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눈 (원고지 약 100매분 개작)

2009.03.14 21:14

Evangelista 조회 수:1464 추천:3

extra_vars1 121648-5 
extra_vars2 15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114712|105201 
extra_vars6 1239206827|1242081275 
extra_vars7
extra_vars8  
extra_vars9  

본 작품은 과거 써서 이 게시판에도 올렸던 「눈」을 졸업시 졸업작품 제출용으로 개작한 것입니다. 당시 hwp 10포인트 A4 3매분이었던 것이 A4 12매분으로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그 때 이후 발견한 문제점들도 수정했습니다.


어쨌든 문예창작과의 졸업사정에서 합격한 물건이니 조금이나마 글을 쓰시려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


#1.




밖에 비가 온다. 속이 좋지 않다. 점심 때 먹은 꽁치가 잘못 된 모양이다. 목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주욱 더부룩한 것이 가시가 걸렸음에 만무한데도 가시가 걸린 것처럼 신경이 쓰인다. 헛트림이 슬슬 나오고 어쩐지 열이 나는 듯 따끔따끔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토할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 다행이다. 화장실이 공용이라 1층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런 수고를 하면서 내려가고 싶지 않다.


앉아 있자니 무릎이 살살 아파 온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뭘 하다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더욱 사실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모른다기보다는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의사는 내게 연골이 조금 나갔다고 했다. 무리한 운동은 피하는 게 좋을 거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기 전이나 후나 나는 딱히 무리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여기는 서쪽 바다에 면해 있다. 마침 이 하숙집이 시내에서도 조금 높은 곳에 있는데다가 내 방이 바다를 향해 배치되어 있다 보니 어둑어둑해지면 해안에 늘어선, 들어오고 나가는 어선들의 불빛이 휘황찬란하다. 내게는 마치 그것이 불야의 환락가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담배라도 한 대 피워 물고 그 쪽을 향해 내뿜으면 붉고 노랗고 푸른 불빛이 그 연기를 뚫고 이 편으로 쏘아지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게 굉장히 몽환적인 풍경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보면 이번엔 서쪽 도시가 자랑하는 정돈된 시가지의 전등들이 눈에 한꺼번에 들어온다. 그 쪽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 곳은 빈틈없이 채워진 데다가 또 너무 밝았다. 몰래 도망 다니는 쥐새끼 한 마리 숨게 해 줄 여유도 없어 보였다. 아니, 모두에게 여유가 없다. 저 사람들은 밤에도 일한다. 밤에도 술을 따르고 요리를 만들어 내 놓고 테이블을 청소하며 몸을 판다. 원래 인간이란 건 낮에 일하고 밤에 놀도록 만들어졌다. 저들은 그걸 모른다. - 여기까지 생각하자 급히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역시 사람은 밤에 놀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지갑을 챙겨들고 하숙 근처의 술집으로 향했다. 시가지는 좀 멀고 비싸니까.


술집 주인은 인상 좋은 아저씨다. 물론 속으로는 왜 밤에 일을 하느냐고 끊임없이 묻는다. 하지만 이 사람은 (들리지 않으므로 대답할 수도 없겠지만) 대답 없이 늘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다. 야간에 일하는 사람들 중 내가 유심히 살펴본 부류는 늘 최소한 하품을 한 번씩은 했었다. 그러나 주인은 전혀 그런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이 곳에 올 때마다 늘 생각을 수정하게 된다.


밤에 일하도록 생겨먹은 사람도 있긴 있는 모양이라고.


맥주는 시원하고 정종은 따뜻하다. 이 가게는 여러 종류의 술을 갖추고 있어서 그걸 쭉 진열해 놓은 선반이 매우 보기 좋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걸 다 사 마셔 볼 돈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문제이다. 나는 방세나 세금, 공과금을 밀려 안 내는 인간은 아니다. 이것은 스스로 약속한 하나의 룰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을 위해 쓸 돈이 언제나 모자라다. 월말이 되면 어떤 반찬이 되었든 하루 세 끼를 다 먹으면 그 날은 만족스러운 호화판이다. 확실히 말해서 내 봉급은 쥐꼬리다. 하루는 월급봉투 속에 정말로 쥐꼬리가 들어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투덜거리면서 봉투를 열었을 때 스쳐지나간 환각 같은 것이다. 누군가 내게 강박증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한 기억이 나는데 이런 사례를 보자면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결단코 나는 정신병자는 아니다. 왜냐 하면 내게 그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달 까지는 그래도 친구에게 얻어먹기라도 했다. 그 녀석은 몹시 착해서 주위 사람들이 곤란한 모양을 보고 지나치질 못한다. 어떻게 내 사정을 아는 건지 내가 돈이 떨어질 때쯤 자기 시야에 들어온다 싶으면 그대로 식당에 데려가는 것이다. 맨 처음 그 대접을 받았을 때에는 정말 눈물이 다 났다.


그러나 이번 달부터는 그만두었다. 놈은 내게 마지막으로 밥을 사 준 사흘 후 결혼했다. 와이프를 보니 아니나다를까 심각한 수준으로 선한 여자였다. 끼리끼리 노는 셈이다. 이 부부라면 재산을 주위 사람들에게 다 퍼다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축도 않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친구가 돌아다니는 길 근처에도 가지 않기로 했다. 보자마자 식당에 끌고 갈 것이 뻔하고 배가 고픈 난 염치도 모르고 또 얻어먹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남을 배려할 줄도 안다.


그저께 월급을 받았다고 돈을 좀 쓴 모양이다. 취기가 확 오른다. 계산을 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연골이 나갔다는 무릎이 후들후들 떨린다. 이게 술에 취해서인지 무릎이 좋지 않아서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 사실 알아봤자 소용없다. 상관도 없다. 내가 하는 업무는 책상에 앉아서 돈 세는 일이고 돌아다닐 꺼리는 없으니 밥줄이 끊길 이유조차 없다. 그러니까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대에 무너지듯 쓰러졌을 때 퍼석 하고 침대 한 쪽 다리가 금이 갔거나 부러졌거나 하는 느낌이 왔는데 그것도 상관없다. 하숙 주인이 발견하기 전에 대충 못으로 박아 두면 되는 일이다. 그 노인은 집이 시가지에 있어서 수금할 때 빼고는 잘 오지도 않는다. 덕분에 내게도 다행인 일은, 그 기름이 질질 흐르는 못생긴 면상을 자주 안 봐도 된다는 점이다.


날 포함해 이 하숙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은 첫째, 주인 영감의 얼굴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못생겼다는 것.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아들과 딸과 손자와 손녀들은 그리도 미남 미녀들일 수 있는가 하는 따위의 것들이다. 아주 가끔, 영감보다 낮은 빈도로 그 희한한 가족 전원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마다 우린 그들의 유전자 구조에 대해 토론하기 바쁘다.


하지만 그보다 나는 막내 손녀가 더 신경이 쓰였다. 올해 스물 셋인 그녀는 이 하숙 근처에 살며 하숙인들에게 식사를 내 주는 일을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도대체 그 DNA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엄청난 미인이다. 아마 다들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짝이 없는 하숙의 남자놈들은 죄다 그녀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덤으로 집이 부자라는 옵션까지 붙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입주한 지 삼 년이 되었다는 세 칸 건넛방의 청년도 전혀 말을 붙여 볼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는 무서우리만치 냉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2.




아침은 먹지 않았다. 14인치 브라운관이 소식을 전한다. 귀를 기울였다. 역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근 이사흘 간 내가 계속해서 바라는 것은 전쟁이다. 계속해서 전쟁을 기다리고 있다. 전쟁이 나면 혼란을 틈타 약삭빠르게 돈을 챙기는 것도 가능하다. 잘 도망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내가 이 곳으로 오기 전 북쪽 도시에 전염병이 돌았다. 그 때는 그렇게 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서쪽 도시에 부임하고 얼마 후 그 병이 고향인 동쪽 도시에 옮겨갔을 때에는 서쪽 도시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혼비백산하며 전신에서 피를 뿜고 죽는 사악한 병이라고 말했다. 짐을 챙겨 돌아가려 하자 갑자기 시장이 서쪽 도시의 성문을 모두 봉쇄했다. 그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 병이 진정될 때까지는 결코 문을 개방하지 않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시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튿날 동쪽 도시 출신 사람 몇이 성벽을 넘어 탈출하려다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들은 사실 스파이였다고 했다. 묘하게 기운이 넘치는 뉴스 아나운서는 동쪽 도시가 병원균을 서쪽 도시로 살포할 계획이었다고 침을 튀기며 떠들어댔다. 시장은 씩씩하게 내 고향 사람들을 향해 선언했다. 서쪽 도시는 동쪽 도시의 악당들을 쓸어버리고 평화를 구축할 것이라고. 하긴 생물병기라는 것이 참 쓸 게 못 되는 물건이기는 하다.


골치 아픈 것은 동쪽 도시 출신 사람들을 시 자체에서 차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사 와서 시가지 한켠에 자리를 잡은 지 단 2주일 만에 쫓겨났다. 그리고 타지 출신자들이 사는 이 하숙에까지 흘러들어왔다. 다행히 사장은 나를 자르지 않았다. 대신 봉급을 삼 할 정도 잘랐을 뿐이다. 시의 개정 근로기준법 조항상 지금까지의 내 급여가 동쪽 도시 출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기준 최고치를 넘어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뭐, 그것은 좋다. 어차피 이 도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려면 일단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얼마 후 시에서 권고라면서 삐라가 날아들었는데 내용인즉슨 동쪽 도시 출신이라도 군에 입대하면 출신에 따른 불이익을 없애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학력이 되는 사람 중에는 이미 하급 장교가 된 녀석들도 있다는 정보를 마구 뿌려댔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병사라면 총알받이로 쓸 것이 뻔했고 장교에 대해서는 전혀 믿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대체 누가 적지 출신을 장교로 쓴단 말인가?


게다가 나로서는 군에 들어갈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무릎? 그런 건 상관없다. 발가락 세 개가 없는 녀석도 지원해서 붙은 걸 봤으니까. 하지만 하숙집 손녀가 군인을 싫어한다는 점은 심각한 요소이다.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녀가 싫어하는 짓은 할 수 없다.


그녀는 정말이지 군인이란 존재를 벌레처럼 싫어하는 것 같다. 근거도 있다. 예의 술집에 갔을 때 우연히 저편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걸 보았다. 그리고 군인들에게 심한 장난을 당한 것도 목격했다. 치마끈이 풀린 그녀가 날 발견하고는 도와달라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시선조차 보내지 못했다. 침묵했다. 총이 무서웠다. 군인들의 근육질의 몸도 무서웠다. 하지만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책망하는 듯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검은 눈동자. 그것은 깊이가 있었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마치 눈싸움을 하는 양 그녀와 서로 계속 바라보는 채였다.


그러던 차에 문을 열고 멋진 제복을 입은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장난질에 빠져 있던 군인들이 얼어붙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여자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문 밖으로 보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속이 좋지 않은 듯 새파란 안색으로 의자에 앉았다. 술집 주인이 물을 가져다 주었다. 물을 마시고 그녀는 주인에게 말했다.


“군인은 지저분해요.”


주인이 난처하게 웃었다.


이것이 근거이다. 확실하다. 싫어하면 싫어했지 좋아할 리가 없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병사들이 입은 군복만 보면 진저리를 쳤다. 하숙에서 입대하겠다는 사람이 나오면 당장 짐 싸들고 나가라고 언성을 높였다.


내가 이런 식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은, 술집 주인이 최근 내게 요상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당신 하숙네 관리인. 그 때 봤던 그 헌병대 장교를 좋아하는 것 같아.”


쓰잘데 없는 소리다.


“그 여자, 군인 싫어해요.”


피식 웃으며 나는 말을 받았다. 주인은 잠시 그대로 내 눈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주인은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녁 네 시 쯤 되면 손녀는 붉은색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식료를 사러 간다. 비번이라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슬금슬금 뒤를 따라 보았다. 그러다 어느 대로에서 신병들이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옆 골목으로 빠져 멀리 돌아갔다. 확실하다. 확실히 군인을 싫어한다!


그나마 술집에서의 그 사건 이후로 고민하고 있던 것은 그녀가 나를 비겁한 놈으로 보지나 않을까,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그 문제도 해결이 되었다. 예전부터 이틀에 한 번씩은 반드시 당근이 들어간 요리가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당근을 몹시도 싫어하는 터라 어떻게 해 줄 수 없는지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가리면 안 좋아요.”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즉답했다. 그 말 속에서 내 몸을 걱정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여자가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해서 날 좋아하는 것이라고 단정 짓고 혼자 착각하는 어리숙한 남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도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그냥 먹죠.”


하고 받자,


“그래야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짧게 대답했다. 이런 식의 대화를 나는 경험한 적이 있다.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입원했을 때 식욕이 없어서 식사를 거르려고 하자 간호사가 그랬었다.


“안 먹으면 안 낫는다.”


투정을 부려 봤자 씨도 안 먹힐 것 같아서 그 때도 나는,


“그냥 먹죠.”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간호사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야지.”


분명히 그 간호사는 내 몸을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 앞에서 당근을 썰고 있는 그녀도 같다. 날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호감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눈치챘을 때 나는 기분이 몹시 좋아서 흙 묻은 당근을 가지고 와도 통째로 먹어버릴 것만 같았다.


저녁은 카레였다. 감자와 당근과 양파가 썰린 채로 들어가 있었다. 고기는 한 점도 없었다. 시 전체가 전쟁 준비를 하는 데 휩쓸려서 준비하지 못한 것 같았다. 부자인 하숙 주인의 집안도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 역시 여유가 모자라게 되는 모양이다. 맹숭맹숭한 카레를 밥에 비비며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기도를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번에 한 것이 진짜 신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서는 아니다. 일종의 기분내기다. 하늘에 대고 궁시렁대고 나니 어쩐지 만족스러웠다.






#3.




이 하숙으로서는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다. 예의 헌병대 장교가 빈 방을 찾아 들어왔다. 시가에 있는 집이 물이 새는 바람에 수리가 끝날 때까지 임시로 있겠다고 했다.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놈에게서 느낄 수 있는 불안요소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그 강대한 적은 젊고(나도 젊으니 이건 문제가 안 된다) 잘 생겼고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지적이다. 동쪽 도시 출신으로 북쪽 도시에 무서운 병이 퍼지기 전부터 이 곳에서 군인으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자에게는 시의 전시특별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출신에 따른 불이익이 없다는 소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놈이 군인이라는 것이다. 녀석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자신이 내 연적이 될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그는, 많은 것을 갖추고도 한 여자를 차지하는 것만은 불가능하다. 만일 내가 조금만 더 착했더라면 전역하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보라고 권해 주었을 것이다. 세상 천지에 그녀를 손에 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만일 장교가 이 말을 들었다면 가차없이 상관에게 전역을 요청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내게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 지금까지 충실히 그렇게 살아온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한 친구를 배려해 앞에서 얼쩡거리지 않도록 주의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하지만 이번에만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 인생에서 발견한 가장 가슴 뛰는 대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나쁜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그 자식이 군인이라는 건 신이 내게 내려준 행운일 거라고 순간 느꼈다. 지금까지 어머니 말씀대로 착하게 살아왔으니 그 정도 쯤은 하늘이 허락한 것일 테다.


이렇게 나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장교는 늘 하숙에서는 평상복을 입고 자신이 군인이라는 걸 숨기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와 하숙의 모든 사람과 그녀마저도 그의 신분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놈은 좀 허술해서 신분을 완벽하게 가리지 못한다. 사람을 대할 때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 엄격하고 딱딱한 말투가 완전히 그가 군대의 장교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 하나 그의 실수는 언제나 목에 군번줄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바보 같은 일이다. 동네방네 ‘나는 군인이오.’ 하고 선언하고 다니는 셈이다. 어설픈 노력이 너무도 우스워서 한 번은 반쯤 장난삼아 지나치던 복도에서,


“그 군번줄은 왜 차고 다니는 거요?”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놈은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자기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이겠지. 그리하여 아무 대답도 않고 내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가,


“흥!”


하고 콧방귀를 크게 뀌고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아무래도 군인이라는 족속들은 자존심이 쓸데없이 강한 모양이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목에 그 군번줄을 걸고 다니는 걸 보면 말이다. 아마 내게 졌다는 패배감을 애써 무마시키려고 노력하는 듯하다. 누군가가 군인들은 로맨티스트라는 요지의 말을 남겼던 것 같다. 녀석도 그렇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쩔쩔매면서도 남자로서 자존심만은 지키고 싶다는 계산일 것이다. 의외로 순진하고 좋은 녀석이다. 하지만 순진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떠나서 시대가 시대이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리얼리스트인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방 안에서 혼자 히죽거리면서 승리를 맛보았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완전히 포기한 것 같았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하숙 내에서도 떳떳하게 군복을 입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장교 녀석을 의식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처음으로 그의 제복을 보았다. 그리고 영문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침대에 누운 채로, 의자에 앉은 채로, 회사에서 서류를 정리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그 불안감의 원인을 찾았다. 언제나 보던 인간이고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포함한다면 그 복장도 처음 보는 것은 아닌데 대체 뭐가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야간의 하숙 현관 등은 셀로판지로 싸 놓아 녹색을 띤다. 고민에 지쳐 술에 취해 들어왔을 때 나는 눈 앞에 장교가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위장하기 좋도록 녹색으로 물들인 놈의 군복을 보면서 또 속으로 이죽거렸다. 이 녀석에게 이겼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고민을 다 잊을 수 있었다. 놈에 대한 승리는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에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무언가 삿대질을 하면서 중얼댔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오며 비틀거리는 날 내려다보고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싶더니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넓은 등짝을 보면서 드디어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깨달았다. 시야를 물들인 녹색 사이로 확실히 보인 것은 그 놈의 회색빛 군복이었다. 착각하고 있었다.


문득 나는 그녀가 싫어했던 군복이 모두 녹색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녹색의 군복을 입은 남자는 그녀에게 있어서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맞다. 내 실수다. 군인의 제복은 모두 그 어지러운 숲의 위장색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나는 장교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 하면 놈의 제복은 회색이고 그렇다면 그녀가 싫어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


그 때의 스트레스가 어찌나 심했는지 난 다음 날 아침 피를 토했다. 위장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머리도 깨질 것 같이 아팠다. 비척대면서 그녀에게 가자 위장약을 하나 던져 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러한 사소한 것으로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채가지 못한다는 가정 하에 나는 여유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빨리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 빼앗기고 말 것이다.


“뭐 해요? 빨리 나가지 않고.”


어서 부엌에 가서 약을 먹으라는 이야기다. 아직까지 내 건강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 하나는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것도 회색 장교가 오면 다 끝날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가라니까요!”


그녀가 재촉하며 나를 쏘아보았다. 그 시선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술집에서 아무 것도 못한 채 모르는 척 앉아 있었던 그 때 원망하는 듯 바라보던 바로 그 눈길이다. 검은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계속 보고 있자니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완전히 매료된 채로 그녀가 나를 쫓아내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뒷걸음질 쳐 간신히 관리인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녀의 시선은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그녀는 미인이고 지적이고 상냥하다. 다른 사람들과 다소 의견 차이를 빚는 것이 이 부분인데, 그들은 그녀가 상냥하지는 않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까만 눈은 나를 치유한다.


위장약을 먹었는데도 속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영 이상해서 돈 크게 깨질 각오 하고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잠시 진찰을 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술 적당히 먹어.”


이제 동쪽 도시 사람이라고 의사까지도 차별한다. 의사란 무엇인가? 국경과 신분의 차이 없이 환자를 보살피고 구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분명히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회색에 겁에 질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트레스가 되어 위궤양이 생긴 것이다. 나도 아는 사실을 왜 30~40년 의사 생활을 한 이 노친네가 모른단 말인가? 이 도시는 뭐가 잘못됐다. 나도 소위 배운 놈이기 때문에 정치하는 인간들이 자기 욕심을 위해서 어떤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는 안다. 그러니까 시장이나 시 공무원들이 전쟁을 시작하겠다느니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것도 모두 이해한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이란 것은 그렇게 움직이도록 생겨먹은 물건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일반 시민들부터 술집의 종업원, 회사의 동료, 문방구의 사환까지, 심지어는 평등을 모토로 삼아야 하는 의사마저도 시장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아예 사람을 외톨이로 만들려 작정한 것 같다.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다. 이 시는 지금 계엄 상태다. 군인들이 득세하는 시기다. 하숙 옆의 옆 방 녀석도 얼마 전에 군인 누구누구에게 긴급사태라면서 자전거를 빼앗긴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 알겠다. 그 헌병 장교 놈이 어제 내 꼬라지를 보고는 나를 제거해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리라. 도무지 무슨 소리를 지껄여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놈이 내려다보는 표정이 험상궂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젠 볼 것도 없이 후딱 방해물인 날 말려 죽이든 태워 죽이든 해 버리고 속전속결로 그녀를 자기 애인이든 마누라든으로 삼을 생각일 테다. 이거 아주 곤란해졌다. 약자를 괴롭히는 나쁜 놈한테 제대로 걸렸다.


“젊은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자함을 가장하고 싱글벙글대는 이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봐.”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주름살투성이의 얼굴로 이마에는 반사경을 두른 채로…….


“선생.”


대답 대신 불렀다.


“왜애?”


목에 가래가 걸린 듯한 탁한 목소리로, 의사는 질질 끄는 듯한, 물결치는 파장으로 대답을 했다. 능청스러워 보였다.


“왜 내과의가 반사경을 착용하고 있는 거야?”


오랜만에 다른 사람에게 화를 냈다. 노인은 당황한 것 같았다.


“그 반사경으로 뭘 하려고 했어?”


“난 치과도 겸하니까…….”


“거짓말하지 마!”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뼈가 드러나 보이는 내 손이 찌잉 울렸다. 아팠다. 하지만 아프다는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약점을 잡아서 괴롭히는 녀석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기세등등해서 날뛰게 된다. 이건 내 생존의 문제다. 헌병 장교가 뒤에서 조종하는 악랄한 서쪽 도시의 시민들을 상대로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서 반드시 그 못된 책략을 깨트리고 그녀와 행복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봐, 왜 이래? 술이 덜 깼어?”


“난 취하지 않았어! 위궤양이야!”


소리를 빽 질렀다. 간호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내 양쪽 팔을 하나씩 붙들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여자들 쯤이야 쉽게 뿌리칠 텐데 몸이 많이 상해서인지 전혀 듣지 않았다. 아무리 몸을 뒤틀고 흔들어도 간호사들은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이 놈이 왜 이러는 거야?”


의사가 정면에서 내 눈을 응시했다. 마주보고 있자니 노인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토할 것만 같았다. 속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분명히 다짐했다. 이 녀석들에게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노라고.


그래서 나는 소화되다 만 것을 입 밖으로 내어 놓는 대신에 침을 뱉었다. 조준이 빗나갔는지 반사경에 그것이 묻었다.


“경찰 불러.”


의사 노인은 짧게 말하고는 반사경을 벗어내 침을 닦았다. 뒤에 들어온 간호사가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이제 정말 큰일났다. 공권력을 상대해야 하게 생겼다. 그건 무서운 일이다. 상대가 그 장교 놈 하나 뿐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으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시장과 맞붙는다면 소리소문없이 지상에서 사라질 게 뻔하다.


이에 나는 목표를 변경했다. 역시 자존심을 세우다가 죽는 것 보다는 목숨을 건지는 것이 급선무다. 다행히도 이들은 장교 본인이 아니라 뒤에서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인간들이니까 잘 설명하면 날 놓아줄 법도 하다.


그리하여 난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굴욕적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살기 위해서다. 생존 본능은 강한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이러는 것은 전혀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나는 가장 인간답게 살고 있는 셈이다.


“제가 취해서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전화번호를 누르던 간호사가 멈추고 내려다본다.


“요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너무 과음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머리를 땅에 쿵쿵 찧었다. 의사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노려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이대로 가면 없던 일로 해 줄 분위기다.


“제가 어르신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날뛰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봐 주십시오.”


“그것 봐. 내가 너 취했다고 했지?”


노인이 히죽 웃으니 누런 이빨이 보인다. 역겹다. 몹시 역겹지만 참아야 한다.


“알았어.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구. 알겠지?”


득의양양하게, 어린아이를 다루듯 의사는 말했다. 나는 몇 번이나 용서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굽신거렸다. 간호사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이 나지막이 들렸다. 아마 사내 주제에 자존심도 없다고 비웃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런 것에 휩쓸릴 내가 아니다.


약을 처방받아 나오면서 따라 나오는 것은 한숨이었다. 오늘은 정말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회색빛 장교의 더러운 계책은 나를 어찌하지는 못했다. 나는 위기가 눈앞에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행동했으며 그에 따라 포위망을 풀고 이렇게 도망쳤다.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나다. 참는 자가 이기는 자이며 마지막에 웃는 자가 이기는 자이다. 나는 이렇게 마지막으로 웃고 있다.


사무실에 들러서 일을 잠깐 보고 하숙에 돌아갔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 가까워진 때였다. 이 때의 나는 승리감에 한껏 젖어 있었기 때문에 헌병 장교가 얼마나 사악한 녀석인지 잠깐 잊고 있었던 것 같다. 현관에 서서 천천히 신발을 벗는 내 뒤에 나타난 그 놈은 걸리적거린다는 듯 등을 확 떠밀었다. 균형을 잃고 쓰러져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난 씨익 웃고 있는 녀석의 비열한 표정을 발견했다. 그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손바닥 안이야. 넌.”


끔찍하게 두려워져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방에 틀어박혔다. 햇볕이 방으로 비추고 참새가 짹짹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이불을 말고 그 속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못했다.






#4.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후로 며칠 동안 그 놈과 일당들이 날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간신히 마음도 평온을 찾아 갔다. 다만 복도에서 녀석과 마주치는 일은 극도로 피했다. 하는 수 없었다. 전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며칠간의 시간을 나는 어떻게 그 자를 상대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데에 소비했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역시 전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 혼란을 틈타 뭐든지 할 수 있다. 누군가 말했던가. 전쟁이 진짜로 발발하면 소대장들은 등 뒤를 제일 조심해야 한다고. 딱 그거다. 전쟁 때 난 총을 주워 들고 그 놈의 뒤로 접근할 것이다.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리면 그 틈에 탕! 하고 쏘면 된다. 이리하여 시장 일파는 속물적인 인간들이라고 경멸하던 내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을 응원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빨리 (내 고향이기도 한) 동쪽 도시를 괴멸시켜 달라고 방송국에 투고까지 했다. 신문사에도 엽서를 마구 뿌렸다. 그 많은 우편물들 중 실제로 공개된 것은 신문 구석에 실린 단 하나 뿐이었지만 그래도 몹시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출근길에 현관 바깥에서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장교 놈과 마주쳤을 때, 나는 신기하게도 몸이 하나도 떨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 얼굴을 보며 표정에 긴장이 풀렸다고 윽박질렀다. 실제로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그 눈빛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히죽 웃고 지나갔다.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그건 신의 뜻이다. 신의 뜻이 아닐지라도 이 도시의 뜻이다.


그리고 내 바람이 하늘에 닿아, 드디어 전쟁이 발발했다! 나는 열렬히 서쪽 도시를 응원했다. 전염병으로 피폐해져 있던 동쪽 도시는 허물어지기 직전이었다. 주위에 사는 고향 사람들이 험상궂은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적인 동쪽 도시 출신이 소란을 일으키면 재판 없이 교도소 행이다. 모두 그걸 알고 있다. 밥을 먹을 때 옆 자리에 앉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을 제외하면 내 생활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녀석은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다만 방위부대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들만 차례로 잡아들였을 뿐이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자식을 전쟁터로 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도서관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전쟁사를 모두 찾아 보았다. 후방에서 편히 쉬는 인간마저 끌고 나가 싸우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겨우 찾아낸 그 답은, ‘후방부대마저 전투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도시가 전선을 확대하게 만들면 된다. 현재로서 가장 적합한 것은 북쪽 도시이다. 북쪽 도시와 전쟁을 시작하면 된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영 무리이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또다시 도서관에서 책과 다투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공부가 즐거운 적은 없었다. 어렸을 때 학교 선생이 말했듯 진정 흥미를 느껴서 하는 학습이라는 건 효율이 좋다.


편 책을 얼굴 위에 얹은 채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굉장한 행복감이 들었다. 꿈에 나타난 그녀는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과하면 몸을 망치게 된다면서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 주었다. 실제로 그 맛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난 그 우유에서 아기일 때 경험한 어머니의 젖의 맛을 느꼈다. 그것은 달고 온후하고 포근했다.


그 날 저녁으로는 생선 구이가 나왔다. 좀 탔고 퍼석퍼석했지만 그나마 간이 잘 되어 있어서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전쟁이 터져 버려서 그런지 그녀가 약간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벌써 나흘이나 당근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와 당근에 관한 이야기를 - 그러니까 나는 당근을 싫어하지만 그녀는 내 몸 운운하며 계속 먹을 것을 권했던 그 일 이후로 거의 빠짐없이 나오던 당근이었다. 당근이 몸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근을 먹지 않으면 눈이 나빠진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 당근에는 눈에 매우 중요한 영양소가 들어 있다.


언제나 나를 쏘아보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당근은 꼭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흘이나 이것이 빠졌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녀 자신의 미를 이루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이에 대해서는 빨리 상의를 해 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나는 잠옷 바람으로 관리인실로 향했다.


어느 순간 조용한 밤의 복도를 타고 무언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내 방에서도 가끔 날 때가 있는 것이다. 이음새로 연결된 널빤지들이 서로를 마찰하며 울부짖는 바로 그 소리다. 마치 재앙을 예고하려는 듯, 지옥 바닥에서 끌어올려진 그런 소리로 느껴졌다. 주위의 모든 것이 경고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난 장교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안에서 여자의 애처로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기분 나쁜 일도 없다. 무언가에 홀린 듯 문을 열어젖혔다. 그녀가 장교의 몸 아래 깔려 있다. 흉터가 좀 있는 탄탄한 상체를 드러낸 놈은 나를 돌아보고는 욕설인지 무엇인지 지껄였다. 나는 흥분해서 달려들며 외쳤다. 당장 떨어져 이 거지같은 인간아. 너한테 그 자리는 어울리지 않아. 자격이 없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 순간 나는 내 방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떨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떠올려 보려 해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복도로 나가니 스산하니 조용했다. 그러나 조금 귀를 기울이자 곧이어 삐걱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발이 다시 그 방으로 향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연 그대로였다. 여전히 둘은 아까 하던 짓을 계속하고 있다. 그 놈이 다시 돌아보고 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키득거리며 웃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안광이 번뜩였다. 곧 나는 정신을 잃었다.






#5.




눈을 뜨니 침대 위였다. 완전히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행이다. 꿈이었다. 제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게 아니어서 정말로 신에게 감사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방을 나서자 북쪽 도시에서 온 건넛방 청년이 말을 걸었다.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런데 복도에서 귀신이라도 봤냐?”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소리인가 해서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어젯밤에 복도에서 삐그덕대는 소리가 나서 무서워 잠을 못 잤다니까. 새벽에 일어나 보니까 네가 바닥에 그대로 뻗어 있고. 귀신 본 거 아냐, 정말?”


어떤 귀신 이야기를 해도 이것보다는 무섭지 않을 것이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며 식은땀이 흘렸다. 그게 꿈이 아니었다. 먼저 들어가 있던 녀석이 나왔다.


“아무리 낡았다고 해도 귀신은 좀 아니지. 내가 먼저 쓴다. 급해서.”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 녀석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제 정말 답이 없다! 남은 길은 전력으로 그 더러운 장교 놈을 북쪽 도시와의 전장에 보내 버리는 것이다! 이것만은 위험해서 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빨리 이 인간을 땅 위에서 지워 버리는 일이다. 재빨리 시장에 나가 검은 옷과 두건을 준비했다.


계획은 완벽하다. 시장의 저택에 숨어들어서 난폭한 짓을 한 후에 북쪽 도시의 스파이라고 정체를 밝히고 도주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분노한 시장은 선전포고를 할 테고 시내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가 전선에 투입된다. 살아 돌아오든 죽어 돌아오든 당분간은 이 근처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것만으로도 효과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낮이 되었다. 회사에도 나가지 않고 밤에 할 일을 시뮬레이션했다.


해가 저물어갔다. 슬슬 긴장되어오기 시작했다.


밤이 되었다. 하숙 근처 으슥한 골목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인생을 건 위대한 도박이 지금 시작되려 하고 있다. 이 거사의 결과에 따라 내가 승리를 거머쥘 것인지 패배자가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 하지만 마음속의 결론은 하나뿐이다. 나의 앞길에는 오로지 승리밖에 없다. 그 검은 눈동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그 시선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물 주는 것을 잊은 열대식물처럼 말라 비틀어져 버리고 말 테니까.


어두침침한 길만을 따라 시가지로 향했다. 골목 저편 너머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과연 불야성이다. 내일이면 어마어마한 뉴스에 놀라 모두 기절초풍할 것이다.


드디어 시장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 병사들이 깔려 있다. 저 포위망을 어떻게 뚫을지가 관건이다. 천천히 주위를 돌며 빈틈이 없는지를 살폈다. 그 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바람 빠지는, 아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보이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한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보니 비행기가 몇 대 떠 있었다.


폭격기였다.


폭격기들이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듯 싶더니만 곧 의식이 흐려졌다.




햇빛이 비추는 듯하여 눈을 뜨자 병원이었다. 침대 위에서 배와 팔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이 곳은 정신없이 바빴다. 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번갈아 코를 자극했다. 뛰어다니는 간호사를 붙잡고 어찌 된 일인지 물으려 하자 대답 대신 신문의 호외를 휙 건네주고 갈 길로 가 버렸다.


북쪽 도시가 기습했다. 시장은 지금부터 전선을 확대해 전면전에 들어가겠다고 선포했다. 어쩐지 허무해졌다. 숙원이 이루어졌는데도 도무지 성취감이 없었다. 다쳐서 그런지도 모른다.


폭격에 튄 돌에 맞아 뼈에 금이 간 거라고 설명을 들었다. 좁은 골목에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다치는 것으로 끝난 것이라며, 의사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날 밤의 시가는 조각난 시체들이 굴러다니는 아비규환이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어쩐지 치료해 주고 생색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전 다른 병원에 갔을 때 호되게 당한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중상자가 넘쳐나므로 일단 나는 반강제적으로 퇴원하게 되었다. 하숙에 돌아오자 이 쪽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제 아침 내게 끔찍한 사실을 알려 줬던 건넛방의 청년이 잔뜩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동쪽 도시 출신들이 차별받기 시작한 무렵의 일을 이야기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나도 싸움을 붙이려 했다는 점에서 어쩐지 죄악감이 들었으니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다. 이제 그 장교 놈은 끌려갈 것이다. 사지로.


그 장면이 굉장히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후 사나흘 간 나는 하숙 내에서 그를 계속해서 찾았다. 복도에 죽치고 앉아 놈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인가 해서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그 벼락 맞을 방의 문을 여니 깨끗이 정리되어 있고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람 그날 밤 폭격 맞고 죽었어요.”


그녀가 아무런 감정 없는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이건 기뻐해야 할 일이 맞다. 어쨌든 그 자식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고 덤으로 그녀의 말투를 보아 하니 놈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지도 않다. 몹시 다행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그 눈이 너무나도 빛나고 있었다. 내 마음 정도는 모두 꿰뚫어 보는 듯 검게……. 아니. 단순히 검은색이라기보단 검붉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른다. 그 장교의 피를 흡수한 듯 새까만 눈동자 속에 붉은 한 방울이 찍혀 있다. 그러고 보니 밤에 본 어둠 속에서의 눈도 이러한 형태였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마주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도망쳤다. 방으로 들어와, 예전 장교의 회색 군복을 발견하고 겁에 질렸을 때 이상으로 떨며 이불로 몸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후 하숙에는 시장 친위대의 소대장 한 명이 묵게 되었다. 밤이 되어 나는 또 귀신에 홀린 듯 그 방의 문을 열었다. 소대장은 방의 전 주인과는 달리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어둠을 뚫고 검붉은 눈빛은 이편을 향했으며 나는 만족하여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이러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동쪽 도시가 병합되고 북쪽 도시는 괴멸 직전이라고들 하지만 이미 그런 일은 안중에도 없다. 난 며칠이나 몇 주의 간격을 두고 점점 붉은 빛으로 변해 가는 그녀의 눈을 관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어느 날 밤 완전히 붉어진,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같기도 하고 장미 꽃잎 같기도 하며 혹은 짙은 노을 속의 태양 같기도 한 그 눈동자를 바로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나는 그녀를 갖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20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