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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다락위의소피아

2007.05.05 11:35

Evangelista 조회 수:2755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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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공천공술(天空穿孔術)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에서 민시현은 파시즘을 느꼈다.


 



여기서부터 재생하세요☆ (Crazy Sunshine - The Pillows)


 


장마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공기는 온통 축축했다. 방과 후, 아무도 없는 신문부실에서 그는 자신들이 만든 때 지난 신문을 들추어 보고 있었다. 활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민은 방학을 보름 정도 앞둔 바로 오늘, 학우들 앞에서 선언했다. 금일 부로 3반의 민서현과 6반의 자신은 사귀기로 했다고. 충격을 받은 인간은 약 여섯 시간 정도 흐른 지금 두 자리 수에 육박하려 하고 있었다. 남녀 비율은 삼 대 칠로 여성 쪽이 약간 많았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컨대 숫자라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전쟁과 쿠데타 다음으로 폭력적인 정치수단인 다수결을 논할 때 쓰이는 것이다. 휴머니즘에 비추어 볼 때 가장 타당한 접근 방법은 열 명에 가까운 그들 중 과연 누가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리라.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바로 민시현 소년이다. 지금은 형과 눈조차 마주치기 싫은 기분이다. 설마 하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서클 활동도 없는 날 이렇게 부실해 틀어박혀 어둠에 잠겨가면서 가장 원망하는 사람이 바로 형이었다. 전혀 낌새가 없지 않았던가. 오히려 싫어하면 싫어했지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작금의 결과가 나온 것은 분명히 그 작자가 여태 위선을 부려왔던 것이 분명했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여자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이렇게 된다고 해서 그녀에게 메리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여간 모든 악의 원흉은 민서현이다. 무조건 그렇다.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 속의 담뱃갑이 거슬렸다. 한 대 빼서 피우고 싶었지만 들켰다간 골치 아파질 것이다. 안경알에 김이 서린다.


“피우고 싶으면 피워.”


옆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사양 말고.”


그가 양담배를 내밀었다. 시현은 멍한 눈으로, 흐린 시야로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남자가 친절히 불을 붙여 주었다. 라이터는 지포였다. 매끈한 은빛이 금속제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울 것 같이 보였다.


“언제부터 피웠나.”


“누구시죠.”


뿌연 안경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담배불빛을 응시하면서 되물었다.


“도와주러 왔다.”


“당신 앞가림은 잘 하면서요?”


그러자 남자가 웃었다.


“요즈음 주위에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지 않나?”


“당신 포함해서.”


“형을 너무 미워하지 마라. 그 녀석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처리했을 뿐이니까. 그 여자애 일도 말이다.”


선글라스 때문에 보이지 않는 눈이, 어쩐지 이 쪽을 보고 웃고 있을 것만 같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빗어 넘긴 단정한 머리 때문에 오히려 더욱 수상쩍어 보인다.


“지금 내가 붙잡을 건 너 밖에 없다. 그 여자가 더 이상 설치기 전에 빨리 날개 쥐어 줘서 돌려보내는 게 좋아.”


“날개?”


“몰랐냐? 그 여자 날개를 달고 있었어. 어쩌다 보니 네 형한테 옮겨 갔지만.”


“별로 재미는 없는 얘기군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재미가 없다는 건지 다른 의미인지 애매했다. 그가 휴대용 재떨이를 내밀었다. 시현은 당연하다는 듯 담배를 비벼 껐다.


“네가 있어야 돼. 나중에 보자.”


그리고 돌아서 부실을 나갔다. 남겨진 소년은 한숨과 함께 마지막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축축한 공기 속에 짙은 안개가 흐릿하게 퍼져 나갔다.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다. 서현은 오늘 또 착한 척 하느라 애들을 모아다가 시험에 대비해 공부하러 간다고 했으니 밤까지 혼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게 낫다. 이 넓은 집에 혼자 있으면 집도 자기처럼 속이 비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러면 소외감은 혼자가 아니다. 빈 집에 소년은 빈 마음을 가지고 소파에 앉아, 자기의 빈 마음속엔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그렇다. 지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지금의 자신은 분명히 이 집의 부속품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부속품이 아니다. 부속품이라고 생각될 만한 그녀에 대한 뉴런 활동의 연상 작용은 모두 과거이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어나지 않을 일들 뿐이다. 상상이나 망상일 뿐이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쁜 건 형이다. 그리고 그 여자도 세트다. 그녀가 나타난 후 늘 침착해 보이던 그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호들갑스러워졌고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친구들은 전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어쩌면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약간 짜증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날개? 아마 뭔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것 중에 형에게 옮겨간 것이 무엇일까. 옮겨갔다는 것은 가져갔다거나 빼앗았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그는 문득 요전 아침에 침대에 함께 누워 있던 그들을 떠올렸다.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것 같았다. 그런 주제에 지민이까지 꿀꺽하려 한다는 소린가?


“꼬맹이 주제에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누군가 뒤에서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껄끄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안 나갔어요? ……옷 제대로 입어요.”


속옷 위에 목욕 가운을 엉성하게 입은 것을 보고 시현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이 집에 그런 것까지 걸칠 목욕탕이 있는 건 아니다. 여자들의 허영심에 대해 투덜거리던 그는 갑자기 속에 흘낏 보이는 그녀의 가슴 굴곡에 예의 그 ‘같이 누워 있었던’ 장면이 겹쳐 떠오르자 또다시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형하곤 무슨 사이에요?”


“분명히 그런 망상을 했었지, 방금 전에.”


이번엔 그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았죠?”


“그 남자랑 만났지?”


노래보는 눈이 섬뜩했다. 여름이지만 전설의 고향을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짐짓 모르는 척했다. 어쩐지 인정했다간 그대로 어깨 위가 날아가 버릴 듯한 공포가 덮쳐왔다.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여자가 작은 콧소리와 함께 웃었다.


“거짓말.”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상하게 뇌는 냉정했다. 그의 전두엽은 아마 자신의 다리가 이대로 일어나 도망치려나 보다 하고 차분히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판단 아래 그것을 멈출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


“찾아왔잖아?”


역시 다리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았던 듯 일어나자마자, 아니 그 말을 듣자마자 두 다리는 서로 교차하며 몸의 균형을 잃게 했고, 곧 시현은 마루에 넘어졌다.


“누가 잡아 먹냐. 아니면 그 자식이 뭐라고 지껄인 거야?”


다리는 완전히 통제를 벗어나 침묵해 버린 것 같다. 그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 정말!”


짜증이 확 난 듯 그녀가 외쳤다. 그리고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래. 예상 못한 상황에 마주치면 사람이 이렇게 되지. 예상 못했어? 난 네가 알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뭘?”


겨우 입이 떨어졌다. 단 한 음절을 부정확한 발음으로 그는 발화했다.


“너, 진짜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한 거야?”


주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여자가 이를 꽉 깨물었다. 화가 난 모양이다.


“귀신도 아니야!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기다려.”


그리고 그녀는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시현은 그렇게 마루바닥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이 돌아왔다. 대체 저 여자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쨌든 그녀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만큼 그 붉은 빛이 도는 눈은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분출하는 피를 보았다. 형은 무엇을 보았을까?


어쩌면 지금의 형은 형이 아니지 않을까? 형을 해치우고 저 여자가 대역을 준비했을 수도 있다.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키워드는 ‘날개’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 움직이고 있고 그 결과로 이 가족은 파괴될 지도 모른다. -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여자가 헐렁한 커다란 티에 반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말했다.


“안 파괴해.”


“……어떻게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죠?”


“집중해야 겨우 한 명 분, 직전의 생각을 대충 알 수 있는 것 뿐이야. 나라고 해서 전능하진 않다고.”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라피스라고 부르지. 그 이상은 너한텐 말 못 해줘.”


“형한텐 가르쳐 줬나요?”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에 열이 확 올랐다.


“왜 언제나 그 녀석만! 이라고 생각했지?”


“남의 머릿속 함부로 들여다보지 말아요!”


“이번엔 그런 거 아냐. 네가 생각하는 건 뻔하거든. 기본적으로 그거란 말이지. 카인 콤플렉스. 무의식중에 안 좋은 일은 다 형 책임으로 돌리진 않아?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그런 거라면 창피한 일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형의 잘못도 일정 부분 있을 것이다. 그게 확실하다.


“둘이 사귀니 마니 하는 것도 그 꼬맹이는 우유부단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어. 아가씨가 갈궜단 말야. 나에 대해서 까발리겠다고. 체면상 도무지 거절할 수 없었겠지. 한 마디로 다 하지민이 잘못이야. 오케?”


“그게 더 안 좋아.”


“그렇겠지. 하지만 저 나이 때 여자애들은 의외로 마음이 금방금방 바뀌거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사실 지금 민서현이 하는 짓을 보면 예전에 그 애가 좋아하던 모습은 간 데가 없어. 우왕좌왕하고 이상한 여자 - 내 입으로 이러긴 좀 그렇지만 말이지, 그 여자한테 막 휘둘리고 뻑하면 짜증이나 내고 말이야. 안 그래? 그런데 이미 그런 게 고려 대상에서 벗어나 버린 거야. 본말이 전도된 거지. 좋아하기 때문에 사귀고 싶은 게 아니라 사귀는 것으로 자기가 민서현이를 좋아한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거라고. 그런 건 얼마 못 가. 넌 더 유리해. 그 꼬맹이가 평소에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잘 알잖아? 벤치마킹하면 되는 거야. 철저하게 여자애가 좋아할 만한 모습을 보여 주라고. 이란성이지만 쌍둥이니까 외형도 크게 차이 없고.”


시현은 중간부터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었다. 라피스가 말을 끝내고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라피스가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이 소년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역시 이 형제 보통 녀석들이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날개를 되찾으려면 이 녀석을 이용하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


“어때?”


재촉해 물었다. 시현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게 되면 목표물인 민서현 주위의 공기는 상당히 크게 흐트러지게 될 것이다. 진짜로 지민이 그런 시현에게 넘어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그만 동요를 가지고 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상황에서의 간단한 접근만으로도 서현은 지금까지처럼 귀찮지만 필요한 놈들을 계속해서 불러낼 것이다. 길은 그 곳에 있다.


“나라면 도와줄 수 있어.”


귀에 속삭였다. 그 때 갑자기 시현이 몸을 돌리며 그녀의 몸을 밀쳐냈다.


“안 돼.”


“뭐가 안 돼?”


속으로 움찔하며 라피스가 말했다. 시현의 눈이 쓸쓸해 보였다.


“안 돼요. 그래서 잘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지민이는 형이랑 만나는 게 될 테니까.”


“말했잖아. 여자애들은 금방 생각이 바뀐다니까! 먼저 사귄 후에 네 성격대로 나가도 문제없어!”


“그렇게 마음이 자주 바뀌는 애라면 또다시, 곧 내가 아니라 다른 남자를 찾을 거예요.”


그 순간 라피스는 느꼈다. 귀찮은 일이 벌어졌음을. 이번엔 왔다느니 기분 좋게 외칠 시간이 없었다. 재빨리 주위를 ‘흔들었다.’ 시현은 공기가 무거워진 것을 눈치챘다. 발밑이 진동하면서 마치 다른 공간이 되는 듯한, 그 형이 지금까지 세 번 감지했던 그 변화가 왔다. 그리고 곧바로 빛의 기둥이 지붕을 뚫고 둘의 눈앞에 떨어졌다.


“하늘을 뚫는다는 건 은유적인 표현이지.”


비는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고열이 대기 중의 구름을 모두 날려 버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빛이 사라진 곳에는 학교에서 보았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정말 짜증나게 등장하네.”


라피스가 말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시현은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그의 무의식이,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슈퍼에고가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예상을 한 모양이다. 저 귀찮은 여자의 말대로 미리 예측한 상황엔 놀람이 덜한 것 같다.


“이제 도와줘야겠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지 않아?”


남자는 라피스를 무시한 채 시현에게 물었다. 소년은 입을 다물고 그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절대 안 돼. 민시현, 내 말 들어. 저 자식 솔직히 말하면 나보다 몇 배는 악질이야.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라고! 필요한 게 있으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지 신경 안 쓴단 말야!”


하지만 시현은 남자 쪽으로 돌아섰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다 틀렸다고 생각한 그녀는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난 아예 인간이 아니니까 상관없어.”


서현이 없으면 조무래기는 몰라도 저 남자하고는 싸우기가 힘들다. 이기지 못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날개는 그 꼬맹이가 들고 도망갔으니까. 어째서 저 남자는 인간인 주제에! 인간인 주제에 인간 같지가 않은 거냐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생 제르맹 같은 것도 아닌데!


“아까 한 말로 분명히 마음 정했어요.”


남자의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소년이 똑바로 말했다.


“라피스 씨는 나보고 형이 되라고 했죠? 그 순간 나한테는 적이 되는 거예요.”


“들었지? 그렇단다.”


남자가 히죽거리는 것이 굉장히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토키와!”


라피스가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남자는 왼손을 들어 가볍게 쳐냈다. 그리고 균형을 잃어 바닥에 쓰러진 그녀에게 말했다.


“내 소개는 내가 하고 싶다.”


곧 라피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을 털며 일어섰다.


“초면엔 자기소개가 중요한 거야. 애초에 했어야지.”


“네가 할 소리냐. 너도 꽤 늦게 하지 않았어? 너 같은 여자한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런 건 신경도 안 쓰니까. 하여간 민시현 군. 나는 토키와 시게루라고 한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잠시 내려다보던 시현이 그를 맞잡았다.


“일본인인가요?”


“그냥 최근 쓰는 이름이야. 신경 쓸 것 없어.”


“역시 아직 그 아저씨 밑에 있군.”


헝클어진 금발을 등 뒤로 넘기며 라피스가 말했다.


“그 재수 없는 이름 빨리 바꿔라.”


“미안하지만 이번엔 좀 오래 일하게 될 것 같아서.”


그 때 현관이 열렸다. 라피스의 입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황한 것 같다. 그렇다. 당황했다. 분명히 지금 이 공간에는 누가 들어올 수 없다.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라도 이 공간 형태의 모체가 된 그 집으로 갈 뿐이지, 이 곳은 완전히 별개의 공간인 것이다. 하지만 곧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른팔에 뻗어 나온 날개를 드러낸 채 서현이 서 있었다.


이렇게까지 이 ‘꼬맹이’가 반가운 적이 없었다.


“이번엔 한 패냐?”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으로 서현이 말했다. 그러다가 그 ‘한 패거리’와 함께 서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뭐 하는 거야?”


“그래, 형. 그게 날개구나.”


“저 아저씬 누구야? 그리고 너……. 아는구나.”


“이 사람, 이 여자의 적이야.”


“적입니다.”


토키와가 웃으며 덧붙였다. 시현으로서는 자기 말에 서현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머리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완벽’에 가장 가깝다고 느낀 형을 자신이 동요시켰다는 것이 일종의 쾌감이 되어 전신에 소름을 돋게 했다.


“야, 꼬맹이. 이 자식들 진심이야. 가까이 가면 안 돼.”


여전히 입은 웃고 있었지만 라피스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 서현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깨달았다. 날개가 완전히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이상 토키와와 붙는 건 무리라는 것을.


“그럼 오늘은 선전포고하러 온 거니까 이제 집에 가야겠다. 좀 늦었고. 더 이상 머무르면 실례지. 그렇지?”


시현이 웃었다.


“다음에 뵙죠.”


토키와가 웃었다. 그리고 서현의 옆을 지나쳐 당당히 문을 닫고 나갔다. 직후 애매한 중력 감각은 사라졌다.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알게 된 소년은 그대로 웃음을 머금은 채 돌아서 계단에 발을 디뎠다. 쌍둥이 형이 계속해서 부르는 것을 무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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