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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다락위의소피아

2007.04.30 10:34

Evangelista 조회 수:3485 추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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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석기제철사




학교는 여전히 멍청하게 굴러가고 있다. 완벽하게 꾸며낸 모습으로 서현은 좋은 평판이다. 언제나 전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놈이 난 척도 하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서 나가지는 않지만 점심 때 축구라도 하자고 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중학생이 점심시간에 어떤 특별한 일이 있겠는가) 같이 어울렸다. 게다가 모두 하고 싶지 않다는 수비수를 자청해서 하는데다가 간혹 터져 주는 오버래핑은 성공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구경하고 있는 여학생들은 난리가 난다. 일반적으로 그 애들에게는, 사실 심심풀이 수준의 이런 축구에 어떤 전술이 있겠냐마는 - 전술이고 어떤 패스가 어느 루트를 타고 멋지게 빠져나갔는지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골. 누가 골을 넣었는가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의미에선 축구를 조금 볼 줄 아는 여자애들이 아니고서야 그녀들의 관심을 골을 넣는 자신들에게 돌려주니 친구들로서는 또한 서현에게 고마운 것이다. 말하자면 인기의 재분배라는 개념이겠지.


“정말 재미없는 인간이야. 그치?”


그늘진 벤치에 앉아서 축구하는 양을 쳐다보던 소년이 옆에 앉은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아무 반응이 없다.


“더 재미없어졌다고. 외사촌 누나가 왔거든. 당분간 있을 거 같아. 그 뒤론 맨날 둘이 붙어 다녀. 집에 있으면 나 혼자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니까.”


“친구랑 놀아.”


소녀가 쌀쌀맞게 말했다. 소년이 조금 얼굴을 붉히는 것 같았다.


“달리 형이랑 놀고 싶은 건 아니야.”


“콤플렉스야? 형보다 공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라서. 획수도 하나 적지?”


“획수?”


울컥 화내려던 그는 문득 궁금한 듯 되물었다.


“시 자랑 서 자 차이잖아. 한 개 모자라다고.”


이번엔 머리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화를 내지 못했다. 그냥 좀 전에 화낼 걸 후회하는 시현이었다.


“그런데 진짜 왜 아들 이름을 이렇게 지었나 몰라.”


“맞아.”


소녀가 맞장구를 쳤다.


“부를 땐 몰라도 쓸 땐 헷갈린다니까. 너랑.”


“야, 하지민!”


일어나서 저편으로 걸어가는 여학생에게 시현은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다. 벤치에 기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무에 가려 파란색은 보이지 않았다. 온통 초록빛뿐이다. 나뭇잎 사이로 흰 햇빛이 쏘여 내려왔다.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그것은 자기 이마를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대로 꿰뚫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연애하냐?”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자 입에 담배를 문 여자가 서 있었다.


“아. 누나.”


“뻥치지 마. 내가 왜 네 누나야. 안 넘어간 거 다 알아.”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그녀에게 시선을 둔 채 앉아 있을 뿐이다. 라피스가 며칠 전 서현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나 여전히 빤히 바라보는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재미있다는 듯 그녀가 웃었다.


“쌍둥이가 말야. 비슷하면서도 다르거든.”


“뭐 하는 사람이에요, 당신?”


“걔는 나한테 절대 존댓말 안 쓰거든. 게다가 내가 얼굴만 들이대면 두근두근해서.”


“대답하기 싫으면 관둬요. 쓸데없는 짓만 하지 말아요.”


“쓸데없는 짓?”


시현이 일어났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교사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뭐 우리 가족 등쳐먹으려 한다던가.”


라피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소년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즐거워 보였다. 꼭 뭔가 찾았다는 듯 말이다.




여기서부터 재생하세요☆ (Sleepy Head - The Pillows)


 


벤치에 앉았다. 사람이 계속 앉아 있었기에 그런지 체온이 좀 느껴져 더웠다. 옆으로 옮겨 앉으니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담배를 털어 끄고 꽁초를 아무 데나 휙 던지려니까 앞쪽에 아까 보았던 여자애를 달고 서현이 걸어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여기서?”


다시 한 번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뭐 하는 뭐냐고 묻는 건 형제가 똑같아.”


“그게 어쨌다고?”


“언니가 외사촌 누나예요?”


여학생이 물었다.


“아가씨가 하지민이에요?”


적의가 담긴 말투를 흉내 내어 라피스가 되물었다. 도리어 공격을 당한 소녀는 조금 분한 것 같았다. 그 전에, 어째서 (뻥이긴 하지만) 사촌 형제를 질투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라피스는 생각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친한 척 구는 게 더 떨어질 게 많을 텐데. 갑자기 장난기가 일었다.


“이봐, 동생. 젊은 남녀가 그렇게 팔꿈치 가슴에 붙이고 다니면 큰일 난다.”


“어차피 떼어 내도 안 떨어져. 내 잘못 아니라고.”


“하지만.”


소녀의 표정이 딱 굳었다. 하지만 예리한 듯 하면서도 둔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소년은 그 다음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리며 오른 눈썹을 찌푸린 채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한 이삼십 초는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말을 해.”


“난 저 아가씨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순간적으로 서현이 지민을 돌아보았다. 뭔가 막 외치기 직전이었다. 괜히 큰 소리가 나서 좋을 것이 없다고 그 짧은 시간에 그는 생각했다. 일단 1차로 이 귀찮은 여학생의 외침을 잠재우기 위해 붙잡힌 왼팔을 흔들어서 주의를 분산시키고 2차로 오른발을 앞으로 거세게 내딛어 딸려오는 그녀를 균형 잃게 했으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급히 말했다.


“유치한 장난 치지 마.”


“아. 너무한다.”


“뭐가 너무해. 처음 보는 사이에 왜 놀리는 거야?”


“그 말 나한테 하는 거냐?”


“너 말고 누가 있냐.”


“이래도 되는 거야,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처음 의도와는 달리 점점 사람들이 이 쪽을 쳐다보게 되었다는 것은 서현으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지민은 또 그녀대로 자신을 감싸주는 저 기사도적인 행동에 (실제로 거기까지 생각하고 서현이 움직였을 리가 없으나) 푹 빠져 눈을 반짝대며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바로 다음의 라피스의 대답으로 산산조각나고 말았지만.


“한 침대에서 자는 사이잖아.”


“뻥 치지 마!”


“같이 잤어?”


“내가 미쳤냐?”


아마 이 즈음부터 그녀는 자신을 어느 드라마 주인공 정도로 착각하게 된 것 같다. 이 나이의 소녀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탓하지 말도록 하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 나중에 청년 민서현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든 한 남자 중학생과 어디서 떨어졌는지도 모르는 여자가 꽃다운 여중생을 울려 달아나게 한 것은 사실이다.


“너 때문에 우는 거잖아!”


“귀찮은 거 떨쳐내서 좋은 거 아냐?”


라피스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다. 늘 보는 거지만 정말 때리고 싶다고 서현은 생각했다.


“나 무슨 소릴 들을지도 생각 좀 해라!”


“내가 왜 그런 걸 생각해야 돼? 난 찾을 것만 찾으면 된다고. 마침 단서가 있거든. 이 학교 어디에 반가운 기색이 있어서 온 것 뿐이야. 그거 말곤 너한테 신경 쓸 거 하나도 없지롱.”


갑자기 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깜짝 놀란 서현이 고개를 돌리니 여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객관적으로 보아 그에게 반한 일군의 소녀들이 자신들의 사랑의 - 동경의, 욕망의? 하여간 그런 대상이 어른 여자랑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분노 - 혹은 부럽다던가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라던가 그 정도의 감정을 마구 폭발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야말로 정말 곤란했다. 빨리 자리를 뜨지 않으면 상상하기도 싫은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리라고 영특한 그의 두뇌는 대답했다. 거칠게 간다는 말을 내뱉고서 소년은 교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학교 끝나고 데리러 올 테니까.”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도망치면 죽는다.”


“진짜 간다.”


“얼굴에 구멍날 거야.”


요전 강변에서 악만지 뭐시긴지의 면상을 시원하게 뚫어버리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무서웠다. 요즈음 자신이 생각하던 자신의 이미지가 여지없이 박살나고 있다고 느꼈다. 이건 뭐, 해결책이 없다. 완전히 불가항력이었다. 웬만하면 기다려야겠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터덜터덜 교사로 들어가는 그를 교실에서 내려다보며 동생은 중얼거렸다. 아마 바보 같다는 등의 말을 한 것 같다.




수업이 끝나니 시현이 만나러 왔다. 생각해 놓았던 대로 ‘세희 누나’와 들를 데가 있다고 서현은 대답했다. 의뭉스럽기는 동생 쪽도 마찬가지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클 활동을 하러 가겠다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걸 보면서 형 쪽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대체 저 녀석은 신문부 같은 걸 무슨 재미로 하는 걸까에 대해서 말이다.


현관 쪽 계단으로 내려오다 보니 라피스가 기다리다 수학 선생과 다투고 있었다. 서현은 수학 선생이 싫었다. 그게 아니라 수학 자체가 싫었다. 제일 자신 없는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럼에도 늘 최소 팔십 점 밑으론 내려가 본 적이 없으니 (게다가 평균은 구십 점이 우습게 넘어가니) 어디 가서 그런 소릴 했다가는 두들겨 맞고 다신 일어서지 못할 것이었으나 그런 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능력이 특화되어 있는 그는 절대 수학 성적에 관한 걸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여하간 그들은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신성한 배움의 터에 뛰어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긴 중학생들한텐 어깨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저 옷조차 자극이 심할 것이다. 수학 선생의 말도 옳긴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주위 다른 학생들한테는 노처녀인 수학 선생이 젊고 예쁜 여자에게 질투 내지 히스테리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 것 외엔 없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서현은 과연 지금 라피스에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수학 선생은 싫다. 하지만 수학 점수가 좋기 때문에 이 아주머니인지 처녀인지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과목에 비해 점수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수학적 인재는 아니라고 판단하는지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지금 라피스를 데리고 가면 오늘은 저 선생 보는 건 끝이다. 하지만 여기 계속 서 있게 된다면 저 짜증나는 흑판 긁는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한다. 그럼 역시 빨리 가야 하나? 하지만 라피스가 곤란해 하는 꼴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결론은 정말로 근거가 희박한데도 그 쪽으로 났다.


그 직후 라피스가 벽을 걷어찼다! 그리고 뭐라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서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주위에서 구경하는 학생들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수학 선생에게만 들린 그 목소리는 곧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교무실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아. 야, 민서현! 빨리 안 내려와!”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후회했다. 구경하기로 한 것을 후회한 것이 아니다. 고민하느라 잡아먹은 시간에 빨리 저 비상식적인 여자를 여기서 치워버리지 않은 것을 그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날이 어둑해졌다. 그 동안 그들은 기술실에 숨어 있었다. 책상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자니 다리가 저려왔다. 여기저기 공구가 보였다. 아무래도 연장을 써서 뭘 만드는 건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도 남자냐고 라피스가 핀잔을 주었다. 군대 갔다 오면 다 하게 될 거라고 무책임한 대답을 했다. 군대 갔다 온 남자와 군대 얘기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주제에.


“왜 여기 틀어박히는 거야?”


“여기야, 여기. 그런데 사람 많으면 안 나타난다고.”


“사람 없으면 그게 나오잖아?”


“그거라니?”


대답을 머뭇거렸다. 악마라고 대답하면 대립되는 라피스라는 존재가 더욱 천사 따위로 부각될 것 같아서였다.


“아, 그거. 다 생각이 있지. 그리고 나 못 믿어? 한 방이야, 그런 거.”


“어련하시겠어.”


손목시계가 오후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집에 늦는다고 전화를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 이제 슬슬 도망칠까 하다가 이 여자의 팔이 관통해 들어간 ‘그거’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고 포기했다.


“그런데 너, 그 여자애 어떻게 생각해?”


“무슨 여자애?”


“하지만”


“하지민이야. 그런 거 물어서 어쩌자고?”


“그렇게 좋다 하는데.”


“특히 귀찮아.”


라피스의 입꼬리가 (서현에게는) 불길하게 씨익 올라갔다.


“안 싫은 거지?”


“……싫어.”


“거짓말. 좋은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싫지도 않을 텐데?”


“이상한 거 묻지 마.”


“은근히 자만하고 있는 거 아냐? 사람들이 너 좋아한다고.”


맨살이 드러난 팔이 어깨를 휘감고 들어왔다. 샴푸 냄새인지 향수인지 좋은 냄새가 났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뺨에 안경테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냉정한 척 하지 마. 절대 도움 안 돼, 꼬맹이 주제에.”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 순간 선반 위에 있던 몇 개 못이 굴러 떨어지며 작은 파찰음을 냈다. 서현이 화들짝 놀라는 가운데 라피스가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머뭇거리면서도 서현은 따라 나갔다. 문득 기술실만 다른 공간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 방만 허공에 떠 있는 듯 밸런스가 맞지 않는 좌우, 아니 불안정한 중력.


“왔다!”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는 소리쳤다. 그 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그러고 있었는데 라피스가 소리를 지른 것인지, 여하간 공구들이 허공에 떠서 뭉치기 시작했다. 공구만이 아니었다. 방 안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한데 모여 사람의 형체로 바뀌어 갔다. 어떻게인지 녹은 듯한 쇳물이 허공에서 부글거리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빨리 없애 버려!”


“변신하는 도중엔 공격하는 거 아냐.”


왼팔을 들어 제지하며 라피스가 말했다. 이윽고 쇠로 만들어진 인간이 바닥에 섰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일전의 그것과는 달리 이번엔 몹시 느렸다. 몸이 무겁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곧바로 검은 생머리를 휘날리며 예전에 천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앞으로 뛰어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손을 부여잡고 아프다며 뒤로 돌아왔다.


“안 먹혀!”


“웃길 생각이야?”


점점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보고 서현은 멀찍이 달아났다.


“아, 도망가는 거냐.”


라피스의 말이었다.


“그럼 나보고 상대하라고?”


서현의 대답이었다. 어쨌든 라피스는 둔중한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물러서고 있었다. 책상이 마구 부서져 날아갔다. 그 때 서현은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저 쇳덩어리가 지능적으로 그녀를 구석으로 몰고 있음을. 자신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앞으로 달려 나가며 외쳤다. 그 쪽은 구석이라고.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에게 정신을 빼앗긴 라피스의 목전에 반사광을 내는 주먹이 쇄도해 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서현이 그대로 뛰어들어 라피스를 밀쳐냈다. 그녀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주먹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곧바로 타겟은 바로 앞의 멍청한 소년으로 바뀌었다. 주먹이 올라갔다. 라피스가 곧바로 일어나 도약했다. 그러나 늦은 것 같아 보였다. 그 순간.


“내 날개!”


라피스가 소리쳤다. 서현의 오른팔에서 뻗어 나온 작은 날개가 그 팔을 맘대로 움직여 쇳덩어리 인간의 주먹을 막아냈다. 주위가 옅은 황색 빛으로 가득 찼다. 소년은 놀란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재차 가해지는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오른팔은 어깨에 통증을 가져다주며 재빠르게 그것을 튕겨냈다.


“이거 뭐야. 라피스!”


부르며 돌아보던 서현은 그대로 멈춰선 채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발견했다.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얼굴이 꽤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쇳덩어리 인간은 이 조그만 생물에겐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조금 더 큰 생물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먹을 들어 내리치려 할 때 달려온 서현이 오른손으로 그 무거운 인간을 떠밀었다. 순간 빛이 주위를 감쌌다. 라피스의 머리가 맨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금발로 변했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고맙다 꼬맹아!”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그리고 귀찮은 고철덩어리를 홱 돌아보았다. 균형을 되찾은 그것은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말했잖아.”


공격이 라피스의 왼손에 간단히 막혔다.


“날개가 없어도 너희들 따위는 한 방이야!”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녀의 오른손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의 얼굴을 꿰뚫었다. 곧, 아무래도 개념적으로 ‘악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것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점점 해체되어 갔다. 이제 바닥에는 원래의 형태를 갖춘 공구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쳐다보며 누가 오면 난감하겠다고 서현은 생각했다. 그러나 곧 팔을 잡아당기는 라피스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아파!”


“이거 내 거야. 빨리 내 놓으라고.”


“가져 가!”


“안 빠져 이거.”


“막 잡아당기지 마. 아프다니까!”


아무래도 날개가 빠져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라피스는 결국 날개가 순간 팔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자 포기한 채 머리만 긁어댔다.


“뭣 때문에 이 고생을 한 거야?”


손톱에 머리카락 몇 올이 걸려 빠졌다. 그녀가 놀라는 듯 했다.


“왜 색이 안 변하지? 변해야 되는데. 그대로 금발이네. 이상한데. 이거 진짜 이상해!”


재미있어 보였다. 서현이 한숨을 내쉰다.


“날라리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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