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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Cercatori

2007.02.17 05:50

Evangelista 조회 수:1432 추천:9

extra_vars1 방랑하는 유대인 
extra_vars2 C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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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카스파 하우저 사건 (7)




제 3의 부분은 파토스다.
파토스란 무대 위에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 또는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B.C.384 ~ B.C.322), 시학De Arte Poetica; 제 11장




떠나오기 전 라피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라피스는 누님을 만났을 때 그냥 취재를 위해서 왔다고 말하라 주문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럴 수 없게 돌아가고 있었다. 누님이 퓌러 목사와 간단히 통성명을 한 뒤,


“라피스도 막 나가기로 한 모양이네.”


라고 대뜸 말했기 때문이다. 휴가를 낸 이후 지금까지 줄곧 서현 씨를 쫓고 있었다고 했다. 마음에 걸린다. 내가 아는 누님은 아는 것은 많았지만 호기심에 관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즐겁고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사람이 굳이 여기까지 쫓아왔을 리는 없다. 무언가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들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한국어로 퓌러 목사에게 유성연 씨와 리나, 그리고 나를 부탁한다고 말하고서 가 버렸다. 자신 있는 발걸음이었다. 서현 씨가 어디로 가든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퓌러 목사의 방 침대에 나란히 누운 유성연 씨와 리나를 바라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를 생각했다. 유성연 씨는 그 이후 줄곧 기절한 상태고 리나는 계속해서 덜덜 떨더니 순간 탈진한 듯 쓰러져 버렸다. 내가 그를, 누님이 그녀를 업고 집으로 들어왔다. 퓌러 목사는 이제 안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은 좋지 않았다. 목사는 서현 씨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츠 퓌러가 돌아왔다. 목사가 웃으며 그를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은 여기에서 먹고 가게 될 것 같았다. 문득 목사가 카츠에게 야채를 잊었으니 미안하지만 다시 시장에 갔다 오라고 시키는 것이 들렸다. 바람도 쐬고 카츠라는 소년을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따라가겠다고 했다. 노인이 힘없이 만류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온 이상 호랑이 그림자 정도는 보고 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집에서 나오자 그제서야 이 소년이 아직 한국어가 미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차 하면서 말없이 걸었다. 카츠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갑자기 카츠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한국어는 잘 하니까.”


깜짝 놀랐다. 소년의 눈이 불그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제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시지만 저도 다 알고 있어요. 데 비바체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 거짓말을 한 적도 꽤 많고요.”


“너는…….”


말을 하려다 잠시 호흡을 삼켰다.


“너는 인공 인간이냐?”


“네.”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기가 자연의 법칙에 의한 생태계 외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나 같이 비교적 낙천적인 인간이라면 웃으며 넘어갈 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 같이 비교적 낙천적인 인간이라도 그런 걸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보통 인간들과 근본이 다른 것이다. 게다가 전례 - 카스파 하우저를 보았을 때 자기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일 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공포가 언제나 몸을 무겁게 짓눌러올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그 압박을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


“깊이 생각하면 골치 아픈 일이 분명히 있다.”


카츠가 걸으며 말했다. 금속제 안경테에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해 주신 말씀이에요. 어쩌면 그 분은 제가 자신이 인공 인간이란 걸 알았을 때에도 방황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하셨을 지도 몰라요. 좋은 분이세요. 폐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소년은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가 포장된 길을 따라 조용히 걸었다.




돌아가니 리나는 깨어나 있었지만 유성연 씨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퓌러 목사는 일단 추이를 보자고 한다. 서현 씨와 만났을 때 무슨 일인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도대체 그 무슨 일이 무엇이었는가는 알 수 없다. 유일하게 현장에 있었던 리나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만은 대답하고 싶지 않아했다. 깊이 잠이 든 거라 곧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문제없겠지만 이것이 길어졌을 때 빈으로 갈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스테이크를 먹으며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리나가 내 팔을 잡고 힘없이 웃어 주었다.


“걱정 마……. 닷새 정도 후엔 일어날 거야.”


나도 따라 웃어 주었다.


“리나…….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카츠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나쁘게 말하면 우리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목사가 카츠와 나를 번갈아 보며 자제할 것을 부탁하는 것 같았다. 그 때 카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식욕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역시 소년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감추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모른 척 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서로가 상대를 속이고 있다. 카츠가 분명 더 힘들 것이다. 목사는 카츠가 비밀로 하고 싶은 것을 모르지만 카츠는 목사가 비밀로 하고 싶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 가족애가 갈 길을 잃은 적막한 가정이 되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본사 사장에게 분노가 생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많은 것을 알게 된 다음엔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이 없는 한 나는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저 부자 사이보다 더 불행하다. 사는 것이 고통인 이유는 살면서 알아가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왜 이 자리에서 리나가 괴로워하는 것을 힘들어하며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네가 힘들다면 말하지 마. 네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건 나도 어렴풋이 이해가 가니까. 하지만 더 이상 힘들어하지 말고 참기 힘들 땐 나한테 기대.”


“너도 고통스러울 뿐이야.”


순간 그녀의 표정이 움찔 하더니 내 팔을 세게 뿌리쳤다.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자르며 말하는 리나는 너무나도 냉정했다. 그녀가 의자를 넘어트릴 기세로 일어섰다.


“왜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신경 써 주고 있는 건 내 쪽이야. 뭘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거야? 이건 영화가 아냐. 설령 영화라고 하더라도 네가 주인공이란 생각은 하지 마. 여러 가지로……. 그래, 나 알고 있어. 목사님을, 삼촌을, 나와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있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한지도 충분히 알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데 비바체가 널 죽일 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런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로 돌아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악재를 각오했다거나 한 건 아니다. 다만 내가 그 말에 신경 쓸 수 없었던 건 리나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시선과 하는 말 모두가 너무나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알려고 하는 거야? 몰라도 살 수 있잖아? 무지하고 무력해도 사람은 다 살아가잖아?”


“미안해.”


차마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식탁에 시선을 떨구고 나는 사과했다. 리나 앞의 식탁보에 물방울이 떨어져 젖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우리는, 나는 무력하다. 오늘 하루 종일 리나를 걱정하면서도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다. 아까부터 고민하던 문제가 괴롭게 폐를 찔러왔다. 그래서, 그들이 뭘 하고자 하는지 알아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유성연 씨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아서 일단 오늘은 퓌러 목사의 집에서 재우기로 했다. 의사소통을 위해 카츠가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카츠는 돌아가려다가 말했다.


“미안해요. 확실히 깊이 생각해서 힘든 일이 있겠지만 당신들 문제는 생각하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녀를 잘 달래 줘요. 난 누구에게도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어요.”


“카츠. 우리는 무력한 거냐?”


소년이 등을 돌린 채 현관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우리는 그냥 잡초일 뿐이에요. 뽑아내도, 갈아엎어도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아요.”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기운 없이 침대에 앉은 리나가 안경을 벗고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누르고 있었다.


“나, 샤워 할게.”


그리고 일어서서 조금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샤워실을 향해 갔다. 그 모습을 나는 너무도 울적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스스로를 질책했다. 자책감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니 어쩐지 그건 그저 분위기에 휩쓸린 감상에 불과한 것 같았다. 본심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는 것 아닐까. 아니, 틀림없다. 나는 그저 알려고 해선 안 된다는 개념만 가지고 있지 정확히 무엇이 리나를 저토록 화나게 했는지 모르고 있다. 하지만 리나가 원한다면……. 그것조차도 알고 싶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담배가 보였다. 유성연 씨 것이었다. 최근 거의 피우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불을 붙였다. 눅눅한 여름 공기 사이로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퍼져 나간다. 한 사람의 존재가 희석되는 것처럼 연기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리나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떨렸다.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말했다.


“여러 가지로 미안해.”


“괜찮아.”


무덤덤하게 그녀가 대답한다.


“너무 들떴던 것 같아. 앞으론 조심할게. 울려서 미안해.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몰라. 네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알 수도 없어. 하지만 바란다면 난 아무것도 몰라도 좋아. 더 이상 어떤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도 괜찮아. 나는…….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울리지 않을 거야…….”


어느새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애인 놀이 그만 하자.”


연분홍빛 입술에서 흘러나온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장을 멈출 듯이 찔러 들어왔다. 몸을 떼고 얼굴을 보았다. 웃고 있었다. 서글픈 눈으로 처량하게. 분명히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나는 내 마음을 읽은 듯 한 번 더 말했다.


“우린 연인이 되면 안 돼.”


여전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분명히 내 뇌는 그렇게 전신의 신경에 지시했다. 하지만 어느새 몸이 마음대로, 내 팔과 다리가 마음대로 그녀를 침대에 쓰러트리고 있었다. 입이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리나도 변함없는 표정으로 뭔가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몸이 내 제어를 벗어났던 것일까.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없었다. 무엇인가에 의해 강제로 움직여지고 있는 내 손이 거칠게 리나의 잠옷 상의를 벗겼다. 단추 하나가 떨어져 바닥에 튕겨 굴렀다. 하얀 피부와 봉긋 솟아오른 가슴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로지 단지, 보이는 것만 보고 있었다…….


시야가 갑자기 변했다. 목이 움직인 것 같았다. 리나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힘겹게 웃는 표정, 그러나 아까와 달랐다. 눈물이 뺨을 타고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온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그리고 힘이 빠졌다.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쳤다. 여전히 리나는 침대에 쓰러져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걸까. 내 몸은 방 밖으로 나갔다.


복도 끝에 있는 창 밖으로 목을 빼고 담배를 피웠다.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아니, 나는 방금 전에 뭘 했던 것인가. 울리지 않겠다고 말하자마자 다시 나 때문에 울고 있는 리나를 보고 말았다. 자괴감이 9월의 태풍처럼 공허한 마음을 휩쓸고 지나간다.


“연애는 환장이니라.”


어느새 내 뒤에 나타난 서현 씨가 말했다. 놀랄 기운도 없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그대로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그는 빙긋 웃고는 계단을 통해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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