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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Ab Cæsar 893

2007.02.12 20:57

Evangelista 조회 수:2803 추천:7

extra_vars1 Der Blaue Lö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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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젠크로이츠 단 사건 - Rosenkreuz Orden





Post CXX Annos Patebo : Christian Rosenkreuz의 무덤에서








  893년 3월 21일, 로젠은 그 날 가벼운 감기로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루나츠는 봄 옷을 사기 위해 정오 쯤 되자 외출했다. 침대 위에 가라앉는 듯 몸을 묻고 갈리아 고대사에 관한 책을 읽고 있던 그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힘들게 일어선 것은 오후 한 시 경이었다.


  "벨파스트부르크 경찰군 칼슈타트 중위입니다. 크나우저 남작 각하 계십니까?"


  문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로젠은 이주 수속을 하던 날의 짧은 머리 군인을 떠올려냈다. 어느 정도 긴장하며 그는 다시 누워 들어오라고 말했다. 오른손은 베개 밑의 단검을 쥐고 있었다.


  군인은 혼자였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병중에 죄송하지만 여쭤볼 게 몇 가지 있어서 왔습니다."


  아무래도 이전에 로젠과 루나츠를 만난 날 이후 머리를 깎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한의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새집을 지어 놓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피곤한 듯 고개만 끄덕이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재빨리 짊어진 자루에서 양피지 뭉치를 꺼내려다가 바닥에 쏟은 것을 보면.


  "예, 그러니까. 어제... 아니."


  그러더니 뭔가 생각난 듯 로젠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우필을 잉크에 찍어 양피지에 되는 대로 적어 나갔다.


  "언제부터 그렇게 편찮으셨습니까?"


  "분명 밤부터였지만 중위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냐."


  다시 끄적대며 적어댔다.


  "전 무슨 일이 있었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는데요."


  "아까 어제- 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랬군요. 그러니까 어제 외출하신 일은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로젠이 고개를 끄덕이자 또 양피지에 우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석판이나 점토를 쓰던 시대에도 저런 귀찮은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저 놈 우필을 대려면 거위가 하루에 한 마리는 필요하겠다. 예산 낭비잖아.


  "그런데 무슨 일이지?"


  그러자 요한은 쓰는 것을 멈추고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로젠은 들으려다가 갈색 머리털 군데군데 박혀 있는 흰 비듬이 매우 신경쓰인다는 걸 깨달았다. 군인이라도 좀 씻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핀잔을 주려던 로젠은,


  "그러니까 어제 밤에 사람이 살해당했는데 남작님이 용의선상에 올라서 말입니다."


  이 즈음에서 온몸이 쑤신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단검이 침대 밑으로 떨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요한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은 그저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귀족들의 관습이자 나쁜 버릇이겠거니 이해했기 때문이리라.


  로젠은 단검을 주우며 어색하게 침대에 기대었다. 그는 평정을 가장한 채 물었다.


  "왜 내가 용의자라는 거냐..."


  그 순간 그의 머리속에 스스로 돌로 내리쳐 잔인하게 살해한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녀가 떠올랐다 - 아니다! 그들은 '어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 말고는 전투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누구도 '죽인' 적은 없다. 오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오해?


  "피해자가 자신의 피로 글자를 쓰다가... 힘이 다해 죽었는데요."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표정이 득의양양, 아마 로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상대가 눈을 매섭게 부릅뜨자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순순히 토해놓기 시작했다. 허연 비듬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RosenK까지 쓰고 힘이 다한 것 같습..."


  "그런 바보같은 말이 어디 있나! 피해자는 누군데?"


  "슈트라흐 레하르트, 벨파스트 백작가의 집사이지요."


  그 음흉한 노친네 말이군 - 로젠은 2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난 여기 온 이후로 그런 사람은 본 적도 없어! 이건 절대 사실이다. 내가 벨파스트부르크 이주 후 그 집사를 만난 적이 있다면 난 벼락을 맞고 죽을 거야. 생각해 봐. 피해자가 날 알고 있어야 이야기가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해 보면 또 이상한 게 내 이름을 쓰려고 했다면 n과 K 사이에 v나 von이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그건 가끔 빼먹기도 하죠. 가해자가 살해 전에 자기 이름을 알려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요한은 계속해서 양피지에 주욱 써내려가며 경쾌하게 대답했다. 화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로젠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 이 남자는 어리숙해 보이지만 여간내기는 아니다. 지금 흥분해서는 오히려 말려들어갈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 사람 만난 적도 없어. 가끔 벨파스트 백작은 몇 번 뵈러 갔었지만 집사고 뭐고 보질 못했었다고."


  "두어 달 어딘가로 출장갔었다고 합니다. 그저께 돌아왔는데 어젯밤 살해당한 거죠. 복부 자상이 두 개로 옆구리로 들어간 게 치명상이었습니다. 흉기는 지금 수색중이지만...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그 문자를 쓰다가 죽었겠지요."


  "추정되는 시각은?"


  "저녁 식사 이후 하인들을 모아 두고 기도회에 참석한 후 자기 방에 들어간 게 오후 9시. 사체 발견 시각은 오전 네 시. 경찰군에서 사체와 접촉한 게 오전 네 시 삼십 분 정도... 그 때 사체는 완전히 굳어 있었으니까 아마 넓게 보아서 방으로 들어간 오후 아홉 시에서 열한 시? 열한 시 삼십 분 정도 사이에 살해당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군. 하여간 난 아냐. 난 그 때 루나츠... 횔그림 자작과 함께 일층 숙박객 식당에서 책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주방장이 확실히 봤을 거다."


  "아. 그러다가 방으로 올라오신 게 언제 정도죠?"


  "열 시 정도지만 그 때는 몸에 조금씩 열이 나는 걸 느끼고, 올라오자마자 뻗어 버렸어. 그건 여관 주인이 말해 줄 거다. 물을 떠다 준 게 그 여자니까."


  요한은 대답 없이 양피지만 끄적댔다. 이번엔 좀 길어지는 것 같아 로젠이 힐끔 쳐다보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자가 오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제국어는 제국어인데 끔찍한 악필이었다. 요즘 군대는 암호체계가 발달한 모양이구나... 로젠은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했다.


  어느 순간 군인은 짐을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는 거냐고 물어보니 그는 증거도 없는데 아니라고 우기는 분을 잡아 둘 수 있겠느냐며 현장으로 갈 테니 몸조리 잘 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반대로 기분이 무척 나빠진 방 주인을 두고 나가려 했다. 로젠이 잠옷 상의를 벗으며 그를 불러세운 것은 그가 문을 막 열려 하던 때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도 같이 가지. 조금만 기다려 주게."


  불러세워진 남자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 표정은 이 도시에 들어온 이후 두 번 밖에 보여진 적 없는 로젠의 그 웃음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러시다면 이왕 아실 거, 말씀드리지 않았던 걸 하나 얘기해드리지요."


  "뭔데?"


  옷을 갈아입으며 로젠이 건성으로 물었다. 셔츠 단추가 너무 많아 그 쪽에 신경이 꽤 쓰이던 참이었다. 요한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노아 아가씨와 하인리히 레하르트가 - 슈트라흐 씨의 독남입니다만 - 납치당했습니다."


  로젠의 셔츠 단추 하나가 땅에 떨어져 굴렀다. 요한 칼슈타트 중위는 그것을 보며 속으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노아에게 자네 얘기를 해 줬더니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군. 유크리트 자작과 이름이 같아서 그렇다던가."


  종종 로젠은 백작 저택에 찾아가 티타임을 가졌다. 정확히는, 저택의 찻잎을 축내곤 했다. 로젠이야 친해져 둔 다음 이용해먹을 구석을 찾는 중이었지만 알트라이그는 그것도 모른 채 어느 순간부터 다소 무례한 잿빛 머리의 귀족 청년을 친한 동생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은 약 일 주일 정도 전이었다.


  "혹시 알고 있나? 노아와 로젠 폰 유크리트 사이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진 적이 있던 것."


  "예. 알죠... 워낙 유명한 얘기니까. 하지만 별 탈 없이 끝났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움찔했다.


  "그랬긴 한데 집안에선 난리가 난 거야. 노아가 그 뭐랄까, 열에 들떠서 보름을 앓았거든. 나야 그 놈을 잡아다 죽여버리겠다고 난리를 쳤지. 그 땐 젊었으니까."


  "지금도 스물여섯 아닙니까? 그 때만 젊었다고 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로젠은 그러면서 웃었다. 그러면서 웃으면서, 제발 2년 지난 지금에 와서 난리치진 마쇼 - 속으로 그렇게 부탁했다. 노아가 말한 게 사실이었구나 하면서.


  "아버지는 오히려 잘된 일 아니냐며 황도로 사람을 보내려 했어. 노아도 좋아하고 로젠도 - 자네 말고 그 망나니 말야 - 좋아하는 눈치던데 막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물론 귀엽기야 하지. 하지만 그런 순진하기만 한 애는 무서운 구석이 있단 말요. - 하지만 딱히 그는 입을 열진 않았다. 사실 그런 소릴 맘대로 지껄일 정도로 알트라이그와 친해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노아가 말렸어. 워낙 강하게 말려서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




  그리고 지금에 와서 로젠은 노아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알트라이그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시 그녀는 백작을 움직일 촉매, 인질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것이 현재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책이었고 또한 윤리적 약점을 지닌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길이 하나인 이상 걸어가야만 했다. 때문에 다른 방향의 길을 내느라 잿빛 머리의 이 사기꾼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노아와 만나며 그녀에게 마치, 연애하는 듯한 느낌을 심어주려 갖은 연극을 다 선보였다.


  노아로 말할 것 같으면, 결론적으로 속지 않았다. 깊은 속사정까지야 그녀로선 알 방법이 없었지만 로젠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말하는 것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그가 위선을 보이는 만큼 확실히 느꼈다. 로젠의 그림자 속에 감춰진 환영이 그림자만으로는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리라. 그런데도 그녀는 일부러 로젠에게 맞춰 주었다. 속담을 떠올리면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당황했는가? - 경찰군의 마차를 타고 백작 저택으로 향하며 로젠은 자문했다. 노아는 기껏해야 장기판의 말일 뿐이다. 지금 내게는 정에 얽매이거나 할 시간이 없다.




  "자네는 왜 왔어?"


  알트라이그는 로젠을 보자마자 놀란 듯 물었다. 스트레스가 쌓여 퉁명스럽게 반응할 것으로 예상했던 로젠은 이번에 그를 확실히 자기 편으로 붙여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사가 살해당했다 해서 걱정이 돼서 와 봤습니다."


  "그 뿐입니까?"


  요한이 말참견을 했다.


  "아가씨나 하인리히 레하르트 때문은 아니고요?"


  동료들 사이에서 간혹 그를 '야수'라고 부를 때가 있었다. 달리 성격이 포악하거나 생긴 모양이 사납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냄새'를 기막히게 잘 맡았기 때문이다. 수사 중에 발견되는 조금의 수상한 점도 그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근무중의 그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미묘한 분위기의 변화를 몸으로 먼저 감지해내는 타입이었다.


  요한이 보기에, 로젠은 아마 예전부터 노아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아와 하인리히 레하르트가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고 단추를 떨어트렸던 것이 실수가 아닌 정말로 당황했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면 (가정이고 자시고 간에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둘 중 한 명, 혹은 둘 다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백작가의 집사가 저택 내에서 살해당했다는데도 자기에게 용의가 돌아간 것만 걱정하던 사람이 오히려 자기와는 별 상관 없는 사람들의 납치사건에 그렇게까지 놀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둘 중 누가 로젠과 면식이 있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노아다. 하인리히 레하르트는 사생아로, 슈트라흐 레하르트가 이번에 갈리아 서부까지 가서 데리고 온 남자다. 벨파스트부르크 내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백작 저택 사람들이 전부다. 게다가 갈리아에서는 계속해서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명이라기보다는 하인리히 자신도 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자기 본명을 몰랐던 것이다. 이것은 슈트라흐가 죽기 전에 알트라이그에게 직접 한 말이고 신빙성도 높다 - 그러므로 설령 로젠이 갈리아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인리히 레하르트'라는 이름만 듣고 그런 반응을 보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로젠의 정체를 의심하게 된 것부터는 어느 정도 감이었다. 어쩌면 로젠과 노아는 연인 사이일지도 모른다! 2년 전부터 명랑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어두운 분위기를 보이던 그녀가 최근 들어 굉장히 쾌활해진 것은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서는 아닐까? 혹시 '생긴' 것이 아니라 '돌아온' 것이라면 이 남자가 로젠 폰 크나우저가 아니라 로젠 폰 유크리트일 가능성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같이 이주해 온 여자도 신경쓰인다. 쫓기다 살해당한 것은 남녀. 비슷한 시기에 이주해온 것도 남녀...


  "혹시 남작 각하, 노아 아가씨와 전부터 아시는 사이가 아니십니까?"


  "칼슈타트. 농담은 그만둬. 바로 어제도 노아는 로젠을 소개시켜달라고 졸랐다."


  알트라이그가 말했으나 요한은 겉으로 수긍하는 척,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게 이 사람이 아가씨를 모른다는 증거는 안 되지. 게다가 액면 그대로 믿기도 힘든 말이다.'


  그 때 로젠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높였다.


  "칼슈타트 중위는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크나우저 가가 몰락했다고 해도 이렇게 계속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짐짓 화난 척 말투도 알트라이그를 따라 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겸연쩍게 웃으며 상대의 눈을 흘낏 쳐다보았다. 사이에 낀 알트라이그는 둘이 대체 뭐 하는 건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머리만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전 현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무례한 경찰군'은 몸을 돌려 가 버렸다. 그제야 백작은 입을 열었다.


  "벨파스트부르크 주재 경찰군이란 녀석들은 다 저 모양이야. 능력은 있는데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군요."


  로젠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알트라이그는 경찰군들의 보고를 그대로 로젠에게 이야기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하인리히 레하르트가 친아버지를 죽이고 노아를 납치해 갔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건 조금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게 전체적인 생각이었다. 하인리히는 하인들 몇과 함께 같은 방에서 잤는데 불침번의 말에 의하면 새벽 세 시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곯아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시 즈음에 일어나 화장실을 간다며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의 경우에는 목격자가 없어 정황을 알 수 없지만 방 안이 어지럽혀져 있었으므로 방에서 강제로 끌려갔다고 볼 수 있었다. 몸싸움으로 인해 망가진 태엽 시계가 2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잠에 빠져 있던 하인리히가 노아를 납치하는 상황은 있을 수가 없게 된다. 안사람들은 모두 조사해봤지만 알리바이가 있어 외부인 소행으로 단정하게 되었다 - 이것이 알트라이그의 설명이었다.


  "하인리히 레하르트가 시간을 속이기 위해 자신이 잠에 빠져 있었던, 혹은 그렇게 생각되는 시간으로 시계를 조작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렇다 해도 슈트라흐를 죽일 수는 없지 않나. 사체경직은 분명히 끝나 있었고 살해추정시각은 날짜가 바뀌기 전이니까."


  슈트라흐의 살해범과 노아의 납치범이 동일 인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 로젠은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상황을 보기로 했다. 어찌 되었건 하인리히 혼자서 모든 범행을 저지른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확실하다.


  "결론적으로 범인은 외부인인 셈이지. 군인 놈들 말로는 뭐, 이것저것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이 많다는데, 그런 설명보다는 - 그 망할 놈들 - 빨리 범인은 잡고, 노아는 되찾아줬으면 좋겠다고. 아니, 노아도 노아지만, 슈트라흐가 당했단 말이다!"


  알트라이그는 조금 찡그린 표정으로, 그러나 굉장히 화를 내고 있었다. 침착하다가도 굉장히 초조해 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복잡한 심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꼴이었다.


  그러고 보면 로젠에게도 노아를 되찾는 일이 급했다. 사건이 미결 상태로 장기화될 경우 알트라이그를 움직이는 일은 엄청난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마침 터진 이 사건을 조작해 황제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모를까 - 하지만 아무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 로젠이라 하더라도 그런 대규모의 사기극을 연출하기는 어려웠다. 팔불출 시스터 콤플렉스 오라버니가 제정신을 찾게 하려면 (즉, 요컨대 로젠 자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하려면) 가장 쉬운 방법은 노아를 하루속히 찾아내는 길 뿐이다... 로젠은 조금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각하. 아가씨의 납치 현장에 경찰군 책임자가 있겠죠? 제가 현장을 좀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자넨 머리도 좋으니까 도움은 될 거라고 생각하네."


  백작이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건강 검진 결과를 기다리는 노인처럼 그는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로젠은 한숨을 쉬며,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사건을 해결해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알트라이그를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쓸데없는 의심을 피하려고 이미 알고 있는 노아의 방 위치까지 물어본 후 로젠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주 수속을 하던 날 밤에 몰래 숨어들었을 때 보았던 엄청난 크기의 화병은 여전했다. 아직도 그것엔 어떠한 식물도 없었다. 오히려 뭔가 넣어 두었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것은 부자연스럽게 컸다. 문득 그는 칼집으로 화병을 툭 쳐 보았다. 탁한 소리가 났다. 궁정 정원에 놓고 나무를 심어 보면 어떨까 -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공상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다시 노아의 방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방은 심하게 어질러져 있지는 않았다. 침대보가 밑으로 흘러내려 있고 알트라이그의 말대로 사람 머리통만한 시계가 떨어져 파편을 흩어 놓았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나 3층이라 그 쪽으로 빠져나간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방 중앙에는 날카로운 느낌의 깡마른 중년 사내가 불쑥 뛰어들어온 로젠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너댓, 뭔가 더 찾아낼 것이 없는지 기를 쓰며 물건을 뒤지고 있다. 누가 물어볼 것도 없이 로젠은 사내에게 다가가 자신은 크나우저 남작 로젠이며 덧붙여 본 사건의 참고인이라고 스스로 소개했다. 깡마른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높낮이없는 어조로 음울하게 말했다.


  "나는 라이겔 폰 푀르첸 대령으로 벨파스트부르크 방면 경찰군의 지휘관이오. 남작은 본 사건과는 관계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신경쓸 것 없소이다."


  "귀족이십니까? 그리고 신경쓰지 말라니?"


  "자작이올시다. 칼슈타트 중위가 남작은 관계없다고 보고해 왔소."


  그러면서도 그는 부하들에게 손가락으로 이것저것을 가리켜 보였다. 어떻게 저런 수신호를 알아듣고 일할 수 있을까, 로젠이 내심 궁금히 생각하고 있을 때 푀르첸 대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므로... 비관계자를 현장에 둘 수는 없으니 나가 주시오."


  로젠이 뭔가 항의하려 하자 푀르첸 대령은 고개를 저었다.


  "난 말을 하는 일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외다."


  여전히 무표정한 싸늘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를 보며 로젠은 루나츠를 떠올렸다. 루나츠는 무뚝뚝해 보이는 것치고는 은근히 말이 많기는 했다. 좋은 비교상대다. 하지만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독설을 퍼붓는 건,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힘들기는 하지만 아마 당신이 봤더라면 백기를 들고 말 거다 - 로젠은 속으로 완고한 대령에게 냉소를 보냈다.


  "백작 각하께선 제가 수사에 동참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그 분의 누이동생이라면 제게도 그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각하께서 절 편한 친구사이로 생각하고 계시는데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령이 생각에 잠긴 채 그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지금 그의 머리속에선 이것저것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고회로가 하나로 합쳐 결론이 도출되는 순간, 그는 약간은 놀란 듯, 그러나 낮고 단호한 어조로, 그러면서도 일견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로젠 폰 유크리트 공작인가?"


  책임자를 만나기 위해 알트라이그에게 허가를 받아낼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가슴이 철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게 사실은 사실인 모양이군. 내가 공작이라니. 라이날트 이 인간은 반역자를 아직도 귀족 편람에서 삭제하지 않았단 말인가?


  어쨌든 로젠은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태연히 되물었다.


  "누구라고요?"


  "시치미떼지 마시오. 슈타트 가르만에서 본 적이 있소. 당신은 로젠 폰 유크리트요."


  "그 자는 죽었습니다만, 아까 칼슈타트 중위도 그렇게 오해하는 모양이더군요. 제가 닮았습니까? 설령 제가 정말 그 자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전 제 이름 자체를 바꾸어 버렸을 겁니다. 상대에게 괜한 의심을 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자작껜 미안한 소리인데, 제겐 크나우저 가의 휘장이나 인장, 증명 서류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대령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진다.


  "'저희 가문'이 아니라 '크나우저 가문'이란 말이오?"


  "정말이지, 쓸데없는 소리 하면서 시간 끌 겁니까? 범인을 잡아야지요. 노아 아가씨를 구출하는 게 우선이지 않습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도대체 어디 있어요? 각하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생각을 하셔야지요."


  "뭐 좋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겠소. 내 무례는 - 이번에 한해서 사과하겠소."


  "일에 충실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여하간 난 유크리트 공작인지 자작인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경찰군에서 내린 결론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보기엔 창으로 들어온 범인이 문을 열고 나간 걸로 생각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이 사냥매같은 영감을 조만간 제거해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걸로 모자라다면 요한도 함께다. 노아를 되찾아오는 날이 너희들 기일이 될 거다. - 로젠은 슬쩍 미소를 지었으나 푀르첸 대령은 보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양 옆으로 젓고 있었다.


  "그 부분이 곤란하오. 분명히 창으로 들어온 흔적은 있는데 방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소. 그렇다고 해서 창으로 나간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오. 혼자서라면 몰라도 납치한 피해자를 데리고 창으로 도망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아니, 완전히 불가능하겠군요. 완전히. 날아서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린 창문, 흐트러진 침대, 망가진 시계. 이 외의 단서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더 뒤진다고 해 봐야 이 방에서 뭔가 나올 성 싶지도 않았다.


  로젠은 사건을 정리해 줄 것을 요구했다. 푀르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부탁을 들어 주었다.




  우선, 밤 열한 시를 전후하여 슈트라흐 레하르트가 저택 건물 앞 뜰 구석에서 살해당했다. 사인은 복부 자상에 의한 내장 파열, 경찰군의 수사 결과 저택 정원 정문 근처에서부터 끌려가 당한 것으로 보인다. 살해 목적은 잠입한 범인에 대한 목격자의 제거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범인은 정문 근처의 담을 넘어서 침입한 것이 되는데 별 문제 없이 이 점은 확실하다. 그리고 로젠의 생각과는 달리 시계는 깨진 후 달리 손댄 구석이 없으므로 노아의 납치 추정 시각은 새벽 2시 15분 전후. 범인은 아마 공백이 발생한  두세 시간 동안 저택의 내부 구조를 익히고 지붕으로 올라갈 길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묘하게 두세 시간이란 게 길지만 원체 저택이 넓은 데다가 불침번들이 계속해서 순찰을 돌았으므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체를 발각되지 않도록 가리는 것도 문제고.


  경찰군 측에서도 아직 추리해낼 수 없는 것이 2시 15분에서 3시 이후 하인리히 레하르트 실종까지의 약 한 시간 가량이다.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거의 확실한 가운데, 범인이 왜 굳이 VIP를 납치하고도 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움직여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하인리히를 건드린 것인지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인리히 레하르트를 납치한 게 저택 내부의 다른 자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노아 아가씨가 납치당하던 시각의 알리바이를 전원, 모두 조사해 본 겁니까?"


  "우릴 바보로 아시오? 그런 건 당신이 굳이 물어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외다. 한 명 빼고는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하오. 이 집 하인들은 마치 하나의 실로 연결 되어 있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소."


  "그 한 명은 누구죠?"


  "당연한 걸 묻지 마시오. 벨파스트 백작 각하요."


  "갈수록 태산이군."


  로젠은 왼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생각해도 범인은 외부인이다. 그래서는 범위가 너무 넓어진다. 범인이 스스로 나타나 주지 않는다면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요즈음과는 달리 그 시절은 경찰 시스템이나 인쇄술 같은 것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배를 내려도 이름을 바꾸거나 변장을 해 버리면 알아보기 힘들었고 원거리로 도주하면 놓친다는 것에 진배없는 일이었다.


  노아의 납치범같은 경우, 아직 이 쪽에 어떠한 통보도 해 오지 않았다. 푀르첸 대령은 몸값을 요구하는 서신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귀족 납치의 동기는 거의 다 두 가지로 압축되오. 돈 혹은 원한. 원한이었다면 각하를 직접 노렸거나 아가씨를 그 자리에서 살해했을 테니 결론은 돈. 원한 관계로 인해 살해했다면 그 원한에 대해 무언가 스스로 단서를 남겨 두고 갔을 텐데 그게 없으니 역시 결론은 돈이오. 몸값을 원한 납치는 대부분 부녀자가 대상이 되는 게 특징이외다."


  로젠은 겉으로는 수긍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다른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이 곳에서 더는 얻을만한 정보가 없군요. 대령께서 정리해주셔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추리도 해 볼 수 있게 되었고요. 제 생각대로라면 왜 이런 밀실 아닌 밀실이 만들어졌는지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모두 구체적 증거가 없는 추론일 뿐이라 확실히 말씀드리기가 애매하긴 하지만... 범인의 주 목적이 노아 아가씨의 납치가 아니라 집사의 살해였다고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범인은 자정 전에 살짝 들어와 슈트라흐를 죽이고 목표 은폐를 위해 일부러 정원에서 풀을 밟아 가며 마치 우발적인 살인인 양 그 시체를 옮겼을 겁니다. 하지만 외부인에 의한 우발적 살인일 경우엔 어째서 그 살인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인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마도 범인은 이후 두어 시간 동안 금고나 귀중품 - 그것도 가치가 굉장히 있는 물건들을 찾아다녔을 겁니다. 여의치 않았겠죠. 금고라던가 비싼 물건이라던가 하는 건 이 저택엔 없으니까요. 며칠 전 각하께서 하시던 말씀이 가내 전 재산을 쉬델트 슈타트의 무슨, 은행이라고 하던가? 최근에 유행하는 상인들인 것 같은데, 금융업인가 뭔가를 한다고 하더군요. 여하간 그 쪽으로 안전하게 황금으로 바꾸어 보관하고 있다고 하셨거든요. 어쨌든 시간을 너무 지체해 버린 범인은 목표를 노아 아가씨의 납치로 바꾸게 됩니다. 금고를 찾다가 우연히 들어간 방이 그녀의 방이라던가 했을 테지요. 어쨌든 그래서 노아 아가씨를 납치하긴 했는데 복도로 가자니 위험 부담이 너무 큰 거예요. 혼자 조용히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과 여자애를 인질로 데리고 이동하는 것은 일단 소음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민첩하게 행동하기도 힘들지요. 당연히 예상 외의 일이었으므로 마취약 같은 것도 준비하지 못했을 거고... 그래서 그는 창문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서 푀르첸 대령은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저으며 말을 끊었다.


  "결국 처음이랑 똑같아. 창문으로 나간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소.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소이다. 이래서는 범인을 잡을 수 없소."


  "아뇨. 죄송하지만 범인은 잡을 수 있습니다."


  로젠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활짝 웃었다. 눈은 푀르첸 대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령은 문득 상대의 눈이 얼핏 볼 때와는 달리 순수한 검은 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젠의 눈은 조금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왜 이런 상황에 자신은 쓸데없이 이런 녀석의 눈동자 색 따위에 관심이 가는 건가? 너무 아름다워서? 아니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어제 밤부터는 바람이 거의 없었죠. 이 창문도 틀이 무거운데, 현장 그대로겠지요?"


  "그렇소."


  "그럼 창으로 나간 게 확실합니다. 이 창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 이런 식으로 열고 들어오면 큰일납니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벽을 타고 침투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이 창문 종류를 아시겠습니까? 그 유명한 847년식 갈리아 벨쥐락끄 데코 창문입니다. 밀어서 열 수도, 당겨서 열 수도 있지요. 저 같으면 밖에서 이 무거운 창을 그냥 밀어 열고 들어옵니다. 그랬다면 창이 지금과는 반대 방향으로 열려 있었을 테죠. 한 마디로 지금처럼 창이 밖을 향해 열려 있다는 건 밖에서 범인이 들어왔다는 말에 완전한 반박은 되지 못하더라도 - 일부러 범인이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요 - 방문이 잠겨 있는 걸로 봐서 창으로 나갔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걸 말해 주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아무래도 좋소. 하지만 어떻게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거요?"


  "놈이 창문으로 들어왔는지 복도에서 들어왔는지는 저도 알 바 아닙니다. 잡아다가 두들겨 패서 불게 하면 그만이에요. 요점은 확실히 복도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입니다. 나갈 때엔 아가씨의 입을 막고 밧줄을 이용하던가 했겠지요. 저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해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창틀에 사소한 자국이라도 남아 있을 겁니다."


  "아니..."


  푀르첸 대령은 짧게 대답한 후, 한숨과 함께 이어 말했다.


  "밧줄 때문에 자국이 남아 있는 건 없지만... 끊어진 듯한 가는 새끼 몇 가닥이 창 밑에 떨어져 있소. 우리들이야 젊은 여자아이 방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고 바람에 날린 것이겠거니 해서 그냥 넘어간 건데...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아시다시피 현장에 밧줄은 없었소. 범인이 돌아와서 치웠다는 거요?"


  "바로 그겁니다. 공범이 있었든 스스로 했든 치우긴 치웠을 텐데 문이 안에서 잠겨 있단 말이에요. 제 생각은 이겁니다. 하인리히 레하르트가 세 시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간 후에, 잠깐 바람을 쐬려고 했는지 어땠는지 정원으로 나갔다가 아가씨의 방에서 드리워진 밧줄을 발견하게 됩니다. 범인은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든 아니든 하인리히 레하르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불침번한테 알릴 생각도 못하고 아가씨의 방으로 뛰어갑니다. 그런데 그 때 방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잠겨 있지 않았을 겁니다. 아깐 여기까지 생각은 못했는데... 죄송합니다. 생각하는 걸 그대로 말로 옮기다 보니... 여하간 범인은 일부러 이 방을 밀실로 만들어서 수사하는 우리들을 지연시키기 위해 밧줄을 걸어 두었던 겁니다..."


  "무슨 소리요?"


  "처음에 범인이 밧줄로 아가씨를 데리고 내려간 건 맞습니다. 복도로 갔다면 불침번에게 들켰겠죠. 하지만 그 자는 방을 밀실로 만들기 위해 아가씨를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움직이지 못하게 해 두고 이번엔 밧줄을 타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밧줄은 다시 치웠죠... 제가 생각을 잘못한 부분은 하인리히가 밖에서 밧줄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아닙니다. 범인은 여기까지도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그게 마침 하인리히였죠. 놈은 그를 습격해 쓰러트린 후 방으로 끌고 들어와서... 그의 다리에 밧줄을 묶습니다. 그리고 하인리히가 정신을 차리자 재차 공격해 창틀에 매달리게 만들고... 밧줄을 타고 유유히 내려온 겁니다."


  "말도 안 돼... 그랬다간 둘 다 떨어져서 다칠 거요."


  "하인리히가 창틀에 매달려 버텨 주면 됩니다. 오래 버틸 필요도 없습니다. 이 창 아래에 관목이 있기 때문에 2층 절반 정도의 높이라면 떨어져도 별로 다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밧줄을 강하게 잡아당기면 그는 추락하게 되죠. 그리고 범인은 시체가 되었든 부상자가 되었든 하인리히를 어디론가 치워 버리고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쳤을 겁니다."


  "믿을 수 없소. 증거도 없이 너무 꾸며대는 거 아니오?"


  "이 이상은 생각해볼 수가 없습니다.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건 경찰군이 아닙니까?"


  로젠이 도발했으나 푀르첸 대령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말을 돌렸다.


  "일단 그렇다고 치시고... 문제는 슈트라흐 노인의 'RosenK'라는 문자요. 남작이 범인이 아니라면 그건 무슨 소리일지..."


  "그 단어로 시작하는 다른 말이거나 내게 덮어씌우기 위해 범인이 쓴 것이겠죠. 신경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묘하게 신경이 쓰여서... 일단 하인리히 레하르트가 자던 방으로 가는 게 좋겠소. 뭔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들은 노아의 방에서 나왔다. 하인들의 방은 2층에 있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화병은 상당히 신경에 거슬렸다. 복도에서 치고받고 싸운 것은 아닌 듯했다. 이렇게 뭐가 많이 놓여 있는 복도에서 박살난 물건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 때 알트라이그가 1층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로젠과 푀르첸 대령은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백작은 여전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푀르첸 대령이 경과를 이야기하자 그는 꽤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얘기가 밑도끝도없이 발전해 나가서 그렇지, 생각보다는 굉장한걸."


  "별 것 아닙니다. 증거는 하나도 발견 못했으니까..."


  "나로선 말이지."


  알트라이그가 한숨을 쉬었다.


  "이 화병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안타깝네. 훌륭한 청동 아닌가?"


  로젠도 이쯤 되면 화가 났다. 지금이 예술혼을 불태울 때냐 이 얼간아! 목소리가 혀끝까지 나왔다가 도로 들어갔다. 어디까지나 심각한 표정을 가장하며 그는 화병에 대해 물었다.


  "카치노의 파체리오가 장미십자기사단에 헌정한 화병이야. 기사의 도는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쓸데없이 역적 모의를 하는 바람에... 아니. 그건 아직도 내막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모르겠군. 하여간 그들이 와해된 후에 흘러나온 것을 아버지께서 구입한 거야."


  "각하... 지금 어느 기사단이라고?"


  푀르첸 대령이 입술을 떨면서 물었다.


  "장미십자라고 했네."


  "그겁니다!"


  그가 소리쳤다.


  "로젠크로이츠... 집사가 죽으면서 쓴 그 문자는 로젠크로이츠일지도 모릅니다."


  로젠이 신음소리를 냈다. 알트라이그도 알아들었다.


  장미십자기사단은 856년 겨우 1개 연대 병력으로 공화국군 제 2군단을 격파한 이후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으나 제 3대 단장 루드하르트 폰 로베인이 모반의 누명을 쓰고 890년 잠적하고 나서 주요 지휘관들이 처형됨과 동시에 해체되어 버렸다. 이후 잔당들은 지하로 숨어 로베인 후작의 복권을 요구하며 테러행위를 벌여 왔는데 로젠이나 경찰군들, 알트라이그조차도 'RosenK'까지 보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냐. 로젠크로이츠 단이라면 슈트라흐 노인보다는 각하를 노렸을 텐데..."


  로젠의 힘없는 목소리에 푀르첸 대령이 가세했다.


  "저도 뭔가 이상합니다. 각하께선 문제없이 잘 주무셨고 남작의 추리에도 조금 무리하는 부분은 있을지언정 모순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다른 증거물을 찾지 못하는 이상 어째서 그들이 집사를 죽였는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역시 우발적인 것인가... 하지만 그래서는 남작의 추리가 뒤틀려 버리고... 일이 꼬여 버렸습니다."


  "아니. 슈트라흐를 해칠 이유라면 있다."


  알트라이그가 어두운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슈트라흐의 매형이 볼프강 게하르트야."


  "분명히 볼프강 게하르트가 로베인을 밀고한 것이지만..."


  "친인척에 대한 테러라 이건가. 비겁하군요, 그 놈들. 궁정으로 숨어버린 게하르트도 역겹긴 마찬가지지만..."


  로젠의 기억 속에 남작이 되어 궁정에서 우쭐대고 다니던 볼프강 '폰' 게하르트가 떠올랐다. 50대 후반의 늙은이인 그의 얼굴엔 저열한 비굴함이 늘 어른대고 있었다.


  알트라이그는 심호흡을 한 후 결심한 듯 힙을 열었다.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다.


  "푀르첸 자작. 벨파스트 백작의 관인으로..."


  그리고는 약간 구부리고 있던 등을 바로 폈다.


  "수도의 로젠크로이츠 단 수사부에 정식으로 공문을 발송하라. 수사는 우리 손에서 그 쪽으로 이첩한다. 증거가 필요하면 알아서 찾아내라고 해! 가능하면 사법권은 우리 쪽에서 행할 수 있도록 요청할 것."


  "예. 알겠습니다."


  푀르첸 대령이 비쩍 마른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한 정중하고 우아한 자세로, 오른팔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혔다.


  "다른 지시는 없으십니까?"


  "노아 폰 벨파스트의 실종 건은 우리 쪽에서 독자적으로 수사한다. 양측 정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긴밀히 협조 관계를 유지하라."


  "예. 이상이십니까?"


  "이상이다. 그리고, 크나우저 남작은..."


  "아, 각하. 죄송하지만 전 빼 주십시오. 도와드리는 건 가능하지만 상부에 보고되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주위가 시끄러워지는 건 더 이상은 힘들어서..."


  알트라이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로젠의 평안한 삶을 보장하겠다고 구두로나마 약속도 했다.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해결해 흥분 상태에 있던 푀르첸 대령은 - 그로서는 목소리나 조금 키우는 것이 흥분했다는 뜻이었지만 - 진정을 되찾자 눈을 가늘게 뜨고 너무도 의심가는 젊은 남작을 지켜보았다. 보고를 거부하는 모습에서 심증을 굳힌 그는 믿을 수 있는 부하들과 함께 그에 대해 캐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사고하지 못했다. 그 당사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청동을 두드리면 어떤 소리가 나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는 화병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런 종이나 병 형태의 청동제 물건을 두드리면 맑게 울리는 소리가 나오. 그리고 그저 청동을 뭉쳐놓은 것이라면..."


  "아. 됐습니다. 각하. 화병 안에 뭔가 넣어 두신 게 있으십니까?"


  "전혀. 갑자기 그건 왜?"


  로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고 있는 건 입 뿐이었다.


  "알고 계십니까? 로젠크로이츠 단은 - 사이비이긴 하지만 - 종교 결사의 성격도 띠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화병을 밀어 넘어트렸다. 사람 키만한 청동 예술품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입구에 사람 다리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푀르첸 대령이 급히 끌어내고 보니 마취 상태에 있던 하인리히 레하르트였다.


  "아무래도 마취약을 가지고 왔던 듯 하군요... 제 생각이 약간 틀리긴 했지만 문제될 범위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파체리오 그 양반도 로젠크로이츠에 가담했다고 하던데 들으셨습니까? 주둥이가 넓은 거대한 병은 인간의 죄를 가두어 놓는 봉인이라고 하더군요. 적어도 그 놈들 말에 따르면요. 이 사람이 하인리히 레하르트가 맞다면 그 놈들에겐 죄인의 이어받은 자손이겠지요!"


  경악하는 둘을 등지고 로젠이 이를 꽉 물었다.


  "범인이란 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신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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