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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hwarang102 밤의 제국

2009.07.22 11:41

Mr. J 조회 수:892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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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는 왜 어두운 숲 속을 걷고 있는 걸까? 나는 분명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숲 속의 어두움은 마치 나의 마음속 같다. 나의 마음속 어둠…… 난 그것에 대해 생각하며 집으로 이어진 길을 걷고 있었지. 그 어두움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 일까? 이 숲길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불확실한 정체성에 내 스스로가 머릿속으로 지어내고 있는 환상인 것 일까
.

나의 마음속 어둠, 그것을 냄새로 표현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더럽게 되어버린 동전을 만진 뒤 손에 배어 나는 구린 냄새나, 손을 몇 번이고 씻어도 잘 사라지지 않는 기름의 냄새 같은 느낌이랄까, 모습으로 표현하자면 빈곤한 자들이 바닥에 고인 구정물에서 국수가락을 주어먹는 모습이나, 부모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죽거나 굴하는 모습보다도 보기 싫은 광경일 것이다
.
내면의 어둠이라는 건 아마 기억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인간이란 것은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끝까지 간직하며 사는 것일까? 기억이란 것은 생물체가 경험한 것이 어떠한 형태로 간직되었다가 나중에 재생, 혹은 재구성 되어 나타나는 것이라는데, 이런 기억이 나에게 어두움만을 불러 온다는 것은 나에겐 어두운 경험 밖엔 없었다는 이야기일까, 물론 돌이켜 생각해 본다면 나에겐 행복한 일도 있었지만 역시 이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는 누구라도 그런 생각들 밖엔 들지 않을 것 같다
.

다시 끔 두통과 함께 몰려온 고통스러운 기억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짐승들도 인간처럼 실패의 기억, 망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가 가끔씩 떠올리며 부끄러워하거나 고통스러워 할까. 짐승들의 단순한 뇌에 비해 사람은 훨씬 진보된 뇌를 가지고 있어 아픈 기억에 또 다시 고통스러워 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

역행성건망이라는 것이 있다
.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으면 충격 전의 기억이 사라진다던 지 하는 사례들이 바로 이 역행성건망이라는 것의 예이다. 물리적 충격에 의하여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감각 경험이 대뇌 중추에 영향을 주어
보유된 기억을 지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기억을 지우기 위해선 내 머리를 얼마나 세게 때려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머리를 싸맨 채 계속 걸었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엔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건 나를 구해줄 사람이 존재할 때나 통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어두컴컴한 장소에도 숲 지기가 하나쯤은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다지 이런 곳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싶지는 않다. 어둠 속의 나뭇가지들이 악몽에 나올 만큼 소름 끼치는 형상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숲은 불안하리만치 조용했으니. 갑자기 분 으스스한 바람 한줄기에 나는 몸을 떨었다. 어느새 흘린 땀 때문이었는지 셔츠의 등 부분이 축축했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길 때 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마른 잎사귀들이 발에 밟히며 말라붙은 비명을 질렀다
.

그렇게 어두운 숲을 걸어나가고 있는데, 작은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안녕하시오?
누군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으나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두리번거리며 그 작은 인사의 주인을 찾는데, 아래쪽에서 작은 헛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곳엔 동화책에서나 볼만한 모양의 난쟁이가 불이 켜지지 않은 조그만 램프를 든 채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조그만 램프 안엔 조그만 양초가 들어있었고, 조그만 손은 조그만 램프의 조그만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덥수룩한 흰 수염 끝을 꼼지락 거리며 한 쌍의 검은 딱정벌레 같은 조그만 두 눈동자로 내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당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군요?
난쟁이가 조그만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난쟁이가 나에게 그 작은 램프를 건네었다. 그리곤 그의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서 바로 북쪽으로 가면 문이 나올 거에요.
그가 조그만 콧구멍들을 벌름거리며 그의 조그만 입술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얼떨결에 그 조그만 난쟁이의 조그만 램프를 검지와 엄지를 사용해 받아 들었다. 내가 뭔가 감사의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내 앞에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난쟁이가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있다가 하마터면 램프를 떨어트릴 뻔 했다. 두 손가락으로 간신히 잡을 수 있었던 그 작은 램프는 어느새 그 크기가 적당하게 커져서 나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내가 신기해 하며 크기가 늘어난 램프를 들어 자세히 보려는데, 갑자기 안에 있던 심지에 불이 붙더니 주변을 밝혔다. 하지만 그 은은한 빛은 그다지 밝지 않아, 나의 주변만을 밝혀줄 뿐 이었다.


 


그 작은 불빛은 나의 두 눈엔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지만 헤매던 마음엔 도움을 주었다. 누가 그러지 않던가, 어둠 속에선 작은 빛 줄기도 큰 힘이 된다고. 비록 코앞만을 밝히는 빛이었지만 그것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나의 마음에도 작은 불, 즉 희망과 따듯함을 피워주었다.



 


난쟁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의구심이 생겼다. 난쟁이 말했던 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난쟁이는 왜 내가 그 쪽으로 가길 바랬던 것일까. 작고 힘없어 보이는 그 늙고 공손한, 그리고 나에게 이 신기한 램프를 빌려준 친근한 그 난쟁이가 나를 속여먹으려 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차피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해도 지금 나에겐 별다른 선택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나는 뭔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복종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가 가리켰던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거대한 문 한 개가 나타났다. 이 정도의 크기라면 아주 멀리서도 보였을 만 했는데, 난쟁이가 가르쳐 주기 전까진 그곳에 문이 있었다는 것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문에 가까이 다가가보았다. 거대한 문은 검고 표면이 매끄럽게 손질된 목재로 되어 있었고, 만져보기만 해도 그 웅장함이 느껴졌다. 문은 누군가가 매일같이 손질을 해 주었는지 어쨌는지 먼지가 조금도 묻지 않았고, 문고리는 번쩍번쩍 광이 나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당겼고, 매우 무겁고 열리면서 긁히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를 낼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문은 가볍게 소리 없이 열렸다. 다만, 문의 안쪽은 그야말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불을 끈 어두운 방, 그런 정도의 어두움이 아니라 아무리 바라보려 해도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듯한 느낌의 어둠, 마치 안쪽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그런 짙은 검정색 어두움이었다
.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그것은 목소리였다. 잠시 후 그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것은 틀림없는 목소리였다. 동물의 울음소리가 아닌, 사람의 목소리. 하지만 소리는 너무 작아 그것이 여자의 목소리인지, 남자의 목소리인지, 아이의 목소리인지, 어머니가 나를 찾는 소리인지,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소리인지, 친구들의 친근한 외침소리인지, 군인의 힘찬 목소리인지, 귀부인의 뽐내는 목소리인지, 교수의 나른하고 단조로운 목소리인지, 장사꾼이 생선을 파려고 고래고래 질러대는 소리인지, 악마의 달콤한 유혹의 목소리인지, 죽음을 앞둔 자의 신음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소리를 잘 듣기 위해 내 얼굴을 어둠 속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또 다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마치 그것은 내가 그 문에 얼굴을 가져댄 만큼 저 뒤로 갔는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결국 나는 귀를 좀더 가까이 가져다 대기로 하고, 천천히 얼굴을 돌려 내 오른쪽 귀를 그 어둠의 경계선에 가까이 들이대려 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나는 몸의 중심을 잃고 말았고 나는 그 문 너머로, 그 한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넘어지며 빠져버렸다. 그것도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1-


 


 기절한다는 것은 이런 기분일 것이다. 기절은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주변이 순간 캄캄해 짐과 동시에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되며, 그 중엔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도 손발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내가 방금 겪은 기절 역시 후자의 것 같다. 그 거대한 문 속의 어둠으로 끌려들어간 뒤, 내 몸은 마치 반쯤 육체이탈이 행해진 듯한 상태가 되어 수족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눈은 크게 떠져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마치 눈을 감은 것처럼, 장님 식물인간이 된 것처럼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아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전무의 암흑이었다. 내가 끌려들어갔던 암흑세계는 그 움직임이 마치 하나의 강줄기 같아, 내 몸을 이리저리 휩쓸리도록 만들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그리고 어둠의 강줄기 끝에, 나는 떨어졌다.


 


머리가 아팠다.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졌는지 정수리 부근이 아파왔다. 고통에 눈을 찡그리고 있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천천히 열리는 눈꺼풀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아아, 나는 집으로 돌아온 것인가, 하며 눈을 완전히 떴다. 내 눈 앞엔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덩이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그건 다름아닌 난쟁이의 램프였다. 실망감이 몰려왔다. 나는 아직도 이 알 수 없는 장소에 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장소와 별반 다를 곳 없었다. 온통 메마른 나무들로 가득한 괴기의 숲 이었다. 나는 엉덩이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램프를 잡아 들고 잠시 주변을 탐색하였다. 문을 통해 이쪽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뒤엔 돌아가는 문이 없었다. 마치 내가 들어왔던 문은 악마의 입이었고 이쪽은 그 놈의 뒷구멍인 것처럼 말이다. 본래 입으론 들어가 뒤로 나와도 뒤로 들어가 입으로는 못 나오지 않던가. 하지만 돌아갈 길이 없다고 해서 실망할 시간 따윈 필요 없다. 그리고 별다른 선택의 여지 역시 없다. 그저 앞으로 걸어나갈 뿐.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발길을 향할 뿐.


 


숲을 걷다가 나는 지금의 숲이 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난쟁이를 만났던 그 숲은, 나무들의 일그러짐이 여러 개의 인면(人面)을 그려내며 전부 나를 바라보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지금 이 숲은, 나무들이 두 그루씩, 혹은 세 그루씩 마치 덩굴처럼 얽히어 서로를 해하려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들은 내가 그들 주변을 지나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서로를 옭아맬 뿐이었다. 나는 생각 없이 걷고 있긴 했지만,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나무들 사이엔 누가 터 놓았는지 부드러운 흙으로 된 길이 나 있었고,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주인공을 시험하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내가 걷고 있던 길은 하나 밖에 나지 않은 친절한 길이었다.


 


램프를 꼭 쥔 채 길을 따라나가자, 거대한 광장이 나왔다. 서로를 괴롭히는 나무들로 둥그렇게 둘러싸여서 마치 광장은 야구장 같은 느낌이 났다. 그리고 그 넓은 광장의 중앙에, 그 어둠 속에 거대한 고목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얼마나 컸냐,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좀 어렵다. 그 나무는 마치 인간들이 땅을 밟기도 전부터 그곳에 존재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대한 광장이 만들어진 이유도, 다른 나무들이 그 거대한 나무를 경외하여 주변으로 물러나 생긴 것만 같았다. 나 역시 그 거대함, 그러나 선해 보이거나 든든한 느낌의 거대함이 아닌 잔혹함에 마음속에 두려움이 자리잡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램프의 손잡이를 좀더 꽉 쥐고,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목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고목은 마치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의 얼굴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나무의 울퉁불퉁한 표면과 굴곡 하나하나가 인간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때 나무의 밑동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것은 금속으로 된 문고리였다. 나무의 밑엔 문이 달려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어둠과 나무의 색 때문에 문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검은 색이었고 매우 매끄러운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느낌에 나는 문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그렇다, 이 문은 내가 빨려 들어 갔던 그것과 매우 흡사하게 생긴, 아니 완전히 똑같은 형태의 문이었다.


 


문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문 안은 전처럼 새까맸으며, 귀를 기울여 보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안함을 가지고 나는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다시 흑색 강에 빠져 흘러 내려갈 것이란 생각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내 다리는 멀쩡하게 어둠 속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빨려 들어가지도 않았다. 램프로 비추어 보니 문 안은 멀쩡한 땅 바닥이었다. 문 안쪽은 그냥 평범한 이었다. 거대한 나무 안의 방. 갑자기 안쪽에서 뭔가를 쾅 하고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성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세히 보니 저 쪽에 흐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램프를 들고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목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흐린 불빛이 나오던 곳은 어떤 방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 방에 들어섰다. 방 안은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장식품들과 기괴한 나무 무늬로 꾸며진 벽과, 오래되어 보이는 네모난 탁자. 그리고 그 탁자 주변에 다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큰 소리의 주인공인 듯한 머리 벗겨진 남자가 먼저 눈에 띄었다. 그가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던 안경을 쓴 남자가 두 번째, 그 들의 중간에 앉아있는 특이한 머리장식의 남자는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보아 졸고 있는 듯 했다. 테이블 끝 쪽에 앉아 있던 두 남자 중 하나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는 원형탈모의 남자는 무시한 채, 고개를 책에 처박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잘생긴 외모의 남자가 나를 보았다.


 


어이, 누가 왔는데?


그가 말하자, 중간에서 졸고 있던 머리장식의 남자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책이 세상의 전부인 듯했던 남자마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는데 사나워 보이는 머리까진 남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젠장! 새로 들어온 녀석인가?


그러자 안경을 쓴 남자가 말을 받았다.


 


섣부른 판단은 좋지 않다고 오펜. 내가 방금 전에도 말했잖아.


그의 태도는 차가웠고, 눈빛은 남을 한없이 깔보고 있었다. 그러나 날카로워 보이는 그 눈매는 그가 지적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닥쳐! 그러고 보니 네놈에게 하던 말이 끊겼군.


오펜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어때? 프라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그렇지 렉타?


내가 문간에 섰을 때 나를 발견했던 미남자가 책에 코를 박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


책을 읽고 있던 남자는 셋의 이야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성의 없는 대답 한마디를 던지곤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네놈도 곧 혼내주고 말겠어 포우! 이놈의 지긋지긋한 토론이 끝나지 않는 것도 다 네놈 때문이야!


오펜이 포우라 불린 미남자에게 외쳤다.


 


이런 이런, 그 문제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 하도록 하자고. 저 분이 토론에 참가하려는 사람인지, 아니면 손님인지는 중요하지 않잖아. 이봐, 이리 와서 앉으라고.


포우스가 일어나 한 손으론 반쯤 일어선 오펜을 앉히고, 다른 한 손은 나를 향해 저으며 말했다. 나는 대답 없이 그가 내어준 자리에 앉았다. 오펜이라는 남자는 고리눈을 하고선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프라스는 곁눈질로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렉타는 내가 그의 옆에 앉은걸 아는지 모르는지 들고 있는 책만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오펜과 프라스의 사이에 앉은 남자는 노인이었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머리장식은 마치 그를 인자한 왕 같이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생각했던 대로 졸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머리장식에 매달린 작은 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포우라 불렸던 미남자는 나에게 자신의 의자를 내어 주고 나선, 새 의자를 찾아 방의 안쪽으로 향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는데, 갑자기 오펜이 말을 꺼냈다.


 


넌 뭐 하는 녀석이지?


저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


뭐야, 그럼 토론에 참가하려 온 게 아니란 말이지?


? 토론이라니요?


멍청한 녀석아, 여기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무엇 같냐?


내가 알고 있는 토론이란 건 참가자들과 주제를 관리하는 의장과, 매너를 지키며 자신의 생각을 소상하게 나누는 참가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다섯 명의 남자들이 하고 있는 것은 토론이 아니라 그저 말싸움일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봐 오펜, 자네를 보면 우리가 토론이 아니라 말싸움 따위나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안경을 쓴 날카로운 눈매의 프라스가 비아냥거렸다. 동시에 오펜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아까 들려왔던 그 소리는 바로 오펜이 책상을 내리쳤던 소리였다. 그런 오펜은 무시한 채, 프라스는 이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러니까 우리 토론에 참가하려 온 것은 아니라 이거지? 잘 됐군. 우리는 여기서 몇 십 년 동안 같은 이야기만을 하고 있으니까.


몇 십 년씩이나요?


그래, 이곳의 토론은 만장일치로 의견이 떨어져야 비로소 끝날 수 있어.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부터 의견이 갈라져서 그런 오랜 세월을 허비하며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 이거야.


…….


왜인지 가르쳐 줄까?


오펜이 내 멱살을 잡아 들었다. 그때 나타난 포우가 의자를 쾅 하고 내려놓았고, 나는 오펜의 손을 뿌리쳤다.


 


오펜, 손님한테 너무 그러지 말라고.


포우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오펜이 뭔가를 또 말하려 했지만 내가 끼어들었다.


 


여러분은 도대체 무슨 주제에 대해 토론하시는 중인가요?


, 지금은 고대의 재배법에 대한 주제였지만 처음 시작했을 땐 얼린 콩 이야기였지.


프라스가 대답했다.


 


얼린 콩 이야기요?


하하, 멍청한 주제였지. 기억나지? 렉타.


포우가 실소를 던지며 말했고, 책을 읽고 있는 남자는 그저 고개를 몇 번 끄덕일 뿐이었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지 아마? 얼려진 콩에서 싹이 나오면 거기에 달린 잎사귀가 두 개인가 하나인가.


프라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맞아. 내 의견은 아직까지도 바뀌지 않았다고. 얼린 콩 싹 잎은 딱 두 개야.


포우가 말했다.


 


웃기는 소리하고 있군 포우. 얼린 콩 잎사귀는 한 개다! 내가 직접 봤다고!


오펜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몰라. 이미 주제 자체가 글러먹은 토론이었어. 얼린 콩 싹엔 잎사귀가 세 개다. 하나도, 둘도 아니야.


프라스가 비웃는 눈초리를 둘에게 던지며 말했다. 그때, 렉타가 책을 탁, 하고 덮었다.


 


네놈들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수 십 년 동안 콩 싹 잎사귀 숫자만을 찾아 책을 읽었다.


그가 말했다.


 


콩이 얼렸건 안 얼렸건 진작에 콩 싹이란 것 자체가 없어. 너희들은 근본부터 잘못된 거였다고.


그가 뿔 테 안경 너머로 셋을 바라보며 말했다.


 


렉타, 그건 틀린 말이야. 너희들이라니, 이거 섭섭한데? 잎사귀가 하나라고 나와 의견을 함께하던 때는 잊은 거야? 혹시 그 동안 책만 읽었다고 해서 꼴통이었던 네가 우리보다 똑똑하다거나 뭐, 그런 거야?


포우가 예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렉타가 어금니를 악물곤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분위기를 와해시키기 위해 얼른 뭔가를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얼린 콩에 나는 싹 잎사귀에 대해 토론을 하신 거란 말인가요?


불만이야? 우리가 지금 멍청하다고 무시하는 것 같은데 너도 혼 좀 나볼래?


오펜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고 나는 빨리 둘러댈 말이 필요했다.


 


, 그러니까 제 말은, 콩을 얼리면 싹 자체가 나오지 못하는 거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내가 오펜의 공격으로부터 얼굴을 가리며 황급히 말했다.


 


순간, 방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오펜도, 프라스도, 포우도, 렉타도 모두 할 말을 잊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때 지금껏 졸고 있던 노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마치 지금까지 잠을 자지 않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척을 하였다. 그가 잠에서 깨자, 네 명의 토론가들이 그를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얼린 콩 싹의 개수 건은 판결이 났는가? 만장 일치인가?


노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노인의 얼굴을 때렸다. 노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고, 오펜은 달려들어 늙은 의장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망할 늙은이! 네놈은 진작에 얼린 콩 따위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


나는 오펜을 뜯어 말리려 했지만, 프라스와 렉타, 그리고 포우가 오펜을 따라 달려드는 바람에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들은 노인을 둘러싼 채,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발로 사정없이 그들의 의장을 밟았다. 그들 사이로 찌그러진 노인의 머리 장식만이 보였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았을 때,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다섯 마리의 못생긴 돼지였다. 그들은 이제 이리저리 뒤엉켜 꿀꿀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투고 있었다. 고풍스러웠던 방은 어느새 돼지우리가 되었다. 카펫은 진흙탕으로 돌변했고, 탁자는 시커멓고 오래된 나무판자였다. 나는 그 진흙탕에 주저 앉은 채, 할 말을 잃고선 그 징그러운 다섯 짐승들을 바라보다가, 바닥을 더듬어 램프를 찾아 들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2-


 


 진흙탕 길을 정신 없이 달렸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빚어진 혼란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다섯 명의 사람으로 둔갑한 다섯 마리의 돼지들과, 그들이 의미 없이 열띤 토론을 벌이던 진흙탕 방이 머릿속에 하나의 복마전을 만들어 내었다. 혼돈, 그것이 지금 나의 정신상태를 확실하게 설명하는 단어이다. 여러 생각들이 마구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이니, 가히 혼돈이고 혼륜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이 세상은 비정상이다. 지금까지 평온을 유지해 왔던 나의 머릿속이 질서정연하였던 흐름 사이에 불안감과 공포라는 것들이 새치기를 하면서 완전히 복잡해져 버리고 말았다. 손에 들린 램프가 흔들리자 안의 불빛이 일렁거리며 공포스러운 모양의 그림자들을 만들어내었다. 그 악몽 같은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고 바지가 온통 진흙 범벅이 되는 걸 무시하며 도망쳤다. 무엇으로부터? 내면의 공포로부터.


 


얼마나 달렸을까, 바닥의 철벅거림이 멎었다. 나는 어느새 그 끔찍한 고목의 방에서부터 벗어나, 마른 땅 위를 달리고 있었다. 공포감이 조금 멎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취약을 맞은 듯한 느낌이어서, 살짝 둔감한 느낌이어도 여전히 뇌리의 끝엔 공포감이 조금 남아있었다. 정신 없이 달리느라 폐가 터질 만큼 숨이 차 올랐는데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램프를 바닥에 떨어트리곤 바닥에 쓰러져 녹초가 된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천천히, 심장의 박동 속도가 안정되었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정신이 들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빠져나가, 따듯한 밥과 폭신한 이불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곳에 오기 전, 왜 나는 집을 그렇게 싫어했던 것일까. 딱히 사춘기도, 비행청소년도 아니었는데 왜 집이 싫고 삶이 지겨웠을까? 그대로 누워 별 한 개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감기 걸리겠네요.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작은 형체가 떨어트린 램프 옆에 서 있었다. 그것이 몸을 굽혀 램프를 집어 들자, 불빛에 모습이 드러났다. 바로 나에게 램프를 주었던 난쟁이였다. 난쟁이는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조그만 손에 쥐고 있었던 램프를 내 옆에 놓았다. 그리곤 말없이 조그맣고 까만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서운가요?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누구시죠?


적절한 호칭을 찾다가 결국 아저씨를 선택하긴 했지만 도대체 이 난쟁이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작은 덩치와 앳된 목소리 때문에 나보다 어려 보이기도 했지만, 얼굴에 달린 새하얀 수염이나 생각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고대 현인의 그것들 같았다.


 


저는 안내자에요.


안내자요?


당신같이 겁먹고 헤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요.


꽤나 조롱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투나 표정은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진실만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어디로…… 안내하시는 건데요?


글쎄요.


내가 묻자 난쟁이가 대답했다.


 


북쪽으로 갈 수도 있고, 남쪽으로 갈 수도 있고, 서쪽으로 갈 수도 있고, 동쪽으로 갈 수도 있으며, 하늘로 솟아오를 수도 있고, 땅으로 꺼질 수도 있지요.


저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그 말을 듣자 일순간 난쟁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다시 예의 표정을 찾으며, 난쟁이가 대답했다.


 


밖이라, 당신은 이미 밖에 나와있잖아요? 아까 그 돼지우리에서 나오시지 않았나요?


잠깐…….


저는 잘 모르겠네요. 밖이라,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주저앉아 있는 것보단 저를 따라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난쟁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두 가지의 불안함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첫 번째는 이 난쟁이가 나를 이상한 곳으로 꾀어서 골탕을 먹이거나 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내가 이대로 난쟁이를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는다 해도 이 곳에서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영영 헤매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불안감이 더 컸다. 난쟁이를 따라가더라도 여차 하면 도망쳐 나올 수도 있는 법이었다.


 


좋아요……. 저한테 길 안내를 해주실수 있나요?


물론이에요.


난쟁이가 작은 손을 뻗었다. 내가 그 손을 잡자, 난쟁이는 작은 덩치에 믿기지 않을 힘으로 나를 가뿐히 일으켜 세우곤, 램프를 내밀었다. 램프를 받아 들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난쟁이는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얼른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를 따라갔다.


 


난쟁이를 따라 좀 걷자,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폭포소리였다. 수풀을 헤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하는 난쟁이를 따라 나도 옷이 가지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며 그를 따라가며 풀숲을 헤치고 나온 곳엔 역시 커다란 폭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폭포는, 본래 시원하고 좋은 느낌을 풍기는 것이지만, 이 폭포는 뭔가 큰 소리는 나고 있어도 별로 시원한 느낌은 아니었다. 어둠 속이라 그런진 몰라도 물은 시커멓고, 냄새가 나는 게 별로 가까이 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난쟁이가 내 바지자락을 끌며 말했다.


 


, 저기 있는 사람을 보세요.


난쟁이는 폭포 옆의 나무 두 그루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과연, 그것들은 나무가 아니었다. 두 명의 사람이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오른쪽의 형체는 움직이지 않았고, 왼쪽의 형체는 꼼지락 대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지요.


난쟁이가 내 손을 잡아 끌며 말했고, 나는 불안함을 가지고 그의 손에 이끌려 따라갔다. 왼쪽에서 꼼지락 대고 있던 형체는 끔찍한 모양으로 나무에 틀어박힌 한 나이든 남자였다. 그의 옆에 있던 건 여신상이었다. 그녀는 인자하면서도 잔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옷의 주름과 무늬며, 머리 뒤의 후광까지 잘 조각되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나무에 몸이 박힌 남자를 향해 있었다. 마치 그를 바라보듯이.


 


램프의 불빛을 비추자 나무에 속박된 남자의 끔찍한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의식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몸의 일부라 할 수 있는 나뭇가지들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두 개의 길쭉한 팔 같은 나뭇가지들의 끝엔 정과 망치가 들려 있었고, 그는 자신의 몸, 즉 나무를 깎고 있었다. 묘하게도 그 나무는 깎이자 마자 그 부분에 다시 새살이 돋아나, 남자의 행위를 의미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눈을 감은 채, 그저 계속해서 깎여도 깎이지 않는 몸을 깎을 뿐이었다.


 


이 사람은……?


보시다시피 깎는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왜 깎고 있는 것이지요?


글쎄요? 이 남자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의미 없다는 걸 이미 깨달은 상태이지요.


그러면 왜…….


왜일까요? 이 짓이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한다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난쟁이를 내려다 보았다. 난쟁이는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짓이라도 안 한다면 할 일이 없어서 아닐까요?


난쟁이가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깎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건 저 여자겠지요.


난쟁이가 여신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는 그저 저기서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뭐가 무서워서 저렇게 몸을 깎아대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저 여자가 무섭다고요?


무서우니까 저렇게 자해를 하는 거겠지요. 저따위의 의미 없는 일을 해대는 이유는 뭐가 마음에 걸리니까 하는 것 아니겠어요? 누가 알겠어요? 사후따위가 두렵다던 지…….


사후? 난쟁이가 한 말은 그저 내 머리에 새로운 혼돈을 일으키며, 또 하나의 아수라장을 만들 뿐이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이 사람은 자기의 깎는 행동에 의미가 존재한다고 믿는 거지요. 이렇게 평생을 자해행위로 채우고 살면서, 얻는 이득도 없고 제자리 걸음만 하면서도,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멍청이 중에 멍청이지요.


 


몸을 깎고 있는 남자에게 난쟁이의 그런 말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는 가끔씩 옆에 서 있는 여신상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깎고 또 깎을 뿐이었다.


 


재미있는 거 한가지를 더 보여드리지요.


난쟁이가 말하며 내 손을 잡아 끌고 폭포 쪽으로 향했다. 악취가 풍겨오는 폭포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난쟁이의 힘이 얼마나 센지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난쟁이가 나를 끌고 간 곳은 큰 구덩이였는데, 거기엔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흐르며 하나의 작은 호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검고 작은 호수 중간에, 소용돌이가 있었다. 난쟁이가 말없이 소용돌이를 가리켰고, 내가 고개를 뻗어 자세히 바라보니, 소용돌이 안엔 기괴한 형상의 물체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몸을 씻고 있었다. 그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이 매우 기이한 모습이었는데, 마치 그것은 거대한 벌레 같은 모양이었다. 그 벌레가 크게 벌린 새빨간 입에 앉아, 남자는 쾌락에 찬 표정을 지으며, 벌레의 촉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로 자신을 닦고 있었다. 벌레의 촉수가 남자의 팔과 다리를 먹어가고 있었는데도, 남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샤워기처럼 생긴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정물로 자신을 닦으며, 마치 방금 막 마약을 투입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 끔찍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자, 난쟁이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수백 년을 저렇게 괴물 아가리 속에 앉아 몸을 닦고 있지요. 자기 몸이 먹혀가는 것도 모르면서, 저렇게 닦으면 깨끗해 지는 줄 알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건 구정물이잖아요!


예에, 구정물이지요. 그런데 저 사람은 저 따위 방법으로 자신이 깨끗해 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쾌락에 빠져서는 결국 저런 흉측한 몰골이 되어버렸지요.


하지만 왜……?


저기서 몸을 씻는 사람이나, 아까 봤던 깎는 사람이나, 전부 부질없이 의미 없는 일 따위를 하면서,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구원 받고, 보호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나는 난쟁이를 바라보았다.


 


저 깎는 사람도, 평생 동안 나무 속에 갇힌 채, 옆의 여자에게 감시를 당하며 한없이 자기 몸을 깎겠지요. 의미 없이, 평생을 제 몸을 깎으며 자신이 이루어낸 이 자해 행위를 보상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요.


난쟁이는 다시 손을 뻗어 닦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사람은, 스스로가 이미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저 구정물로 자신이 깨끗해 질 수 있다고 믿으며, 사실은 흉측한 벌레 따위가 기회만 찾으면 덥석 하고 자신을 씹어먹을 것이라는 건 깨닫지도 못한 채, 구정물과 타락이 가득한 구덩이에서 머무는 것이지요.


궁금해진 나는 결국 난쟁이에게 묻고 말았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여기서 저런 짓들을 하고 있는 거지요?


 



 


글쎄요? 당신이 말한 바깥에도 저런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요? 뭔가를 언제나 두려워하며, 의미 없는 짓 따위로 자신들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 이제 이곳엔 더 볼게 없으니 움직이도록 하지요.


 


난쟁이가 다시 내 손을 잡아 끌었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깎는 이와 닦는 이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난쟁이가 했던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돌고 있었다.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을 깎으며, 닦는 사람들. 이토록 의미 없는 일들을 별다른 뜻 없이 평생을 걸쳐 하는 자들이 있었던가. 알 듯 하면서도 모를 듯 했다. 이 알 수 없는 어둠의 세계와 내가 살고 있던 바깥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수풀을 헤치며 앞서가는 난쟁이에게 내가 물었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요?


난쟁이가 걸음을 멈추곤 뒤돌아 보았다.


 


이곳은 밤의 제국입니다.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3-


 


 지금껏 걸어왔던 숲길과는 다르게, 난쟁이와 함께 걷는 숲은 제대로 된 길이 나 있지 않았다. 내 허리춤에 닿을 만큼 길게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나 있어, 발걸음을 조심하며 앞서가는 난쟁이를 따라갔다. 난쟁이는 거의 완전하게 풀숲에 덮여 보이는 거라곤 그가 쓴 모자의 끝부분뿐 이었다. 풀에서 나는 톡 쏘는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지러움이 심하면 주위 환경이 심하게 회전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며, 간혹 심한 오심과 구토를 동반한다고 한다. 풀을 밟을 때 마다 그 자극적인 향기가 내 코를 찔렀고, 결국 더 이상 걷지 못할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껴 그만 옆의 나무에 손을 대고 몸을 지탱하였다. 앞서가던 난쟁이가 그런 나를 보고는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그가 말했다. 그를 바라보려 했지만 난쟁이는 풀숲에 묻혀 그 풀잎들 사이로 빛나는 작고 까만 한 쌍의 눈 만이 보였다.


 


이건 도대체 무슨 풀이죠? 냄새가 절 어지럽게 만드네요.


풀 냄새가 아니에요.


난쟁이가 말했다.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더 버텨봐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난쟁이의 마지막 한 마디에 의아해진 내가 물었으나 난쟁이는 이미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마치 천근을 들어 지탱하듯 내 몸을 나무로부터 떼어 추슬렀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난쟁이의 빠른 발걸음을 좇아갔다. 난쟁이의 보폭은 나의 반절도 안되었는데도 그의 걸음걸이는 배가 빨랐다. 게다가 어딜 가는 건데 거의 다 왔다는 걸까. 일단 걷는 동안 난쟁이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 이 알 수 없는 장소가 밤의 제국이란 것만을 알아내었다. 그 외의 질문에 난쟁이는 알 수 없는 대답만을 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질문 던지기를 포기하였고, 아무 생각 없이 이 난쟁이를 따라 가기로 하였다.


 


자아, 다 왔어요. 보세요!


난쟁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여태 나와 난쟁이가 걸어가던 방향의 끝엔 거대한 성이 우뚝 서 있었다. 흐르는 밤 안개에 그 성벽이 동조하며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 볼까요?


난쟁이가 말하며 성을 향해 다가갔고, 나는 또 얼른 그를 따라갔다. 성벽을 반 바퀴 돌아가자 거대한 입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성문은 얼마나 큰지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성문은 열려 있었고, 지키는 병사는 없었다. 내가 성의 웅장함에 잠시 감탄하는 동안에도 난쟁이는 마치 제 집 드나드는 양 성문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성벽 안에 들어가니 글쎄, 밖에서 본 것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성벽이 너무나도 웅장하고 아름다워 그 안뜰의 궁전 역시 대단하리라 기대했던 나는, 성문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작고 오래된 대리석 건물을 보곤 그만 실망을 하고 말았다. 어째서 성벽만을 과장하여 만든 것일까?


 


갑자기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겹고,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그 냄새. 아니, 향기인가? 이 냄새가 풀에서 나는 것으로 착각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풍겨오는 냄새는 뭐랄까, 뭔가가 썩어서 풍기는 그런 악취가 아니라, 독한 향수라던가 별로 좋지 않은 풀 내음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난쟁이의 말대로 그 냄새는 풀 내음이 아니었다. 냄새는 앞에 보이는 저 작은 건물에서부터 풍겨오는 것 이었다. 마치 쓰레기통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것처럼, 지독하고 참을 수 없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 냄새는 도대체……?


내가 난쟁이에게 물었지만, 난쟁이는 그저 고갯짓으로 작은 건물을 가리킬 뿐 이었다. 결국 궁금함에 난쟁이와 함께 대리석 건물에 다가갔다. 좀 떨어져 있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건물엔 다양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의 형상을 한 것들이었는데, 특이한 게 남자의 형상을 한 것들은 죄다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으며, 여자들은 엎드린 남자들을 카펫 삼아 걸어 다니거나 무릎 꿇은 남자들을 의자 삼아 앉아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라던가 주변 상황은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아 이 무늬가 나타내고 있는 것이 단순히 남자 여자들의 유희인지, 노예 부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무늬를 자세히 살펴보려 하는데, 난쟁이가 육중한 대리석 문을 열며 나는 소리에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자, 들어와요.


난쟁이가 손짓했고 나는 그를 따라 대리석 현관을 지나쳤다. 건물 안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미술 작품들로 가득했으며, 곳곳마다 화려한 색의 꽃들이 담긴 화분들이 놓여져 있었으며, 바닥은 폭신폭신하고 비싸 보이는 융단이 깔려 있었다. 복도엔 금색 새장들도 걸려 있어서, 그 안엔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희귀하고 신기한 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악취만큼은 건물의 밖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더 심했다. 난쟁이는 화려한 장식품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저 복도를 걸어갈 뿐이었다. 그 복도의 끝엔 금과 은, 붉은 색 파란 색 노란 색 보석들로 치장 된 문이 하나 있었는데, 난쟁이는 그것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갔다.


 


거대한 방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방은 유난히 장식이 더 화려한 곳이었는데, 그 화려함은 방금 지나쳐 왔던 복도보다도 더 하였다. 바닥과 벽이 온통 도금되었는지 번쩍번쩍 빛이 났으며, 정원도 아닌 실내인데 화려한 꽃들이 만발했고, 비싸 보이는 장식품들이 방을 도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악취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아아, 늦게 왔군요?


방을 둘러보던 중 갑자기 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나와 난쟁이가 서 있던 방의 반대편엔 거대하고 화려한 왕좌가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엔 왕좌만큼이나 거대한 몸을 가진 한 여자 보석과 비단으로 심하게 치장되어 과연 저게 사람인지 장신구인지 모를 가 앉아 있었다. 왕좌에 앉아 거들먹거리는 폼이 마치 여왕 같았다. 그녀의 주변엔 비실비실한 체구의 시녀들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뼈까지 앙상한 게, 참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여자와 한 약속에 늦다니, 무례하군요 나노스.


왕좌에 앉은 여자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난쟁이를 나노스라고 불렀다. 그것이 난쟁이의 이름인가?


 


무례해!


옆에 있던 한 시종이 외쳤다.


 


무례해!


옆에 있던 다른 시종이 외쳤다.


 


무례해!


옆에 있던 또 다른 시종이 외쳤다.


 


미안하게 됐군요. 잠시 어디를 다녀오느라 말입니다.


난쟁이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여왕은 돼지가 끽끽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곤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는, 그 디룩디룩한 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저 꼬마 머심애는 선물인가요?


선물?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선물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이분께서는 제 손님이십니다.


손님이라…….


뚱뚱한 여왕은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듯 하더니, 선물이 아니란 것에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부르신 거지요?


난쟁이가 공손하게 물었다. 이토록 그가 공손하게 굴다니, 이 여자는 그냥 여왕 행세를 하는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는 진짜로, 밤의 제국이란 곳의 지배자일지도 몰랐다.


 


일하는 사람이 더 필요해요.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난쟁이는 그냥 나 같은 사람을 안내하는 겸, 이 곳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일손이라면 충분히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난쟁이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아, 우리는 너무 고귀해서, 지금 일손으론 우리의 미모를 지키기엔 턱없이 부족해요. 손가락이라도 까딱했다간 금세 피부가 늙어 버릴걸요?


여왕이 그녀 손가락에 끼인 아름다운 반지들을 뽐내며 말했다.


 


자자, 그럼 나노스가 더 좋은 일꾼들을 데려오실 것이라 믿고, 대접을 해야죠!


그녀가 옆의 시녀에게 지시하자, 시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뭔가를 외쳤다. 그러자 그 방 양쪽에 있던 지하계단에서, 일꾼들이 음식이 가득 담긴 커다란 은 쟁반들을 들고 올라왔다. 세상에, 그들은 일꾼이 아니라 노예였다. 하나같이 누더기 한 개씩만을 걸쳤고, 발가벗은 이도 있었다. 목에는 굵직한 쇠사슬이 묶여 있었으며, 몰골이 초췌하였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그들은 전부 남자였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방 중앙에 놓여진 화려한 식탁에 음식과 식기를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그 와중 머리가 허옇게 샌 노예 한 명이 떨리는 손으로 식기를 정리하다가 그만 포크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여왕이 미간을 찌푸렸고, 그녀 옆의 시녀들이 재빨리 그 남자를 낚아 채어 데려왔고 여왕은 그 병약한 남자의 뺨따귀를 힘껏 올려 붙이곤, 배를 걷어찼다. 쓰러진 남자는 주춤거리며 몰려온 그의 동료들에 의해 다시 지하로 데려가 졌다.


 


간신히 분을 삭힌 여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거 보세요, 일꾼들 상태가 형편 없잖아요? 이래서 새 일꾼이 필요한 거에요.


여왕이 노예들을 마치 벌레 보듯 하며 난쟁이에게 말했다. 이 남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천민이었건, 그들이 과거에 어떠한 중죄를 지어 노예가 되었건 이는 너무한 것이다. 그들의 초라하고 끔찍한 모습에 내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그 한마디가 여왕을 분노케 했다. 그녀는 매우 불쾌한 듯 툴툴거리며, 옆의 두 시녀에게 뭔가를 말했다. 그러자, 그 앙상한 몸매의 끔찍한 시녀 둘이 순식간에 다가와 나를 부여잡고 여왕 앞에 끌고 나갔다. 나는 눈빛으로 난쟁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시녀들의 손아귀가 얼마나 억센지, 저항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나를 여왕 앞에 끌고 가자, 그녀가 그 굵직한 손으로 내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남자 주제에……. 죽고 싶나요?


그녀가 그르렁거렸다. 이제서야 알았는데, 성 밖에서부터 나던 그 끔찍한 악취는 바로 여왕에게서 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향수였다. 지독한 향수.


 


남자면 뭐가 안되나요!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대답하자 갑자기 여왕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녀는 나를 바닥에 내 팽개치곤 배꼽을 잡고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대었다.


 


남자면 뭐가 안되냐고? 하하하!


 


헤헤헤!


첫 번째 시녀가 웃었다.


 


히히히!


두 번째 시녀도 웃었다.


 


호호호!


세 번째 시녀도 웃었다.


 


웃음을 간신히 마친 여왕은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남자? 더럽지! 냄새 나지!


여왕이 외쳤다.


 


멍청하지!


한 시녀가 외쳤다.


 


게으르지!


그 옆의 시녀도 외쳤다.


 


호색이지!


또 다른 시녀도 외쳤다.


 


, 꼬마 남자 씨, 여자는 남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존재랍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신들이 남자를 노예로 부릴 이유는 없는 것이지 않나요? 남자도 사람인데, 권리가 있고 자유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말하자, 여왕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래서요?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그녀는 옆의 세 시녀들과 함께 또다시 정신 나간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진짜로 미쳤다. 아니, 이 장소는 미친 사람들의 장소이다. 심한 악취는 단순히 그녀의 향수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썩어버린 마음에서도 나는 냄새이다. 비 정상적인 인간들.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들. 어느 한쪽이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들.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때 난쟁이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내가 고개를 홱 돌려 난쟁이를 쏘아보자, 그는 내 눈을 바라보곤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참아야 한다. 이런 자들에게 괜히 열을 올리는 것은 내 패배를 인정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그나저나 여왕.


난쟁이가 입을 열었다.


 


호호, 아이 웃겨라. 무슨 일이죠? 나노스.


일꾼은 더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만, 관리를 잘 하실 거란 약속만 하시지요.


관리는 충분히 잘 하고 있어요. 인간이면서도 동물 같은 자들인데, 동물에게 적합한 대우는 충분히 해 주고 있으니까요.


아아, 당신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건 상관은 없습니다만, 남자라는 것들은 자존심이 꽤나 강해서 말입니다.


난쟁이가 말을 마치자 마자, 음식 나르기를 마치고 주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식탁 위의 뾰족한 식기들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여왕과 세 시녀에게 달려들었다. 여왕과 시녀들은 비명을 질렀다. 여왕은 너무 뚱뚱해서 왕좌에서 일어나 도망칠 수 없었고, 그런 여왕을 보호하려던 시녀들은 노예 남자들의 손에 찢어져 나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여왕이었다.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비명을 질러대던 여왕은, 성난 한 무리의 남자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포크에, 나이프에 찢어졌다. 그녀의 피부가 찢어지며 짙은 화장이 벗겨졌다. 세상에! 그녀의 몸은 온통 썩어 있었다. 짙은 화장으로 새 피부를 꾸며내어 끔찍하게 늙어 썩어버린 그녀의 피부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지독한 냄새도, 향수가 그녀의 썩어가는 피부의 악취와 섞여 나는 냄새였다. 그 잔혹한 복수의 광경을, 나는 말 없이 지켜보았다. 그때 난쟁이가 옷자락을 끌어 당겼다.


 


, 여기는 저 사람들에게 맡기고, 우린 가지요.


나는 난쟁이를 따라 이 산 지옥에서 벗어났다.


 


저 여자가 이 밤의 제국의 여왕인가요?


내가 달리며 물었다.


 


아아, 글쎄요. 밤의 주인은 저렇게 어리석지 않답니다.


난쟁이가 대답했다.


 


여왕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4-


 


 성난 한 무리의 남자들은 여왕을 갈기갈기 찢어 죽인 것만으론 성이 차질 않았는지, 피로 물든 은 식기들을 휘두르며 나와 난쟁이를 쫓아왔다. 이미 그들에게 이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사냥감을 쫓는 원시인 떼처럼, 입술을 앞으로 죽 내밀곤 높은 톤의 소리를 내지르면서 손에 쥔 흉기 아닌 흉기를 빙빙 휘둘렀다. 대리석 건물을 빠져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성문 밖으로 나갔는데도 광폭한 남자들은 우리를 계속 쫓아왔다. 잠시나마 그들이 개들처럼 목표물이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면 쫓기를 그만둘 것이라 생각한 내 머리통을 후려치며, 나는 쉬지 않고 달렸다. 도망치기 시작했을 때 내심 걱정했지만 난쟁이는 그 짧은 두 다리로도 잘 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나보다 더 빨리 달리고 있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 하다가 다리 찢어진다는 속담은 틀린 속담이다. 난쟁이 키의 세배는 되는 내가 그와 속도를 맞추어 달리려 하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운 나쁘게도 내가 발을 헛디딘 곳은 가파른 언덕의 끝자락이었고, 마치 내가 넘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질퍽한 진흙이 나를 반겼다. 진흙탕 속에 얼굴부터 처박혀 내 자신을 추스르려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금이라도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기 위해 몸을 꼼지락거리는 것뿐이었다. 잠시 후 평지에 이르렀을 때, 비록 난쟁이와 떨어지게 되고 온몸이 쑤신데다가 진흙투성이였지만, 최소한 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을 벗어났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은 곧 탄식으로 뒤바꿈 하였는데, 이는 미친 남자들이 나를 따라 진흙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마치 맹수들이 추격 끝에 진이 빠진 사냥감을 여유롭게 놀리듯이, 그들은 피에 절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게로 향한 채, 내 주변을 서성였다. 목숨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성을 잃고 피에 굶주린 남자들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 중 한 남자가 손에 쥔 포크를 머리 위로 쳐 들었다. 내 머리통을 찍을 생각이다. 죽기 전엔 지금껏 살아왔던 기억들이 순간 스치고 지나가며 일종의 파노라마를 만든다고 하던데, 곧 포크에 찍혀 골수와 뇌, 눈알이 사방으로 튀어나갈 상황인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릿속엔 그저 공포만이 꽉 차 있었다. 죽음이 직면해 있었지만 눈을 감고 싶진 않았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남자가 쳐 든 포크가 나를 내려찍기만을 기다렸다. 순간, 거대하고 검은 그림자가 나와 남자들 위로 드리워졌고, 그와 함께 머릿속을 지배하던 광기가 공포심으로 돌변했는지 남자들은 화들짝 놀라 어디론가로 허둥지둥 달아나버렸다.


 


여전히 몸은 쑤셨지만 나는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옅은 달빛 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난쟁이는 아니었다. 그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한걸음 한걸음 내걸을 때마다 대지가 울렸다. 한걸음 한걸음 내걸을 때마다 그의 크기가 커졌다. 그가 내 앞에 섰다. 그는 거인이었다. 족히 삼 미터는 되어 보이는 그는,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수많은 별 모양 단추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구두는 잘 손질되어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그는 챙이 좁고 통이 길쭉한 신사 모자도 갖춰 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눈만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몸을 굽히며 내게로 손을 뻗었고 그의 거친 손이 나를 붙잡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들었다. 뿌연 눈을 비비며 어느 정도 시력을 되찾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누워있던 곳은 벽난로가 지펴진 따듯하고 아늑한 방 이었는데, 조금 어색한 점이라면 방 안에 놓여진 가구들이 전부 비정상적으로 거대했다. 그도 그럴게, 이 방의 주인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니라. 거대한 형체가 거대한 탁자 근처에 앉아, 거대한 술병에서 폭포수처럼 흘러 나오는 술을 거대한 술잔에 받고 있었다. 거대한 손으로 그것을 쥐어 들이키려는 찰나, 그는 내가 깨어난 걸 본 듯, 술잔을 내려놓고 예의 묵직한 발걸음과 함께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붉게 빛나는 벽난로 빛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약간은 특이한 모양으로 기른 수염이 그의 새하얀 얼굴색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그를 보고 당황하자, 거인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히죽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체적인 인상은 좋아 보였지만, 마치 가면 같은 그의 미소 때문에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저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척 하다가 내가 방심하면 그 틈을 타서 얼른 엄지와 검지로 나를 집어들고 한입에 삼켜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면 꼭꼭 씹어먹던지. 내가 수많은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벌써 거인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손을 뻗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는 그저 뭔가를 건네려 했을 뿐이었다. 그건, 땅콩이었다. 껍데기를 전부 까서 먹기 좋게 된 상태의 땅콩. 그러나 그 땅콩은 거의 내 키의 반쯤 되는 길이의 거대한 땅콩이었다. 나는 바위덩어리 같은 땅콩을 힘겹게 받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 알 수 없는 땅에 도착한 이후로 아무 것도 먹질 못했고, 기특하게도 지금껏 내색 따윌 일체 안 하던 위장이 음식에 반응을 하며 갑작스런 배고픔을 몰아왔다. 나는 열심히 땅콩을 먹었다. 거인은 그런 나를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이리 저리 살펴보다가, 얼마 후엔 다시 거대한 책상으로 돌아가 술을 마셨다. 그때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거대한 벽 아래쪽에 난 구멍에서 꼬물대고 있던 어떤 것들이었는데, 고개를 쭉 뻗어 잘 바라보니 그것들은 작은 사람의 형태를 한 나무뿌리들이었다. 그것들은 온 몸에 잔털 잔 뿌리가 더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 있었고, 사람처럼 팔 다리 구분이 되어있었다. 그들에게 특이한 점이 한가지 있었는데, 바로 정수리에 조그만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들은 작고 귀여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재빠른 움직임으로 거인의 책상 밑에 숨어들었다. 거인은 술을 마시느라 그 작은 생물들을 발견하지 못 했다. 거인이 술을 마시다가 잠시 난롯가로 시선을 돌린 사이에, 그들은 놀라운 속도로 테이블 위로 기어올라 거인이 먹던 빵 조각 몇 개를 채어갔다. 거인이 그들을 눈치챈 건 그들이 들어왔던 구멍으로 도망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한 무리의 작은 도적떼들을 발견한 거인의 표정이 몇 번 변했다. 그냥 변했다고 표현하기엔 좀 어색했다. 그들을 발견했을 때 거인의 얼굴이 잠시 동안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었던 것 같았는데, 마치 내 착각이었던 것처럼,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구멍으로 사라져 들어가는 작은 나무뿌리 인간들을 바라보던 거인은, 잠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다가오더니,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나를 올려놓곤,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방의 문을 나서자마자 계단이 있었는데, 거인이 그 위로 올라가자, 탁 트인 공간이 하나 나왔다. 그런데 이곳엔 해란 것이 뜨지 않는 모양인지, 그렇게 높은 곳에서 서 있었는데도 어두컴컴하여 옥상 아래의 주변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거인이 옆에 있던 거대한 램프에 불을 붙이자, 그제서야 나는 주변이 어떤지 둘러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주변은 각종 무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커다랗고 괴상한 손잡이가 달린 대못들과 도끼, 식칼,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끝이 뭉툭한 대롱 여러 개가 있었다. 거인이 램프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거대한 램프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은 옥상 아래까지 비추었는데, 거인은 성벽 아래의 무언가를 찾는 듯 했다. 거인의 손이 멈추었다. 거인이 비추고 있던 것은, 아까 그의 빵을 훔쳐간 뿌리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거인의 불빛에 노출되자, 매우 당황한 듯,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을 내려다 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어느새 거인의 크기가 더욱 커졌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큰지, 내가 올라서 있던 그의 손바닥이 아까 그가 앉아있었던 테이블만해졌다. 키 역시 커져서 거인의 머리가 램프의 불빛을 벗어나 하늘의 어둠 속에 숨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그의 잔인하게 빛나는 두 개의 눈들만은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예의 대롱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가 대롱의 끝 부분을 램프의 불꽃에 가져다 대자, 그것은 밝은 빛을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거인이 그것을 성벽 아래로 떨어트림과 동시에, 그것은 꽁무니에서 불꽃을 더 힘차게 내뱉으며 하늘위로 솟아올랐다. 귀가 째질듯한 소리를 지르며 날아간 대롱은, 거짓말처럼 도망가던 한 무리의 뿌리 인간들 사이에 떨어졌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불꽃 폭풍이 일었다. 잠시 후 땅의 진동과 연기가 좀 멎었는데, 그것이 떨어진 장소는 한 순간에 생지옥이 되어 있었다. 산산 조각난 뿌리 인간들의 조각과 시커멓게 그을린 빵 조각들이 타 버린 땅 위에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그 중엔 기적적으로 무사한 녀석들이 몇 있었는데, 그것들은 동료들에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것들은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쏟아지는 동정심에 나는 거인의 자비를 바랬지만, 그는 어느새 흉측한 대못 한 개를 꺼내 들고 있었다. !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한 놈이 산 꼬치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대못에 몸통을 관통 당한 채로, 아직도 살아있는지 조그만 사지를 꿈틀거렸다.


 



 


이건 진짜 지옥이다. 땅에는 시체와 더럽힌 음식들이 즐비하고, 사방은 칠흑에 덮여 있다. 썩은내가 진동한다. 위쪽에는, 신사의 얼굴을 한 거대한 하얀 사신이 죽음의 흉기를 들고 있다. 그는 저승사자이다. 심판관이다. 그 역시 생명체이면서 또 다른 생명체를 심판한다. 죽음의 낫 따위는 없지만 불을 뿜는 막대기와 죽음의 대못이 있다. 그가 웃는다. 그는 살육을 즐긴다. 그저 작은 빵 조각 때문에. 그들의 동료가 눈앞에서 꿰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나머지 뿌리 인간들은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었는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 또 다른 한 마리가 지옥 잔치의 제물이 되었다. ! ! !


 


수많은 뿌리인간들이 꽂혀 새빨간 피가 고여 떨어지는 대못을 바닥에 내 팽개친 거인은, 이제서야 기분이 풀리는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크기가 원래대로 돌아온 거인은, 입고 있던 화려한 신사복을 고쳐 입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밖에 나간 사이에 난롯가의 불은 꺼져 있었고, 거인은 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곤 난롯가에 가볍게 불을 붙였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거인은 온화한 편이지만, 그의 심보를 잘못 건드렸다간 아까의 생물들 같은 끔찍한 최후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인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술을 한잔 마시고 거대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잠시 후에 거대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가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최대한 조용하게, 발끝으로 걸어 책상을 내려왔다. 이 거인은 살육자다. 아무리 그 작은 생명체들이 그의 빵을 훔쳤다고 해도 이 정도로 보복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없이 작은 상대에게도 그 잔임함을 거침없이 표출했던 그를 보며, 나는 숨을 죽이고 거대한 건물을 빠져 나왔다. 건물을 빠져 나오자마자,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정신 없이 달렸다. 한시 빨리 난쟁이를 찾아가야 한다. 그래야지 이 미친 장소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소는 정상이 아니다. 언덕을 달려 내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5-


 


기 있었군요.


 


거친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난쟁이였다. 그는 나와는 다르게 매우 차분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미친 남자들에게 쫓겨 진흙탕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고,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괴신사에게 이끌려 이리저리 옮겨 다녔으니 말이다. 내가 거인에게 끌려갈 무렵에 난쟁이는 남자들을 따돌렸었겠지. 그런데 전과 다르게 난쟁이의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 예의 알 수 없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그의 표정은 살짝 뒤틀려 있었다. 그의 지금 표정을 말로 표현하자면 매우 당황스럽다 해야 할까, 매우 미세한 변화였지만 그것은 분명 뭔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몸에 있는 기운이란 기운은 전부 빠져 바닥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난쟁이가 램프를 건네었다.


 


램프! 진흙에 미끄러져 굴러 떨어질 때 잃어버렸던 램프는, 거짓말처럼 난쟁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내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잡자, 램프 안의 심지에 다시 불이 붙었다. 무의식적으로 램프를 받긴 했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이 정도로 램프를 반가워 한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보통, 낡은 램프 한 개일 뿐인데. 게다가 내 것도 아니고. 아마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 밤의 제국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 길을 밝혀주고 작은 희망을 던져주었던 램프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쑤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두통이 몰려왔다. 감기가 걸린 것도 아닌데 이 장소에 떨어진 이후로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심해졌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 이다. 그리고 나의 역행성건망 역시 그 강도가 세져 이젠 이곳에 떨어지기 전의 일들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희미하게 몇 가지 기억이 나긴 했지만 사실, 별로 떠올리고 싶은 기억들도 아니다.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날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와 버렸네요.


난쟁이가 낮게 말했다.


 


, 안내해 드리죠. 저쪽으로 가요.


그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그의 억센 손아귀에 이끌리던 찰나,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저 멀리, 어두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숲 속에서 마치 보름달 밤에 빛나는 별들처럼 은은한 빛이었다. 저 곳에 누군가가 있다. 정상적인 존재를 기대하기엔 좀 무리인 장소이지만, 빛은 역시 인간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준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임을 두려워하고, 주변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외톨이로 만들어 버리는 어둠 역시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운 어둠을 쫓는 빛, 밝은 빛을 사람들은 좋아하며, 행운의 상징, 길조 따위로 빛을 숭배한다. 그렇다, 빛은 희망이다. 좋은 미래이다. 어쩌면 저곳이 이 끔찍한 곳에서부터 영원히 빠져나갈 수 있는 천국의 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억센 난쟁이의 손을 뿌리치고, 저 멀리에서 빛나는 불빛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쟁이가 무언가를 외치며, 내 옷자락과 손을 잡아 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 오오 위대한 빛이여.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통증은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다. 내려다 본다. 난쟁이가 램프로 내 발등을 내리 찍었다. 꿈같이 몽롱한 느낌이 사라지며 고통이 밀려왔다. 소리를 지르며 발을 감싸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매우 세게 내리친 것인지, 아니면 수십 번을 내리찍은 것인지 발등의 살이 전부 까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소리지르며 굴렀더니 통증은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고, 세상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난쟁이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군요.


아아, 이게 무슨…….


숲 깊은 곳은 매우 위험하다고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어가 버리면 어떡해요. 큰일 나요.


난쟁이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손에 뭍은 피를 바지에 비벼 닦으며, 아픈 발은 디디며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작은 오두막 앞에 와 있었다. 오두막 지붕 아래에 걸린 작은 램프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를 이끈 불빛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오두막. 거인의 것처럼 크지도 않고, 여왕의 것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보통 사람, 마음씨 좋은 나무꾼이 살 것만 같은 아담한 오두막이었다. 문을 향해 다가서는데 난쟁이가 내 손을 다시 잡아채었다.


 


이쪽으로 오라고요!


그가 작게 외쳤다. 난쟁이가 이토록 당황해 하는 모습은 처음 본 듯 했다. 그는 온통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내 손을 꼭 잡곤 필사적으로 나를 당겨대고 있었다. 그때,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형체로 미루어 보건대 사람이다.


 


누구신가요?


말을 한다. 그것도 극히 정상적이며 점잖은 남자의 목소리이다. 예의 바른 사람이다. 자세히 보기 위해 그에게 가려는데, 난쟁이는 그때까지도 나를 필사적으로 잡아 끌고 있었다. 나와 난쟁이의 실랑이를 알아챘는지, 오두막에서 나온 남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나노스?


그가 말했다. 이 자는 난쟁이를 알고 있다. 전에 만났던 여왕은 난쟁이를 나노스라고 불렀다. 역시 그것이 난쟁이의 이름인 듯 하다. 어둠 속에 서 있던 남자가 그를 부르자, 난쟁이는 체념한 듯, 내 손을 놓곤 남자에게 다가갔다.


 


시멜라!


난쟁이가 반가운 듯,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나노스! 나노스 맞군요! 오랜만입니다!


남자가 다가오며 말했다. 난쟁이는 이 자와 사이는 좋은 듯 한데, 왜 내가 이쪽으로 오는 걸 막은 것일까. 혹시 겉으로만 친한 척 하고 속으론 매우 싫어한다던가, 그런 이유일까. 램프를 집어 들었다. 심지가 다시 타오르며 주변을 밝히었고, 램프의 불빛에 남자의 형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말쑥한 체구, 깔끔하고 잘 갖추어 입은 정장, 단정하게 빗은 머리. 그리고 그의 얼굴 솔직히 이 땅에서 정상적인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는, 얼굴 이곳 저곳에 눈을 가지고 있었다. 코는 없었고, 여러 개의 눈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뭔가 사악함을 풍기지는 않았지만, 기괴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램프의 불빛이 조금 밝았는지, 남자는 얼굴에 달린 여러 개의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불빛을 가렸다.


 


수천 년을 어둠 속에서 산 저에겐 좀 밝은 빛이군요.


그가 말했고,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램프를 내렸다. 자신을 괴롭히던 불빛이 사라지자, 시멜라는 다시 난쟁이의 손을 부여잡았다.


 


나노스! 매우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삼백 년 전쯤이던가요?


글쎄요. 삼백 년이었는지 사백 년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난쟁이가 대답했다.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요, 언제나 수고하는 시멜라를 못 본 척 할 수는 없지요.


시멜라의 눈들이 나에게로 향했다.


 


이분은?


, 제 손님입니다.


손님이라, 그렇군요. 손님도 약 오백 년 전 이후로 처음이군요.


“…… 그렇군요.


난쟁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 외에도 이 장소에 왔던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이 두 생명체의 대화는 조금 비상식적이었지만. 몇 백 년의 단위가 마치 작년의 이야기 하듯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 오랜만에 찾아온 귀중한 손을 이렇게 밖에 세워둘 순 없지요. 들어오세요!


마음은 고맙지만 시멜라, 우리는 급히 가 보아야 할 데가 있어서요.


아니, 그렇다고 여기까지 찾아온 나노스를 그냥 보낼 수는 없습니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가세요.


그가 난쟁이를 잡아 끌었다. 난쟁이는 체념한 듯, 순순히 그의 손에 이끌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게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에게도 시멜라가 손짓을 하였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가 따듯한 오렌지 빛을 방 안에 퍼뜨리고 있었고, 그 불꽃 위에 놓여진 작은 단지에서는 좋은 냄새가 나는 무언가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이와 같은 푸근한 오두막의 풍경을 상상하던 내게, 시멜라의 오두막은 커다란 반전이었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아까 그가 수천 년을 어둠 속에서 살았다라는 말이 기억났다. 들고 있던 램프의 은은한 빛에 작은 책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의 한 모퉁이에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난쟁이의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무엇이 저 능글맞은 난쟁이를 이토록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저 시멜라라는 자가 상상 외로 고약한 자 인 것일까? 어두운 방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들어갔던 시멜라가 작은 쟁반에 어떤 액체가 담긴 찻잔 세 개를 올려 들고 나타났다. 그는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찻잔을 하나씩 들어 요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와 난쟁이 앞에 놓아 주었다. 내가 액체의 정체를 확인하는 동안, 시멜라는 자신의 것을 집어 들고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내며 그것을 음미했다.


 



 


곁눈으로 난쟁이를 보니 그는 찻잔에 손조차 대고 있지 않았는데, 그는 뭔가 생각하는 것인지 하지 않는 것인지 멍한 눈으로 즐겁게 를 마시는 시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도를 마친 시멜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 언제 마셔도 참 좋습니다. 그보다 나노스, 여기까지 어쩐 일로 왔죠? 차만 마시러 온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난쟁이의 얼굴에 다시 한번 당황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차마 일부러 피해가려 했는데 상황이 틀어져서 원치 않게 와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리라. 핑계거리를 떠올렸는지 난쟁이가 입을 여는데, 시멜라가 말을 가로채었다.


 


아하, 알겠습니다.


그가 얼굴에 달린 수많은 눈들을 깜빡이며 말했다. 조금 으스스한 것이, 그의 눈들은 보통 것들처럼 동시에 여러 개가 깜빡이는 것이 아닌, 눈 한 개 한 개 마다 깜빡이는 때가 달랐다. 마치 개구리나 도마뱀 따위의 파충류들처럼 말이다. 마치 눈 하나하나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간혹 눈 몇 개는 내 얼굴을 훑어보기도 하고, 눈 몇 개는 난쟁이에게 향해있기도 하고, 몇 개는 자신의 빈 찻잔에 향해있기도 하였다.


 


제 작업을 점검하러 오신 거군요?


난쟁이가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신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 벽으로 다가갔다. 그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뭔가를 조작하자 찰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은은한 불빛이 방안을 메웠다. 먼지가 가득 낀 전구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램프의 불빛으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방의 모습을 흐릿하게 묘사해 주었다. 책상 뒤편엔, 넝쿨줄기처럼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과, 벽을 메우고 있는 수십 개의 모니터가 있었는데, 그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요란한 소리가 나는 기계장치들을 이리저리 작동시키자 모니터들이 하나 둘씩 흐릿한 불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뿌연 안개 같은 화면을 보이던 모니터는 천천히 어떤 형상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입이었다. 모니터 하나하나마다 화면에 입이 있었다. 두꺼운 입술의 입, 짙은 색 입술의 입, 시퍼런 입, 잔인한 미소, 조소를 짓고 있는 입, 찡그린 입, 충치를 가진 입,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양의 입, 이를 악물고 있는 입. 그리고 그 입들의 중앙에, 시멜라는 앉았다.


 


그가 서랍에서 얇은 종이 한 장과 펜을 꺼내 들고 모든 준비를 마친 듯 고개를 들자, 매우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수십 개의 모니터에 갇힌 입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찡그린 입은 찡그린 채로 뭔가 불만을 토로하듯 낮은 톤으로 중얼거렸으며, 비웃음을 띈 입은 뭔가 즐거운지 연신 낄낄대며 무언가를 재잘거렸다. 수십, 수백 개의 입들이 제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해댔고, 여러 소리들이 섞이며 그것은 소음이, 혼돈이, 더러움이 되었다. 그 진개장속에서, 시멜라는 얼굴에 달린 여러 개의 눈들을 이리저리 굴리며 뭔가를 바쁘게 종이에 받아적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내가 물었으나 난쟁이는 말이 없었다.


 


순간 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모니터 속 더러운 입들 중 시커먼 충치를 가진 녀석이 뭔가 익숙한 단어를 내뱉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던 그 것, 하지만 지금은 뿌연 기억 속에 묻혀 희미해진 그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이름?


 


슬슬 아파오는 머리를 진정시키며 귀를 기울이려는 순간 난쟁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오두막의 문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가 문을 벌컥 열고, 나에게 외쳤다.


 


! 이제 슬슬 가 봐야만 할 것 같군요, 어서 오세요!


그와 동시에, 시멜라가 문서의 작성을 끝마치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양피지를 들고선 난쟁이를 불렀다.


 


나노스! 목록이 막 완성되었는데 벌써 간다니요?


안돼요!


차 한잔만 더 하고 가세요!


안돼요!


그럼 이것만이라도 읽고 가세요!


안돼요!


그럼……!


안 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알 수 없었던 나는 그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 나를 보고는 나노스가 재빨리 다가와 손목을 부여잡곤 나를 끌다시피 하여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시멜라가 우리를 따라 오두막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난쟁이가 그의 면전에 대고 문을 세차게 밀어 닫았다. 얼마나 세게 닫았는지 나무재질의 문이 비틀어지며 문이 끼어져 버렸고, 시멜라는 나올 수가 없었다.


 


나노스! 왜 이러는거에요!


한 오백 년 후에 다시 오겠어요!


난쟁이가 외치곤, 내 손목을 부여잡은 채 몸뚱이를 질질 끌고 달리며 외쳤다. 점점 멀어지는 오두막으로부터 시멜라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666-


 


 멜라의 오두막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난쟁이는 나를 놓아주었다. 거의 끌리다시피 하여 온몸이 지저분해지고 작은 상처가 몸의 이곳 저곳에 나고 말았다. 반 강제적으로 난쟁이에게 이리저리 끌린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앞뒤 상황설명도 해주지 않고 힘으로 잡아 끈 난쟁이에게 화가 났다. 이곳에 처음 도착해왔을 때처럼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침착한 마음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성을 잃었다. 머릿속도 어지러웠다. 더 이상 내 영혼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가지고 마치 인형극의 마리오네뜨처럼 실에 묶여 움직여 지는 듯했다. 머릿속엔 온통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목격했던, 하나같이 괴상망측한 것들 밖엔 떠오르지 않았으며, 집과 과거에 관한 기억도 이젠 쓰디쓴 기억 밖엔 남지 않았다. 이건 건망증이 아니다. 누군가가 뻣뻣한 고무지우개를 가지고 머릿속을 조금씩 조금씩 거칠게 문질러가며 지워나가는 것만 같다. 아무리 과거를 떠올리려 해도 생각나는 것은 나를 반겨주었던 차가운 땅바닥과, 달조차 뜨지 않는 밤, 기괴한 모습의 나무들, 나를 머리 아프게 하는 모든 것들. 하지만 램프! 그렇다, 램프! 그것만은 나의 편이다. 내가 이곳을 헤매고 있을 때 처음으로 나에게 도움을 준 것이었고, 지금도 그랬다. 그렇다면…… 난쟁이는? 난쟁이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어디서 왔는가, 몇 살인가, 목적이 무엇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편인가, 나의 적인가, 방관자인가, 배반자인가, 인간인가, 짐승인가, 이름은 무엇인가? 아니, 이름은 알고있다. 난쟁이의 이름은 나노스, 나노스. 그래, 나노스. 썩은 내를 풍기는 여왕도 나노스라고 했고, 얼굴에 눈이 뒤 덮인 남자도 나노스라고 했다. 나노스다 나노스. 구원의 손길은 나노스이다. 나노스, 나노스, 나노스, 나노스, 나노스나노스나노스나노스나노스나노스나노스. 나노스.


 


정신차려요!


누군가가 내 뺨을 때린다. 손이 매섭다. 후끈거리는 볼이 내 시점을 되찾아준다. 난쟁이가 내 멱살을 부여잡곤 따귀를 올려 붙이고 있다. 이건 나를 정신차리게 하려는 행위인가 나를 아프게 하려는 행위인가.


 


그만해!


외치며 나노스를 밀쳐내었다. 갑작스런 나의 반응에 놀랐는지 난쟁이는 뒷걸음을 조금 친다.


 


나노스!


?


대답은 잘 한다.


 


전부 설명해 달라고! 밤의 제국이란 곳은 뭔지, 내가 지금까지 봐온 것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 자식아, 들리나!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 눈이 돌아가서 흰자위를 보이고 있을 것이다. 난쟁이의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노스!


좋아요.


난쟁이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분노로 돌아가버린 내 머리는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


 


이곳은 밤의 제국.


그래!


밤의 제국은 헤매는 이들이 찾아오는 곳. 헤매는 이들의 안식처. 헤매임의 항구. 방황하는 영혼은 이곳으로 향하게 되어 있지요.


점차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흙탕물을 마구 휘저어놓으면 잠시 후엔 흙이 전부 가라앉듯 머릿속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흙이 가라앉는다고 해서 물이 완전히 맑아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뿌연 먼지가 물을 혼잡하게 만든다. 혼잡한 머릿속에서 드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말씀 드렸듯이, 저는 안내자입니다. 방황하는 자들을 이 밤의 제국으로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상관없어.


당신도 헤매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겠지요. 당신들이 부르는 바깥세상과 이곳의 경계는 확실하기도 하고 애매하기도 하지요.


그러면…… 그들은 어디로 안내되는 거야.


영원한 안식으로.


안식.


정신을 되 찾는다. 눈 앞이 보인다. 내 앞엔 난쟁이가 램프를 들고 서 있다. 램프의 불빛이 유난히 밝다. 하얀 불빛이 난쟁이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춘다. 난쟁이는 무표정이지만 일렁이는 불빛이 얼굴에 표정을 그려내고 있다. 눈이 어둠에 익으며 점차 주변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주변은 온통 고통스러운 인면으로 뒤덮인 나무들이다. 수십, 수백 개의 얼굴이 나무에 갇혀있다.


 


이해하셨나요?


난쟁이가 묻는다. 난쟁이의 창백한 얼굴, 인면 나무들, 이 어두운 장소. 여러 가지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회전한다.


 


이곳은 지옥?


그렇게 부르는 자들도 있지요.


집에 가고 싶어.


난쟁이가 웃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난쟁이의 웃음이었다. 기괴하다. 그저 기괴하다는 말 밖엔 할 수가 없다. 그 웃음이 기괴 그 자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머리가 아파 별다른 단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은 이미 영혼의 대부분을 빼앗겨버렸어요.


그가 램프를 머리 위로 들었다.


 


이 램프는, 당신의 영혼을 기름으로 하여 타오르는 램프이지요.


어지럽다.


 


당신의 영혼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나무들이 울부짖는다.


 


, 얼마 남지 않은 영혼을 저에게 주세요!


구역질이 난다.


 


자아!


싫어.


 


얼마 남지 않은 영혼을 공짜로 줄 순 없지. 지금까지의 영혼은 당신의 친절한 안내와 동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준 것이었지만 지금 와서 내 남은 재산을 달라니, 말도 안되.


입에서 무슨 헛소리가 나가는지도 모른다. 온몸이 나른하다. 내 말을 듣고는 난쟁이는 잠시 생각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내기를 하자!


내기, 저는 내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내기내기!


사실 당나귀라도 이보다 나은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의 작은 악마는 거의 손에 넣은 영혼에 눈이 멀었는지 흥분하여 새까만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그래, 내기! 달리기 내기 어때?


달리기! 인간들은 멍청하게도 운에 내기를 걸던데, 당신은 좀 다르군요!


,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줘! 만약 내가 안전하게 바깥에 도착한다면, 내가 이긴거다! 나를 보내줘.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나를 잡는다면, 나는 내 영혼을 주겠어!


이런 곳에서 멈출 수는 없다. 나에겐 영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머릿속이 다시 흐려지며 난쟁이가 여러 개로 보인다. 목소리도 사방에서 들린다. 이것저것을 따져보는 것인지 난쟁이의 대답이 늦다.


 


어때!


좋아요.


난쟁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은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저 멀리, 하얀 빛 줄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나의 출구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내 몸은 이미 내 몸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 내 자아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난쟁이 또한 아니다. 알 수 없는 무언 가이다. 순간적으로 움직여 난쟁이가 들고 있던 램프를 뺏어 들었다. 난쟁이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램프를 높이 쳐들고 난쟁이의 대가리에 램프를 냅다 집어 던진다.


 


!



 


램프가 박살이 나며 누런 기름이 난쟁이를 뒤덮음과 동시에 불이 붙는다. 난쟁이는 불타오른다. 영혼의 기름이 불타오르며 희생자들이 울부짖는다. 오열한다. 분노한다. 괴로워한다. 오오, 아름답다.



난쟁이가 괴성을 지른다. 밤의 주인이 불에 타오르며 고통과 함께 분노의 저주를 내뱉는다. 그의 몸이 괴상하게 틀어진다. 달리자 달려. 도망가자 도망. 빛을 향해 달린다. 지옥에서부터의 귀환이다.



난쟁이, 아니 악마가, 사탄이 나를 쫓아온다. 하지만 그는 나를 잡을 수 없다. 나의 희망, 나의 삶에 대한 순수한 욕망, 그리고 살고 싶다는 의지. 나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다. 아픈 기억은 그냥 한때의 기억일 뿐이다. 추억이다. 아름답진 못하지만 추억이라 부른다.


 



 


빛 줄기를 올려다본다. 저 빛은 집을 의미한다. 저 빛은 집의 따스함이다. 멀겋고 흐린 불빛이 아니다. 광명이다. 진실된 희망이다.


 


나는 빛 줄기 안쪽으로 발을 뻗는다.


 


 


 

 

 

 

 

 

 

 

 

삽화 : 그리폰 (http://blog.naver.com/pictu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