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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어느 프랑스인의 전말

2007.05.13 09:13

Evangelista 조회 수:3650 추천:5

extra_vars1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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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 분노한다Je suis fâché1)




미스터 필레아스 포그와 무슈 쥘 베른에게.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게2) 딱 여기에 있구나. 필레아스 포그, 너는 그래도 조금은 신사인 줄 알았다. 최소한 나를 대할 때에는. 그런데 역시 극악한 부르조아지였어. 누구한테도 올바르지 않다고. 네가 어떤 녀석인지 이 지면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 주마.


쥘 베른은 그 저질스런 소설에서 필레아스 포그를 신비스러운 부자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실 버밍엄과 맨체스터에 공장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악질 공장주다. 직공들은 실을 뽑아내느라 지문이 없어질 판이지. 제철소는 대호황이야. 얼마 전엔 굴뚝을 청소하다 떨어져 죽은 소년을 내가 치운 적도 있어. 기분 나쁘니까 얼른 치우라고 하더군. 여러분은 정말 필레아스 포그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기 돈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나? 돈은 쓰면 없어지는 거다. 일만 이천오백구십육 파운드하고도 삼 실링을 나올 것 없는 멍청한 여행에 날리고도, 그리고(결국 이겼지만) 내기에 진 것으로 알고도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어차피 돈은 뒀다 썩힐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쓰레기 소설에서 언급된 베어링 형제 은행의 이만 파운드 저축은 빙산의 일각이지. 픽스 형사는(쥘 베른이 써갈긴 허접한 글을 보니 픽스 당신도 한패렷다) 수에즈에서 런던에 전보를 칠 때 은행 절도범이라고 해선 안 되었어. 필레아스 포그의 죄상은 역사에 역행하는 반동죄라고.


여행이 끝나고 명예를 얻고 예쁜 마누라까지 낚았으니 아주 기분이 하늘을 날아다니겠지? 확실히 당신 첫 부인이기는 해. 하지만 나는 알고 독자들은 모르는 사실을 하나 더 알려주겠어. 자. 당신 애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건가? 버밍엄의 제철소에서 식사를 나르던 마리 휴즈Marie Hughes라는 소녀 기억하지? 땀 냄새가 나고 씻지 못해서 얼굴에서 콧기름 냄새가 났지만 동그란 푸른 눈이 참 귀여웠어. 열일곱이었을 거야. 살아 있다면 열일곱이고 죽었지만 열일곱이지. 걔는 임신해서 세 달 전에 목을 맸어3). 끝까지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얘길 않은 모양이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당신은 그 애한테 고마워해야 해.


그러고 보니 작년 말에 내가「타임즈」에 글을 투고했을 때 맨체스터의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어떤 소녀가 날 찾아왔어. 물론 난 그 앨 알고 있었지. 그 애는 삼 년이나 전부터 당신의 애인이었으니까. 쥘 베른을 공격하는 건 당신을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충고하더군. 당신도 그 앨 알 거야. 하지만 누구인지 말해줄 순 없어. 그랬다간 그 애, 분명히 당신한테 뭘 당해도 크게 당할 테니까.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해. 당신이나 쥘 베른, 피에르 쥘 에첼 같은 부르조아지들에게 휘둘려선 안 된다고. 젠장맞을. 홍콩에서 배탈이 나서 늦었다고 날 버리고 갈 때 알아봤어야 했어. 그것도 아니면 아우다, 아니 포그 부인을 구하자고 내가 주장했을 때 이만 파운드를 중얼거리면서 출발하고 싶어 하던 당신을 그 바라문들한테 던져 버렸어야 했어. 아니지. 애초에 부르조아지적 소일거리로 80일만에 세계를 돈다는 둥 헛소릴 지껄일 때 일거릴 놓고 나왔어야지. 차라리 베르사유 정권하고 같이 코뮤니스트들을 학살하는 게 더 생산적이었겠다4). 최소한 네 밑에서 일할 바에는 말이야.


난 지금 예의 그 여자애와 함께 잉글랜드 어딘가에 숨어 있다. 찾을 테면 한 번 찾아보라고.


 


 


5. 장 파스파르투의 정체D'identité de Jean Passpartout,「Le Temps」, 1874. 2, 파리5)




작년 말 존경할 만한 형제6) 무슈 필레아스 포그의 수치스러운 하인 장 파스파르투가 런던의「타임즈」지에 그다운 저열한 글을 투고한 것을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소르본에서 철학을 공부했다는 그는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를 공부한 것이 아니다. 나의 독자적인 조사에 의하면 그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이론은 바로 유물론이었다. 이 지면을 빌어 잠시간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무뢰한 장 파스파르투의 정체를 상세히 밝히고 우리가 다시는 그러한 속임수에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하도록 하자.


장 파스파르투는 1840년 7월 17일 파리 북동쪽의 공업도시 생 캉탱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장 노동자의 아들이었으며 천성이 비열하고 이유도 없이 가진 자들을 증오했다. 그의 논리는 오로지 반박을 하고 남을 공격하기 위한 논리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아카데미아가 아닌 생 캉탱의 빈민굴에서 그는 반항적인 젊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대로 자랐다면 그 역시도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날리는 실밥 속에서 일을 할 운명이었다.


그의 역사를 바꾼 것은 한 권의 논설이었다. 그렇다. 우리들이 비난해 마지않는, 어떠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으로 보아도 옳음이 없으며 외치는 것이라고는 투쟁뿐인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바로 그것이었다! 반항하기 좋아하는 젊은이는 마르크스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반사회적 의식을 싹틔워갔으며 하루가 달리 범죄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만 끝났다면 우리는 그를 다소 어리석은 젊은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사회의 종양이라고까지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1871년 3월 18일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정부를 전복시키고 전 프랑스를 악마의 소굴로 만든 파리 코뮌에 참가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형제 무슈 픽스가 자세히 조사해 주었다. 파리 시민들이라면 모두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오로지 투쟁만을 위해 살고 투쟁만을 위해 전진하는 공산주의라는 망령이 파리 시내를 배회하고 있었음을7). 무슨 일이 있었던가? 싸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그들에 의해 단 1주일 동안 3만여 파리 시민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장 파스파르투는 네오자코뱅8)의 무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사실은 자명해진다. 그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파괴자인 것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미국인이 인디언에게 약탈당하는 현실을 부정하며 자신의 재산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형제 무슈 포그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에겐 모든 현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후퇴할 것인가이다.


포그 형제가 그를 해고하고 자기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한 것은 매우 현명한 행동이었다. 만일 그대로 갔었다면 아마 지금쯤 포그 형제는 살해당해 템즈 강의 수면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을 테니까. 그를 증오하는 (그들이 왜 증오하는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파스파르투와 노동자 패거리에 의해서. 한 마디로 그들에 대한 최선의 대답은 ‘잊혀지는 것’이다. 더 이상 기억되어서 하등 도움이 될 것이 없는 작자들 말이다.


 


 


6. 용기있는 장 파스파르투에게To Jean Passpartout he courageous,「Times」, 1874. 3. 런9)




최근「르 땅」에 실린 쥘 베른의 글을 보았네. 자네가 실망할 필요는 없어. 자네의 신세계를 갈구하는 그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네. 확실히 아직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단결할 날은 요원하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은 길게는 수세기, 짧게는 수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는 것일세. 아무도 이 시대의 요구를 가로막을 수는 없어. 필연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들이 될 것일세.


내가 최근 말한 적이 있긴 하지만 다시 한번 강하게 말하자면 파리 코뮌은 바람직한,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완수하기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이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국가의 한 형태일세10). 부르조아지들이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건 자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네. 근시안적 시각을 가진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잉여 가치의 법칙 하에 돌아가고 있지. 그 사이에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설 공간은 없네. 그것은 자신들의,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에 의한 세계 지배 체제란 말이네. 그에 따라서 세상은 오로지 역행만을 계속할 뿐이야. 즉 시대에 대한 반동 의식일세. 아주 파렴치한 사고방식이지.


자네가 우리의 운동에 관심이 있다면 뉴욕으로 가게. 제 1인터내셔널11)은 아직은 신뢰할 수 있는 괜찮은 단체일세. 또한 부르조아지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자네를 보호해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목숨을 소중히 하게! 계속해서 단신으로 그들과 부딪쳐 봐야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으니까. 지나친 용기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네. 지금은 (애석한 일이긴 하나) 코뮌의 실패로 프롤레타리아트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어. 자네 같은 훌륭한 생각을 가진 동지를 잃는 것은 우리로서도 큰 손실일세. 다시 한번 말하겠네. 더 이상 의미 없이 그들과 맞서지 말게.




이 글을 보고 있는 내 친구 엥겔스12)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네. 이번엔 돈 달라는 얘기가 아니니 걱정 말게. 아니, 나한테 돈을 달라는 얘기는 아니지. 파스파르투를 찾아서 그를 원조해 줄 수 없겠나?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노자를 마련해 주게.




……여기까지 썼으니 위의 내용을 지우기도 좀 뭐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이 글은 그냥 신문에 싣기로 하겠네. 엥겔스 자네뿐만이 아니라 런던, 영국, 아니 유럽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겠네.


지금 전해들은 사실일세. 장 파스파르투가 살해당했네.


용의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땅히 심증이 가는 유력한 용의자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은 비단 파스파르투 한 사람이 피살된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 위협을 받고 있다. 포그와 베른 패거리에 의해 살해된 파스파르투는 즉, 자본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의해 압사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일맥상통한다.


……파스파르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는 없다. 나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외치겠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여, 단결하라!


 


 


7. P.포그로부터 K.H.마르크스에게.To K.H.Marx from P.Fogg,「Times」, 1874. 3. 런던13)




나는 원래 이런 진흙탕 싸움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오. 하지만 분명히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씨가 지난번 「타임즈」에 올린 글은 나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고 나는 이에 따라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소.


우선 장 파스파르투라는 사내가 원래 나의 하인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사실이오. 그것은 전 세계의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며 이제 와서 부정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일 테요. 실제로 그는 나의 80일간의 여행과 그 후 약 1년간의 하인 일을 성실하게 잘 해내었소. 그러나 약 삼 개월 전에 그를 해고한 것은 그가 하인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오. 이 정도 얘기했으면 당신은 물론 고대의 하이랜더14)들도 알아들었으리라고 믿소. 그가 거짓말을 섞어 가면서 주인인 나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은 제 2의 스카팽15)이 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심각하게 비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소.


내가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씨에게 여쭙고 싶은 말씀은, 비록 마르크스 씨가 자본에 의한 전체적 부의 상승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못하긴 하나 기본적인 윤리 의식을 따져 보건대 어째서 그러한 파렴치한 하인 따위를 두둔하느냐, 바로 그것이외다. 아무리 우리 시민 계급을 부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경제학의 문제이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본래의 품성과는 별 관련이 없는 얘기일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부르조아지가 되었건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었건 모드레드16)를 보고 다 함께 분노할 수 있는 것이오. 아마 몇 백 년이 지나면 모드레드의 위치가 파스파르투로 대체되지 않겠소? 주인을 배신하고 상처입히려 한 자로서 말이오.


그런데 마르크스 씨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와 베른 형제 등을 살인자로 지목했소. 이것은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우리는 여왕과 법률이 우리를 수호하는 한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가 없소. 마르크스 씨의 그 주장은 우리를 거대한 바위에 비유하여 마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들을 죽이려 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그랬다가 가장 손해 보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외다. 공장을 돌릴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가들도 끝이란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 씨의 주장인 ‘자본가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몰살시키려 한다.’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인신공격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내뱉은 프롤레타리아트들을 선동하는 그 한 마디를 위해 억지로 끄집어 낸 다분히 부자연스러운 주장이었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나 내 주위의 어느 누구도 파스파르투를 죽이지 않았소. 나는 해고된 후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 들은 적도 없소이다. 설령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가 어디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서야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겠소? 신문에 나기 전까진 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커녕 그가 뭘 하고 있는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오.


마르크스 씨는 앞서 신문에서 나와 자본가들을 비방한 글을 취소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와 뜻을 모아 당신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겠소.


 


 


8. 흑사병La peste17)




파스파르투는 이미 계단을 다 올라와 있었다. 넓고 싸늘한 런던의 하늘이 집들 위에서 반짝이고, 언덕 기슭에는 별들이 마치 부싯돌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이 밤은 파스파르투가 나폴레옹 3세와 그 끔찍한 정치를 잊기 위해 파리의 어느 테라스 위에 올라갔던 그날 밤과 별로 다른 게 없었다. 다만 그 날은 코뮌의 성공을 위해 환호했다면 오늘의 환호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블랙 컨트리18)에서 불어오는 매연 때문에 하늘이 더욱 검었다. 공기는 미지근한 런던만의 바람이 실어오던 찝찔한 맛이 없어지고, 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 동안에도 시내에서 들려오는 아우성 소리가, 여전히 물결과 같은 소리가 되어 테라스 밑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파스파르투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밤은 해방의 밤이 아닌 반항의 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반동의 밤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어두운 도시에서 공식적인 축하의 첫 불꽃이 올랐다. 온 시는 길고도 조용한 환호로서 이에 답했다. 파스파르투도, 마르크스도, 포그가 잠시 사랑했으나 잊어버린 여자들도, 죽은 자도, 죄를 범한 자도 모두 잊혀지고 있었다. 베른이 말한 그대로이다 - 사람들은 변함없이 똑같았다. 그것이 그들의 강점이며, 그들의 허물없는 점이며,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뇌를 초월해서 파스파르투는 자기 자신이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갖가지 빛깔의 붗꽃이 점점 많이 하늘로 떠오름에 따라 그 강도와 길이는 더욱 늘어나고, 테라스의 바로 밑에까지 길게 울려오는 함성 속에서, 도망자 파스파르투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글로 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이 기록이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기록은 다만 공포와 악착같은 ‘무기’에 대해 수행했어야 했던 일, 그리고 아마도 모든 사람들 - 프롤레타리아트일 수도 없고, 마르크스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도 역시 어떠한 사상가가 되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 개개인의 분열증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수행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이 될 수는 있으리라.


사실 시내에서 들려오는 희열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면서, 파스파르투는 이 희열이 항상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환희하는 군중들이 정말로 모르고 있다고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좀먹고 있는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는 일이 없으며 언제든지 가진 자들의 욕망에 의해 발현하여, 어느 때인가는 인간에게 다시 한번 ‘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 또다시 공장의 멀리에서 자신의 그 공장을 바라보는 ‘쥐’들을 흔들어 깨워, 어느 평화로운 마을로 그것들을 보내 거기서 새로운 공장을 짓게 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말이다. 다만 정말로 모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째서 행동을 하지 않는가? 결국 파스파르투는 절망했다. 맨체스터에서 온 제인 애쉬턴Jane Ashton이라는 소녀가 그를 부축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물론 그 근처에 사는 사람 누구도 그날 밤 함성과 환호를 듣지 못했다. 들은 사람은 오로지 파스파르투 뿐이었다.


 


 


9. 심판Der prozess19)




밤 9시경, 거리가 고요할 때에 두 명의 사내가 파스파르투의 거처로 찾아왔다. 프록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창백하고 몸은 뚱뚱하며, 머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실크해트를 쓰고 있었다.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이므로, 현관에서 잠시 옷차림을 고치더니 인사 비슷한 말을 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두 사람이 파스파르투의 방에 들어올 때도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뜻밖의 손님이었으나, 파스파르투는 두 사람과 꼭 같은 새까만 옷을 입고, 입구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손가락에 꼭 맞는 장갑을 천천히 끼고 있었다. 파스파르투는 서서히 일어나면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셋은 집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명령만 받고 있을 뿐, 일의 분담은 정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침착한 태도로 다음에 해야 할 일의 담당을 상의한 후, 한 사람이 파스파르투 옆으로 와서 조끼 저고리를 벗기고, 속옷까지 벗겨 버렸다. 파스파르투는 순간적으로 놀라고 추워서 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그는 기운 차리라고 격려라도 하는 양 파스파르투의 등을 한 번 툭 쳤다. 그러고 나서 그는 파스파르투의 옷을 차곡차곡 개켜 놓았다. 나중에 이것은 쓸 데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파스파르투의 팔을 붙잡고 부근을 잠시 걸어 보았다. 가만히 앉아서 차가운 밤바람을 쐬면 감기 들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 다른 사람은 채석장의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것이 발견되자 전자는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파스파르투의 팔을 쥐고 있던 전자는 파스파르투를 끌고 그 쪽으로 갔다. 채석장의 절벽 바로 아래였는데 그곳에는 쪼개진 돌이 뒹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파스파르투를 땅 위에 있는 그 돌에 등을 대게 하고 반듯이 뉘었다. 두 사람은 이리저리 연구를 거듭하고 파스파르투도 그들의 행동에 협조를 해 보았으나 참으로 무리한 자세였다.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기라고 큰소리를 했으나 아무래도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바라던 자세로 만들 수 있게 되기는 했으나, 이것은 결코 편한 자세는 아니었다. 이어서 다른 사람이 프록코트 자락을 젖히고 조끼 둘레에 띠었던 혁대에 매달린 칼집에서 정육점에서 쓰는 길고 얄팍한 칼을 꺼내어 이마 앞으로 쳐들고 달빛으로 칼날을 살펴보았다. 다시 또 흉측한 목소리로 저희들끼리 뭐라고 말을 교환하더니 칼을 건너편 사람 쪽으로 건네 주었다. 그러나 곧 그 칼은 파스파르투의 알몸뚱이 위를 두 번째로 넘어 처음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칼이 머리 위에서 오고갈 때 그것을 빼앗아 스스로 자기 가슴을 찔러 버리는 것이 오히려 그의 의무가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차마 그렇게 하지는 않고 아직 자유스러운 목을 좌우로 움직여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의 눈길은 채석장과 이어진 위치에 있는 건물의 맨 위쪽에 닿았다. 갑자기 등불이 하나 켜졌다. 그와 동시에 덧문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사람 모습이 하나 나타났다. 멀기도 하고 높은 위치였기 때문에 그 사람은 몹시 야위어 보였다. 다음 순간 그 사람은 앞으로 몸을 내미는 듯하더니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파스파르투는 두 팔을 내밀고 두 손의 모든 손가락을 활짝 폈다. 그러나 파스파르투의 목에는 한 사람이 두 손을 올려놓고 다른 또 한 사람은 칼로 파스파르투의 심장을 찔러 두 번 도려 냈다. 눈이 가물가물거렸으나, 얼굴을 맞댄 두 사람이 파스파르투의 머리 바로 옆에서 최후를 지켜 보고 있는 모습은 그래도 알 수 있었다.


“개처럼 죽는다!” 파르파르투가 말했다. 비록 육체는 죽었지만 굴욕만이 살아남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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