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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Artifact

2007.06.27 07:40

Evangelista 조회 수:1585 추천:11

extra_vars1 La Chanson De L`adi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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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솔직히 말하자면 동성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군 휴학 제외 2년하고 또 반년을 보내면서 내가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처음에 입학하면서 난 뭘 하고 싶었을까. 그건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 된 일이다. 5년 전이니까.


스물다섯. 과거를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고 미래를 생각해도 어림잡을 수 없다.




학교가 한창 바쁘다. 기말시험 기간이라. 평소엔 비어 있던 도서관은 이젠 자리가 없어 아침부터 와서 자리를 맡아야 한다. 엘리베이터가 만원이 되어 지하에서부터 계단을 걸어 올라오다 보면 층마다 조용한 가운데 저마다 전쟁을 치르는 학생들이 보인다. 저 전쟁은 이기려고 벌인 거겠지. 하지만 옛날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드는 의문, 그걸 이겨내고 나선 어쩌겠다는 걸까?


사실 그 답은 나와 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은 두렵다. 그랬다간 나조차도 그 현실 속으로, 담배 연기가 환풍구를 통해 빨려 나가듯, 나조차도 남들과 같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질 것 같아서.


학점을 딸까 고민도 해 보았다. 그러기에는 과를 잘못 골랐다. 어느 정도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론 수업 위주로 듣고 있다. 이것도 현실과 이상의 괴리란 거다. 왜냐하면 난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그냥 글을 쓰고 싶었는데 의외로 공부할 게 많았다. 졸업한 어떤 선배는 내게 한 마디 했었다. 피카소도 데생부터 시작했다나. 맞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기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기본에 대해 생각하자.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끌을 들고, 망치로, 두들겨 파고 있는 것 같다. 저 앞의 건물 모서리를 지나서……. 여긴 미대 건물이니까.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멍하니 걷는 빈도가 늘어난 것 같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개미가 줄지어 지나가고 있다.


“뭘 그렇게 봐요?”


시선을 올려보니 흰 박스티를 입고 목에 수건을 두른 여학생이 오른손에 망치, 왼손에 끌을 들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쉬는 듯 목조 인간이 앉아 있었다. 그녀보다 큰 사람이었다. 나보다도 컸다. 누구보다 컸다. 키가 사 미터는 될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형태를 갖춰 가는 중이었다.


“아뇨. 별 거 아닙니다.”


난 그렇게 대답했다. 몸을 돌렸다. 그 때 부는 바람에 그녀의 짧은 단발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옆눈으로 보였다. 그녀도 나와 반대편으로 향해 다시 조각하는 데 전념하는 것 같았다. 고개만 돌린 채 바라보았다. 통이 넓은 청바지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끌은 규칙 없이 그늘에 앉은 남자를 감싸고 있는 형틀을 벗겨냈다. 왼어깨가 나타나고, 팔꿈치가 보이고 손목이 다시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근육의 모양을 만들어냈다. 어느새 나는 그녀의 옆에서, 앉은 사내의 맞은편에서 그가 생명을 얻어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볼 거예요?”


난처한 듯 묻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일어나 허겁지겁 그 자리를 떴다. 등 뒤에서 다시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재란 게 있지.”


다음날, 동기 한 녀석과 같이 점심을 먹는데 그녀 얘기를 했더니 그런 대답이 나왔다.


“미대 쪽에선 유명해. 일단 하나 잡았다 하면 상당한 퀄리티가 돼서 나온다더라. 게다가 미대 소속도 아니래. 듣자 하니 우리 과라는데 거 도통 본 적이 없단 말야.”


“엄청난 걸 파고 있던걸. 재료는 자기가 직접 사는 거야?”


“미대 학장님이 그냥 준다던데. 그것만 봐도 할 말 없네. 이제 일학년이라고. 이미 걔한텐 소속의 문제가 아니야. 그냥 천재야.”


“그렇게 확신할 만한 거야?”


“들은 것만 종합하자면 그렇지.”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녀석이다. 써 놓는 작품은 나랑 크게 다를 게 없다. 문예창작학과 3학년 정형욱. 이름대로 술만 마시면 욱하는 성격이 어찌나 설치는지 동기들도 뒤치다꺼리하고 싶지 않아서 같이 마시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뭐, 나름의 정신세계가 있으니까 그걸로 좋은 건가. 이 바닥은 그런 동네니까 말이다. 기술만 익히는 것보단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흔해빠진 그렇고 그런 작품만 만들어내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거다.


식당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태우며 생각했다. 그녀는 천재일까? 진짜?


그냥 나무 조각하는 것 한 번 보고 확신할 수는 없다. 문예창작과에서 조각을 한다고 해서 재주가 많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눈으로 보고 어떻게 평가할지 결정해야겠다.


그리고 나는 걸어갔다. 담배를 피우며, 예년보다 일찍 시작한 뜨거운 햇빛을 몸으로 받으며, 호주머니에 짤랑대는 동전을 쥐어 손바닥에서 금속 냄새가 나도록, 그 미대 건물 후면의 나무그늘 아래로. 그녀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거의 완성된 목재 인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늘어져 잠든 채.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옆머리가 땀에 볼에 붙어 가닥가닥 갈라져 보였다. 오른손엔 여전히 망치가 쥐어 있다. 끌은 남자의 발 근처에 굴러다닌다.


자는 얼굴이 너무 평화스러웠다. 입가엔 침까지 흘리면서.


솔직히 딱히 미인이라고 할 아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 천진한, 다소 맹추같은 얼굴이 내겐 너무도 사랑스러워 보였다면 믿겠는가. 그 조금 말라붙은 듯한 침 때문에 더 그랬다고 하면 그건 또 믿겠느냔 말이다. 어쩐지 변태의 길로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수업도 빼먹은 채 담배 한 갑을 다 피우며 여자와 목각 인형을 맞은편에서 응시했다. 세 시간 동안 그대로. 그 동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슬몃 부는 바람에 나뭇잎 쓸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네 시가 다 되어서야 그녀는 멍청히, 맹한 눈으로 한참 이 쪽을 쳐다보다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얼핏 보이는 그 뺨이 붉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뭐 해요, 거기서?”


“……문창과라면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내가 선배야. 너보다 다섯 학번이나 위라고.”


“그렇게 유세떠는 것 별로 안 좋아하는데.”


조그맣게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다 들렸다. 하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애시당초 나조차 그런 것 싫어하니까 말이다. 다소 고음인 그 목소리를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들었다. 그 음성이 귀에 들어와 고막을 지나 전두엽을 그대로 울렸다. 그렇게 듣기 좋은 말소리는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느꼈다.


“너, 이름이 뭐야?”


“예희라고 불러 주세요. 이름은 너무 쪽, 아니 부끄러운 거라…….”


“본명이 아니야?”


“호(號)예요. 은사님이 지어주신 건데요.”


“별나구만. 처음 봤다.”


그리고 침묵.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할 말이 없었다. 예희는 가만히 앉았다가 작은 조각칼을 들어 커다란 사람의 손가락 윤곽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저 생각 없이 손만 놀리는 것 같았다. 시선이 정확히 그 손가락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네 시 반이 다 되어 갔다. 난 다소 멍청한 질문을 했다.


“밥은 먹었어?”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사 줄 테니까 일어나.”


“괜찮아요. 원래 잘 안 먹고…….”


다시 조각칼을 든 오른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쌍하게 쪼그리고 앉아서야 그냥 가기도 뭐하단 말야. 저녁 다 돼 가는데 고기라도 사 줄까?”


잠깐 이야기를 끊게 되지만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절대 돈이 많지 않다. 오히려 가난한 편이다. 고기, 말이 좋아서 고기지 그걸 먹으려면 전후 보름은 고생 아닌 고생을 하게 된다. 사실 조금은, 돈을 쓰는 데 겁을 먹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돌려 말하자면, 지금 이런 말을 하긴 정말 바보 같아서 더 이야기를 풀어야 할지조차 고민이 되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난 그 여자한테 고기를 사 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나도 갑자기 먹고 싶어졌거든. 다른 게 아니라, 혼자 고깃집에서 앉아 있으면 처량해 보이지 않아? 그러니까 가는 김에…….”


“고기…….”


멍청한 변명을 늘어놓는데 그녀가 말을 자르고 들어와 중얼거린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 옆으로 멘 내 가방 끈을 딱 붙잡고는 놓으려 하지 않았다.


“사 줘요.”


그것마저도 귀여워 보였으니 콩깍지가 껴도 단단히 낀 셈이다. 나중에 알았다. 이 애가 얼마나 무서운 육식주의자였는지. 그런데도 비쩍 마른 걸 보면 정말 안 먹기는 안 먹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서 생고기 삼인분을 먹고 더 먹으려 들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는 굽고 그녀는 먹고, 내가 먹은 건 소주 한 잔에 고기 한 점 뿐이었다. 한참 그 잘 먹는 양을 쳐다보며 복잡한 기분에 젖어들어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음악이었다. 라 샹송 드 라듀. 그녀의 전화였다.


“아, 예. 선생님. 학교 앞이에요.”


귀찮은 전화인 것 같다. 난 화장실 간다면서 일어섰다. 선생님이라면 우리 과 선생님일까, 아니면 예의 그 은사님인 걸까? 후자라면 어쩐지 만나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고기를 먹어? 누가 사 줘서?”


고깃집 문 바깥에서 안을 훔쳐보며 한 남자가 전화를 하고 있다. 사십대 중반 정도 된 것 같다. 머리는 보통 사람들처럼 깎았지만 지저분하게 나 있는 수염이 꽤 거슬렸다. 그런데 뭔가 수상하다. 하고 있는 짓도 그렇고 뻔히 고깃집 안을 들여다보면서 한다는 대화 내용도 그렇고.


“아무 남자나 따라가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아. 너무 수상하다.


“남자보다 위험한 동물은 없단 말이지.”


너도 남자입니다.


“걱정 마라. 무슨 일이 생기면 선생님이 구해 주마.”


그리고 가게 안에서 대답.


“걱정 말라니까요!”


……라고 소리 지르는 게 여기까지 들렸다. 남자는 침울하게 휴대폰을 덮어 주머니에 넣는다.


그래, 어디선가 본 듯한 것이 분명히 내가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문인일 것이고 여러 상황 증거를 겹쳐 보면 당신이 바로 그녀의 ‘선생님’이렷다. 나는 얼른 다가가 그 어깨를 툭 짚으며 말했다.


“예희 씨의 선배인데요. 뭐 하시는 겁니까?”


“저 애한테 뭘 하려고 했나?”


의외로 망설임 없이 물어 온다. 처음부터 내가 엿듣고 있는 걸 알았나 보다. 그렇다면 애저녁에 날보고 들으라고 한 말이었단 말인가? 충분히 가능하다. 이 자가 쳐다보고 있는 상태에서 밖으로 빠져나온 거니까. 질린다.


이게 선생이란 말이냐, 예희. 이건 스토커란 말이다.


“하긴 뭘 해요. 애가 비쩍 말라 있으니까 선배 입장에서 고기도 사 주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정말인가?”


“아니면요.”


“쓸데없는 짓 하면 알아서 해. 너희 문창과 교수들은 다 내 부하들이니까! 이건 비밀이다.”


그리고는 돌아서더니 재빨리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이미 화장실은 까맣게 잊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니 그녀가 신이 나서 고기를 굽다 내게 물었다.


“화장실 가는데 좀 오래 걸리네요?”


이상한 걸 묻고 그러나, 여자애가…….


“바퀴벌레가 한 마리 기어다니길래 신경이 쓰여서 말야.”


“나도 바퀴벌레는 싫어요.”


이 목소리 뒤에 깔린 기름 튀는 소리가 마치 녹음된 음성에 낀 노이즈같이 들려 묘했다.


“그런데 너희 선생님 성함이 뭐라고 하시냐?”


“극작가신데요. 조규창이라고.”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다! 그런 거물일 줄은 몰랐는데! 이 애한테 손 잘못 댔다간 그 자리에서 학사경고 결정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한눈에 반할 정도로 취향적으로다가 내게 맞는다고는 해도 모험을 감행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 먹은 거 갚으라면 갚을 거냐?”


“흠.”


그녀가 콧소리를 내더니 빙긋 웃었다.


“아까 깎던 그 조각상 있죠? 그거 다 만들면 제가 쏠게요. 주문받은 거니까.”


그리고 가위를 들어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노다메 칸타빌레 - La Chanson De L'adi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