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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Testament 제 1장

2008.10.13 04:36

Evangelista 조회 수:1571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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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999년, 황도 가르만




아름브레스트 자작 루카스가 황성에서 나와 황도에서 가장 큰 주점이라는 ‘앵두 마차’에 들어갔다. 그의 카리스마에 반한 청년들이 나이 불문하고 형님 운운하며 주위에 몰려들었다.


요 근래 라이날트는 말했다. 형은 괴물이라고. 그러면서 “좋은 뜻으로 말예요.”하고 부연했다. 내가 실소하자,


“아니, 사실이에요. 황제가 형을 총애하는 걸 보면 이건 젊은 신하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아주 동성애 수준이라니까요. 그게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아세요? 아버님은 한 1~2년 되지 않았겠는가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아버님 뒤를 따라 린로테에서 처음 인사했을 때였어요. 그러니까 황제가 되기 전 말이에요. 그 때 이미 형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거죠.”


하고 열변을 토했다. 이렇게 말하는 라이날트마저도 루카스의 추종자다.


“10년도 아니에요. 5년 안에 형은 황제가 될 거예요. 형을 방해할만한 아무런 사고도 발생하지 않는다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루카스는 너무 완벽하다. 또래 귀족들 중 제일 총명하다. 창술 시합에서는 역전의 용사인 그라이비히 후작과 호각의 싸움을 벌였다. 물론 마지막에 흐트러지며 지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라이비히를 이길 만한 인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양반과 20분이나 말 위에서 대치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이날트는 루카스와는 달리 작위가 없다. 그도 분명 문무 양면에 뛰어나기는 하다. 바로 옆에, 그 자신의 말대로라면 ‘터무니없는 괴물’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루카스와 함께 있으면 빛이 바랜다.


“하지만 그 잘난 형한테 조금은 조심하는 게 어떨까 충고라도 해 줘.”


“무슨 말씀이세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게 긴 흑발을 뒤로 가지런히 묶은 이 청년의 특기이다.


“빌리캄 백작의 딸과 친해지는 건 좋지만, 나쁜 소문이 돌아선 곤란하다는 거야.”


그러자 라이날트가 어깨를 으쓱한다.


“형은 지나치게 신사적이에요. 나였으면 벌써 으슥한 곳으로 꼬셔내려고 했을 걸요.”


“걱정 않아도 된다는 건가?”


“백작 영양도 엉덩이가 가볍지가 않거든요. 몸이 그렇게 날씬한데도. 그 둘이 황궁 벤치에 앉아 있는 걸 보고 있자면 벌써 10년 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요.”


“무슨 모습?”


“내가 그 아가씰 황후 마마라고 부르는 모습이요.”




황제 슈겔 3세, 즉 그룸바크로 말하자면 아무래도 라이날트가 한 말이 순전히 농담만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그 뚱땡이는 유넨 폰 빌리캄에 대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질투심을 키워 놓았던 것이다. 불쌍한 것은 빌리캄 백작이다. 영문도 모른 채 황제가 자신의 얼굴을 보며 투덜대며 심술부리는 것을 참아 넘겨야만 했으니까.


스트레스로 만신창이가 된 백작은 결국 나를 찾아와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조금 장난을 쳐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제가 루카스와 가까운 당신 딸에게 질투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웃으며 말해 보았다.


웃기는 점은 이 자가 자기 딸이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더니만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제에의 충성심과 딸의 미래를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루카스가 보통 인간은 아니니까 계속 황제의 히스테리를 참아 가면서 딸을 대귀족의 본처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당장 자기 몸부터 지키고 볼지 고민하는 게 당연했다. 아들 잘 둔 덕에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도 할 수 있는가 보다.


“하지만 아름브레스트 자작이 여식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 아니겠지요?”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지. 당장 시집보내 버리면 오히려 나을는지도 모르지.


“그 애는 지나치게 신사적이오. 나 같으면 그렇게 착하고 귀여운 애는 벌써 어떻게든 꼬셔내려고 갖은 수를 다 썼을 것이외다.”


“원, 농담도…….”


조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 백작의 영양도 조신해 보였소. 난 벌써 10년 후의 모습이 선했다오.”


“무슨 모습 말입니까?”


그제서야 이것이 라이날트와 했던 대화와 판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대답했다.


“백성들에게 숭앙받는 아름브레스트 후작 루카스와 그 처인 유넨 폰 빌리캄의 모습 말이오.”


백작은 몹시 들뜬 상태로 돌아갔다. 한차가 뒤에서 키득댔다. 아무리 봐도 이 녀석은 광대가 어울린다. 왜 웃냐고 물어보니 녀석은 예상대로 라이날트와 내가 며칠 전 나누었던 대화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폐하의 애절한 사랑도 응원해 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역시 근친혼은 불가능하겠죠? 어쨌든 삼촌과 조카니까.”


하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해 댔다.




그룸바크는 생각 외로 황제 일을 잘 해 나갔다. 대신들이 다들 머리가 좋았기 때문이며 의외로 놈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 황제가 되겠다고 까불 때 나는 솔직히 자기 원하는 대로 날뛰는 폭군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황폐한 린로테와는 다른 가르만의 고급스런 분위기가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딱 한 가지, ‘조카’인 루카스에 대한 뒤틀린 애정만은 제외하고 말이다.


“아버님, 저와 유넨의 사이를 너무 신경 쓰지 말아 주십시오.”


저녁 식사 중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좋은 신부감은 많지 않아. 너만 좋다면 식을 올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버님이나 라이날트, 둘 다 절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무엇이든 가능한 인간이 아니에요. 라이날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만 먹으면 여자 정도는 쉽게 후려낼 수 있는 그런 난봉꾼도 아니고요.”


“뭐야? 잘 안 풀리는 거야?”


라이날트가 웃으며 농을 던졌다. 루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차가 구운 양고기를 가지고 왔다.


“저보다는 라이날트에게 더 관심을 가져 보시죠.”


“라이날트는 잘 해 나가고 있어. 네가 너무 뛰어난 것 뿐이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갑자기 타겟이 된 동생 쪽은 급히 말수가 없어져서는 묵묵히 나이프만 놀리고 있었다.


“그럼 무슨 얘기냐?”


“라이날트는 동생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고요.”


“아, 형. 그 얘길 하는 건 반칙이야.”


그러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나저나 동생이라니?


“너희, 또 형제가 있었단 말이냐?”


“그런 게 아닙니다. 잊으시면 안 되죠, 아버님. 선황 폐하께는 공식적으로 ‘아들’이 없었던 거지 ‘자식’이 없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형!”


이번엔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과연, 그렇게 일이 꼬인 것이었다.


그들의 아버지인 돌아가신 선황에게는 분명 아들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그 바로 아래인 그룸바크가 탈취해갔다. 모두 애초에 여자가 황제가 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아나 공주가 있었다! 황궁의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로 가끔 큰 파티에만 잠시 얼굴을 비추는 이 두 청년의 여동생이 있었다.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나조차도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하지 않으면 기억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맞아요. 건국제 파티에서 만났어요. 우연찮게 이야기도 나눴었죠. 그녀가 동생이란 건 며칠이나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고요!”


“라이날트. 포기해라. 너와 그녀는 절대로 맺어질 수 없다.”


내가 타이르는 동안 화제를 던진 장본인인 루카스는 그저 조용히 고기를 썰어 천천히 입에 가져가는 일만을 반복했다.


“제 신분을 속인다면…….”


“똑똑한 녀석이 그런 것도 생각 못 하나! 너는 루카스의 동생이다! 네가 선황의 황자가 아니라면 루카스도 황자가 아니야! 쿠데타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 아무리 루카스가 인기가 좋다고 해도 황제가 되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라이날트는 입술을 깨물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카스의 접시는 이제 반도 남지 않았다.


“아버님, 저는……. 크리스티아나가…….”


“전하.”


오랜만에 그 호칭을 꺼냈다.


“부탁입니다. 전하의 형님을 황제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 후로 그 식탁에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저택의 베란다에서 라이날트와 루카스가 바람을 쐬며 앉아 있다. 한차가 들어와 홍차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슬그머니 나갔다.


“형……. 왜 그 얘기를 아버님한테 한 거야?”


“네가 계속 그 애를 생각한다면 결국 알려질 이야기였어. 게다가 이 소문이 퍼지면 하나도 좋을 게 없지. 겉으로 보기에 너와 크리스티아나의 혼인은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으니까. 황녀라고는 해도 우리들 아버지의 딸이지, 그룸바크의 딸이 아니거든.”


별이 떨어졌다. 또 하나 떨어지고, 수십 개의 별이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형. 유성우야.”


“미안.”


“괜찮아. 다 이해해. 우리에겐 입장이란 게 있으니까.”


루카스가 쓸쓸히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 라이날트의 말에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하지만 이 이상 날 방해하면 평생 원망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