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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dest21c 도외시의 확대

2007.06.17 23:23

Evangelista 조회 수:1478 추천:6

extra_vars1 소위 대중 소설에 대한 중립적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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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비평문입니다. 비평문도 문학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대중문학과 관련해 공부하시는 분들께 다소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실 시간에 쫓겨 쓰던 기말레포트라 군데군데 궤변이 섞여 있습니다 ㅡ,.ㅡ;


 


 



도외시(度外視)의 확대


소위 ‘대중 소설’에 대한 중립적 입장에서


 


1. 들어가는 말.


U.에코는 그의 저서인 『종말론자와 순응론자』의 서론에서 자신이 '종말론자Apocalittici' 로 규정한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자들의 태도에 대해 ‘공평치 못하고, 편파적이며 신경질적이고 의구심에 가득 찬 탄핵’1)이라고 비꼬아 말하고 있다. 한편 가라타니 고진은 2003년의 강연에서 ‘근대문학은 그 목적을 다했다.’는 자신의 요지를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2) 그러나 이 둘은 대중문학이니 본격문학이니에 큰 치우침을 가지지 않는다.


대중 문학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경계를 지을 수는 있을지언정 문화, 사회적 종합적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불성설인 감이 없지 않다. 특히 한국 문단에서의 ‘대중 문학’, 특히 소설 장르의 작품들에 대한 평들을 보면 그 분석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저열함을 논하는 데까지 논지를 발전시킨다.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하 무궁화 꽃)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 가령 ‘이 삼류소설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일은 지면낭비에 가깝다.’3)는 등의 평가가 나오는 형편이다.


사실 그 주장들은 틀리지 않다. 한국 출판계에서 찍혀 나오는 ‘대중 소설’ 각각에 대한 평을 하자면 그러한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문제 삼으려는 것은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대중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미진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분명히 이에 대해서는, 각개 작품이 가지는 좋지 않은 점을 가지고 그것이 속하는 ‘장르’에 대해서까지 적용시키려 한 과거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한국의 ‘대중 소설’이 지금까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와 또한 ‘대중 소설’이 가지는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서 중립적인 입장에서 논해 보도록 하겠다.






2. 대중과 교양을 엘리티즘에서 바라보았을 때


가. ‘대중’


원래 ‘대중’은 군중을 뜻하는 말이었고 매우 중요한 말이었다.4) 영어로 masses라고 말해지는 이 개념은 본디 집단, 덩어리 등을 뜻했었고 R. 윌리엄즈는 대중이 형성되는 원인을 산업화에 따른 도시에의 인구 집결에서 찾았다. 그는 ‘대중=다수’의 등식(mass라는 단어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기표적 의미)은 ‘대중=군중’과 허울 좋게 동일시할 수 없다5)고 말한다. 그것은 대중은 언제나 타인이며 우리는 그들을 알지도 않으려니와 알지도 못하기 때문, 결국 타인들에게는 우리 또한 대중이기 때문이다.6) 즉, ‘대중’이란 개념은 어느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에 대한 이항대립적 용어로 사용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실상 ‘엘리트’ 집단이 어떠한 기준에 의해 설정된 집단 범주인 ‘대중’에 대해서 문화적 저열함을 논하는 것은 다소 사리에 맞지 않는다.




나. ‘교양’과 엘리티즘


‘교양’, culture를 해석할 수 있는 두 가지 의미로, 첫째는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보통 사회의 물질적 생산을 가리키며 둘째로 역사학, 문학, 문화연구에서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체계와 의미 생산을 가리킨다.7) 그러나 R. 윌리엄즈의 문화유물론적 방법에서 문화는 물질적 생산과 떼어 놓고 볼 수 없다. 두 의미 해석은 한 쪽만으로는 분명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세상이 다원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중 소설’이라고 하면 ‘대중’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광범위하게 향유할 수 있는 일련의 작품군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일 뿐 한국 사회에서의 ‘대중 소설’은 거기에 추가하여 ‘대중’들이 손쉽게 쓸 수 있는 소설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이 경향은 소위 ‘판타지 소설’ 등이 공급 초과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90년대 후반 이후 두드러진다.) 그리고 대부분 이는 ‘대중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비판의 주요 근거가 된다. 요는 “대중이란 관료 제도나 대중매체를 통해 조정되는 이른바 ‘시장지향형’의 비합리적이고 개별화된 인간의 무리”8)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엘리티즘적인 시각에 다름없다. 다른 관점 없이 무분별하게 비판을 가하는 평자들은 언필칭 ‘비교양적’이고 ‘다분히 기분파인’ 대중을 정의하나 실상 그들이 최초의 그러했던 “무지한 대중”에서 세월이 지나며 어느 정도 교육의 혜택을 받은 계층이 되었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30년대에 접어들어, 서구 사회에서처럼 지식인, 고급, 순수의 상대적 개념으로 선택적으로 사용9)되었던 시절에서 인식이 발전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까지 ‘대중’의 개념을 평균 이하의 상태로 묶어놓은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교양’이라는 용어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우에서 사용되는 ‘교양’은 단순히 사전적 의미인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닌 ‘교양 없는 자’들에 대한 이항대립적 냉대, 그리고 그들을 곧바로 천한 상업주의의 주자로 묘사한다. 가령 이어령 같은 경우엔 그것을 ‘유아어를 사용하는’ 저질 문화로 보고 “韓國文化의 企業家들은 마이더스王처럼 文化의 生命을 죽여 黃金으로 變化시키는데에만 關心을 팔고있다.”10)고까지 매도한다. 여기에서 ‘문화의 생명을 죽인’다는 말은 자못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즉 이런 관점이야말로 이항대립적으로 문화와 반문화를 나누고 반문화의 영역에 ‘상업주의적 대중문화’를 편입시킴으로써 악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상업주의’가 악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화를, 남보다 뒤떨어지지 않겠다는 심사에서 끈질기게 혼자 내적인 소양을 단련해 스스로를 고귀하게 만들고 대중의 세속성에 반대하고 나서는 “귀족주의자들이나 관심을 두는” 일로 이해11)하기 때문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 경우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열려진 문화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망상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반문화로 보일 수밖에 없다.12) 그리고 이것이 바로 통용되는 ‘교양’, 즉 culture의 의미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교양’을 갖춘 글쓰기는 ‘정치 현실과 동떨어진’ 순수 문학이 되어도 좋고 ‘부조리에 맞서는’ 참여 문학이 되어도 좋으나 근대문학이 지향하여야 하는 ‘현상의 반영’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다. 그들(만)의 축제


먼저 ‘교양’을 갖추지 못한 일반 대중을 배제하고, 그 후에 ‘교양’을 갖추지 못했음을 성토하는 것은 편협한 태도이다. 근대문학의 위상이 차츰 약해져 가는 것은 이러한 태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른바 ‘문화권력’이 지식인층에서 대중으로 이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란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여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국가가 원하는 인재로 그들을 키우는 것을 의미하며 획일적인 교육제도로 증명된다. 문제는 그것이 피교육자의 지적 수준에 비해 더 높은 자신감을 심어준다는 데에 있다. 줄세우기 위주의 공교육은 천편일률적 지식을 가진 대중을 양산한다. 그러한 현상은 성과급과 지위로 대표되는 ‘사회 생활’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대중은 그 수치상의 우열을 자기 집단에서의 총체적 우열로 착각한다. 결국 이 시점에서 상대적 의미로서의 ‘지식인’은 말 그대로 깨끗이 사라진다. 공부를 많이 했고 사유의 깊이가 넓은 사람을 사전적 의미로 ‘지식인’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대중은 보통 생활에서까지 그들을 자신들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전문화가 된 세상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제 ‘그 어느 분야’로 한정된다. 그렇다면 최소한 문학에 관해서는 ‘문학 전문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대접받아야 마땅하나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다.


어느 분야에 대해 전문적이지 못한 대중들은, 가령 같은 예술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는 미술, 음악의 전문가들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낸다. 기술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 기술을 훈련하지 않은 대중은 결코 접근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언어 행위는 별개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매일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언어 행위는 서사적이다. 즉 누구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비교적 쉬워 보인다. 그리고 같은 대중 집단에서 그 이야기가 먹힌다면 그는 곧바로 준(准) 작가로 자칭할 수 있다. 이에 정말로 기술을 훈련하고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지위가 격하된다. 어디선가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으면 전혀 관심 받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오히려 엘리티즘을 내세워 대중과 자신들을 유리시킨다면 그것은 그들만의 축제에 다름없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는 셈이다. ‘그들만의 축제’는 그 두 집단 모두에서 행해지고 있는 동일한 문제이다.


 



라. 대중문화와 강준만


보통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좋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강준만은 베스트셀러에 대해서 논하면서 “베스트셀러는 철저하게 만들어진다”13)라는 주장을 한다. 책의 기획 단계에서 출판사에 의해 모든 출판 과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가 이 책에서 논한 ‘베스트셀러에 대한’ 논조는 철저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저 이러이러한 면이 있다는 것만 말할 뿐이다. 이것은 그가 사회학자이고 주변의 ‘문화권력’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나 그는 이번엔 문학권력을 이야기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대학생들조차 소설에 등을 돌리게 하는 기막힌 현실은 외면하면서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앉아 담을 높이 쌓고 담 밖의 문학적 안목이 형편없다고 개탄해서 무얼 어쩌자는 건가? 문학 동네14)는 폐쇄적인 종교집단인가? 오직 그 안에서만 ‘최대의 시인’과 ‘족장’을 선출하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인가?15)




말이야 전혀 틀리다곤 할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태도이다. 몇 년 전 그는 유시민이 네티즌을 우민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노사모의 광신적 행태’로 들었다. 어째서 그들 때문에 엉뚱한 유시민 이야기가 끄집어져 나오는지는 난 모르겠다. 이러한 논지 전개는 위의 예문에서도 드러난다. 강준만은 저 한 문단을 통하여 ‘대학생들이 소설에 등을 돌리게 하는 기막힌 현실’이 지속되는 책임을 문단에 돌리며 광신적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종교집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그 광신의 주체를 문단 전체의 구성원으로 확대시킨다. 이건 너무 근거가 빈약하고 쓸데없이 공격적이다. 『문학권력』이라는 책 전체에서 그는 예의 ‘문학권력’을 공격하다가 정도가 조금 심했다 싶으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의 XXX는 인정할 수 있으나’라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학권력’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집단 권력 내 입지는 훼손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심리학은 그렇지 않다. 당연히 ‘불특정 다수의 타인’ 집단인 대중은 군중 심리에 영향을 받게 된다. 강준만의 ‘권력 기반’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그가 공격하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으나 역으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대중은 권력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권력은 대중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대중문화의 자본권력과 ‘문학권력’을 공격했을 때에는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으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파고들면서 노무현 정권을 공격하기 시작한 후로는 그는 대중에게서 유리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 정권이 현 권력의 중추에서 다소 멀어진 형태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일 좋지 않은 비판의 형태를 우리는 강준만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도 비판하고 저것도 비판하는 행태는 자신의 근본 사상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옳은 말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3. 대중소설이 점하는 위치


가. 대중소설은 본격소설과 다르다


교육을 받은 대중은 앞서 말한 ‘다소 엘리티즘적인’ 정의의 한 측면대로 쉽게 군중심리에 휩쓸려 들어가는 경향이 있긴 하나 무분별하지는 않다. 즉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분명히 갖추고 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식의 ’80년대적 사고에서 ‘설령 남들이 그러고 있다 하더라도 일단 나의 이해를 고려하는’ 사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의 이해 판단이 가능하다는 점은 그 사람이 사회 체제에 적응하였으며 그 사회 현상에 충분히 맞서 나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들이 내리는 판단은 그를 수 있을지언정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쓰는 소설은 어떻게든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그 작품군이 사회를 반영하는 방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본격소설, 즉 ‘근대소설’과는 다르다. 근대소설의 특질은 무엇보다 리얼리즘에 있으며 그것이 허구를 통해서 진실을 파악한다고 간주될 때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16) 그러나 대중소설은 일반적으로 작품에서 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주요한 특질 중 하나인 도식성을 기준으로 비슷한 내용의 작품들을 모아 두면 그들에게서, 특히 당대의 대중이 욕망하는 것이나 공유하고 있는 생각을 도출해낼 수 있다.


가령 『무궁화 꽃』, 『영원한 제국』등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파쇼적’ 작품들을 하나의 작품군으로 묶는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당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박정희 예찬론을 읽을 수 있다. 파시즘과 박정희를 어떠한 시각에서 평가할 것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김진명과 이인화의 서사에서 보여지는 사회 심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귀여니’를 필두로 한 소위 ‘하이틴 소설’들에 대해서는 저연령 여성독자층의 대리만족 심리와 함께 만화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으며 일일이 거명조차 하기 힘든 수많은 ‘판타지 소설’은 작가의 위상이 일종의 프리랜서 직업인으로 변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나. 특징과 해석


애초에 대중소설은 본격소설과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격소설은 근대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대중소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은 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그 역할을 끝냈으며 더 이상 문학은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잃었다고 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분명히 현재의 문학은 과거에 비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격감한 상태이다. 또한 그 역할을 대부분 상실한 것도 부정하지 못할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구조 이행에 따른 현상이며 ‘근대문학’ 자체의 수요가 줄어든 것일 뿐, 그러한 외적인 요소를 가지고 문학이 가지는 내적 본질을 재단할 순 없다. ‘근대문학’이 가지는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중소설은 그 과정에서 파생되어 나온 문화의 한 가지로 보아야 한다.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의 종말에 대하여 근대문학의 존립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에토스ethos가 소멸하였다는 관찰에 근거하고 있다.17) 그러나 바로 앞에서도 말한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그 에토스는 소멸하였다기보다는 미약해진 것이다. 그 어간에서 대중소설은 빠져나온다. 대중소설이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존립시켜 주는 것은 파토스pathos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소설은 인간 의식하의 근원충동(根源衝動)에 의지하며 욕망을 반영한다. 그 욕망은 어디에서부터도 기인할 수 있다. 다만 텍스트 단독으로 그것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근대문학은 TV처럼 독자에게 단방향 송신을 보내는 방식인 데에 비해 대중소설은, 특히 미디어의 발달과 더불어 성장하는 최근의 대중소설은 불특정 다수의 작가와 불특정 다수의 독자, 그리고 그들이 혼재된 ‘대중’의 삼각 구도에 의하여 끊임없이 상호 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중’이며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타인’의 집합이다.


결국 본격소설과 대중소설을 읽어내는 방법은 달라야 한다. 본격소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연구된 어떠한 비평 사조도 무리 없이 사용될 수 있다. 그 타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각개 비평가들이며 절대적인 해답은 없다. 그러나 대중소설을 해석할 때는 일단 텍스트와 작가, 사회적 맥락을 모두 파악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보았을 때 그나마 가장 주효한 비평사조는 문화유물론적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법론과는 다르게 여기엔 어느 정도 정답이 존재한다. 사회 현상의 흐름은 규정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15~17세기의 유럽 대항해 시대는 근대의 맹아가 싹튼 시기로도, 혹은 제국주의적 침탈의 시발점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근대문학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에 작가는 그 현실을 자기 해석대로 반영하여 작품을 쓰고 비평가는 그 작품을 또한 자기 해석대로 읽어 평론을 낸다. 어느 쪽으로 판단하느냐는 그것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대중소설은 다르다. 대항해시대에 항해가들의 한탕주의가 팽배했던 것이나 신대륙 원주민들에 대한 문명적 우월감이 유럽을 지배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중소설을 해석한다는 것은 작품에서 그러한 상태를 읽어냄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예를 들어 애써 텍스트에 쓰여진 당시 선박의 이름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독교적 세계관18) 따위에 매달려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본질이 다른 만큼 별개의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다. 별개의 장르로서의 대중소설


지금은 일반적으로 대중‘소설’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는 ‘문학’에 포함되는 다른 장르로 규정하는 편이 옳아 보인다. 다만 통용되는 ‘소설’과 형식이 동일할 뿐 존재 양식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literature이란 최초 ‘학문’의 의미에서 사용되다가 점점 범주가 줄어들어 최근엔 단지 ‘문예’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한정되었다. 이것은 근대 ‘이성’의 발견과 동시에 발전하기 시작한 인간 이성의 예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예술의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근대회화와 조소에서 인체를 정확히 묘사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문학은 인간 본질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 도그마Dogma로 자리잡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는 2차대전 이후 이성이 패배한 시점에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실존주의의 등장으로 사실상 애초 ‘근대문학’의 범주는 다소나마 확장되었다. 더 이상 이성을 찬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의 이성이 부정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작품들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현상을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은 근대적 개념의 ‘문예’를 넘어 문자를 사용하는 일련의 서사적․서정적 서술 방식으로 이행해 버렸다. 그것은 ‘근대문학’의 본질을 지탱해 오던 이성이 무너졌음이다. 그 시점 이후로도 문학을 ‘문예’의 정의로 매어 두는 것은 고집에 불과하다.


대중소설은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문학’에 편입될 수 있다. 어떠한 용어를 사용해야할지는 판단하기 힘드나 일단은 구분을 위해 ‘대중서사’라고 하기로 하자. 이 ‘대중서사’는 ‘본격문학’ 혹은 ‘근대문학’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본격문학’ 속에는 현재와 같은 분류법인 시, 소설, 희곡 등이 존재하며 ‘대중서사’는 그와는 다른 부분집합을 가진다. 지금은 혼재된 양상이지만 대중의 양상이 좀 더 확실히 정립되면 분명한 구분을 지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라. 역기능과 순기능


대중소설이 갖는 역기능은 그 문화 현상을 향유하는 일반 대중에게 천민자본주의와 함께 수많은 갈래의 그릇된 태도를 취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들은 지금까지 풀어온 논지들에 의하면 ‘근대문학’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윤리적인 해악이기는 하다. 이는 대중소설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해소되어야 할 문제이다. 문학 내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보다 그를 향유하는 대중 사이에서 인식의 진보가 요해진다.


이러한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대중소설의 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음은 분명하다. 우선 대중소설은 확대된 범위의 ‘문학’ 범주 안에 이전 범주의 ‘문예’에 의해 유리되어 있던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다. 문화란 결코 고급문화 내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이제 와서 상, 중, 하위문화로 명확히 분간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문화와 접해 있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똑같은 기회로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그를 위해서는 우선 문화의 우열을 가리려는 행동부터 자제해야 할 것이다.






4. 맺으며


문학은 더 이상 예술 범주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는 다른 예술 장르들도 마찬가지다. 문학을 예술이라는 개념만으로 설명하기엔 각 학문 분야의 밀접성이 너무나도 두드러진다. 진정한 의미의 ‘단일민족국가’가 없듯 진정한 의미의 ‘순수예술’도 그 발판을 잃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 예술도 사회학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단지 예술을 사회학적 의미에서 해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예술과 사회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 분석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순수예술분야가 아니라고 도외시하는 엘리티즘이 사라져야 한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없다면 각개 분야에 대한 관대함이 필요하다. 이는 모든 분야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긴 하지만 생각을 한 번 전환해 본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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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Umberto Eco, 조형준 옮김, 『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 새물결, 2005. 56쪽.


2) 柄谷行人, 구인모 옮김,「근대문학의 종말」, 『문학동네 (2004 겨울)』, 문학동네, 2004. 432~459쪽.


3) 한만수, 「90년대 베스트셀러 소설, 그 세계관과 오락성」,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아세아문화사, 2000. 302쪽.


4) Raymond Williams, 나영균 옮김, 『문화와 사회』, 1988. 397쪽.


5) 위의 책. 399쪽.


6) 위의 책. 399쪽.


7) Joseph Childers, Gary Hentzi, 황종연 옮김, 『현대 문학 문화 비평 용어 사전』, 문학동네, 1999. 133쪽.


8) 장영우, 「대중소설의 유형과 그 특질」, 위의 책. 56쪽.


9) 정덕준, 「한국 대중문학에 대한 반성적 고찰」, 『한국의 대중문학』, 小花, 2001. 15쪽.


10) 이어령, 「‘에비’가 支配하는 文化-韓國文化의 反文化性」, 조선일보, 1967.12.28


11) Umberto Eco, 조형준 옮김, 『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 새물결, 24쪽.


12) 위의 책, 24쪽.


13) 강준만, 『고독한 대중』, 개마고원, 1996. 162쪽.


14) 출판사 ‘문학동네’가 아닌 문단을 은유적으로 지칭한 말.


15) 강준만, 권성우, 『문학권력』, 개마고원, 2001. 20쪽.


16) 柄谷行人, 구인모 옮김,「근대문학의 종말」, 『문학동네 (2004 겨울)』, 문학동네, 2004. 443쪽.


17) 황종연, 「문학의 묵시록 이후-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읽고」, 『현대문학 (2006.8)』, 현대문학, 2006. 205쪽.


18) 콜롬부스의 첫 항해시 배 이름인 ‘산타루치아’라던가. 만약 당시 그런 소재의 대중 소설이 나왔다면 말이다.