느꼈다. 진수도 오른팔을 쓰지 못했지. 마도사들은 전부 힘든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만큼의 강인함이 뒷받침되고 있긴 하지만.

“시현.”

“응. 무슨 일이니, 세파티?”

“…갑자기 다정하게 나오면 때려주고 싶어. 너.”

제, 제길! 나도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어! 네 녀석이 이상한 타이밍에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그만!! 세파티는 내 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빈 밥그릇에 계속 수저질을 하는 건 이 나라의 풍습이야?”

“치우자.”

덜그덕.

쏴아아아아.

그릇들이 부딪치면서 날카로운 음을 낸다. 마개를 달아 작은 샤워기가 된 수도꼭지 앞에서, 나는 반복적인 동작으로 식기를 씻었다. 동작에는 성의고 뭐고도 없다. 내 머릿속을 메우는 것은 다른 생각들뿐이었으니까.

이제 난 뭘 하면 좋은 걸까.

이제 와서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일상 외에 허락된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이 건 지극히 모순된 상황이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진수와 세야가 내게 바라는 건 하나다. 얌전히 박혀있을 것. 그래, 나는 그저 집안에 가만히 있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최상의….

순간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도구다.

그들은 나를 도구로 취급하고 있다. 내 기분, 내 생각은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그저 깨져서는 안 될 중요한 물건이다. 빌어먹을. 똑같아. 그 빗속에서 달려가며 느끼던 기분과 똑같다. 지독한 무력감. 그들의 세계가 나를 거세시켜버렸다. 그 속에서 나는 생각 따윈 필요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아- 제기랄!!

“시현.”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나는 그릇을 부서뜨릴 뻔 했다. 실제로 그럴 힘이 있으니 신경 쓰고 있지 않으면 곤란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세파티가 그 곳에 서 있었다.

“왜… 그러지?”

녀석은 조금 시선을 돌린 뒤 긴 머리카락 일부를 손가락에 빙글빙글 감았다. 뭔가 부담되는 내용인가? 세파티는 조금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오늘, 나와줄 수 있겠어?”

나… 온다니? 나는 그 말을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이유가 뭐지? 세파티는 덧붙여 해명했다.

“아무래도 이 거대한 도시를 두 사람만으로 수색한다는 건 무리야. 나도 도와주고 싶지만… 난 시현을 지켜야 하잖아? 혹시 시현이 괜찮다면, 찾는 걸 도와주지 않겠어?”

…….

나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멍하게 세파티의 말을 따라했다.

“도운… 다고?”

“으응.”

“어떻게 도운다는 건데?”

“그냥 내 곁에만 있어주면 돼.”

“…….”

물론 그럴 의도가 아니겠지만,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세파티도 그걸 깨달았는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고개를 도리질치자 머리카락이 아예 위로 떠버릴 것 같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있잖아! 시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내가 항상 옆에 있어줘야 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 자연체를 찾는 동안 내 가시범위 내에만 있어준다면 된단 얘기야! 그리고 시현도 그 것과 접촉한 경험이 있으니까, 어쩌면 찾는데 도움을 줄지도 모르고! 그래서, 내 말 이해하겠지?”

“…….”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세파티는 조심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응? 시현?”

“…쿡.”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그걸 참을 생각 따윈 없다. 나는 몸이 따라가는 대로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핫!!”

세파티는 갑작스런 내 웃음에 적이 당황한 듯싶었다. 그 당황스런 표정마저도 내게는 유쾌하게 보인다. 나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웃었다. 팽팽하던 신경이 끊어지자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했던 고민들이 모두 바보 같아질 정도로.

결국 나는 웃는 걸 그만두었다. 배가 아픈 까닭도 있지만, 세파티가 다시 내 열을 재보려고 하는 것 같아서이다. 안 그래도 근육이 땅기는데 저 녀석이 열을 쟀다간 즉사다. 하지만 갑자기 웃음을 멈춘다고 이번엔 사레가 들려서, 세파티는 기어코 열을 재보기로 마음먹은 듯 싶었다. 그런 세파티를 간신히 말린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하아… 하아….”

“…….”

“…고마워. 헛생각을 했군.”

“뭐라고?”

“아니, 아무 것도.”

세파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미소만 띄웠다.




* * * * * *




만사가 각오한 대로 풀릴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사람을 찾는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거대한 도시와, 살인적인 태양 아래에서라면 더욱.

나는 눈썹을 타넘고 내려오는 땀을 훔치면서 세파티의 말을 받아들인 게 잘한 것인지 점점 후회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덥지도 않나? 세파티의 걸음속도는 차라리 달린다고 하는 게 더 나아보일 정도였고, 아무리 체력이 올라간 나라지만 더위까지 막는 것은 무리였다. 정말 날 지킬 생각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잡는 게 이렇게 벅찰 리가 없잖아. 참다 참다 못한 나는 결국 세파티를 불렀다.

“어-이. 거기.”

세파티는 가볍게 멈춰서더니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말끔한 얼굴을 내게 향했다. 순간 나는 배신감 비슷한 감정까지 느껴버렸다.

“왜? 불렀어?”

“…너 말이야, 내가 뒤쳐지리란 생각은 하지 않는 거냐? 속도 좀 줄일 수 없어?”

세파티는 땀에 젖은 내 얼굴을 훑어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시현을 믿었기 때문이야.”

“그런 식으로 태연하게 변명하지 마!”

“어머? 누가 변명을 해?”

“됐네요….”

나… 내 주변의 여자들이 점점 무서워지고 있어…. 왜 갑자기 세야가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네. 세파티는 내가 땀을 식힐 동안 주위를 둘러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세파티에게 꽂히는 시선들은… 여느 때와 같다. 뭐, 굳이 검은 피부를 따지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돌아봐줄 얼굴이니까. 다만 문제는 뒤이어 따라오는 ‘그런데 저 뒤의 칙칙한 남자는 뭐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눈길…. 아무리 맘에 안 들어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실망하지 말란 말이야! 이 사람들아!

그건 그렇고, 이 속도라든가, 경로로 봐서, 내가 예상한 게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듯싶다. 그늘에서 슬슬 몸이 식었단 생각이 든 나는 고층 건물을 쳐다보느라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세파티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파티. 너 혹시 연을 느낄 수 있는 거야?”

세파티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홱 돌려버렸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세파티의 머리카락은 굉장히 부드럽게 날린다. 하지만 그 속의 얼굴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나는 살짝 굽히고 있던 무릎에서 손을 떼면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냥 그런 것 같아서.”

그렇지 않다면야, 나로선 딱히 10년 동안 협회란 곳에서도 추적하지 못했던 연을 단지 1년 만에 따라잡았다는 점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 반응을 보니, 정확하게 걸려버린 모양이다. 세파티는 뭔가 변명거리를 찾는가 싶더니 체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막연한 감각이라, 이 도시처럼 좁은 범위에서는 어려워지는 게 사실이지만.”

“흐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나도 모르겠어. 사실… 그녀를 추적하기로 한 것에는 이 감각도 조금은 이유가 될 꺼야.”

“혹시 너도 그 자연첸가 하는 거 아냐?”

그러자 세파티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 갑작스런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 난 그냥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현!! 마도사를 천사나 악마에 비유하는 것도 모욕인데, 자연체라니!! 내가 아닌 다른 마도사한테 그런 소릴 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알기나 해?! 시현은 지금 굉장히 큰 무례를 저지른 거야!”

읏, 알았으니 제발 노려보지 좀 마. 그 말뜻을 이해했다기보다는 기세에 눌린 나는 어물거리며 사과했다. 여기서 변명했다간 뼈도 못 추리겠다.

“미, 미안. 그렇게 심한 말인 줄 몰랐어.”

“흥… 됐어. 어차피 시현은 이 쪽 사람도 아니니까.”

세파티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됐다고 한 것치곤 너무 쌀쌀맞군…. 뭐, 저 녀석 성격에 뭘 더 바래. 이 더운 날에 좋긴 하지만 이런 종류의 냉기는 사양이다. 나는 어떻게든 말을 돌려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천사가 왜 모욕이 된다는 거야? 악마는 이해할 것 같은데.”

“그거야 당연한 얘기지. 시현이 생각하는 천사와 이 쪽에서 얘기하는 천사는 전혀 다른 존재야. 시현이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우월한 신적 존재로서의 천사겠지만, 이 세계 밖의 천사는 인간의 의식에서 태어난 정신체에 불과해. 원래 8년 전 사고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마도사들은 이 세계 밖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어.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모습을 빈 지성체는 존재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는 것이지. 비록 8년 전의 일로, 이 세계의 밖이 갖고 있는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된 마도사들은 마지못해 그 존재를 인정하긴 했지만, 완전히 그렇다는 건 아냐.”

“에에, 고작 그런 이유라면 세야가 너무 불쌍하잖아.”

“정말, 시현은 내가 한 말을 뭐로 들은 거야? 고작이란 말 하지 마! 어차피 그런 권위 따위 따지지 않더라도, 500년 전에 나타나 인간을 살육한 존재가 천사와 악마야. 그런 자들과 우릴 같은 반열에서 논하라고?”

나는 그 말이 가져온 충격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본 세파티는, 화난 눈썹을 한 채로 걸음을 늦췄다. 나는 선 채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살육?”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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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으음...
쪽팔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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