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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Artifact

2007.07.01 10:49

Evangelista 조회 수:1828 추천:11

extra_vars1 La Chanson De L`adieu 
extra_vars2 C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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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2.




약간 빛깔이 빠진 갈색이 도는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얼굴엔 젖살이 아직 덜 빠진 듯 했지만 손목에 뼈마디가 보일 만큼 말라 있었다. 옷은 늘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니는 것 같았고 가끔 꾸미고 온다 싶으면 어깨 조금 아래 오는 윤기 없는 머리를 흰색 리본으로 묶는 정도였다.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마 하는 법도 모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목소리는 조금 고음이었지만 서울의 탁한 공기를 마셔서 그런지 가끔 뭔가 걸리는 듯 기침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몸이 빈약해서 그런지 그럴 땐 꼭 폐병에 걸린 아이 같았다. 저렇게 고기를 좋아하고 잘 먹으면서 왜 살이 찌지 않는 걸까.


아마 평소엔 전혀 먹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조규창 선생도 그렇게 쫓아다니는 것치고는 그다지 신경 써주지 않는 모양이다.




매일 흘낏대며 지나가는 척하며, 그렇게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그녀는 없었다. 다만 사나흘에 한번씩 남자의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시험이 끝났다. 계절학기 같은 건 듣질 않으니 방학이다. 입학하고 나서 다섯 학기째가 지나갔다. 정형욱이는 그 기념으로 한잔 하러 가자고 꼬드긴다. 하긴 술을 좋아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 내 관심사는 술하곤 거리가 멀었다.


“천재랑 어울려서 좋은 꼴 본 사람이 있냐?”


그는 그렇게 묻고는,


“콘스탄체 봐라. 얼마나 고생을 했어?”


“너 모짜르트 말고 기억나는 천재 대 봐라.”


그러니까 웃으며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천재란 것들은 안 좋아하거든.”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럴 법하다. 이 녀석은 성적이 안 나오는 것치곤 글이 굉장히 좋다. 그만큼 노력하는 것일 게다. 수없이 책을 읽고 닥치는 대로 모작하고, 그리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런 녀석이 어느 순간 떠오르는 대로 펜을 놀리고 망치를 휘둘러서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다.


“난 친구가 없으니까, 너랑 만나는 순간 옆에 그 천재가 붙어 있으면 기분 나쁠 것 같아서.”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남의 연애사에 신경 쓰면 안 되긴 하다!”


그리고 그는 낄낄대며 웃었다.


“다음에 연락할 테니 술이나 마시지.”


돌아서 멀어져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수긍, 내가 거절한다 하더라도 저 놈은 연락을 해올 것이다.


인간 정형욱과 같이 술을 마시면 상당히 재미있다. 공부하는 만큼 아는 어휘도 많아서 그런지 술에 취해 지껄이는 소리가 아주 기상천외하다. 어쩔 때는 옆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이 웃겨서 키득대는 경우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을 해 본다면 저 인간도 왜 인기가 없는지 알쏭달쏭한 문제다. 역시 그 웃기는 잡소리를 나불댄 후엔 귀신처럼 설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건 참 싫다.


하늘을 보았다. 내일부터 장마라고 했던가. 요즘 기상청은 믿을 게 못 된다. 아마 장마는 일주일 정도 후에 시작될 것이다.


아직도 거대한 목재 남자를 조각하고 있을까.


한 방울, 빗방울이 정확히 타고 있는 담배 끝에 떨어졌다. 칙- 하고는 불은 꺼져 버렸다. 허탈하여 웃음이 나와서, 나는 담배를 그냥 땅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일주일 후는 무슨. 지금 당장 소나기가 오려는 모양인데. 그래도 기상청이 틀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옳은 셈이다.




역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삼 개월 전에 가방에 넣고 꺼내지 않은 우산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느긋하게 걷고 있자니 어째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다리가 움직이니까 나는 뛰었다.


목재 남자는 여전히 나무 아래 앉아 있다. 빗방울이 무릎 아래를 적셨다. 나무 아래라 아직 많이 맞지는 않았지만 몸도 젖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뭔가 낑낑대며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예희가 목상을 들어올리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더 젖기 전에 혼자서라도 옮기려는 것 같았다. 택도 없다. 나도 이건 혼자서 못 든다.


“뭐 하는 거야?”


“옮겨 줘요!”


울상이 돼서 외쳤다. 눈가에 눈물인지 빗방울인지 맺힌 걸 보고, 이걸 들 수 있나 없나, 역시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리 쪽을 들었다. 남자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그녀가 머리를 받쳐 든다. 저 가는 몸에서 이 목상을 들 힘이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내가 뒷걸음질치는 속도에 맞춰 깡마른 아가씨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힘을 쓰며 걸어온다. 이십여 미터를 이동해서 겨우 미대 건물 안으로 옮겼을 때 조상은 상당히 젖어 있었다. 둘이 한참을 쌔근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저 자리로 재료를 옮겼던 걸까?


“괜찮아?”


“괜찮아요. 이 정도 젖은 걸론……. 거의 완성된 거라 마르면 마무리하고 니스로 발라 버리면 괜찮을 거예요.”


쑥스럽게 웃는 그녀를 보고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이거 말고! 너 말야. 내가 들어도 무거워 죽겠는데!”


“예?”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거 들어 봐!”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건네주었다. 서너 권의 책이 든, 비교적 가벼운 가방이었지만 그녀는 받자마자 힘없이 떨어트렸다. 한번에 갑자기 무거운 걸 옮기느라 팔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진짜!”


“왜 화를 내고 그래요?”


그녀가 대들고 나서자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하긴 사실이다. 뭣도 아니고 그냥 선배인 내가 이렇게 소리 지를 일이 아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그렇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말하면 그건 아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해?


오른손바닥이 남자의 무르팍을 치며 철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럼 선배는 선배 작품이 안 중요해요?”


“그거랑 이건 틀리잖아.”


“어떻게 틀린데요?”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깔리면 죽어!”


그렇게 외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입김이 와 닿는 거리까지 얼굴을 마주 보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키가 머리 하나 차이가 나는 날 올려다 노려보고 있었다.


“죽긴 싫지만 작품도 살려야 해요! 게다가 주문받은 거라면 더욱!”


“너라면 금방 하나 더 만들 수 있잖아? 다 지켜봤어. 설렁설렁 만들었잖아. 그렇게 금방 만들 능력이 되면서 위험한 데 집착하지 마!”


말해 놓고 속으로 후회했다. 이건 억지다. 분명히 내 생각에, 이런 목상 정도는 이사흘 안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걸 강요할 권리는 없다.


그렇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선배도 이상한 소문 주워듣고 온 거죠? 난 천재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만드는 게 좋아서 뭐든지 만들고 있을 뿐이라고요. 이 정도까지 조각할 수 있게 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알아요? 십 년이 넘게 결렸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글을 쓰다 질리면 찰흙을 뭉치고 돌을 깨고, 그래서 겨우 이렇게 된 거라고요. 자기들이 못 한다고 해서 날 외계인 취급하지 말란 말이에요. 하려고 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아까는……. 내리는 비 속에서 저 망할 목상을 옮기려고 되도 않은 힘을 쓸 때는 그 물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지 그녀의 몸 안에서 나온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긴 말을 엄청난 속도로 내뱉고 숨을 몰아쉬는 예희의 눈에 지금 맺혀 있는 건 분명히 눈물이었다.


서러웠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이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알아주는 바람에 그 세상과 소통할 방법을 잃어버린, 그런 서러움이라고.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그저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실제로 이 작은 소녀가 어떤 감정에서 눈물을 보였는지, 나는 모른다.


“미안.”


“아뇨…….”


힘없이 두 손을 늘어뜨렸다. 맥이 풀린 것 같았다.


“오늘은 자고……. 내일 마르면 완성해야겠어요. 여긴 습도 조절이 되니까.”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비에 젖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기고는 건물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 완성해야 돼?”


그 말에 예희는 멈추어 섰다. 이 쪽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일 오후 세 시…….”


“고기 구워 먹으러 가자. 갔다 오면 말라 있을 거야. 도와줄 테니까 밤새 만들어 버리자고.”


그녀가 돌아섰다. 하지만 시선은 피하고 있었다. 겸연쩍은 듯 왼손으로 제 뺨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혼자 해도 돼요. 나한테 신경 쓰지 말아요.”


“천재도 아닌 주제에 혼자 하려고 하지 마. 만들어서 넘기면 밥이나 한 끼 사 주면 되는 거야. 알았어?”




그 날 밤새 난 그 괴상한, 홀라당 벗은 남자놈을 만드는 데 시중을 들었다. 진지하게 작업을 시작하니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이것저것 가져오라고 어찌나 시켜대던지 한 도구 가지고 한꺼번에 작업한 후에 다른 도구를 쓰라고 했다가 끔찍하게 혼났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단순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예희가 소위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친근감을 느꼈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녀가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그녀가 하려는 무언가를 돕고 있고, 단지 그것 때문에 좋았다.


나무 조각이 바닥에 쌓여 가고 톱밥이 엉켜 날리는 가운데, 그녀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주위에 담배 피우는 여학생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물론 당연히 그녀가 담배를 피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도 아니다.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여하간 이것으로 왜 간혹 기침을 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말했다.


건강에 좋지 않으니 끊으라고.


그러자 몸집이 작고 마른 스무 살짜리 소녀는 대답했다.


“선배도 담배 피우지 않아요?”


“네 앞에서 피운 적은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


“선배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요. 희미하게.”


“미안하구만.”


그리고 나는 웃었다.


“그게 싫은 냄새가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그녀도 웃었다. 그 와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라 샹송 드 라듀, 바싹 긴장하게 만드는 곡이다. 보나마나 조규창 선생일 거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즈음 예희가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인데 받으니까 끊어 버리시네요.”


이번엔 웃을 수 없었다. 명백한 경고였으니까!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하지만 뭐 어떤가.


 


 


 




노다메 칸타빌레 - La Chanson De L'adi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