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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Testament Prologue

2008.10.12 05:30

Evangelista 조회 수:1466 추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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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몇 달 전 시골을 여행하다 비를 피하러 들어갔던 창고에 이틀 동안이나 갇혔던 적이 있다. 구출되기 직전에는 완전히 공황 상태였다. 무너진 건물더미 아래 삼십 일을 버텼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억났다. 어쩐지 인간 전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까운 교회의 목사가 빵과 우유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먹지 않으면 굶어 죽어요!”


나는 감사히 그것들을 받아서 그가 돌아가자마자 옆에 방치한 채로 시간을 보내 부패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던 여성이 찾아와서 내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작별 인사를 한 것 같았다. 밖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렸는데 그에 섞여 그녀와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함께 들린 것을 볼 때 아무래도 새 애인이 생긴 게 확실하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집안에 틀어박히게 된 게 먼저인지 그 (빌어먹을) 남자와 붙어먹은 게 먼저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내 눈앞에 천사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는데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건 환각이 분명하다. 천사는 무언가 몇 마디 하고 나서 돌아서서 걸어나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진짜 천사였다면 날아갔을 테니까.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들이 몇 들어왔다. 아무래도 나는 옆으로 쓰러져 있는 모양이다. 몹시 당황스러워 하며 부축해 일으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들은 내게 전하가 찾고 있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한 명이 입고 있는 검은 튜닉을 가리키며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붕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빵과 우유를 줘.”




죽은 황제의 동생이며 린로테 대공인 그룸바크는 능력은 없는데 꽤 야심만만한 인간으로써, 어쨌든 우리 가문의 주군이다. 생각하는 건 뻔히 보인다. 황제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은데다가 후사도 없으니 옥좌를 노리는 것일 테다. 그건 실수다. 이 정도로 야망에 들떠서 살게 되면 주위에서 금방 알아차리는 게 당연하다. 잘못 움직이면 동원할 수 있는 부대란 부대는 모두 린로테로 몰려올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되면 나도 개죽음이다. 그런 꼴을 당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 자네가 총사령관 직을 맡아 주길 바라네.”


라고 한다. 회피하는 게 상책이다. 뒤에 앉아 있다가 진짜 난리가 일어나면 대충 이 녀석을 팔아넘겨서 살아남는 게 제일 좋다.


“저는 이제 갓 마흔이고……. 슈왈포 백작이나 노람 백작에게 맡기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슈왈포나 노람 두 영감들 정도라면 꽤 잘 싸워줄 테니까 나도 시간을 벌 수는 있을 테다. 그랬더니 또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럼 자네는 자네보다 작위가 낮은 그 둘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건가? 앞뒤가 맞지 않잖아.”


“죄송합니다만 저는 전쟁공포증이 있어서……. 왜, 그……. 아시잖습니까? 십 년 전에.”


마르디아 전쟁 때 기사단이 전멸하고 시체의 산에 혼자 남겨진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처음엔 시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정도였다.


그룸바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이제야 떠오른 모양이다. 부하의 상태 정도는 기억해 줬으면 한다.


“그럼 슈왈포 백작. 자네가 군을 이끌게. 준비를 마치는대로 황도로 출정일세.”


“예.”


슈왈포 영감이 시원스럽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이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나 보다. 노람은 꽤나 불만스러운 것 같은데 출정을 반대하는 것인지 총사령관이 못 돼서 저러는 것인지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이대로 놔두면 나를 두고 생테 형님을 황제로 하자고 떠들어댈 거야, 원로원 놈들.”


하긴 우선권은 폴즈 대공 생테에게 있지.


“아름브레스트. 자네는 린로테의 수비를 맡게. 어차피 누가 쳐들어오지도 않겠지만 말일세.”


거절할 이유는 없다. 회의는 여기서 끝났다.




혼자 있는 집은 쓸쓸하다. 결혼을 할 걸 그랬다. 마르디아 전쟁 직전까지는 군대 일이 너무 즐거워서 혼자였고 그 후로는 겁쟁이가 되는 바람에 아무도 시집오려 하지 않더라. 마리아는 젊고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역시 요 몇 달 간의 내게 정나미가 다 떨어진 것 같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집사인 한차다.


“그럼 제가 다시 시중을 들어도 괜찮겠습니까요?”


“해고한 적이 없으니 당연하지.”


“해고요? 하셨는뎁쇼.”


“언제?”


“세 달 쯤 전에 앉으신 채로 고용인들을 모두 해고하셨습니다요. 기억 안 나십니까?”


그랬나 보다. 기억은 안 난다. 어쨌든 내가 그 몇 달의 생활을 청산하자마자 어떻게 듣고 달려온 것을 보면 충성심 하나는 알아줘야겠다. 집사장 놈은 해고되기도 전에 진작 도망쳐 버린 것 같지만 말이다.


“아직도 외투를 걸치고 계시면 어쩝니까? 잠시만 몸을 일으켜 주십시오. 벗겨 드리겠습니다요.”


한차가 슬슬 다가와 의자 뒤에 섰다. 나는 주문대로 등을 조금 굽히고 몸을 일으켰다. 한차가 말했다.


“영영 그 ‘수도생활’을 하시는 줄만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요. 유언을 전해드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언젠데? 너도 나처럼 정신줄을 놔 버린 거냐?”


그러자 그는 히죽히죽 웃는다.


“폐하께서 말입죠.”


……이 놈은 미친놈인 모양이군. 왜 돌아왔나 했다.


“헛소리가 아닙니다요.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린로테까지 몰래 오셨었단 말입죠.”


“허어. 그래? 그래서 네게 뭐라시든?”


“제게 말씀하시기 전에 각하께 먼저 말씀하셨습니다요.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요.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는 동안 전 홍차를 끓였거든요.”


정말로 미친놈이다. 내가 대체 그 동안 누구와 말을 했단 말인가? 그것도 홍차를 끓일만한 시간 동안. 대충 해고하고 다른 집사를 찾아봐야겠다.


“홍차를 가지고 들어가니 폐하께서 아무래도 각하와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그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요. 그 뭐랄까, 각하 자신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 상황이 사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 않겠습니까?”


해고하고 광대로나 고용해 볼까.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배신하면 황가의 조상들로부터 천벌을 받을 것이라면서 각하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하셨는데?”


“내 아이를 보낼 테니 황제로 키워 내라. 라고요.”


“폐하께는 아이가 없어.”


“하지만 있다고 하시던데요.”


“혹시 너도 나와 같이 마룻바닥에 몇 달간 자빠져 있었던 것 아니냐?”


“그럴 리가요. 저도 그랬다면 지금쯤 쥐새끼들이 온 집안을 다 파먹었을 겁니다요.”


정말로 광대로서 재능은 있는 놈이다. 해고하기 아까워졌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그게 다냐?”


“몇 마디 더 하셨습죠. 나는 곧 죽는다. 독살당한다.”


“폐하는 병사야.”


“병으로 죽으나 독으로 죽으나 겉으로 봐서는 모르죠.”


“말 좀 가려서 해.”


한차는 조금 계면쩍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작이 네 말을 믿지 않거든 천사를 보았냐고 물어보거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게 왕가의 인장으로 봉해진 편지를 내밀었다.




다음날 집에 한 소년이 찾아왔다.


 


 


 


#0-2.




인간이란 이런 거다. 나조차도 황제의 아들이라는 미끼가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덥석 물고 말았다. 내게도 야심이란 건 있는 모양이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그 소년의 이름은 루카스라고 했다. 예의바른 아이였다. 스스로 나이와 출신지, 성장 환경에 대해 다 말해 주어서 몹시 고마웠다.


정리하자면, 그는 열 여섯살이었고 비옹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와 함께 지금까지 지내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몰래 매달 보내 주는 생활비 덕분에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했다. 가장 마지막에 온 아버지로부터의 편지에는, 자신은 곧 죽을 것이라면서 그것이 확인되면 린로테의 아름브레스트 후작을 찾아가라고 되어 있었단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으니 어떻게 확인해야할지 고민하자 어머니는 지금 린로테로 가면 된다고 했다고 한다.


“제 아버지는……. 귀족이셨습니까?”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민의 신분으로 살아왔으니 귀족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은 잘못 했다간 평민 주제에 엄청난 꿈을 가지고 있다고 욕이나 먹기 딱 좋으니 불안할 만도 하다.


“귀족이 아닙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소년은 안도하는 것인지 실망하는 것인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뭔가 눈치챈 듯 내게 다시 물어왔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왜 아까부터 제게 존댓말을 쓰십니까?”


이제 폐하를 믿는 수밖에 없다.


“전하의 아버님은 돌아가신 프리드리히 벨트 폰 로엔 황제십니다.”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즉답이었다.


“사실입니다.”


소년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 그는 시선을 내게 맞추고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제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어제 알았습니다.”


다시 정적.


“그럼 저는 이제 황제가 되면 되는 거군요.”


“이해가 빠르셔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제가 황제의 아들이라고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텐데요.”


“폐하께서 전하의 신분을 보증하신 문서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믿느냐 마느냐는 상관없어요. 제 지지 기반은 각하 뿐이지 않습니까? 이대로 황도로 올라가서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암살해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렇지 않을까요?”


루카스는 보통 소년이 아니었다. 보통 자신이 사실은 황제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들떠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의 반응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냉정히 사태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군요, 각하.”


“각하라고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전하.”


“……알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건 상관없어요. 전 비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무슨 소리십니까! 폐하의 유언입니다!”


“아버지께서 정말로 절 황제로 만들 생각이 있었다면 애초에 저희를 황실에 부르셨을 겁니다. 위기가 닥치자 지푸라기를 잡고 싶으셨을 테죠.”


나는 야심에 졌다. 그룸바크가 황도로 쳐들어가자고 할 때는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는데…….


“린로테 대공은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입니다. 저와 같이 황도로 가시는 겁니다! 대공이 황제가 되면 거기서 기반을 강화해서 황제가 되십시오! 그거라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루카스는 다시 뭔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동생이 근처의 여관에 있습니다. 데려와도 괜찮을까요?”


“예? 아, 예…….”


왕자가 둘이었다.




“라, 라이날트라고 합니다. 루카스의……. 쌍둥이 동생입니다.”


“닮지 않으셨군요.”


이 정도로 닮지 않은 쌍둥이도 없을 것 같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라이날트는 형과는 달리 깡마른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형……. 이 분, 귀족이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이 분이 아름브레스트 후작이야.”


그러자 라이날트는 곧바로 반색하며,


“그, 그럼 각하께서 저희 아버지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하고 흥분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길바닥에서 쓸데없는 소리라도 하면 안 되니까요.”


여전히 냉정하게 루카스는 말했다.


“무슨 얘기야?”


“저는 아름브레스트 후작 요한이라고 합니다.”


무릎을 꿇는 나를 보고 라이날트가 굳어졌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버지가 황제였단 말야?”


이 형제, 머리는 꽤 좋은 모양이다.




그룸바크는 내가 출정에 참가하겠다고 하자 몹시 반가웠던 모양이다. 의자에서 뛰어내려와 어린애처럼 방방 뛰며 좋아했다. 대체 내 어디가 좋은 건지……. 최근 10년 동안은 전투 한 번 치른 적이 없는데.


“마르디아 군을 벌벌 떨게 한 하얀 귀신이 도와 준다니, 정말 든든하네!”


……그렇게 불린 적도 있었던 것 같군. 하지만 마지막에 결국 겁쟁이 바보가 된 건 또 까먹은 건가?


“그런데 자네 뒤에 그 애들은 누군가?”


“마르디아 전쟁에서 전사하고 가문이 붕괴한 슈베르트 남작의 아들들입니다. 최근에 찾아내서 양자로 삼았습니다. 오늘은 각하께 소개해 드리려 이렇게 데리고 왔습니다.”


“슈베르트 남작? 그게 누군데?”


“각하께서는 모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르디아 전쟁 때 제 둘도 없는 전우였습니다. 용맹스런 사나이였지요. 인사드리거라. 내 주군인 린로테 대공이시다.”


“루카스 슈베르트 폰 아름브레스트입니다.”


루카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무릎을 꿇자 라이날트도 뒤따라 무릎을 꿇었다.


“라이날트 슈베르트 폰 아름브레스트입니다.”


“잘 생긴 아들들이군. 자네가 가정의 중요함을 알게 되어 정말 반갑네. 루카스와……. 라이날트라고 했나? 아버지를 잘 도와주게나.”


“예.”


몇 년 후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될 두 소년을 보고 즐거워하는 그룸바크를 향해 미소를 띄우며, 나는 손짓으로 둘을 내보냈다. 대공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래, 그런데 자네는 전쟁공포증이 있다지? 정말 나가도 괜찮겠나? 가능하면 본부에서 작전을…….”


“아닙니다. 두 노백작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총사령관으로 나서겠습니다.”


슈왈포와 노람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걸로 보아 슈왈포는 정말로 대장 하기가 싫었나 보다. 하긴 총사령관은 실패하면 처형이니까. 어제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기개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노람이야 뭐, 벌써 린로테 방위는 자기한테 맡겨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말에 오르기도 힘든 양반이 전쟁에 나가는 건 무리지.




나는 생각보다 걱정이 많은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황도의 누구도 그룸바크가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995년 황도 가르만에 대한 린로테 군의 기습은 반나절만에 싱겁게 원로원의 항복으로 종결됐다.




사후처리를 위해 가르만 군사성(軍事省)에서 일하는 내 서류작업을 도우며 라이날트는 말했다.


“나중에 형이 황제가 되면 난 린로테 대공이나 시켜 주세요. 거기 사람들, 너무 먹지를 못했는지 다들 저보다 말라 있더라고요.”


나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