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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hwarang102 The Magic

2007.09.21 17:00

Mr. J 조회 수:1105 추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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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아시스의 수도 아슈라드의 북서쪽엔 임자 없는 큰 땅이 있다. 민가와 그 지방의 경계에서부터 약 한 시간만 걸어가면 온갖 꽃과 과일나무로 가득한 곳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개국공신가문인 칼리사르 가의 영토이다. 손꼽히는 명문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문의 특이함에 보통 사람들은 영토 근처에 가는 것을 꺼려했다.


칼리사르 가문은 슐리아시스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마법학파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게다가 일반적인 귀족 가문처럼 후사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식이 아닌, 당주가 인정하는 사람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칼리사른 가문은 사람의 인품보다는 실력 자체에 큰 무게를 두어, 역대 당주중엔 괴짜나 미치광이도 존재해왔다. 그 일부가 이룬 악명 덕분에 가문 밖의 사람들은 칼리사르와 접촉을 피하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칼리사르 가 영토 주변의 땅이 비옥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땅을 차지하려 들지 않았다.


 


칼리사르 가문의 8대 당주는 베네딕트 칼리사르였는데, 그는 밝고 외향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7대 당주로부터 작위를 부여 받자, 영토의 전부를 각종 과일나무와 밝은 색의 꽃으로 채웠다. 사람을 시켜 영토 전체의 잔디가 항상 고르고 보기 좋게 관리시켰으며, 7대가 세웠던 경계 주변의 울타리와 돌담을 허물고 사람들의 방문을 허락하였다. 그는 영토를 하나의 작은 낙원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는 왕국에서 열리는 연회나 모임엔 빠짐없이 참석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여 민심을 얻어나갔다.


덕분에 그가 당주가 된지 얼마 안되어 사람들은 칼리사르 가문에 대한 경외심을 조금씩 없애가기 시작했다.


 


칼리사른 가문의 영토에서부터 시작되는 꽃 길을 따라 걸어가면, 거대한 저택이 나온다. 베네딕트가 손님들을 위해 새로이 저택의 커다란 방을 응접실로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저택까지 찾아오는 손님은 드물어, 단 한번도 응접실은 제 구실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응접실은 저택 내의 사람들이 휴게실 정도로 사용하였는데, 그날은 응접실에서 매우 특별한 만남이 약속되어 있었다.


 


텅 빈 응접실엔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한 폭의 꽃송이와도 같이 화사한 노란 빛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뭔가 근심이 있는지 얼굴 빛이 좋지 않았으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머리결과도 같은 다갈색 눈동자들은 앞 탁자에 놓여진 작은 꽃병에 머물러 있었다.


그 공녀의 이름은 사라 칼리사르, 베네딕트 칼리사르의 수양딸이었다.


그녀는 응접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잡힌 약속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부녀의 만남이었다. 아침식사 때 베네딕트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응접실에서 그를 만날 것을 요청했고, 평소 때와는 다른 그의 태도에 사라는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녀는 초조하여 창문이라도 내다볼 생각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는데, 그때 베네딕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외출을 하고 바로 돌아온 것인지 검정색 예복을 입은 그는 길게 난 수염이 잿빛인 것이 막 말년에 접어들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신사였다.


 


조금 늦어서 미안하구나. 오전 중엔 처리해야 될 일이 있어서……. 앉거라.


다소곳이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사라는 베네딕트가 앉고 나서야 다시 의자에 앉았다.


 


너도 이제 열 여섯이지 않느냐?


.


그래서 말인데……. 이제 천천히 결혼 상대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해서 말이다.


?


사라는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생각하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였으니 말이다. 결혼이야 그녀도 전부터 조금씩은 생각해 본 것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가 아들녀석이라면 모르겠지만, 딸이다 보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구나. 실은 생일날에 말을 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미루다 보니 지금에서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


그래, 혹시 특별히 마음에 드는 청년이라던가, 있느냐? 얼마든지 주선을 해줄 수 있으니까.


, 아니오…….


사라는 얼굴을 붉혔다.


 


물론 작위는 너에게 물려줄 생각이다. 마법이야 좀 더 손을 보면 잘할 수 있을 테고…….


사라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베네딕트의 하나뿐인 수양딸이었지만 그녀는 마법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칼리사르 가문의 전통을 따르게 된다면 그녀는 자격 미달이었지만 베네딕트는 칼리사르 당주 중에선 좀 특별한 케이스여서, 실력가인 외지 사람을 후계자로 삼는 것보단 정을 주고 키운 사라에게 작위를 부여할 것을 고집하였다.


사라는 그런 아버지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 한없는 죄송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었더라면…….


 


그래, 할 말은 이것뿐이다.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나도 나름대로 알아보고 다닐 테니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지 와서 말해다오.


, 감사합니다 아버님.


베네딕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사라는 잠시 그가 나간 방향을 바라보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사실 결혼은 그녀에게 있어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베네딕트가 원하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할 가문에 시집살이와도 같은 생활을 원할 남자는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머리가 복잡 해져버린 그녀는 나들이를 나가기로 정하였다.


 


.


.


.


 


시녀 둘과 경호원을 데리고 저택을 나온 사라는 마차를 타고 왕국으로 향하였다.


마침 날이 장날이라 왕국의 거리는 북적거렸으며, 상인들과 광대가 흙먼지와 더불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행차할 때 그러듯, 사라의 호위병은 앞에 서서 칼리사르 가문의 엠블렘이 새겨진 휘장을 펼쳐 들었고, 평민들은 알아서 길을 피하였다.


 


사라는 마땅히 용건은 없었지만 그냥 이렇게 북적거리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좋았다. 저택에서의 조용한 생활도 나쁘진 않았지만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땐 이렇게 나들이를 하면서 구경도 하면 기분도 풀리곤 했다.


 


그렇게 거닐던 중, 광장 쪽이 유난히 소란스러웠고, 궁금해진 사라는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내기대회인 듯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사회자와 덩치가 집채만한 검투사 하나가 서 있었다. 색이 바랜 연미복을 입고 있던 사회자는 작은 유리상자를 들고선 광장 주변에 서 있는 구경꾼들에게 뭔가를 외치고 있었는데, 유리상자 안엔 잘 가공된 유리 장미가 놓여 있었는데, 척 봐도 값진 물건인 듯 하였다.


 


, 다음 도전자 없으십니까? 여기 이 무적의 검투사 베른을 넘어뜨리시기만 하는 분께 이 고가의 유리 장미를 드립니다!  참가비는 단돈 1000골드!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거리 한편에 젊은이 몇이 나뒹굴어 있는 것을 보니 이미 용감한 도전자 몇이 혼쭐난 뒤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거대한 몸집의 남자를 넘어뜨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으니 말이다. 사실 저 사회자도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을 테고. 그때 구경꾼 몇몇이 칼리사른 가문의 휘장을 눈치채곤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칼리사른 가문이다!


누구야?


공녀님이다! 사라 칼리사른 공녀님이다!


사라 일행 앞에 서 있던 구경꾼들은 얼른 옆으로 피하였고, 졸지에 광장의 한쪽은 칼리사르 가 전용 구경석이 되어버렸다.


 


!


잠시 혼란스러워진 광장의 분위기를 잡으며 사회자가 외쳤다.


 


칼리사른의 공녀님의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은 젊은 투사 없습니까!


관중들은 전보다 좀 더 크게 수근거렸지만, 여전히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한 젊은이가 손을 높이 들고선 광장 앞으로 나왔다. 긴 흑발을 가진 한 젊은 남성이었는데,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청록색 갑주를 입고 있는 것이 왕국 기사단의 기사임에 분명했다.


 


! 기사님께서 도전을 하시는군요!


나무 검을 들고 있던 덩치가 조금 긴장했는지, 그의 등 근육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무리 자신의 반도 안 되는 덩치의 어린 남성이지만, 왕국 기사이면 그 검술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얼굴도 곱상해서, 구경하던 마을의 처녀들이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였다.


젊은 기사는 말없이 1000골드를 지불하고, 그의 갑옷을 벗어 한편에 정리해 둔 뒤, 사회자가 건넨 목검을 받아 들었다. 베른이 전투태세를 취하는데, 갑자기 그 기사는 성큼성큼 걸어 광장을 가로지르더니, 칼리사르의 휘장 앞에서 자세를 낮추었다.


 


이 몸, 세반드 제레인트! 제가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사라 칼리사르 공녀님께 저 장미를 바치겠습니다!


아주 기세가 당당한 젊은이였다. 이런 싸구려 내기 싸움을 전투라고 하는 것이며,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좀 우습기도 했지만 사라는 이미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자신 앞에서 이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사라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고, 기사는 덩치에게 돌아섰다.


 


살루트!


세반드가 외치며 목검을 가볍게 들어올린 뒤, 오른쪽 밑으로 내저었다.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는, 기사들의 무술 대련시의 인사였다.


그가 전투자세를 취하자마자 덩치가 재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종베기를 하였고, 세반드는 재빠르게 뒤로 피하였다. 본래 넘어지지만 않는 것이 목적인 베른으로선 그냥 방어태세를 갖추다가 틈을 타 공략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지만, 지금 이 덩치는 기사를 골려 주고 싶은 것 같았다. 애송이를 흠씬 두들겨 패주기 위해 그는 사납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 기회를 놓칠세라, 세반드가 덩치의 살짝 무른 공격을 튕겨내었다. 검을 몸에 바짝 붙이며 밀어내자 베른은 제풀에 휘청거렸지만, 곧 페이스를 되찾았다. 관중들은 그 틈에 세반드가 공격하지 않은 것에 의아해하며 아쉬움이 탄성을 내질렀다.


세반드는 여전히 검을 몸에 붙인 상태였고, 세반드의 공격에 어느정도 열이 오른 베른은 온 힘을 담은 강렬한 횡베기를 하였다. 세반드는 재빠르게 움직여 자세를 낮춤과 동시에 검으로 베른의 발목을 쳐냈고, 덩치는 그대로 자빠져 버렸다.


육중한 몸집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쓰러져 버리자, 군중들은 한동안 의아해했지만, 검을 치켜드는 세반드를 보곤 금새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세반드는 일부러 베른을 흥분시켜 그가 공격에 체중을 담기를 기다렸고, 그가 계획대로 움직여 온 힘을 다한 횡베기를 하였을 때, 체중이 쏠린 몸의 반대편에 가격을 한 것이다. 상체, 그것도 오른쪽 어깨에 크게 힘이 들어가 있던 베른은 허술해진 하체 덕분에 그렇게 가볍고 재빠른 일격에도 넘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자는 순순히 유리장미가 담긴 상자를 세반드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크게 떠벌려졌을 뿐이지 그다지 비싼 물건도 아닐테고, 지금까지 얻은 참가비로 본전 이상은 건졌을 테니 말이다. 세반드는 상자에서 붉은색과 녹색으로 색이 잘 입혀진 유리 장미를 꺼내었다. 그는 사라 앞으로 다가갔고, 사라는 호위병으로 하여금 잠시 옆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세반드는 사라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고, 장미를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사라는 수줍지만 체면을 지키며, 그의 장미를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순간 세반드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입을 맞추고, 장미를 직접 쥐어주었다. 깜짝 놀란 호위병이 칼집에 손을 가져갔지만 사라는 그를 저지하였다. 귀족 집안 아가씨의 손에 함부로 입을 맞추는 일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사라는 그의 당돌함이 매우 맘에 들었다. 기사는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갑옷을 챙기곤 군중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군중들 역시 쇼가 끝나자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쇼는 끝났지만 아직 장날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재미있을법한 구경거리를 찾아 떠나고 있었다.


 


사라는 여전히 유리장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는데, 그가 아무런 약속 없이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이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젊은 혈기로 나서서 스스로를 뽐낸 것뿐이었을까. 어찌되었건 사라는 그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 보기 위해 얼른 저택으로 향했다.


 


.


.


.


 


제레인트 가문이라면 대대로 왕실 기사단장을 지내온 가문 아니더냐. 안될 것도 없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던 사라는 베네딕트의 흔쾌한 승낙에 마음에 놓였다. 베네딕트는 손수 격식을 차린 편지를 써 제레인트 가에 전하였고, 바로 다음날 영광이며 감복 따위의 단어가 한 가득 적힌 답장이 도착했다.


또 다음날, 단정하게 차려 입은 세반드가 살짝 굳은 얼굴로 저택에 찾아왔다. 제레인트 가문에서도 그 장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알았을 테고, 분명 점잖지 못했던 행동에 대해 몇 마디를 들은 모양이었다.


 


세반드가 온 것을 보고 마음이 들뜬 사라는 얼른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그녀도 칼리사른 가의 공녀. 최대한 예를 갖추어 행동해야 했다. 게다가 상대 집안도 꽤 이름있는 가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문간에 서 나가지 않고 기사를 기다렸다. 세반드는 얼른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깎듯이 예를 갖추었다. 길어서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던 흑색 장발도 단정하게 묶은 그를 보고 사라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일어나세요.


그녀가 말하며 기사에게 손을 뻗자, 세반드는 기뻐하며 그녀의 손을 받아 일어섰다. 그리곤 천천히, 몸을 굽혀 그녀의 손등에 살짝 키스하였다.


 


저번의 무례에 대해서 사죄 드리겠습니다.


그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말했지만 사라는 그것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사실 은근히 그의 당돌함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참이었으니.


 


아니에요. 그때 주신 장미, 잘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라는 세반드를 이끌고 저택 뒤의 뜰로 나갔다.


 


젊은 두 남녀의 사이는 급격한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사라는 처음엔 세반드가 남자이면서도 여자의 집에 찾아와 만남을 가져야 하는 것을 싫어할까 불안했지만 세반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였다. 기사들이 본래 여성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을 미덕으로 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세반드는 온화하고 매너있는 남성이라 더욱 그랬다.


사실 저택에 살면서 시종들 외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던 사라는 자신 말을 잘 들어주는 세반드가 참 편하였다. 꼭 이야기를 할 거리가 없더라도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으면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들은 언제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정원의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에서 만남의 대부분을 보내었다. 세반드가 사라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사라는 그의 길고 매끄러운 흑빛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곤 했다. 만나면 만날수록 서로에게 하는 말은 줄어갔다. 그저 상대방과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만족하고 행복했으니, 그것이 정말로 사랑이었다.


 


교제를 시작한 지 1년도 안되어 그들은 약혼을 하였고, 일주일 후에 혼례를 올리기로 약속하였다. 양쪽 가문은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행복은 순간이었다. 결혼식 이틀 전,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길에 세반드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의사들이 의식 불명이 되어버린 그를 찾아왔지만 아무도 세반드가 쓰러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반드는 숨은 쉬고 있었으나,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날 소식을 들은 베네딕트가 몸소 제레인트 가를 방문하여 세반드의 상태를 보러 왔다. 그는 마법사이면서도 의학에도 능통했으니 말이다. 걱정이 되었던 사라도 아버지를 따라 왔지만, 걱정이 되어 결국 세반드가 있는 방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직도 무의식인 그를 봤다간 마음이 견뎌내질 못할 것만 같았다.


베네딕트는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방에서 나왔다. 터질것 같은 가슴을 누르고 있던 사라는 아버지를 보고 벌떡 일어섰지만 그녀는 베네딕트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말았다.


 


……. 어떻게 됬나요.


이미 암울한 답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뇌에……. 뇌에 깊숙하게 염증이 자리잡았더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노래졌지만 사라는 용케 몸을 지탱하고 서 있었다.


 


고칠 수는 없나요?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이미 일반 의사의 의학수준을 넘어선 아버지의 표정이 저렇다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선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현대 의학으론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 안쪽에 생긴 염증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단다. 미안하다 얘야…….


사라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그 후 방으로 옮겨진 사라는 곧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병상에 누운 세반드를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만약 그녀에게 선천적인 재능이 있어 칼리사르 가문의 비술을 익혀왔다면, 그녀에겐 어쩌면 세반드를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무능력했다. 비술은커녕 대를 이어나갈 수 있는지도 확실하지가 않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괴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세반드는 열흘 밤낮을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사라는 세반드가 땅에 묻히기 전, 관을 열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정신을 잃은 상태일 때 그를 보지 못한 것은 무능한 자신이 부끄럽고 세반드에게 너무나도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사라는 편안해 보이는 세반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세반드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죄일 것이다. 세반드는 자신 때문에 죽은 것이다…….


 


이른 새벽, 세반드의 관은 제레인트 가문의 묘지에 묻히게 되었고, 사라는 매장이 끝나기도 전, 갑자기 저택으로 돌아갔다. 베네딕트는 그런 세라를 부르려 했지만, 그녀의 마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플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사라를 그냥 두었다.


 


사라는 저택에 오자마자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고 그 누구의 출입도 금지하였다. 시종들은 영문은 몰랐지만 지옥바람같이 차가웠던 사라의 눈빛에 아무 대꾸 없이 지시에 따랐다.


 


밤이 깊어서야 베네딕트는 저택에 돌아왔고, 시종들이 사라의 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자, 그는 서둘러 서재로 달려갔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그녀는 자살을 했을 수도 있다. 불안한 마음에 서재 문을 박차고 들어간 베네딕트는 안의 광경에 놀랐다. 서재의 책 대부분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는데, 사라는 그 무수한 책 더미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사라, 뭐 하는 거니?


베네딕트는 잠시나마 딸이 미쳐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사라는 아직까진 정상인 듯 하였다. 다만 전의 꽃다움은 없고 좀 더 강철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 전과 다른 냉정함과 차가움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가와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며 들고 있던 두꺼운 고서를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베네딕트는 그 책이 무언인지 알곤 얼굴이 굳어졌다.


 


안되,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아버님, 부탁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책은 바로 인체개조에 대한 고서였다.


모든 사람은 자신 육체의 극히 일부만을 사용하며 살아가는데, 그 덕분에 평소엔 쓰지 않는 나머지를 보통 인간 내면의 힘 이라던가 한계 돌파 등의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고대의 의사들은 수술을 통해서 이런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을 전부 끌어낼 수 있다 믿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 개조였다. 실제로 성공한 예도 있다고 전해지지만, 사실 이론상으로만 유력한 수술일 뿐이었다.


 


사라는 베네딕트에게 자신을 개조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자신의 딸을 사랑했던 베네딕트는 절대로 그런 위험 천만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완강히 반대하였다.


 


절대로 안 된다!


아버님, 이대로라면 저는 가문의 명성을 실추시킬 뿐입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베네딕트는 말하며 돌아섰다. 그는 서재를 떠나려 했지만, 사라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 세반드가 묻힐 때 제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그건 네 탓이 아니다…….


, 제가 만약 유능한 마법사였다면……. 뭔가 라도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전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어요. 그 사람,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얼마나 괴로웠을까…….


사라야…….


베네딕트가 들썩거리는 사라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사라야, 인체 개조는 정말로 위험한 것이다. 난 의학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지만 단 한번도 개조에 실제로 성공한 사람은 만나 본 적이 없단다. 이론상으론 완벽하지만 절대로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란다. 그런 위험한 것을 너에게 해 줄 수는 없다.


아버님, 전 아버님을 믿습니다. 이 목숨, 칼리사르 가문을 위해 바칠 수 있습니다.


사라야…….


베네딕트는 마음이 아팠지만 딸의 굳어진 마음을 누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


.


 


그는 시종들에게 온 집의 문을 걸어 잠그도록 명하고, 그날 밤은 저택 밖에서 머물도록 지시하였다. 집안이 정리되고 모두가 떠나자, 베네딕트는 사라를 이끌고 칼리사르 저택의 숨겨진 지하실로 향하였다. 베네딕트의 방에 있었던 작은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실이 나타났다. 뭔가가 푹 썩은듯한 냄새에 사라는 속이 메스꺼웠지만 꾹 참았다. 어둠 속에 뭔가 알 수 없는 것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희미한 길의 끝엔 거대한 철문이 있었고, 문 안쪽엔 은빛 수술대가 놓여진 작은 방이 있었다. 사라는 옷을 벗고 수술대 위에 누웠고, 베네딕트는 떨리는 손으로 날카로운 수술칼을 집어 들었다. 얼마 전에 맞은 마취주사가 천천히 효과를 내기 시작했고, 사라는 눈을 감았다. 희미해지는 정신 끝에 세반드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까마귀의 깃털과도 같은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


.


.


 


그로부터 35년 후, 베네딕트는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베네딕트의 수양딸이었던 사라반드 칼리사르가 9대 당주가 되었는데, 그녀는 선대와는 다르게 조금 폐쇄적이고 살짝 인간과는 다른 어떤 섬뜩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이었지만 마법과 의학에 대한 지식에 있어 아버지 못지 않은 방대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새로운 당주가 되면서 시종들을 비롯한 집안의 구성원들은 새로이 구성되었고, 그 전에 베네딕트 칼리사르를 위해 일하던 사람들은 전부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덕분에 사라반드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몇 없게 되었다. 사라반드는 8대가 이루었던 동산의 관리를 그만두어 칼리사르의 영토는 예전처럼 잿빛으로 물들었고, 베네딕트 칼리사르의 이름은 잊혀지고 동떨어진 북서쪽의 외딴 저택에서 사는 으스스한 마녀 사라반드 칼리사르에 대한 이야기만이 슐리아시스 전국을 떠돌게 되었다.


 


그녀의 본명은 사라였지만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이름을 붙인다는 관례에 따라 사라반드로 개명한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