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다락위의소피아

2007.05.14 11:12

Evangelista 조회 수:3604 추천:12

extra_vars1
extra_vars2 121648-4 
extra_vars3 15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extra_vars9  


 

5. 산상항해술(山上航海術)



여기서부터 재생하세요☆ (Hybrid Rainbow - The Pillows)


 




시현의 행동은 달라진 데가 없었다. 서현은 어째서 이렇게 귀찮고 말도 안 되는 일에 휩쓸렸는지 자문해 보았으나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라피스는 내내 저기압이었다. 무슨 말이든 붙여 보려 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닥쳐.”라고 쓰여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건 힘들다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시현이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쌍둥이고 동생이니까 그 동생이 누굴 좋아하는지 정도는 (그나마도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으니)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 바보 같은 계집애가 이상한 짓을 해서다. 그나마 조용히 하려고 했는데 그걸 동네방네 퍼트리고 다녔으니 그래서야 동생 녀석이 모를 수가 없지 않은가.




사흘 정도 지났다. 여전히 라피스는 기분이 좋지 않다. 오히려 시현이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다. 집에서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시현은 시현대로 “신경 안 써.” 그렇게 짧게 대답할 뿐이었고 라피스는 라피스대로 “손톱을 다 뽑아 버릴 테다.” 하면서 이를 갈고 있다. 가운데에 낀 불쌍한 소년은 진짜로 그녀가 동생의 손톱을 다 뽑아 버리면 어쩌나 고민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거실에서 라피스가 TV를 보고 있었다. 헐렁한 반바지에 역시 헐렁한 나시 티 차림이 저절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흰 옷들은 비쳐 보일 것처럼 얇았다. 어쨌든 그래 봤자 서로 할 얘기도 없고 해서 위로 올라가려 했다.


“꼬맹이.”


잘못 들었겠거니 하고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야, 임마.”


“왜…….”


불안함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리 와서 앉아 봐.”


기역 자로 놓인 소파의 저쪽 부분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서현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 얌전히 앉았다. 반항하면 한 대 맞을 것 같기도 했거니와 사흘 만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생각해?”


“뭘?”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촉촉해진 금발을 손가락으로 꼬며 묻는 그녀에게 서현은 여전히 시선은 피한 채로 되물었다.


“뭘? 뭘까. 그래. 어떻게 생각해, 나를?”


“뜬금없이 무슨…….”


“일 수도 있고. 아니면 토키와란 놈에 대해서? 일 수도 있고.”


“뭐야. 똑바로 말해.”


“하나씩 물을게. 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녀가 웃었다. 사흘 만이지만 서현은 아마 일주일, 아니 적어도 보름 만에 다시 보는 것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좀 방정맞은 웃음이었지만.


“진지하게 대답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게 다야?”


그리고 편안한 미소와 함께 상체를 뒤로 젖혔다. 서현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순간 활짝 펼쳐진 그녀의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옷 아래의 ‘그 윤곽’도 함께 눈에 들어온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속옷 좀 입고 다니라고.”


“그래?”


라피스가 자기 가슴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예전에 지어 보였던 기분 나쁜 미소를 띄워 올렸다. 이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이 꼬맹이가.”


재빨리 다가온 라피스가 머리를 찍어 누른다. 아팠다. 하지만 어쩐지 그 손길이 부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의 경우에는 남의 얼굴에 구멍을 뚫어 버리는 그 손이었지만.


뭔가 머리를 짓누르는 손보다 더 부드러운 것이 왼쪽 팔과 가슴에 걸쳐 닿았다. 가슴이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물렁물렁하다.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코피 터트리는 건 만화에서나 많이 봤지, 어쩌면 그런 꼴사나운 장면을 지금 자신이 연출할 지도 모른다고 서현은 생각했다. - 전화벨이 울렸다. 구원받은 느낌!


“여보세요?”


얼른 그 품에서 달아나 전화를 받았다.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지민이다. 전화가 온 걸로 보아 집 앞에 있다던가 해서 또한 만화 같은 상황이 벌어질 우려는 없을 것 같았다.


다시 등에 물컹한 감촉이 와 닿았다. - 아, 정말 이 멍청한 여자는 가슴이 왜 이리 큰 거야? - 그렇게 외칠 뻔 했다.


“별 일 없어. 대충 숙제 해 놓고 자야지.”


“숙제하기 전에 좋은 거 할까?”


움찔했으나 다행히 그 목소리는 전화선을 타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 너도 잘 자고. 오늘은 피곤해서. ……시끄러. 끊어.”


서현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양쪽으로 피곤하게 하고 있어.”


“피곤해? 아가씨가 뭐라든?”


“별 거 없어.”


라피스가 재빨리 서현의 뒤꿈치를 걸어 넘어트렸다. 엉덩방아를 찧고 어깨가 땅에 닿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눈앞에 있음을 알아챘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샤워를 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했다. 분홍 빛 입술에 윤기가 돌았다.


“너 정말 엉덩이 가벼워.”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가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아? 그럴 거면 벌써 했다고. 그리고 이런 거…… 너한테 밖에 안 해. 다른 녀석들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야.”


그리고 조용히 이마에 키스했다. 서현이 조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날개가 나한테 있어서?”


라피스가 몸을 일으켜 전화기를 올려놓은 서랍장에 기대어 앉았다. 서현도 몸을 일으켜 불안정하지만 어쨌든 계단에 등을 받치고 앉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비슷한 것 같지만 아니야.”


라피스가 뻗었던 두 다리를 모아 가슴 앞에서 감싸 안았다.


“날개가 너한테 있다는 거, 날개가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텐 들어갈 리가 없었다는 거야. 민시현이 됐건 토키와 시게루가 됐건 말이야. 날개가 너한테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날개가 들어갈 사람이 너 밖에 없었기 때문이란 얘기지. 이해 돼?”


“몰라.”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이런 거 할 수 있는 사람도 너 밖에 없다는 거야.”


그녀가 또다시 서현의 어깨를 안아 왔다. 이번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그대로, 다소 얼굴을 붉힌 채로 소년은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현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다섯 시였다. 시현이 돌아왔구나. 좀 일찍 왔네. 하지만 라피스를 밀어낸다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 편하고 몽롱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지민에게 전혀 미안하다는 생각이 없다. 어차피 사귄다고 떠드는 건 그 애 뿐이고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그 이상 별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래. 남자다 보니까 그런 감상에 빠질 수도 있는 거다.


아무래도 이,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나 보다. 내일 지민이에겐 뭐라고든지 이야기하고 수습하도록 해 봐야겠다.


- 그랬는데 들어온 게 시현 뿐이 아니었다. 어두침침한 얼굴로 웃으며 선 동생의 뒤로 익숙한 얼굴의 여자 아이가 멍한 얼굴로 이 쪽을 보고 있었다. 순간 딱 속으로 외쳤다. 아. 망했다.


어째서 이 놈의 상황은 생각할 시간을 안 주는 건가?


“뭐 하는 거야, 형?”


“……누나가 남자한테 차였대.”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빵점짜리다. 저 두 사람 다 이 여자가 이세희라는 친척 누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말에 지민이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라피스는 그들을 한 번 쳐다보았을 뿐 다시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묻었다.


“그러고도 남자야?”


지민이 몇 걸음 다가와서 말했다. 뒤에 남겨진 시현은 여전히 웃고 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좋으면 아예 처음부터 못 사귀겠다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미안.”


할 말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인정한 대답이다. 민서현은 라피스를 좋아한다.


“이럴 수가 있어? 둘 다 붙잡고 어떻게 해 보려고 했던 거야?”


“미안.”


“됐어. 내일 학교에서 다 말해 버릴 거야!”


“미안. 하지만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너만 바보 되는 거라고.”


“아니. 네가 이상한 나이든 여자랑 바람났다고 퍼트릴 거란 말이야!”


거의 발악에 가깝게 소리를 쳤다. 갑자기 시현이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오른손으로 팔을 뒤로 꺾고 왼손으로 입을 막은 채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곤란해.”


라피스와 서현이 동시에 일어섰다. 그러나 그대로 선 채 시현을 노려보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서현은 곧바로 달려들어 시현의 왼손을 붙잡아 지민의 입에서 떼어냈다. 그 바람에 시현이 균형을 잃고 팔에 힘을 주었기 때문에 오른팔이 더 꺾이게 된 지민이 짧게 비명을 올렸다. 그리고 자세를 잡기 위해 그녀를 풀어 준 동생의 턱을 서현이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안경이 날아가고 비틀거리던 시현이 소파에 의지해 겨우 일어섰다.


지민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형제 사이로 끼어들어 싸움을 말리려 했을 때, 뒤에서 라피스가 붙잡았다.


“형제 싸움은 말리면 안 돼.”


잔뜩 찡그린, 눈물이 맺힌 눈으로 지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라피스의 표정은 편안했다.


“자기들끼리 풀도록 내버려두라고.”


그게 정답인지는 라피스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저 바보들이 어떻게 해서든 서로 기분을 좀 풀고 이해를 해서 결과적으론 시현이 토키와 같은 놈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아무래도 그 작자는 귀찮기도 했고 또한 서현이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사흘 전은 정말 위험했다. 서현이 들어왔기에 토키와가 순순히 손을 떼고 물러나 다행이었다. 우연이었지만 그 때 처음으로 그 꼬맹이를 이용해 먹을 대상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생각한 것 같았다. 아마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십 년이 지나 그가 청년이 된다고 해도. 하지만 날개를 가지고 있어 원 갖가지 이상한 놈들의 표적이 되는 이상 이게 마무리 될 때까지는 지켜주어야 했다. 아니,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웃었다.


날개야 저 꼬맹이가 죽기라도 하면 자연스럽게 돌아올 텐데.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니, 서현도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런 것까지 이용해 먹을 정도로 못돼먹진 않았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자기들끼리 풀 거야.”


“그러니까 그건 곤란하다니까.”


집 안에 목소리가 울렸다. 네 명 모두 이질적인 무언가를 눈치챘다. 서현과 라피스는 낭패감을 느꼈다. 그 남자가 왔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토키와 시게루가 ‘생겨났다.’ 그는 오른손 중지 손가락을 들어 선글라스를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풀어 버렸다가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지면 어쩌란 말이냐.”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를 책하는 듯한 말투였다.


“토키와라고?”


서현이 분노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어른한테 반말 쓰는 거 아니다.”


토키와 역시 화가 난 듯 되받아쳤다. 하지만 단순히 말을 낮춰서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부류들이 느끼는 ‘날개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너 때문에 라피스가 굉장히 귀찮아한다더라.”


“나도 저 언니 때문에 귀찮긴 매한가진데.”


그 때 시현이 서현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서현의 오른손이 그것을 잡아채 주인을 보호했다. 라피스가 놀랐다. 어떠한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원래 날개가 나타날 때에는 먼저 자신에게 반응이 오게 마련인데다 지금 저 오른팔은 그저 빛만 조금 내뿜고 있을 뿐 날개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미안.”


서현이 여전히 토키와를 노려본 채로 입을 떼었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그 어조에서 지민은 자신에게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널 좋아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해도.”


지민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라피스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지금 저들 사이에 끼어들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서현이 위험해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이 곳에 나타난 이후로 그가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라피스는 말했다.


“죽여 버려.”


“가능하겠냐?”


다른 감정을 싣고 서현과 토키와가 동시에 대답했다. 손아귀에서 주먹을 겨우 빼낸 시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한 판 붙지.”


토키와가 넥타이를 조금 풀어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었다. 그다지 싸우는 법에 대해 자신이 없는 서현은 어느 영화에선가 본 듯한 자세를 취하는 상대에 대해 그저 오른팔을 들 뿐이었다. 그리고 토키와가 웃었다.


“먼저 와라.”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말했다. 명백한 도발, 그런데도 서현은 신중했다. 하지만 라피스의 시선을 느끼자 소년다운 치기가 발동했다. 그는 앞으로 달렸다. 순간 토키와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소형 리볼버가 들려 있었다. 곧 총성이 울렸다. 지민의 비명과 함께. 총탄은 정확히 서현의 오른쪽 어깨를 뚫고 들어갔다. 신음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다. 재차 겨누는 토키와에게 재빨리 다가간 라피스가 다리를 내질렀다. 그는 간발의 차이로 피해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난 그런 거 맞아도 안 죽는 거 알지?”


서현 앞을 막아서며 그녀가 말했다.


“빠르긴…….”


토키와가 권총을 든 손을 한 번 흔들었다. 흉기는 허공으로 흩어 사라졌다.


“애 상대로 비겁하게 뭐 하는 짓이야?”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 자체가 유아적 발상 아냐? 그리고 냉정하게 말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제일 비겁한 건 너잖아. 그나저나 그 소년, 마음에 들었나 보군. 총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어차피 안 쏠 거였어. 그래도 만약을 생각한 거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냉정한 라피스가. 하지만 안 되겠다. 난 이 자리에서 널 해치울 거니까. 이제 좀 사라져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토키와가 바닥을 박찼다. 궤적이 아치를 그리면서 그의 주먹이 라피스를 향했다. 대미지는 꽤 있겠지만 어쨌든 튕겨내기 위해 라피스가 양팔을 위로 올렸다. 그 때 무언가 자신의 허리를 휘감는 것을 느꼈다. 출혈로 반쯤 정신이 나간 서현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을 왼팔로 지탱하고 있었다.


빛이 그들을 감쌌다. 토키와가 공중에서 멈췄다. 그리고 바닥에 착지한 뒤 엄청난 속도로 뒤로 물러났다. 지민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시현이 달려가 어두운 색 교복 상의로 얼굴을 가려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서현이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고여 있던 피가 깨끗이 사라졌다. 어깨의 상처에서도 더 이상 출혈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 형제들보다 키가 더 작아진 라피스가 멍하니 서 있었다. 어려졌다. 동년배로 보였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살펴보더니 외쳤다.


“그래, 이게 움직이기 더 편해!”


자포자기한 것 같다.


“너 도대체 뭐야?”


토키와가 일어서며 물었다.


“뭐 어떻게 됐는지는 알겠지만 대답 안 해. 어쨌든 날개가 돌아왔다!”


그녀의 등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상의를 찢으며.


“앗, 젠장.”


투덜거리는 라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현이 눈을 떴다. 날개 하나가 라피스의 오른쪽 등에서 뻗어 나와 있었다. 옷이 찢어져 있다. 그래도 다행히 흘러내리지는 않고 있어 안심이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가 굉장히 작아 보였다. 그리고 저 쪽에서 아까보다 커진 듯한 토키와가 한숨을 쉰다.


“완전히 반칙이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어. 그것 봐라. 비겁한 건 너라니까.”


그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민시현 군. 상황이 안 좋아져서 먼저 가야겠다. 다음엔 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돼서 돌아오마.”


목소리만이 남았다.




지민은 소파에 쪼그려 앉아 있다.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현은 상처가 나았다고는 해도 아까 흘린 피 때문에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 방에 올라가 잠이 들어 버렸다. 좀 더 옷을 단정히 갈아입은 라피스가 옆에서 간호하고 있는 듯 하다. 옷은…… 아무래도 환자가 ‘추가 출혈’을 해 버리면 곤란하니까 그런 거겠지.


시현이 커피를 끓여 왔다.


“커피 마실 줄 알아?”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민에게 커피잔을 내밀었다.


“인스턴트라서 그냥 그렇겠지만 마셔.”


그리고 커피를 호호 불어 조금씩 마시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미안.”


“형제가 쌍으로…… 못됐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남들한테 말하지 말아 줘. 이쪽은 장난이 아니니까.”


대답이 없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아까 그 사람 봤지? 우리 같은 편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잔인한 사람이야. 너한테도 쏠 지 몰라, 그 총.”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약속한 걸로 알게.”


현관 앞에서 지민은 멈춰 섰다. 그리고 이 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할게.”


한숨을 쉬고 말을 골랐다.


“너…… 몰랐겠지만 나 네가 좋았어. 지금도.”


“알고 있었어.”


소녀는 다시 현관 바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도 미안해.”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서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시현은 혼자 거실에 남아 소파에 누웠다. 생각 없이.





그 즈음 라피스는 간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거울에 비친 자기 눈이 녹색이 된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몸이 작아진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이 눈은 뭐란 말인가?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39 Cercatori [18] file Evangelista 2006.12.11 98059
338 사은(詐隱)고교 사건모음집 [4] file 솔비 2007.01.19 4473
337 어느 프랑스인의 전말 [1] Evangelista 2007.05.13 3742
336 어느 프랑스인의 전말 [3] Evangelista 2007.05.13 3650
335 어느 프랑스인의 전말 [2] Evangelista 2007.05.13 3623
» 다락위의소피아 [9] file Evangelista 2007.05.14 3604
333 다락위의소피아 [19] file Evangelista 2007.04.30 3485
332 Cercatori [35] file Evangelista 2006.12.28 3459
331 다락위의소피아 [26] file Evangelista 2007.04.29 3440
330 *Fate / Battle Royal* [3] file ◈ÐÆЯΚ◈찰드 2008.05.18 3317
329 Ab Cæsar 893 : Der Blaue Löbe [12] file Evangelista 2006.12.22 3250
328 바하카프 7회 [6] file 영원전설 2006.12.31 3205
327 다락위의소피아 [17] file Evangelista 2007.05.01 3162
326 나르실리온 [10] file 솔비 2007.01.05 3042
325 *Fate / Battle Royal* [3] file ◈ÐÆЯΚ◈찰드 2008.05.06 3032
324 Cercatori; Paris [9] file Evangelista 2006.12.17 2965
323 바하카프 4회 [2] file 영원전설 2006.11.14 2821
322 나르실리온 [8] file 솔비 2007.01.18 2812
321 Ab Cæsar 893 [5] file Evangelista 2007.02.12 2803
320 나르실리온 [13] file 솔비 2007.01.11 27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