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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21c Ab Cæsar 893 : Der Blaue Löbe

2006.12.22 04:03

Evangelista 조회 수:3250 추천:13

extra_vars1 Der Blaue Lö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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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노아 - Nhoa von Welfast



연애는 환장이니라 : 채만식, 『태평천하』






  루나츠가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로젠은 일을 진행시키지 않았다. 무리해서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계획을 세워 두었어야 하나 소재만 남아돌 뿐 그 소재를 이용해 만들어야 할 작품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어째서 로젠이 처음에 알트라이그와 대면하는 것을 꺼렸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3월 들어, 그는 소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따금 여관 근처의 작은 성당에 가 하프시코드를 연주하고 있었다. 성당의 신부는 새 이주민이 이렇게 자주 나와 주는 것에 대해 축복을 하고 감사의 뜻을 표한 후 성무 공과 시간 이외, 혹은 신부들이나 성당에서 공부하는 수도사들이 미사를 드릴 때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하프시코드를 연주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사실 로젠이 칠 줄 아는 곡이라고는 세쿤둠Secundum의 바실레우스Basileus 페르티낙스 7세Pertinax Ⅶ(A.C. 633 ~ 690)의 찬송 3편, 즉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Salva Me ab Ore Leonis,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영광Gloria Patri, 지극히 높은 곳에서 신께 영광Gloria in Excelsis Deo 이 세 곡과 갈리아에서 전해전 베를라쥐Rene Berlageus의 찬미곡 정도 뿐이었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왠만해서는 연주하는 이 곡들을 로젠은 - 굉장히 멋대로 - 자기 나름 종교색에 맞게 어레인지해 연주했기 때문에 성당을 찾은 사람들은 꽤 신선하게 생각한 것 같다.


  3월 6일 오후에도 교회에선 단조풍의 아다지오로 편곡된 베를라쥐의 찬미곡이 연주되었다. 수도사 몇 사람인가가 채식(彩飾)이나 필사를 멈추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수도사들은 다시 자신들의 일로 돌아갔다. 꽤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별다른 즐거움이 없는 수도생활중에 색다른 음악을 듣는다는 건 그들대로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프시코드는 어디서 배운 거예요?"


  베일을 쓴, 소녀티가 남아 있는 아가씨가 물었다. 로젠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가씨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가만히 말했다.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슈타트 가르만이죠?"


  로젠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마음과는 틀리게 말이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광이 빛났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햇빛이 얼굴을 옆에서 그림자지게 만들었다.


  "이삼 년 정도 전에 아버님과 같이 수도에 갔을 때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더니 그녀는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죠, 로젠?"


  로젠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 작게 "아" 하고 감탄을 토했다.


  "노아 폰 벨파스트였군. 이제야 생각났다."


  "이제 생각나다뇨. 어떻게 잊을 수가 있죠? ...물에 빠져 죽은 줄 알았다구요. 그렇다면 황녀님도 무사한 거예요?"


  "미안. 아무 것도 말해줄 수 없어."


  그리고 로젠은 입을 다물었다.


  유크리트 자작 로젠과 와 클로테 폰 피넬리츠 황녀가 카이저브룬 강변의 남쪽 방면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전 벨파스트 백작 요한이 죽었다는 이야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속도로 퍼져 나갔다. 단순한 사고사로 보기엔 너무나 사체가 돌로 내리친 듯 짓이겨져 있었기 때문에 생김새로 신원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입고 있던 옷으로 그들임을 알 수 있었다.


  도무지 혐의를 피해갈 도리가 없던 황제 라이날트는 이상하게도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로젠은 아마 그가 진상을 눈치챈 것이라고 믿었다. 애초부터 그런 얄팍한 사기로 라이날트 정도 되는 사람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을 벌기 위해 벌인 일이었던 것이 결과적으론 자신들을 방면해 주는 쪽이 되어 버리자 그는 왜 황제가 이쪽을 쫓아오지 않는가 - 그 심리상태만 제외하고는 황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역시 변수는 라이날트의 움직임이 될 것이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요한 선생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리고 그는 성당 밖으로 향했다. 노아도 따라갔다. 그녀는 로젠의 옆에 달라붙어서 눈을 무섭게 뜨고 분을 실어 물었다.


  "정말로 황녀님과 도망친 게 야반도주였나요?"


  웃겨서 말도 안 나온다... 로젠은 그렇게 생각하고 대답 없이 시선을 피한 채 재빠르게 성당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다리 길이에 차이가 났기 때문인지 노아는 뛰어오며 계속 물었다.


  "황녀님을 좋아했나요?"


  이래서 여자는 귀찮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로밖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건가? - 로젠은 혀를 찼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노아는 필사적으로 반쯤 달리다시피 하고 있는 그를 따라잡았다. 그녀가 로젠의 오른팔을 붙잡고 거세게 잡아당겼다. 반동으로 넘어질 뻔한 로젠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노아 폰 벨파스트는 벨파스트부르크 전체를 통틀어 (어머니인 고 벨파스트 백작 부인을 제외한다면) 가장 유명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벨파스트부르크 대학에서 어학을 공부하는 그녀는 붙임성 있는 성격에 귀여운 외모,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벨파스트 백작가의 영양이라는 조건들 덕분인지 도시의 남자들에게서 '목표로 하여 오르고 싶은 나무'가 되어 있었다. 물론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에도 불구, 무리해서 오르고 싶어하는 족속들이 태반이었지만.


  그녀가 로젠을 만난 것은 2년 전, 891년 6월 황도 슈타트 가르만에서 있었던 당시 청사자기사단Der Blaue Löbe Ritter장 유크리트 공작 루돌프의 환갑연에서였다. 장남 알트라이그를 도시에 남긴 채 17세의 딸을 데리고 친구의 생일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벨파스트 백작 요한은 축하도 축하지만 딸을 로젠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했다. 자신은 루돌프를 친형처럼 모시고 있었지만 루돌프가 모략에 능한 사람이니만큼 언젠가 뒷통수를 맞을 때를 대비해 연줄을 강화시켜 놓으려 한 것이다. 문제는 당사자인 노아가 정략 결혼 따위 죽어도 싫다며 발버둥쳤다는 것이었다.


  환갑연 저녁, 로젠은 홀에서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베를라쥐의 찬미곡을 불렀다. '주의 은혜로'Deo gratias로 시작되는 노래가 정원에 울려퍼졌다. 멍하니 꽃만 바라보던 노아가 홀로 시선을 옮겼다. 그 곳에는 윤기 없는 금색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건반 위로 손을 놀리며 그 자신의 저음이 어울릴 리 없는 테너 파트를 부르고 있었다. 들어보니 테너 파트를 바리톤으로 낮추어 연주하는 것이었다. 노아는 계속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바라보았다.


  "저 분이 로젠 폰 유크리트 님이랍니다."


  벨파스트 가의 집사인 늙은 슈트라흐 레하르트가 말했다.


  "공작 각하의 생신 때문에 쾰른의 대학에서 잠시 돌아오셨답니다. 특별히 남자답다거나 멋지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머리는 좋다고들 합니다."


  노아는 무심결에 - 아뇨... 멋있어요.


  집사가 미소지었다. 문득, 주인의 어린 딸이 잠시 여기서 첫눈에 반한 저 사람에게 빠져 있도록 놓아 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웃으며 그는 다른 귀족들의 하인들이나 집사들과 어울리기 위해 정원 한편으로 갔다. 하지만 주인의 당부대로 그녀를 시야에서 놓지 않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새 연주는 끝나고 로젠은 언제 몰려든 지 알 수 없는 귀족 영양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홀에서 나왔다. 노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쪽으로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일이 된다면 인생은 소설이라 -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예의 귀족 아가씨들이 그의 주위를 떡밥에 달려드는 잉어들처럼 휘감았다. 그 날 이후로 벨파스트부르크 시내 구석의 작은 도서관 관장 베버 씨는 노아가 철이 들어서 발길이 뜸해진 건가 생각하게 되었는데, 실상은 그녀가 자주 대출해 읽던 삼류 연애소설들이 현실과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음에 실망해서였다. 제대로 말해서 노아는 그 '혼란의 와중'에 '귀공자'와 '눈맞춤'이 일어나길 기대했다! 로젠이 '귀공자'까지는 아니었고 노아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으므로 기본 전제부터 엇나간 것이었지만. 말하자면 로젠은 엉겨붙는 적들을 상대하느라 노아 쪽으로는 전혀 신경쓰지 못했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날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벨파스트 백작은 며칠 더 체류하기로 했다. 공작이 어제 저녁에 있었던 로젠에 대한 '습격'에 진노해서 "혼담 같은 건 일절 없다"고 못박았기 때문에 그는 딸에게 부모들에 대한 언급은 일체 말고 로젠에게 접근할 것을 주문하고는 슈트라흐 노인을 뒤에서 몰래 따라가도록 했다. 노아는 못 이기는 척 수락하고는 옷을 고르고 몸치장을 하는 데에만 두 시간을 할애했다. 워낙 감각이 없어서 하녀들이 바로잡아 주었지만.


  노아가 성격적으로 그다지 적극적이었던 건 아니다. 오전 열한 시쯤에 나간 그녀가 정오 즈음에 다른 청년들(그들은 대부분 귀족이 아니었다)과 함께 거리에서 뭔가 대화중인 로젠을 발견하고 말을 걸기까지는 삼십 분 이상이 걸렸다. 그나마도 친구로 보이는 청년 하나가 계속해서 주위를 서성거리는 소녀를 수상히 여겨 먼저 불렀기 때문, 그녀 스스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가씨, 이름이 뭐야?"


  노아를 데리고 온 청년이 물었다. 하지만 그 말이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숙소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얼굴에 열이 올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말을 더듬은 끝에 예의 '금발의 귀공자'를 가리키며 "로젠 님"하고 부르기까지가 어린 소녀에게는 고문당하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여하간 로젠은 웃었다. 장난 반,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베르톨트. 난 이제 꼬맹이들한테도 사랑받는 모양이다."


  베르톨트 리히터는 그냥 싱긋 웃을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넌 누구니?"


  로젠이 부드럽게 물었다. 지금까지 숨까지 참아가며 버티고 있던 그녀는 폭발하듯 대답했다.


  "노아 폰 벨파스트, 열 일곱살입니다."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커진 것에 대해 로젠은 문제삼지 않았다. 꽤 동안이군 - 생각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그 나름) 신사였던 그는 꼬맹이라고 말한 것에 화가 났다고 여긴 건지 더는 나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벨파스트라는 성에 관심이 갔다. 벨파스트 백작이 아버지와 친구인지 아닌지는 그 때의 그에겐 관심이 없었지만 벨파스트 가가 강력한 도시 영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하지만 노아는 도시의 사정에 대해서는 알 리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못했다. 말미에 그는 질문을 바꾸었다.


  "벨파스트 백작께서도 황도에 계시니? 어제 우리 집에 오셨겠구나?"


  여전히 홍조를 띤 하얀 얼굴이 고개만 끄덕 -


  "그 분께서 나한테 시집가라고 하시든?"


  홍조를 띤 하얀 얼굴이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이번엔 약간 시간이 걸렸다. 로젠은 강아지를 데리고 놀듯 여전히 부드럽게, 하지만 짓궂게 물엇다.


  "넌 어떠니?"


  진정을 찾아가던 심장이 다시 엄청난 속도로 뛰는 것이 느껴졌다. 폐혈관은 이미 터져버린 것인지(그랬을 리야 없지만) 호흡하기가 매우 괴로웠다. 눈물이 나오려 했다. 얼굴은 물을 끼얹으면 곧바로 증발할만치 뜨거워졌다. 침이 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몰라요, 그 말 밖에 소녀는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제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베르톨트. 첫사랑은 괴로우니라."


  로젠은 로젠대로 이 어리숙한 아가씨가 "소녀는 모르겠사옵니다" 따위의 뜻으로 말을 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앉아 있던 분수대에서 일어서다가 도로 앉고는,


  "베르톨트. 이 애한테 황도를 구경시켜주고 올 테니까 너는..."


  맞은편 건물 그림자 속에 숨어 지켜보고 있던 슈트라흐 노인을 가리키며,


  "아무래도 벨파스트 가의 하인 같은데 쫓아오지 못하도록 잘 좀 막아 줘."


  그러면서 노아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제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어 로젠이 이끄는 대로 힘없이 끌려갔다. 베르톨트가 휘파람을 불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어둠 속에 몸을 완전히 숨겼다. 그가 다른 방향으로 로젠을 찾아보려 할 때 베르톨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로젠은 함부로 여자애를 건드리는 놈은 아니니까 걱정 마십쇼."


  하지만 슈트라흐 노인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재빨리 사라진 둘을 찾아 나섰다. 얼마 안 가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약 반 시간 후 로젠은 혼자 돌아왔다. 베르톨트가 의아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그는 왼손을 좌우로 저어 보였다. 이해가 된 양 베르톨트는 곧바로 헛소문을 퍼트릴 준비를 시작했다. 즉, 노아는 로젠의 성가신 구혼자들을 떼어놓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풀이하여, 이용당했다. 로젠은 용의주도하게 아버지의 질책과 벨파스트 백작의 - 이게 왠 떡이냐는 식의 - 항의가 들어오기 직전에 '노아 폰 벨파스트 양에게서 사랑의 상처를 입었으며 (그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상처인가에 대해서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당분간 여자는 생각도 하기 싫다며 수도원으로 잠적해 버렸다. 삼십 분 동안 로젠에게 철저히 정신교육을 받은 노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도통 입을 열지 않자 격노한 유크리트 공작은 수없이 많은 가르만 일대의 로젠(제국군 직속의 장미십자기사단이나 혹은 꽃 중에서 장미가 특히 유행하는 바람에 로젠이라는 이름은 A.C. 8세기 전후 가장 흔했던 이름이었다)들을 죄다 찾아보게 했지만 로젠 폰 유크리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공작이 전국의 수도원을 몽땅 뒤질 태세를 갖추자 로젠은 야간에 도망치려다가 붙잡혀 아버지에게 인계되었다. 혼은 엄청나게 났지만 어쨌든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구혼자들은 전부 떨어져 나가고 로젠은 감금인지 유폐인지를 당했으며 노아는 수도에서 일약 유명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빌고 빌어 풀려난 로젠이 별안간 집 밖으로 뛰쳐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라고 뒷수습을 해 약 한 달을 황도를 시끄럽게 한 유크리트 자작 사건은 끝이 났다. 그 자신은 한 달을 더 집안에 갇혀 살았지만.




  "그 때 참 대단했어요."


  눈물을 닦으며 노아가 말했다.


  "솔직히 벨파스트 백작 - 너희 오빠를 만났을 때 알아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나와 백작은 서로 얼굴을 모르니까. 워낙 흔해빠진 이름이라 그런지 다행이라면 다행, 전혀 알아보질 못하더군. 일반적인 오빠들의 반응으로 때려죽여주길 바랬는데 말야."


  "오빠가 그랬던 건 사실이에요. 죽여 버리겠다고 했던가. ...농담으로라도 죽는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요."


  그녀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제 양손을 모아 쥐었다. 여전히 흰 얼굴이 다시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로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 사흘 동안은 거의 먹질 못했으니까."


  "미안."


  로젠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시선도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해가 질 때가 되자 성당에서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진동을 일으켜 몸을 떨게 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로젠은 짐짓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황녀님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다른 건 생각할 여유가 없어."


  그리고는 사죄하듯 허리를 숙였다. 노아가 쓸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띄우며, 같이 허리를 숙였다.


  돌아가려는 잿빛 머리카락의 청년에게 그녀는 숨막힐 듯한 목소리로, 그러나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또렷하게 말했다.


  "죽지 말아요."


  청년이 멈춰 섰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으니까. 그 짧았던 반 시간 후에 해준 한 마디, 나 기억하고 있으니까, 죽지 말아요."


  잠시 그대로 서 있던 로젠은 발걸음을 떼어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내 어디가 좋은 거냐?"


  삼십 분을 돌아다닌 끝에 조금은 지친 금발의 로젠이 물었다. 붉게 물들다 못해 열이 조금 오른 얼굴로 그에게 이끌려 온 노아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가만히 앉아 있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어려서 그런 걸까요?"


  금발의 로젠은 상냥히 대답했다.


  "난 너한테 아무런 감상도 없다만 - 네가 계속 네 자리에 있어 준다면 나도 찾아갈 거야. 언젠가는."


  "그 사이에 정말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버리면요?"


  노아가 용기를 내어 (그러나 실상은 생각도 거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물었다.


  "사랑이란 말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니라더라. 내 이상형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날 정말로 좋아해 주는 여자면 돼. 그러니까 넌 그냥 그대로 있어 주기만 해. 그럼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찾아갈 테니까."


  그리고 금발의 로젠은 노아를 슈트라흐 노인에게 넘겼다.




  "오빠고 동생이고 정말 써먹기 쉬운 녀석들 뿐이군."


  잿빛 머리의 로젠이 약 보름 전 루나츠의 침대에 칸막이를 쳐줄 때 지었던 것과 똑같은 웃음을 내며 중얼거렸다. 자신도 몸을 돌려 돌아가던 노아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로젠의 머리속에 모든 계획이 잡혔다. 이제 계기만 있으면 될 것이다.




  노을이 참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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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상편에서 계속=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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